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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사상자 - 460만명(전사자 310만명)
소련과 독일은 불가침이었는데 독일이 어기고 소련을
2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미국.영국 연합군과의 서부전선이 아니라 동부전선, 특별히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였습니다.
나치독일이 여기에서 패배함으로 패색이 짙어지게 된 것입니다.
2차대전 중 레닌그라드 공략에 실패한 나치 독일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하루를 200g의 빵으로 버티고 레닌그라드 포위는 900일 가까이 계속되었으며
우리는 모든 것을 겪었네. 레닌그라드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이 겨울에도 똑같이 불렸다.
그러나 때로는 헝그리 마켓이라고도 불렸다. (중략)
간간이 통통하고 홍조를 띈 부드럽지만 질긴 듯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소름끼쳐 했다.
모두 잡아먹힌 것이었다.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한 나이든 미술가가 자신의 애완용 고양이를 목졸라 죽여서 먹었다고 한다.
얼마 후 그는 목 매어 자살하려 했으나 줄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다리가 부러져서 얼어죽었다.
레닌그라드의 어린이들은 개나 고양이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자랐다. 그들은 그것이 말고기, 아니면 개고기나 고양이 고기라고 주장했다. "포위중 가장 어려웠을 때, 레닌그라드는 식인종들의 손아귀 아래 놓여있었다.
아파트 내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신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잡아먹은 경우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살고 있는 건물에서도 경비가 아내를 죽여서 그녀의 머리를 잘라 뜨거운 스토브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빵가게가 문을 열기를 한없이 줄서서 기다리던 여자들은 끔찍한 소문을 주고 받았다.
그녀들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그 다음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피스카레프스키, 세라피모프 등의 큰 묘지에서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하여 묘지를 파도록 전선에서 불려온 공병들이 대형 무덤에 시체를 쌓아넣으면서 몸 일부가 없는 시체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주로 지방이 많은 허벅지나 팔, 어깨의 살점이 없을 때가 많았다.
이 부위는 음식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시체손상을 금하거나 그 살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은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 중에는 인육을 먹는 자들의 동호회나 클럽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클럽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이 모여서 특별 잔치를 벌인다고 했다.
그들은 인간 지옥이 되어 버린 레닌그라드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고, 이는 그들을 극도로 괴롭혔다.
두 남자가 조용한 길에 들어섰다. 드미트리는 키 큰 남자를 쫓아 계단을 올라갔다. 식인종에 관한 이야기와 그들이 희생자들을 어떻게 꼬여내는지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키카 큰 남자는 매우 잘 먹고 지내는 것 처럼 보였다.
드미트리는 계속 계단을 올라가기는 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
조금만 위험한 기미가 보여도 도망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누군가,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나요, 산 채로 데려왔어" 하고 그 남자가 대꾸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문이 열리자 털이 많이 난 붉은 손과 찌푸린 얼굴이 보였다.
방에서는 기묘하고 따뜻하고 짙은 냄새가 풍겨왔다. 허연 고기 덩어리가 천장에 박힌 갈고리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얼핏 보았다.
그는 층계를 단숨에 뛰어내려갔으며, 추적자들보다 더 빨리 1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경군용 트럭의 빛이 보였다.
2명의 군인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건물로 서둘러 들어갔다.
얼마 후 두 군인이 다시 나타났다.
한 명은 큰 외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빵 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외투를 든 군인은 외투에 흠이 났다고 불평했다.
그것은 그가 발렌키(두꺼운 펠트 부츠)와 교환하려고 했던 600그램 되는 빵이었다.
군인들은 아파트 안에는 5구의 시체가 토막내어져 다리가 마치 돼지 족발처럼 매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다시 올라타고 라도가 호수로 가서 생존의 길에 합류했다.
1941 -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 개시 독일군은 이날부터 1944년 1월 18일까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채 공격을 계속했다. 육상은 물론 인접한 라도가(Ladoga)호수의 수상 통로도 완전히 차단해 모든 물자의 수송을 끊었다.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이다. 기아 및 포격전으로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생겼는데, 소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67만 명, 일설에는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였고 , 히틀러는 3개의 집단군 중 하나인 북부집단군에게 레닌그라드 점령 혹은 파괴를 지시했다. 독일과 소련 국경 부근에 배치된 소련군은 순식간에 패배했고, 독일군의 내습까지 완성된 방어 시설은 목재 장애물 190킬로미터, 철조망 635킬로미터, 대전차호 700킬로미터, 토치카 5,000개소, 참호 25,0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핀란드군은 9월 7일까지 레닌그라드 북쪽 160킬로미터까지 도달하였으나, 겨울 전쟁 이전 국경선을 넘어 전진하는 것은 멈추었다. 9월 4일 요들은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을 만나 레닌그라드에 대한 공격을 요청했으나, 만네르하임은 이를 거절했다.
그 뒤에도 독일군과 핀란드군과의 연계는 완성되지 않았다.
8월 30일 독일군은 네바 강에 도달하였고,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최후의 철도선을 차단시켰다. 9월 4일 시내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9월 8일 독일군은 라도가 호수에 도달하였고, 이윽고 라도가 호수 위를 통하는 경로를 제외한 모든 연결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같은 날 공습을 받아 시내 178개 장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독일군은 시가지에 대한 침공은 피하고 포위에 나섰고, 10월 7일 히틀러가 발령한 지령에는 일절 항복을 받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9월 2일 시민에 대한 식량 배급이 줄어들면서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600그램, 노동자는 400그램, 그밖에 시민과 아이는 300그램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9월 8일 공습을 받아 상당량의 곡물과 유지(乳脂), 설탕이 소실되었다.
9월 12일 식량의 남은 양은 아래와 같이 계산되었다.
기타 시민은 250그램으로 바뀌었다. 육군과 발트 함대는 비축분을 갖고 있었으나 충분하지 못했다.
라도가 호수에 배치된 함대는 장비도 충분치 못했고, 여러 차례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9월에는 곡물 수송선이 격침되었다. 수송선은 나중에 인양되었고, 배에서 발견된 부패한 곡물도 빵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소맥분을 전부 사용한 후에는 셀룰로오스와 톱밥, 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말의 사료용이었던 귀리도 식용으로 돌렸다. 육류도 떨어지자, 내장 및 가죽도 요리하였다. 시내의 빈 공터에는 양배추 등의 야채를 심었다.
10월 8일 도시의 북쪽에 있던 삼림에서 목재의 채벌이 계획되었으나, 기재도 작업 시설도 없어 10월 24일까지 목재 채벌 계획의 1%만이 실시되었다.
전력 공급도 부족해져, 전력 사용은 군 사령부 및 지역 위원회, 방공 거점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지되었다. 대부분의 공장이 작업을 중지하고, 11월에는 모든 공공 교통 기관이 통행을 정지했다. 1942년 봄에는 일부 노면 전차가 운행을 재개했으나, 트롤리버스와 버스는 종전까지 재개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였다.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비로프의 연구원 중 1명은 식용에 쓰일 수 있었던 20만 종의 식물 종자 수집품을 지키다가 아사했다.
레닌그라드 외곽에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희생자의 시체가 넘쳐났다. 이윽고 식료가 끊어진 도시에서는 사체에서 채집한 인육을 먹는 처참한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나타나 사람들은 이것을 먹었다.
그 후 트럭에 의한 수송도 가능하게 되었고, 얼음 위의 연결로를 “생명의 길”(러시아어:Дорога жизни)이라고 불렀다.
호수의 맞은편에서 시내로 물자가 운반되면서 시민의 탈출도 가능하게 되었다. 생명의 길은 1942년 4월 24일까지 152일간 이용되었다.
그 기간 동안 시민 514,000명과 부상한 병사 35,000명이 레닌그라드에서 탈출하였고, 중요한 산업 설비도 운반되었다.
생명의 길은 대공포와 전투기로 방어하였으나, 독일군의 포격과 공습으로 위협이 계속되어 위험은 지극히 높았다. 트럭 운전수들은 이곳을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렀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자, 생명의 길은 다시 열렸다.
12월 20일부터는 말의 왕래가 시작되었고, 4일 후에는 자동차를 이용한 수송도 시작되었다. 빙상 철도의 건설도 이루어졌다.
1월 18일 레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육상 루트가 확보되었다. 그 후에도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게 부분적으로 포위되어 폭격과 포격을 받았으나, 1944년 1월 소련군의 공세로 인해 독일군이 철수하자 포위는 완전히 풀렸다. 1944년 여름에는 핀란드군도 개전 시의 위치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레닌그라드의 저항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레닌그라드에 1945년 스탈린은 영웅도시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전후 소련 정부에 의한 공식 발표는 사망자 67만 명이라고 하였으나, 다른 연구에서는 사망자 70만 명에서 150만 명, 다수설로는 111만 명 정도라는 추산치가 나왔다. 희생자의 다수는 피스카료프 기념 묘지에 매장되었다.
시민들은 그때까지 레닌그라드가 문화 도시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포위 속에서 도서관의 장서 및 18세기 골동품 가구를 불태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어야 한다는 선택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편 레닌그라드가 900일 가까이 저항을 계속하였기에 “트로이도 함락되었고, 로마도 함락되었으나,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라는 것은 시민들의 새로운 자랑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레닌그라드 시내에는 독일군의 포격을 피하기 위해 설치된 표식이 수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corea8124&folder=27&list_id=11739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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