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사전적 의미를 흔히 '살림살이가 쪼들리고 어려워 딱한 사정'이라고 풀이한다. 내가 겪었던 '젊은 날의 가난은 고독하고 외로운 삶이었으리라. 오늘날 빈곤 문제는 절대적 의미의 빈곤(Absolute Poverty)과 사회구성원이 누리는 생활수준을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Relative Poverty)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을 노출하고 있다. 빈곤을 보는 시각이 불화와 대립을 낳았다. ‘가난하다’는 말의 정신적 경제사회적 의미는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의 다름에서 다양하다. 고대 그리스의 헬라어는 ‘가난하다’는 말을 페네스(pen'-ace)라고 했다. 그 말은 헬라어로 쓰여진 성경 원문에서 ‘가난한’을 ‘pto-knos'로 표현하였다. 헬라어 ’ptosso'는 ‘웅크리다’에서 유래한 ‘거지’, ‘빈민’, ‘탁발승(托鉢僧)’을 뜻하는 말이다. 중세 독일 신비주의 종교철학자 마이스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그의 논문 <가난 사상에서의 신비적 이해>에서 언급한 가난의 의미와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자 빅토르 위고의 동화 같은《가난한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끼의 소설《가난한 사람들》이 전하는 처절하게 사무치는 가난의 울림과 떨림을 새삼 음미해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난’은 겸손이고 순명이다. 그 가난의 의미는 마태오 복음 5장 1절로부터 12절까지의 '산상설교'와 루카 복음 6장 20절에서 23절까지 '참행복'에서 사펴볼 수 있다. 성서적 가난은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진복팔단(眞福八端)과 루카 복음 6장 20절에서 23절까지의 참행복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성서적 의미의 가난을 연구한 마이스트 에크하르트는 중세 신비주의를 도미니꼬 수도승으로써 산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인이다. 그는 앞서 소개한 논문 <가난 사상에서의 신비적 이해>에서 ‘너 자신을 부인하라’는 생각으로 ‘무심(無心)과 공(空)이 없는 사랑이나 자비는 보잘 것 없다.’고 가르치며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통해 신이 나를 바라본다.’고 했다. 그의 사상과 가르침은 현세에 살아 있는 수도회적 종교의 가혹한 교리인 ‘청빈, 순결, 순명’에 비해 보다 단호하고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첫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둘째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셋째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자유로운 사람은 무엇이든 바라지 않는 마음, 무엇이든 알려고 하지 않는 마음, 무엇이라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라 하였다. 더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란 죄가 없거나 짓지 않아서 하느님 앞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로 표현하였다. 종교적 이념을 현실과 비교해 본다. 믿는 사람, 즉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누구인가? 가혹하다.
빅토르 위고가 쓴 단편 <가난한 사람들>은 이렇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날 밤. 가난한 어부의 아내 쟌니는 낡은 어망을 한 땀 한 땀 기웠다. 어린 아이 다섯은 이미 잠들었다. 폭풍우가 거셀수록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걱정된 쟌니는 조바심이 나 램프불을 들고 밤길을 나섰다. 문득 가난한 과부 시몬집을 지나다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 시몬은 숨져 있었고 그 곁에는 두 아이가 있었다. 쟌니는 두 아이를 안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러나 집이 가까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가난한 살림에 남편의 허락도 없이 이웃집 두 아이를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두 아이를 포대기로 덮어 재우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때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당신 오셨어요? 고기는 좀 잡았나요?”하는 쟌니의 말에 남편이 “고기가 다 뭐야, 죽지 않고 살아온 게 다행이지. 그물은 비바람에 다 찢겼어.”라는 말에 쟌니는 “시몬 아주머니가 죽었어요.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잇자 남편이 의외의 말로 되받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그랬어?” 그때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여준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쿠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 보다 슬픈 내용으로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갸륵한 이웃 사랑이다.
도스토예프스끼는 처녀작《가난한 사람들》로 데뷰했다. 그 스토리는 가난한 연인의 순수하고 처절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다루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중년의 가난한 하급 관리 마까르 제부쉬낀과 가난을 면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욕심쟁이 사내와 결혼을 하는 병약한 처녀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주고받은 편지로 이어지는 서한체 소설이다. 마까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사색하고 걱정하고 배려하며 번민할 줄 아는 3차원적 인간형으로 편지를 통해 가난과 사랑, 증여와 헌신의 마음을 나눈다. 가난 때문에 명예가 박탈되는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변덕스러운 인물로 살아가는 모습과 가난이나 궁핍이 주는 심리적 영향과 결과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마까르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물건 팔아 바르바라와 그녀의 식구를 돕는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함 때문에 그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마침내 자포자기에 빠진다. 바르바라는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이별의 슬픔과 좌절감에 빠진 마까르는 빼쩨르부르그에 홀로 남는다.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작가 도스토예프스끼는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힌 간질병, 사형집행 직전의 극적 특사, 시베리아의 유형생활을 통한 선과 악, 성(聖)과 속(俗),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고뇌에 찬 사람들의 삶을 돌아본다.
첫댓글 국장님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가난은 비움에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가진 것에 감사하기 보다 더 가질려는 욕심을 회개합니다.
감사합니다.
더 가져야 하고 더 채워야 하는 자본주의식 생활방식에 찌든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가난이야말로 은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