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올려주다
팔도강산 노름판을 찾아다니는 전천후 노름꾼 장보는 이레째 벌교에 파묻혀 있었다.
황 대인의 사랑채에서 불이 붙은 마작판은 한장 터울이 지났어도 끝날 줄 몰랐다. 판이 커졌다.
장보는 남도에만 오면 끗발이 올라 이번 벌교 노름판에서도 싹쓸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선주 우 생원이 “한식경만 기다리시요잉, 판을 접으면 살인이 날 거구먼” 하며
겁박을 주고 급전을 구하러 부리나케 노름판을 떴다.
삼경이 가까워졌다.
곰방대에 불을 붙인 장보도 일어서며 “내 판돈 건드리지 마시오” 하곤
앞 고름을 풀어 젖힌 채 문을 열고 나가 우산을 쓰고 마당을 가로질러 통시로 갔다.
우 생원이 급전을 구해서 돌아왔는데 통시에 간 장보가 나오지 않았다.
그 시간 장보는 통시 들창을 뜯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치고 있었다.
허리에 전대를 굳건히 찬 채 맨발로 폭우 속 이십여리를 전력 질주해 조계산 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두팔을 벌려 하늘을 쳐다보며 장보는 껄껄 웃었다.
판을 싹쓸이하면 온전히 나올 수 없는 법이다.
허기와 오한이 찾아왔다.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은 칠흑인데 길도 없는 산속을 맨발로 헤매던 장보에게 두려움이 덮쳤다.
목숨을 못 건지면 전대가 무슨 소용인가!
그때 멀리 불빛이 아른거렸다.
장보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가시에 찔리고 발을 헛디뎌 나동그라졌다가 엉금엉금 기어서 사립문에 들어섰다.
덜컥 겁이 났다.
산적 소굴인가?
100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고 있는가?
“사, 사람 살, 살려주시오.”
불이 꺼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구세요?” 여인의 목소리였다.
“길을 잃었구먼요. 하룻밤 유하게 허락해주시오.”
장보는 애원을 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들어오세요.”
보이지 않는 주인 여자의 목소리에 귀기(鬼氣)가 서렸다.
돌아서서 도망을 가려고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름꾼의 결기가 솟아올랐다.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더듬더듬 깜깜한 방에 들어가니 장마철에도 군불을 지펴놔 와들와들 떨던 한기가 사라져 살 것만 같았다.
문을 닫자 빗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한결 조용해졌는데 이번엔 침묵이 장보를 미치게 했다.
“이 늦은 밤에, 이 장대비 속에, 이 깊은 산속에 어쩌다가 길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소만 끼니는 때우셨는지요?”
여인의 목소리는 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청아했다.
장보 대신 “꼬르륵~” 하고 배가 대답을 했다.
여인이 소쿠리에 담아온 삶은 감자를 장보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칠흑 속에서 여인은 능숙하게 움직였지만 장보는 봉사나 다름 없었다.
“불 좀 켤 수 없으신지요?”
장보가 묻자 여인은 말했다.
“불씨라고는 호롱불이 전부였는데 문을 열자 불이 꺼졌고 부엌에서 부싯돌을 켰지만, 워낙 날씨가 눅눅해서….”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소찬이 워낙 부실해서 미안허구먼요. 혹시 약주를 하시는지요?”
“네, 네.”
약주라는 소리에 장보는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호리병에 술을 들고 왔지만, 뭐가 보여야 따르지.
그때 돌돌돌 술 따르는 소리가 나더니 장보의 손에 술 종지 잔이 쥐어졌다.
단숨에 마셔보니 머루주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었던가.
여인이 따라주는 술을 거푸거푸 마셨더니 취기가 오르고 담이 커졌다.
“낭자는 이 깊은 산속에 혼자 사시오?”
“그렇습니다”
“식구들은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여인은 조용히 “약주 맛이 어떻습니까?” 라며 말 물꼬를 돌렸다.
“내 평생에 이렇게 감칠맛 나는 술은 처음입니다.”
‘귀신은 아니지요? 100년 묵은 여우도 아니고?’
이렇게 물어보려고 하다가 장보는 참았다.
“과객께서는 어인 일로 어디를 가다가 이 산속을 헤매게 됐습니까?”
장보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여인도 ‘도적은 아니지요?’ 물어보고 싶은 걸 참았다.
“누추하지만 아랫목에서 주무십시오.”
장보가 뜨뜻한 방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우 속에서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했는데 목숨이 살고나니 하초가 뿌듯해지며......
윗목에서 부스럭부스럭 여인이 옷을 벗는 소리가 나고 이내 조용해졌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던 장보가 기어서 윗목으로 갔다.
꼴깍 침을 삼켰다.
큰돈이 쌓인 마작판에서 후를 부르려고 패 한개를 버리고 한패를 가져오려 할 때 두근거리는 가슴,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 그래 이거야! 여인의 종아리에 입을 맞췄다.
장보의 입술은 엎어져 자는 여인의 무릎 안쪽까지 올라갔으나 고쟁이가 걸리지 않았다.
장대비는 끝없이 쏟아졌다.
장보의 입술은 촉수처럼 낭자의 허벅지를 더듬어 올랐다. 온몸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숨소리는 가빠졌다.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산속 외딴집 방 안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꽈르르 꽝 ! 번개가 문을 하얗게 만들었지만 장보는 낭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밖에도 안에도 폭풍우는 끝없이 이어졌다. 우르르 쾅 ! 천지를 쪼개는 벼락과 함께 방 안에서도 낭자와 장보는 한몸이 돼 천길만길 허공으로 떨어졌다.
장보의 품에서 빠져나온 낭자가 숨을 가다듬으며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소첩이 머리를 올렸습니다. 낭군께서 비녀를 꽂아주십시오.” 장보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나무젓가락이었다. “낭자의 머리에 이런 비녀를 꽂아줄 수는 없소이다.” 장보는 제 상투에서 동곳(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식)을 뽑아 댕기를 감아올린 머리에 꽂아줬다. 원래 동곳은 짧지만 장보는 제 어미가 이승을 하직했을 때 은비녀를 뽑아 동곳으로 붙이고 다녔다.
그날 밤 장보는 한 일이 너무나 많아 금방 코를 골았다. 장보가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하룻밤, 그 방에서 잤건만 방 구경은 그제야 처음이다. 통나무 벽 사이는 진흙으로 때우고 방바닥은 멍석 위에 돗자리를 깔았지만, 방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지난밤 만리장성을 쌓은 낭자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다. 세칸 너와집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낭자는 보이지 않았다. 옷을 빨아 깨끗이 다림질까지 해놓았다. 방으로 다시 들어가 자던 이불을 개다가 장보는 깜짝 놀랐다. 요 위에 새빨간 핏자국! 천하의 잡놈, 장보는 팔도강산 노름판을 전전하며 이 여자 저 여자 수없이 치마를 벗겨왔지만 숫처녀는 처음이고 칠흑 속에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윗목에 보자기를 덮어놓은 개다리소반에 정갈한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삼계탕에 산삼이 세뿌리나 들어 있었다. 배를 두드리며 먹어 치웠다. 지난밤, 마작판을 휘어잡아 긁어온 전대에서 백냥을 꺼냈다가 삼백냥을 만들어 이불 속에 찔러놓고 길을 떠났다. ‘낭자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 걸. 벌교 장날 장 보러 갔나? 아니야, 나를 그 집에 눌러앉히든가 나를 따라가겠다고 나서면 큰일이지.’ 장보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벌교 마작판에서는 큰 재미를 봤지만, 금산에서는 골패판에 끼었다가 왕창 나갔다. 노름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한몫을 잡았다 해도 좀 모자라는 것 같고 찾아온 끗발을 포기하는 것 같아 한번만 더 끌어모으겠다고 패를 계속 돌리면 허탕질이 되고 전대는 가벼워지는 게 노름꾼의 속성이다. 장보도 그렇게 날리고 고향땅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전답을 헐값에 팔아서 또 노름판에 처박고 함경도 무산에서는 투전판에서 사기도박을 하다가 들통이 나 양손 엄지·검지가 작두에 잘려나가는 낭패도 당했다. 마지막 남은 집마저 날리고 그는 제 목숨을 끊기로 작정하고 부모님 묘소에 마지막 절을 올리러 고향땅 산청으로 가 산에 올랐다.
과거에 여덟번 떨어지고 주색잡기에 빠졌다가 노름꾼이 돼 조상한테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몽땅 탕진하고 제 목숨 끊으려니 눈물이 절로 났다. 어머니 묘에 큰절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 은비녀가 생각났다.
벌교 조계산 속 외딴 너와집에 저녁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열두어살 먹은 아이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장보가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발을 들여놓자 마당을 쓸던 아이가 장보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서로의 눈빛은 따듯했다. 부엌에서 아이의 어미가 나왔다. 얼굴 오른쪽 반쪽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번들거렸고 오른쪽 눈도 없었다.
“그분이시군요.” 여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여인의 올린 머리엔 어머니의 은비녀가 꽂혀 있었다. 장보가 방에 들어가 좌정하자 그 여인이 아들을 보고 “너의 아버지시다. 큰절을 올려라”고 했다. 한 많은 36년, 제 목숨 끊으려던 장보가 뜻밖에 얻은 아들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어릴 적에 부엌에서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져 장작불이 활활 타는 아궁이에 얼굴을 처박아 괴물로 살아온 그 여인과 호롱불 아래서 얘기를 나누며 밤을 꼬박 밝혔다. 마지막 남은 수수께끼를 물었다. “임자, 그날 차려놓은 삼계탕에 산삼이 세뿌리나?” “산삼이 아니고 장뇌삼입니다. 심마니였던 아버지가 산삼씨를 열두군데 남모르는 곳에 뿌려두고 손수 지도를 그려뒀습니다. 이제 모두가 50년근이 돼 우리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습니다.” 장보가 부인을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꼬끼오~” 새벽닭이 울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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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독했습니다
여인의 삶
어찌보면 고마운데 한편으론 짠 합니다
여인을 사랑 합시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