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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한국 천주교와 관련이 깊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던 곳이다. 2010년 3월 마카오/홍콩을 방문하여 파리외방전교회의 주소지를 모두 방문하여 이곳에 게재한다. 홍콩 지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주소를 밝힌것은 최초의 일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경위와 3년 전 파리 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모습과 홍콩으로 이전하기 전 마카오의 주소지 모습도 함께 올렸다. 답사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데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원 원장 김용재 신부님과 파리외방전교회 중국 지부장 부르노 루페(Bruno Lepeu) 신부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I.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설립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Ἐtrangères de Paris ; MEP)는 1658년 7월 29일 창설되었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되던 17세기 당시 아시아에선 포르투갈이 교황청으로부터 '선교 보호권'(padroado)을 위임받아 중국 난징과 베이징, 필리핀 마닐라, 마카오, 인도 고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일대 선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선교 보호권이란 그 지역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교구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십일조 징수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이 행사한 권한을 말한다. 그러나 교황청 의도와 달리 선교 보호권이 해외 선교에 도움이 되기보다 국왕의 권한 남용으로 폐단이 더 심했다. 특히 선교지에서 수도회간의 불화가 점차 심해지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년)는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 교황청에서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케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이 설립될 당시 프랑스에선 파리를 중심으로 교구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성체회'라는 신심단체가 활동했다. 이 성체회는 교황청에 지금까지 수도회 중심이던 외방선교에 자신들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이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년)가 1658년 이 요청을 받아들여 라오스와 코친차이나, 중국 남부 지역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됐다. 곧이어 1664년에는 선교지에 파견할 후속 선교사의 양성을 위해 교황청의 공인을 받아 파리, 뤼드 백(Rue du Bac)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66년 최초로 샴(Siam, 현 태국)의 수도 아유티아(Ayutthaya)에 그 대표부를 두고 출발하였다. 후에 박해로 인하여 1688년 인도의 퐁디쉐리(Pondichery)로 이전하여야만 했다. 1685년에는 극동 아시아의 선교 필요성 때문에 중국 광동(Canton)에 두 번째 대표부를 설치하였으나, 1732년 광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래서 당시 포르투갈 보호아래 있던 마카오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그러나 보호권(Padroado)의 압력과 마카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1847년 초 홍콩으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천주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년)가 즉위하자마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샴(현 태국) 보좌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면서 부터다.
또 조선교구 설정을 계기로 중국 내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의 잔재를 척결하고 포교성성의 선교권을 강화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 요청대로 1838년 북경교구에서 만주교구를 설정했다. 이처럼 교황청은 한 명의 선교사도 없던 신생 조선 교회를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는 파격적 결정을 내렸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양성을 시작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치교회로 성장해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선교의 책임을 맡을 만큼 성장하는 밑거름이 돼 왔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이래 지금까지 한국에 173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시성됐다.
II.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위치
1. 마카오 시대(1732년∼1847년)
[주소지] Cai. do Befelho, Macau ; 澳门 白鴿巢前地 麗豪花園
[현 주소내 건물] 5층 주상 복합 아파트
1732년 광동으로부터 추방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마카오로 이전하여 카뮤에스 공원 입구 성 도미니코 성당 길 건거편 신성가(新胜街)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그 자리에 5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다.
마카오는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동방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곳이다. 16세기부터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됐다. 지금은 중국의 행정특별자치구로 운영되고 있다. 전체 면적은 29㎢로, 서울 여의도의 3.5배 크기다. 인구는 50여 만 명이며, 대부분 중국인이다.
마카오가 가톨릭 신자들, 특별히 한국 교회 신자들의 이목을 모으는 것은 포르투갈의 보호권아래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선교회들의 극동 선교 전초기지로 활용되며 일본 및 중국선교의 중요 거점이었다는 점이다. 선교 단체 중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1565년 본부를 설치, 성 바오로신학교, 성 요셉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이외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지역 대표부는 1732년 대표부를 광동에서 마카오로 이전해 아시아 선교 활동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 부분에서 마카오는 한국교회와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되는데, 1808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 이어 조선 교회 관할권을 계승했던 수자 사라이바(Joachim Souza de Saraiva, 1744∼1818년) 주교는 1811년 바로 이곳 마카오에서 한국 교회 신자들이 보낸 2통의 편지를 받고 이를 번역해 교황청에 보냈다. 또 1825년경에 쓰여진 조선교회 교우들의 청원서 역시 북경을 거쳐 마카오에 전달됐는데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부대표 움피에레스(Raphael Umpierres, 1823∼1835년 재임)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해 교황청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기폭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적으로도 마카오는 조선으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의 경유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거쳐 조선 입국을 시도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마카오를 연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성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이다. 1835년 마카오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모방 신부는 그 이듬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는데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한 이들은 1842년까지 6년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대표 : Libois 신부)에서 칼레리(M. Callwry) ‧ 데플레슈(M. Desfleches) ‧ 르그레조아(Legregois) 신부 등에게서 수학했다. 그 중간에 민란으로 잠시 마닐라로 피신해 있기도 했으나 다시 귀환해서 철학 신학 과정을 이수했다.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으로 마카오 지역 몇 곳에는 김신부를 기억하는 상징물들이 남아있다. ‘흰비둘기 공원’으로 불리는 카모에스 공원에는 198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세운 동상이 세워져 있고 바로 인근 안토니오 성당에는 홍콩의 한 한인 신자가 봉헌한 김신부의 목상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100여 년간 유지해오던 마카오의 극동대표부는 포르투칼의 보호권(Padroado) 압력과 마카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1847년 초 홍콩으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당시 홍콩은 아편전쟁 후 1842년에 난징(南京)조약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은지 얼마 안된 시기였다.
● 한국천주교의 상징 김대건 동상
성 바오로 성당에서 골동품·재활용 가구 거리인 루아 데 산토 안토니오 거리를 지나면 카모에스 공원(Camoes Garden, 嘉模公園)이 나온다. 1557년 한때 마카오에서 살았던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카모에스를 기려 만든 곳이다. ‘흰비둘기 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카모에스 공원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198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제막한 것이며, 홍콩과 마카오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이를 다시 보수해 1997년 새로 봉헌했다.
2. 홍콩 시대(1847년∼현재까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1847년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하였다. 홍콩은 1841년 영국령으로 귀속되던 당시만 해도 평범한 어촌지역에 불과했다. 그 시기에는 단순한 불모의 암석지대로 표시될 뿐이었지만, 영국의 통치구역이 홍콩섬에서 주룽반도를 거쳐 신제까지 확대되면서 홍콩은 무역지로 대두되었고 오늘날 중국 본토의 중요한 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편전쟁(1840∼1842)에서 청나라는 퀸 빅토리아 함대를 앞세운 영국군에 패하게 되고 1842년에 난징(南京)조약을 맺으면서 홍콩섬을 영국에 양도하게 되었다. 1898년에는 신제(新界)를 영국으로 99년간 양도하게 되었으며, 헨리 포팅어(Henry Pottinger)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이 후 99년간의 영국 식민 기간이 만료되면서 1997년 6월 30일 홍콩은 다시 중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현재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서 1국가 2체제의 자치권을 행사하며 5천여 년을 넘는 장대한 중국의 역사와 100여 년 동안 이식된 영국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독특한 국제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1) 첫 번째 주소지(1847년∼1890년)
[주소] 6, Staunton Street, Hong Kong(香港 士丹頓街(사단돈가) 6-8號)
[현 주소내 건물] 汛和大廈(신화대하) 현재 레스토랑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는 마카오에 있다가 1847년 홍콩으로 이전하였다. 첫 번째 이전한 이곳이 중요한 사적지인 이유는 시기적으로 이곳에 위치했던 기간 중에 두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1847년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포함한 프랑스어본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하여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고 1847년에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이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여기에는 함께 공부했던 동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도 포함되었고, 이 행적은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되어 시복 소송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79위 복자 탄생으로 이어졌다. 최양업 부제가 동료를 잃고 슬픔 속에 이 작업을 한곳이 이곳으로 추정된다.
둘째, 이곳은 제주의 첫 순교자이며 이번에 시복시성대상자로 교황청에 올린 김기량이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김기량은 동료 4명과 함께 무역차 서귀포를 거쳐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갑자기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한 달 가까이 혼자 표류하던 중 해류에 밀려 중국의 광동 해역까지 흘러갔을 때, 다행히 바다를 지나가던 영국 배에 발견되어 구조를 받아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페낭신학교에서 최양업 신부가 보내 공부하다 휴양차 와 있던 이만돌(바울리노) 학생에게 교리를 배운 김기량은 1857년 5월에 루세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제주 출신의 첫 번째 신자로 탄생하였고 나중에 통영에서 대못으로 가슴을 박혀 순교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하느님의 종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운명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된 거룩한 곳이다.
현재는 Staunton Street 6호와 8호로 두 번지를 사용하고 있는 신화대하(汛和大廈) 6층 건물이 있다. 그곳에는 pudding과 seafood 가게가 운영되고 있다.
(2) 두 번째 주소지(1890년∼1918년)
[주소] 34, Caine Road, Hong Kong(香港 堅道(견도) 34號)
[현 주소내 건물] 嘉諾撒聖心商學書院(가낙살성심상학서원, 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 of Commerce)
파리외방전교회가 홍콩에서 두 번째로 이전한 주소지에는 현재 이태리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the Canossian Daughters of Charity)가 1860년에 설립한 가낙살성심상학서원(嘉諾撒聖心商學書院, 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 of Commerce)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종합 캠퍼스로 사용하고 있다.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의 창립은 현재는 성녀 Magdalene of Canossa인 Magdalene 후작부인이 이태리 토스카나(Tuscany)에 있는 카노사의 집(the House of Canossa)에서 유래한다. 1860년에 이태리에서 이곳에 온 수녀회에서는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1960년에는 이 학교를 카노사 성심대학(Sacred Heart Canossian College)으로 등록하였다.
(3) 세 번째 주소지(1918년∼1953년)
[주소] 1, Battery Path, Hong Kong(香港 炮台里(포태리) 1號)
[현 주소내 건물] 終審法院(종심법원 ; The Court of Final Appeal)
파리외방전교회가 1917년 세 번째 이전한 곳은 현재 Battery Path 1호에 있는 홍콩 종심법원(終審法院, The Court of Final Appeal) 건물이다. 1842년 지어진 이 건물은 초기에 홍콩 총독 Henry Pottinger경과 후임 총독들이 살았으며 홍콩 입법회의(Legislative Council) 초기 건물 중에 하나로 사용되었다. 몇차례 소유주가 바뀌고 파리외방전교회가 1917년 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기존 건물을 개축하였다. 지붕위로 돌출한 원형 지붕의 경당을 북서쪽에 짓고, 신고전주의 형태로 화강암과 붉은 벽돌로 3층을 건축하였다. 1953년 홍콩 정부에 되 팔아서 이제는 홍콩 종심법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종심법웝은 최고 항소법원을 말한다. 홍콩이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 된 이후 사법부의 경우는 기존 영국의 추밀원대신 종심법원을 구성, 최고 항소심을 담당하게 한다. 하지만 종심법원은 국가안전법에 대한 사안을 심리할 수 없어 홍콩 반환후 사법권의 독립이 어느 정도 지켜질 지 관심이다.
현재도 종심법원 건물 법관 출입문과 창문에는 1917년 파리외방전교회 건물이었음을 알리는 표지들이 있다.
(4) 네 번째 주소지(1953년∼1968년)
[주소] 1, May Road, Hong Kong(香港 梅道(매도) 1號)
[현 주소내 건물] THE MAYFAIR Apartment House
파리외방전교회가 네 번째로 옮긴 이곳은 앞의 세 곳이 홍콩섬 북쪽 번화가인데 비하여 산 중턱에 위치한 다소 한적한 곳이다. 1950년대 초인 것을 감안하면 무척 한적한 산 중턱으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Mayfair 아파트가 고층으로 한 채 서 있다.
(5) 다섯 번째 주소지(1968년∼1975년)
[주소] 139, Pokfulam Road, Hong Kong(香港 薄扶林道 139號)
[현 주소내 건물] Béthanie The Academy's Landmark Heritage Campus(演藝學院古蹟校園)
홍콩섬 남쪽에 위치한 Béthanie는 187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요양원으로서 건축한 역사적 건물이다. 당시 요양원으로서는 홍콩 최초의 건물이며, 여기에서는 선교회 신부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모든 신부들을 위해 열대성 질환(熱帶性疾患)을 치료해 주던 곳이다. 또한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머물고 생활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후에 1968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가 1975년까지 이곳에서 업무를 보았고, 홍콩이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 전환된 뒤 2003년 Béthanie와 주변 낙농장의 우사는 홍콩 ‘공연예술아카데미’(the Hong Kong Academy for Performing Arts)로 전환되고, 2006년에는 ‘영화 및 TV 아카데미’(the Academy's School of Film and Television)가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시설 외에 두 개의 공연장, 전시관, 경당 및 박물관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건물은 개축을 하여 박물관으로 변형되어 사용 중이니 개관 시간에 맞추어 입장할 수 있다.
(6) 여섯 번째 주소지(1975년∼현재)
[주소] 14, Mount Kellett Road, House B, Hongkong(香港 加列山道(가열산도), 14號 B座)
[현 주소내 건물]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 건물
홍콩에서 이전한 여섯 번째인 이곳은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로 사용중인 곳이다. 홍콩섬 정상(Hong Kong Peak) 쪽에 있는 고급 빌라 단지 내에 있다. 빌라 단지의 정문 수위실을 지나 우측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파리외방전교회 건물이 있다. 단지 정문 수위실에서 문의하면 된다.
현재 이곳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중국지부(대표부) 지부장(Superior) Bruno Lepeu(회장, 중국명 ; 龐樂培) 신부, 총무(Proculator) Emile Louise-Tisserand(총무, 중국명 ; 呂德能) 신부외 세분의 신부가 더 계시나 모두 외부에서 활동 중으로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있으며, 방문 중에는 총무 신부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홍콩 주소지에 대해 궁금하였는데 이번에 이를 확인할 기회를 가졌다. 자료 확인과정에서 도움주신 홍콩 한인성당의 오주현 라파엘, 배진옥 요안나님과 그곳을 방문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신 박상호 사도요한 신부님과, 홍정민 크리스티나 사무장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안내를 맡아 차량 편의를 제공해 준 제자 이지영, 도가구 내외의 수고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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