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발표된 곡을 재발매)음반
흰눈이 휘날리는 바로그날밤
그대와 나는 촛불을 밝혀놓고
전선에 가는 짐을싸고 있을적에
멀리서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
밤하늘 정답게 울렸지 아 ~
그때가 잊지못할 시절이었네
만달이 서산위에 걸려있던밤
그대와 나는 화롯불을 헤치면서
청춘설계를 꾸며보고 있을적에
눈보라 헤치며 벌판을 달리는
기적도 정답게 울렸지 아 ~
그때가 잊못할 시절이었네
도 미
ㅇ 가락오봉산 6.25 전몰장병 묘지
6.25를 동족상잔의 비극이라한다.
가락 오봉산북편 산자락 낙동강상류쪽이 잘 조망되는 언덕에 우리고장출신으로 6.25때 낙동강전투
에 투입되어 산화하신 39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밀려내려온 국군은 낙동강을 사수하며 전투가 한창일때 우리고장 20대
전후의 미혼 청년들이 조국의 부름으로 징집되었고, 가락중학교의 전신인 공립학교가 죽림마을
2층적산가옥 박씨집 (택호를 포목상집이라했다)에 임시개교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들죽날죽했던
10대의 재학생들도 6.25로 임시휴학에 있던중 1950년 8월경 갑자기 소집되어 아침조회를 마치자
만17세이상자는 학도병 신분으로 군인차에 실려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다.
전투장비도 지급받지 못하고 군사훈련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최전선에 투입되었으니 거의 전사
했다고 한다. 전선으로 가던중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도망쳐 천수을 다한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
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은 없다.
ㅇ 가락고등공민학교 학생(가락중학교 전신)
이분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전쟁은 멈추었고 나라는 지켜졌으나 유해는 편안한 곳에 안장되지
못하고 범어사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다가 1952년 전사자의 유골을 수습해서 오봉산 문수암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낙동강상류을 바라보는 오봉산 북편 언덕에 묘지를 조성해서 유해를 안장했다.
6.25 전몰장병 국군묘지는 오랫동안 관리가 안되서 잡초가 무성했고 봉분은 허물어지고 이끼 낀
비석은 쓰러진채 방치되다가 다행히 지역의 관심있는 분들의 노력과 나라살림이 나아지면서
지금처럼 잘 정비되었고 추모일에는 충혼길로 참배객도 늘고 있다.
"내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젊은 이들
역사의 책장위에 꽃수를 놓으셨네
조국의 포근한 흙속에서 웃으며 잠드소서"
헌시가 비석에 새겨져있다.
광복후 남과북은 이념을 달리하는 정권이 들어 섰고 남쪽의 방심한 틈을 타서 북은 기습남침을
자행하였다. 무방비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리다가 낙동강전선에 겨우 방어선을 고착시켰다.
우리 고향 김해지역은 전투가 있었던 지역은 아니었으나 전방이나 후방이나 전시라 어수선하기
는 마찬가지였다.
전선이 남하 되면서 우리고장 가락지역은 피난민과 후방군인들로 북적였다.
현위치 가락국민학교와 지금 가락중학교 자리 가락국민학교 죽림분교와 덕도 삼광 해포국민학교
는 교실마다 피난민들로 가득찼고 운동장에는 야전병원 임시막사가 설치되어 전투에서 부상한
국군들이 후송되어 왔다. 면소지마을 죽림은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가장 북적였던 시기였다.
함안, 창녕, 산청 등 서부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많이 밀려들었다는데 피난민들은 가재도구를
소달구지에 싣거나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걸어서 오거나 낙동강 수로를 따라 배편을 이용해서
우리고장에 연고불문 몰려들었다.
특히 면서기가족, 우익인사가족, 경찰가족, 군인가족, 지식층과 지주들 양민들이 피난을 많이
왔다. 피난 왔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남쪽이 전세가 불리하자 좌익활동자 그리고 빈민층과
머슴살이 하던 사람들의 세상으로 변하여 그 바닥에 암약하던 좌익분자들과 인민군의 앞잽이가
되어 특정인 개인감정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피난민들은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낙동강戰線이 다급해 질 수록 병력의 충원이 필요했다.
각처에서 징집된 젊은이들이 더러는 보리짚 모자에 핫바지를 입을채로 징집되어 왔다.
오봉산 문수사 절뒷편 공터에 임시 군사훈련장이 만들어 졌고 징집된 자들은 몇일동안 총쏘는
훈련과 기초적인 군사훈련만 받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10대초반이였던 둘째 형님은 어머니가 만들어 준 김밥과 주먹밥, 찹쌀떡을 생선나무상자에
담아 훈련병에게 팔기도 했다는데 훈련중 잠시 쉬는 시간에 한꺼번에 달라들때는 돈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 양철 물동이에 음식물을 담아가서 깔고앉아 돈을 받은 다음에 팔기도 했다.
그때 핫바지군인들과 민병대원의 뒤치다꺼리는 우리마을과 인근마을 사람들에게도 할당되었
는데 전선에 투입되기전 군인들을 오봉산밑에 사는 각 가정에 보내어 하루저녁을 재워주고
먹이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새면 소집되어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며칠 뒤면 전선에 투입되는 또 다른 군인들이 각가정으로 왔고 사람들은 먹고 재워 보냈다.
형편이 어렵던 가정에서는 死地로 떠나는 이들에게 한 끼 쌀밥도 해먹이지 못하고 떠나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전선으로 떠나기전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던 군인들에게 훈련교관들이 우리마을 앞산 당산
할매에게 무사귀환을 빌게도했다.
ㅇ 우리마을 당산할매 성왕당
작년에 도로 만든다고 철거되었지만
죽림마을 큰향나무가 있었던 적산가옥에 전시 계엄사령관이던 일명 백두산 호랑이 라던 김종원
이 여러날 있다가 떠난 사실도 있는데 징집독려차 왔는지 병참문제로 왔는지는 알 수없지만
한동안 최후방마을에 군 지휘관들이 들락거려 군인들의 경호가 삼엄했고 군인들과 피난민들로
최후방 마을에도 전시분위기가 그대로 노정 되었다.
6.25는 군인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인민군 점령시기에는 지방좌익들과 인민군이 우익인사나 군인가족, 경찰가족 개인감정이
안 좋았던 자들을 찾아내어 죽창, 칼, 낫 등 원시적인 방법으로 즉결처형하기도 하였고
인민군이 물러간 후에는 인민군에 부역자들이 잡혀들어 한꺼번에 처형되기도 하였다.
후방이던 김해지역에서도 좌익활동에 가담했던 보도연맹원들이 검거되어 김해지역 여러곳
에서 총살되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나고 막태어난 전후세대들이라 미군이 주는 원조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
기도 했고 보리고개라는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내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은 겪지는 않았다.
막상 6.25때 우리고장에서 벌어졌던 당시 참상들을 조합해서 글을 쓰보고자 하였으나
경험자들이 돌아가시고 더러는 거동이 불편하고 오래전에 고향을 떠나버렸고 해서
단편적인 이야기들 밖에 줏어 모을 도리가 없었다.
ㅇ 적산가옥 향나무집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
53년 7월 27일 휴전
2019년 6.25는 전쟁발발 69년
ㅇ 6.25때 발표된 우리가요들
01 현 인-전우야 잘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02 남인수-가거라 삼팔선 (이부풍 박시춘)
03 신세영-바로 그날 밤 (유호 박시춘)
04 금사향-임 계신 전선 (손로원 박시춘)
05 박재홍-경상도아가씨 (손로원 이재호)
06 황금심-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이재호)
07 신세영-전선야곡 (유호 박시춘)
08 현인-굳세어라 금순아 (강사랑 박시춘)
09 남인수-이별의 부산정거장 (유호 박시춘)
10 손인호-함경도 사나이 (손로원 나화랑)
ㅇ 미국에서 발표된 6.25한국전쟁관련 노래(팝)
1.Korea_Here_We_Come-Harry_Cho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