|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항해로 비유하곤 합니다. 어딘가 목적지를 향해 큰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노련한 선장은 항해의 풍부한 경험을 자랑하고, 과학은 기상의 변화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고해 주지만, 그러나 바다의 일기는 언제 갑자기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네 인생도 그렇고, 항해 중에 때때로 갑자기 찾아오는 폭풍우는 어쩔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는 배 한 척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배였습니다. 그 배에는 선원들뿐 아니라 여러 상인과 여행객들, 그리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몇 명의 죄수들과 그들을 호송하는 백부장과 군인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수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도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고발당한 바울에게서 어떤 혐의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까지 받고있는 상황에서 바울은 로마 황제의 재판을 요청하였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이스라엘 땅을 떠나 도피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땅끝까지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로마로 가기를 계획하였고, 그래서 로마 시민권자의 권리인 로마황제의 재판을 청구하여 로마로 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바다의 기상 조건이 안 좋아서 항해가 늦어지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이 배는 항로를 따라 예정대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배가 도저히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선원들은 예정된 항로를 변경해서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서 해안을 따라 운행하여 간신히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계획보다 운항이 여러 날 지체된지라, 어느새 날짜는 금식하는 절기를 지났습니다. 쉬운 번역 성경을 보면 이 ‘금식하는 절기’를 추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추분이 지나 동절기에 지중해 먼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배에 실은 귀중한 물품들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선장과 선주는 아마도 자신들의 경험이나 항해술을 믿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유익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백부장이라면, 항해를 계속해도 된다는 항해 전문가들의 주장과, 위험하니 여기서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리자고 하는, 얼핏 보기에도 항해와는 별 인연이 없는 죄수 바울의 주장 가운데 누구의 의견을 따르겠습니까? 11절에 의하면, 당연히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더군다나 12절에 보면, 그들이 입항한 미항이라고 하는 항구는 겨울을 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습니다. 그래서 배에 탄 사람들 중에서는 빨리 이곳을 떠나 겨울나기가 좀 더 괜찮은 곳으로 가자고 하는 의견이 우세했고, 그래서 결국 그레데 섬 뵈닉스까지 서둘러 가서 거기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남풍도 순하게 불었고,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들의 항해가 순조로운 것에 대하여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기가 들이닥쳤습니다. 14절에 보면, 유라굴로라고 이름 붙은 무서운 태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 날 계속해서 몰아치는 태풍으로, 먹구름과 비바람에 가려서 해와 달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서운 태풍이었습니다. 그 흑암 속 거센 파도와 바람 가운데, 알렉산드리아 배는 위태롭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은 누가 썼는지 아시지요? 병약했던 바울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던 이방인 의사 누가입니다. 누가는 당시 상황을 20절에서 이렇게 짧게 묘사하였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분, 이 알렉산드리아 배는 아마도 북아프리카 동부인 알렉산드리아에 선적을 두고, 소아시아 여러 지역과 섬들을 거쳐 이탈리아까지 오가면서 많은 인원과 물품들을 실어나르던 규모있는 큰 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무서운 태풍 앞에서 이리저리 바람과 파도에 떠밀려서 침몰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 배에는 선장과 선원들도 있었습니다. 운항의 전문가들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지중해를 수 없이 오고 갔던 노련하고 경험 많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속에서는 그들의 경험이나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배에는 당시 세계를 제패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도 있었고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용맹도, 전투력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배에는 돈 많은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사들인 값비싼 물품들, 진귀한 물품들이 배에 가득 실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 속에서는 그 재물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몰아치는 유라굴로 앞에서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그들을 지켜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배 안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들에 의해서 호송되어 가고 있는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죄수로서, 앞으로 받을 재판 결과와 그에 따라 펼쳐질 자신의 운명만으로도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면 그는,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22절에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확신을 가지고, 배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용기와 확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 풍랑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서운 풍랑을 보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선주나 선원이나 군인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희망을 걸었다면, 그들의 무력함을 알게 되는 순간에 또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그와 같은 바울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23절 이하에,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반드시 한 섬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바울의 선포 가운데 바울의 소명이 나타나 있고 풍랑 속에서도 감당해야 할 사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일생을 걸고 감당해야 할 그의 소명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반드시 로마제국의 심장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일진대, 하나님은 이 풍랑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하시고 자신의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소명과 확신이 있기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다고 탄식하는 풍랑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소명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소명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풍랑 속에서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24절에 보면 지난 밤 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을 다 너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배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구원의 여망이 사라진 이 상황 속에서 바울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지금 나와 함께 이 배에 탄 사람들을 하나님은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사명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위기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회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통하여 일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생에 세 번쯤 기회는 온다고 합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인생의 위기는 몇 번 쯤이나 오는 걸까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겠지만 크고 작은 위기는 때때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회가 됩니다. 그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 위기는 오히려 하나님이 알하시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그 위기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그 사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믿음이고 진정한 인생의 진정한 지혜임을 믿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옥스퍼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대서양을 건널 만큼 그의 구원의 열정은 대단하였습니다. 배가 영국의 항구를 출항할 때 웨슬리는 아마도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리라고 하는 자신감에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 떨고 비명을 지르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웨슬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험한 풍랑 속에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 속에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독일에서 온 경건주의 기독교 종파인 모라비안 신도들이 2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안의 다른 승객들과는 달랐습니다. 배가 항구를 출항한 직후부터 그들은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여행객들을 돌보며 계속해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영국인들이 그들을 경멸하고 모욕을 할 때에도 그들은 변함없는 겸손하게배 안의 승객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1736년 1월 25일 일기에서 웨슬리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쯤 되어서 출항 후 세 번째 폭풍이 시작되었고, 4시가 되자 전보다 폭풍은 훨씬 더 맹렬해졌습니다. 저녁 7시에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폭풍 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 중에 시편이 한참 낭송되고 있는데 파도가 덮쳐서 큰 돛대가 부서지고, 바닷물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귀를 찢을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독일인 모라비안 신도들은 흔들리지 않고 계속하여 시편을 낭송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울부짖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폭풍우 속에서 자신은 이토록 불안하여 떨고 있는데, 이들은 어찌도 이렇게 평안할 수 있었을까요?
폭풍우가 지나고 난 후 웨슬리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불어보았습니다. “당신들은 폭풍우 속에서도 두렵지 않던가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위기 속에서도 그들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그들은 그저 담담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뿐이었습니다. 폭풍우 속에서도 잠잠히 그들은 예배하고 시편을 낭송하였습니다. 그들의 그 내적인 확신, 그 평안함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절망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그때 과연 우리는 누구를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더욱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이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은 과연 무엇인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하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파선의 위기에서 알렉산드리아 배에 있던 사람들이 한 일이 있습니다.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18절과 19절에 보면,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는 수많은 물품들이 가득히 실려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물품들이나 재화는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선원들은 또 배의 기구들을 그들의 손으로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배를 운행하기에 반드시 필요한 기구들이지만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인간의 기술이나 도구조차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정 살기 위하여 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살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삶의 목표로 삼고 수단으로 삼았던 그 물품과 기구들을 던져버렸습니다. 물품도, 기구도, 다 버리고 그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생의 풍랑 속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기술을 익히고 공부를 합니다. 다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달려갑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욕망과 이기심과 함께, 우리 안에는 시기와 분노, 증오와 같은 무거운 짐들도 쌓여만 갑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바다에 다 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구원의 여망이 사라진 것 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사랑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여망이 없는 것 같은 바로 그 자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은혜의 자리로 변화되고 말 것입니다.
땀 흘리며 수고하는 우리가 그렇게 달려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존재의 진정한 이유와 소명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만 있다면, 그래서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주님만 바라본다면,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이 바다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