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반죽을 해서 바로 빵을 만들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해서 못 먹으며, 밭에서 방금 캔 감자는 바로 먹기에는 너무 독하며, 포도와 빵과 감자도 하루 정도 숙성을 시켜야 제 맛이 나는 것처럼, 중요한 결정도 하루정도 가라 앉혀야 본래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입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하십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울에 이어 다윗을 왕으로 정하신 후, 오랜 세월을 도망자로 살게 했습니다. 사울에게 추격당하고, 이방민족들과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익혔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의 시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절기 때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위해 기록한 시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은, 예루살렘 뿐입니다. 이 유일한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정해진 절기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을 묵상해 보면, 다윗은 수많은 예배자들로 가득 찬 예루살렘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신도 그 중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 예루살렘 성안에 가득 찬 기쁨과 영광의 자리에 참예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은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을 위해 평강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해 성도의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법궤가 안치된 “성막”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세운 성막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신 것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장막과 훗날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거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전인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림에 있어서, 습관적이거나,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예배드려서는 안 됩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생각과 삶의 중심을 맞추는 것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자세가 다윗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전인 교회를 사랑함으로, 언제 어디서나 항시, 형통한 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자고 제안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함께 가는 길이, 기쁨의 여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가 가까웠을 때, 다윗의 측근 중의 하나가 그를 찾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갈 것을 요청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말하라면, “너와 나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은, 만남과 선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치, 좋은 나무가 좋은 땅을 만날 때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아무리 좋아도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처럼, 좋은 만남을 통해 우리도 변화됩니다. 다윗은 측근으로부터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을 때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큰 즐거움을 여깁니다.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러 성전에 올라갈 때는 가족이 함께 가며, 이웃에게도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자”며, 서로에게 권하여 함께 올라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는 날은 명절이었고, 잔치였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건축한 “하나님의 성소”였으며, 다윗은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깊은 영적 교제를 이룰 수 있는 의미심장한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그곳에 올라가 함께 예배드리자는 말에 이토록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 속에서, 우리 역시, 성도로서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기뻐하는 기쁨은 여행가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맛볼 것을 기대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맛볼 것에 대한 기쁨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전국 곳곳에서 올라오는 순례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점차적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은 높은 시온산 꼭대기에 있었기에, 산에 나무가 없는 팔레스틴이었으므로, 사방 멀리에서도 잘 보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성전을 향한 설레임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 질 때 마다, 사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올라오는 더 많은 순례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처음보는 사이면서도 반갑게 “샬롬”하며,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얼굴에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대에 대해, 밝고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 세상의 어떤 위치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다는 것보다, 그에 앞서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과 감격을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 가운데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곡의 가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이 찬양의 가사 그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으로, 여러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까? 예배를 인생의 가장 큰 가치요, 기쁨으로 여기는 성도가 되심으로, 진정한 예배자로서 날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형통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라고 합니다. 예배의 필수는 감사이며,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을 향해 올라가는 분명한 목적을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을 찾는 자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 있는데, 이것이 “감사”임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전례대로”란 말은 “약속과 규례를 따라 이스라엘 중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전한 율법의 전례에 따라 성전으로 나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 주일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예배를 드려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닌,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진정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앞세운 예배가 올바른 예배이고, 올바른 예배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성경 속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볼 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감사와 순종과 찬양으로 나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성도된 우리 역시, 어떠한 순간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시 50: 23을 보시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목적에 대해, 어떤 이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까봐 드린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무입니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즐거움과 감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말은, “번성, 안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는 실패를 모르는 자로서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기독교의 고전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진정한 평안은 사람의 말에 의해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하지 않는다. 참된 평안은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만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만 마디 말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한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 14: 27을 보시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또, 평안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과 평안의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본문 앞의 7절을 보시면,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에는 평안이 있고, 궁중의 위정자들에게는 형통이 있으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평안이 흩어진 모든 백성들의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탄생이고, 새로운 출발이며 거듭남이며 영생입니다. 세상의 평안은 짧고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합니다.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평안이 교회와 가정과 우리 마음 속에 늘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시 128: 1 - 2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 평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은 언제나 예루살렘 중심의 삶을 살려고 애썼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졌고, 또, 이방에서 살았지만 절기 때가 되면, 저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중심과 또, 본문에서 보여진 다윗의 중심을 기억하여,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예루살렘인 예배당을 사랑하며, 예배당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과 형통으로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