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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태복음 21장 1-11절 /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21: 1-11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공생애 3년 반의 종반에서 마지막에 이르러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마지막 공생애 사역인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시게 됩니다.1)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무리들이 따라가면서 환호함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감람산 위에 있는 벳바게라는 동네 이르렀을 때2), 예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인데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만일 그 나귀의 주인이나 그의 이웃에 있는 사람이“당신은 누구인데 남의 나귀와 그 새끼를 허락도 없이 함부로 풀어 끌고 가려고 하느냐?”라고 묻거든“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 즉시 주께서 나귀를 쓸 수 있도록 보내줄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제자 두 사람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한 것은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이 일은“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라고 한 선지자의 예언(사 62:11; 슥 9:9)3)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두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나귀에 올라타시자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벤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러준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자,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탔다고 하였습니다(막 11:2, 7; 눅 19:30, 35; 요 12:14). 그러자 군중이 예수님을 앞뒤에서 에워싸고 따라가면서 크게 환성을 올렸습니다.“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는 더욱 거세져서 예루살렘 온 성을 뒤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소동하여 집 밖으로 나와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저마다 묻기를“이분이 누구신데 이렇게 환호합니까?”하였습니다. 이에 무리는“저 나귀에 타신 분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과 무리들의 환호가 갖는 의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까닭 :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은 여러 번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로 불리는 큰 명절의 하나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모여 들었는데, 예수님도 매 유월절 때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이번에 맞이하는 유월절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예루살렘 입성은 다른 때와는 달리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였습니다. 시온의 딸,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이 임하시는 것에서 그의 백성들은 나귀에 타신 예수님을“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신데, 모든 이들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라고 환호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입성하시는 것인데 세상 임금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왕의 보좌에 앉아 군림하기 위한 입성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와 스가랴가 각각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니,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여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 짓는 십자가에 달려 매년 유월절 때마다 드려왔던 헌신제사의 제물로 친히 하나님께 바쳐져서 고난을 받으시고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어 속죄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입성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새날을 맞이하고서 승천하여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으로써 영원히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까닭 : 그러한 예수께서 마지막 방문이 되는 예루살렘에로 올라오시고 이 성에 들어가실 때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인지요. 혹자는“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에서의‘그는 겸손하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심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니 그분과 같이 우리 마음이 겸손할 것을 가르친다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의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그는 겸손하여’에서 겸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나귀를 타는 것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인격(인품)이 모든 사람의 본이 될 만한 것으로 참으로 겸손하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에 이 말씀을 하시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언한 시온의 딸인 이스라엘이 환호하여 맞이할 왕이심으로 그 왕에 합당한 모습에 걸맞게 입성하실 것인데, 이는 정복자로서 힘 있고 위용 있는 모습으로 백마를 타고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로 나아오시는 왕이심에도 튼튼한 일군을 대신하는 힘 있는 잡종도 아니고 또는 용맹한 군사를 태우고 전장을 누비는 군마도 아니고 한갓 작은 덩치의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에서 크게 대비가 됩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이니, 멍에를 메고 고생되는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나귀의 새끼를 타는 모습은 비천한 종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그는 겸손하여’라고 예수님을 표현함은‘그는 겸비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표현되고 있는‘겸비’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에서 알려 주신“(1)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3)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에 죽으심이라”(빌 2:6-8)를 의미하는 것에서이며, 이는 예수님께서 선지자의 예언에 나타내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에 있음을 의도하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겸비한 왕의 모습을 띠는 것은 겸비한 종의 사역과 관련한 것으로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에서 있는 일임을 유대 백성들에게 알게 하여 맞이함에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 예언됨으로 그곳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게 해 주셨듯이,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자기 백성들에게 오실 것이 예언됨으로 유대 백성은 겸비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봄에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한 백성들의 환호에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 : 이는 다음의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는 것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통해서 전해 주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백성이 그 예수께 무엇이라고 말하며 맞이하여 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환호하며 맞이합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시니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기에‘호산나’4)라고 외치며, 자기들을 구원할 주이신 메시야(그리스도)요 왕으로 맞이하는 합당한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환호하며 영접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기 계시의 사건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인데, 두 맹인의 외침에 있듯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이심을 나타내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을 통해서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메시야이시며 왕이심을 계시하셨으며, 무리들이 환호하는 것을 통해서 섭리적으로 무리들이 예수님을 메시야이시며 왕으로 인정하고 환영하게 하심으로 자신이 참 메시야이시며 왕이심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온 백성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그들이 들은“다윗의 자손 예수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에 있어야 할 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환영하는 이유 : 무리들은 이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이 일이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자기들의 의사와 의지에 의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무리들은 비록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께 환호를 보내며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며 메시야와 그 왕 되심으로 맞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예수께 가진 자신들의 본심을 곧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엠마오로 데려가던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 중의 두 사람이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으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르고 있는 것이니,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이 당면한 해방을 위하여 일하는 구원자로 보는 지극히 현세적 차원에서 보낸 환호였습니다(참조. 눅 24:21; 행 1:8). 예수님을 환호하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자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인자가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야 영광에 들어갈 것이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증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면서 호산나 만세를 불렀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무리들은 소동하며“이분이 누구시냐?”고 물었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자들은 그 대답으로“이분은 예수님이신데 갈릴리 나사렛 출신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며칠이 못되어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충동되어“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마 27:23)고 외칩니다. 그러하지만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눅 3:8)고 하신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의 입을 열어 호산나를 외침에 있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거함에 있게 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다름 아닌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실 것을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유대인들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오직 대속주로 오신 한 길만을 걸어가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때는 시기적으로 일요일(유대인의 종교력으로는 안식일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전 9시(유대인의 시간으로 제3시)에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그 날 오후 3시(유대인의 시간으로 제9시)에 운명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린 지 불과 6시간 만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날의 준비와 기다림에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구속 사역기에 들어설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맡아 수행하기 위한 준비에 있어오셨으며, 공생애 3년 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온전히 순종하여 수행하신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을 예고해 주셨었습니다(마 16:21; 17:22-23; 20:17-19; 26:1-2)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떠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죄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오직 그 한 길만을 걸어가신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한길만을 걸어가신 것을 의로운 사람이 행한 의로운 삶의 행동으로 평가하는 그릇된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의로운 일을 해 나간 분으로 이해하는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해서, 이를 모범으로 제시하며 그 예수님을 따라 그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가난하고 힘없는 불쌍한 자들의 대부가 되어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한 가지 일을 위해 한 길을 걸어간 것은 온 세상 모든 곳에 있는 인류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부르셔서 저희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구속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뜻을 받들어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 받들어 감에 있는 교회
교회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일을 온전히 수행해 가기 위하여 일생을 한 길만을 걸어감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이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를 의로운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품으신 뜻을 이루어 가심에 있게 하시기에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흔적을 육체에 지니고서 주께 가진 믿음에 변치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서,‘호산나’, 곧“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에 우리가 구하는 기도가 있으며, 이 기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섬기려는 생각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하였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은 그 모두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으로‘호산나’를 생각하는 것에 있다면 그들이‘호산나’라고 말하며 구함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김에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위해 섬김을 받으려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이 없는 생각은 다만“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다만 떡을 먹고 배부름을 위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던 무리들처럼(요 6:26) 다 자기를 위하여 가져나갈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먹든지 마시든지”에서 끝나 있을 것이며,“다른 무엇을 하든지”다만 하려는 그 무엇인가에 생각이 고정되고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기 위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 그런지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 속에서만 있다면“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에 생각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거스려서‘자기를 위하여’살기 마련입니다. 이런 그에게는“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그게 어떤 것이든지“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를 생각하는, 곧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에 거치는 돌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게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신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없다면 사람이 갖는 생각은 여기서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도록 우리 마음을 채근하며 우리 몸을 복종케 하십니다. 그래서“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그 모두를 다 자기를 위해서 하고자 하는 육의 생각에서 멈추어 있지 않게 하십니다. 이 생각에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므로“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그 모두에서“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하나님을 일을 받들어 섬겨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 육에서 올라오는 생각대로 우리 몸이 맡겨지고 행하도록 놔두지 않으시고, 이 생각에 맞서 대적하여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힘, 곧 그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받들어 섬겨 나가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을 의지함에 있다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그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므로 우리가 우리 몸과 목숨을 하나님께 드려간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위해 우리 몸과 목숨을 드려 많은 사람을 섬김에 있으므로 그들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도록 하여 섬김이 기쁨이 되게 하고 있다면,“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그 모두는 걸려 넘어지는 돌, 곧 거치는 돌이 되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무엇으로도 많은 사람을 섬김에 있는 하나님의 일의 생각을 막지 못합니다. 어디에서 이를 보게 되는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일로 예수께서 당하신 멸시와 조롱과 죽음을 당하는 고난의 십자가에 의해서 있는 그 고난의 잔을 마시게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도 십자가와 무관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이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으로 있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되며(갈 6: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자랑할 자랑이 됩니다(갈 6:14). 이것이 우리 입에서 말해지며 그 증거에 우리가 있음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중단 없이 입고 있으니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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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마태복음의 종반인 21-27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마지막 일주일에 해당하는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 21-23장은 안식일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고난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에서 셋째 날인 화요일 전반기 중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특징은 예수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다루고 있는 21:1-11은 고난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구속주요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에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 준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다루고 있다.
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라고 기록하였으나, 마가복음에서는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막 11:1)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도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눅 19:29)라고 밝히고 있어서 예루살렘과 멀지 않은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동네까지 오셨을 때에 있은 일이라고 시기적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어떤 장소에 이르셨을 때의 일인지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고 있다. 마가와 누가가 이렇게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벳바게와 마태복음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 베다니를 함께 기록하여 알려 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본문의 사건 이전에 벳바게와 함께 감람산 근처에 있는 베다니에 들르셔서 행하신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복음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요 12:12)의 사건 앞에서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만 아니라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모여드는 것을 보고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한 것을 다룸(요 12:9-11)으로써, 벳바게에 앞서 먼저 베다니에 들르신 것을 알 수 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그 베다니와 함께 벳바게에 이르셨을 때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말성경.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너희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표준새번역.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현대어성경. “`너 시온성아, 기뻐 뛰어라! 너희 예루살렘 시민들아, 환호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왕께서 네게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노련한 해방자이시다. 그런데도 겸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다. 잡종도 아니고 전투용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4) 호산나는 시편 118:25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인데 헬라어로 음역하여 “호산나”가 된 것이다. 그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이다. 즉, 지금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