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오셨어요. 전 이 곳 저택의 주인인 마리 스코트 글라디스 백작 부인입니다. 영주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편안히 쉬다가 가세요."
온화한 표정의 노부인 글라디스 백작 부인은 접대실에서 베너 일행을 부드럽게 맞이 하였다. 먼저 와 있던 중년의 마법사 하킨은 로브를 벗어 놓은채 얼마남지 않은 머리숯과 덥수룩한 수염을 내놓은 채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베너에게 다가가 말했다.
"정말 좋으신 분 아니냐. 이분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또 노숙을 할뻔했다. 허허허."
베너도 그말에는 동감한 것 같았다. 베너는 방안을 둘러 보았다. 문 밖으로는 갑옷에 검을 든채 장식 해놓았고, 방 안에는 커다란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와 멋진 은색의 검이 놓여져 있었다. 베너는 그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것은... [실버 소드]아닙니까?"
노부인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예. 그 검은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보로서 은으로 코팅한것이 아닌 순 은에 특수 처리를 했다는 군요. 이미 성검(성스러운 검)으로 인정 받아 악령 퇴치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합니다."
베너는 그 검이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누크에게 어울리겠는 걸....'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는 다시 검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베너에게는 그 저택에 들어 올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결국 베너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노부인에게 말했다.
"밖에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던데...."
노부인은 그말을 듣자 안색이 바뀌면서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은... 하나 뿐인 제 딸의 장례식입니다. 어제 밤에...."
결국 노부인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하킨은 험악한 인상을 쓰면서 말없이 베너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베너도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다는 것을 아는지 무안해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사디언이 나섰다.
"상심이 크시겠군요. 글라디스 백작 부인. 그 불쌍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도 될런지요...."
베너는 최대한 느끼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말이 나이든 사람에게는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어찌 손님께...."
"우리를 손님이라고 생각진 말아주십시요. 자... 내려 가시지요."
그리고 사디언은 노부인을 에스코트하고는 먼저 내려갔다.
그 뒤를 베너가 따르면서 레이안에게 귀속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느끼한 짓은 골라서 잘 하는군."
'그래도 그덕분에 이상한 분위기는 피했잖아요.'
레이안이 그렇게 맞받아치자 베너도 더이상 할 말이 없는지 하킨의 무서운 시선을 받으며 재빨리 내려갔다.
저택 앞의 정원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사디언이 노부인을 에스코트하고 내려오자 사람들이 노부인께 인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여기는 은랑 기사이신 베너 드래이크님과 유니언 가드이신 사디언 하스메테님, 그리고 뒤쪽에는 왕국 마법사단에 계신 하킨 알드로 이시고 그 옆은 성직자이신 레이안 프레오 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서로 나와서 악수를 청하기 시작했다.
숙부에서부터 고모, 삼촌, 사촌에 처제까지 온갖 친척은 다 모여든 것 같았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젊은 미남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사한 결과 그들중 대부분은 친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중 금발의 깨끗한 이미지의 미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일라이자의 약혼자 였던 로이드 듀폰 입니다."
"상심이 크시겠군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디언이 그렇게 대답하자 로이드는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그녀는 사고 따위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분명한 살인입니다. 전... 반드시 그 범인을 잡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뒤에서 또 누군가가 다가왔다. 흑갈색의 머리칼에 차가운 눈매. 그리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 미남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가 베너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곳 영주의 아들인 크리스토퍼 리브입니다. 크리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아.... 영주의 아드님께서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크리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죽은 일라이자와 난 꽤 친분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스코트 글라디스 백작 부인은 상류 계급 사회에서 제법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라서 찾아온 겁니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도 거의다 백작 부인을 보러 왔거나 일라이자를 보러 온 것이겠죠. 그녀의 얼굴은 죽어서도 아름다우니.... 안그런가, 로이드?"
그렇게 말하며 살짝 비웃는 크리스에게 로이드는 살의가 담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부르르 떨다가 결국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베너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크리스에게 물었다.
"일라이자... 라는 여인이 그렇게 미인이었나 보군요."
크리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탄식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정숙한 여인. 일라이자.... 아름다운 여인. 일라이자.... 하지만...."
크리스는 도중에 말을 끊고 베너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한번 보면 알게 될거요."
그리고 크리스도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 베너는 아직 매장되어있지 않은 관으로 다가갔다. 매장은 저녁에 이루어지는데 그 전에는 관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어 상체만 보이도록 관을 반만 열어 놓고는 안치해놓았다.
베너는 살며시 관의 안쪽을 보았다.
"세상에...."
베너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감탄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백금발의 안개같은 머리결. 하얗고 투명한 피부. 조각해놓은 듯한 이목구비는 과연 엘프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이것이 진짜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시체라서 인지 차라리 아름다운 인형에 더욱 가까웠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베너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그 남자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난 이곳의 영주인 알레그로 리브 남작일세."
이 말은 좀 전에 인사했던 크리스토퍼 리브의 아버지라는 뜻. 그렇게 보니 과연 크리스와 이미지가 많이 닳았었다. 베너는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차리고는 다시 인사를 건넸다.
"전 은랑기사로서 임무를 받고 디.파스트 산으로 파견중인 베너 드래이크 라고 합니다."
리브 남작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런 자리에서 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네. 편안히 있게나."
그 말에 베너는 고개를 들고 옆으로 비켜났다. 리브 남작은 관으로 다가가 일라이자의 시채를 보며 말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이애는 정말 내 딸처럼 사랑했네."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매우 쓸쓸해 보였다.
저녁이 되어 관은 매장되고 1층은 제법 큰 연회를 벌였다. 그것은 장례식에게 어울리지 않은... 마치 파티와도 같이 모두들 웃고 떠들었다. 일라이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라고는 기껏해야 전 약혼자인 로이드 듀폰 말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미남자들은 연회에 있는 아가씨들을 유혹하기에 바빴고, 사디언 역시 그 일에 한 몫거들었다. 사디언은 제법 잘생긴 얼굴 덕에 다른 미남자들과의 경쟁을 뚫고 많은 아가씨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베너의 동료들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가벼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쨍그랑!"
사람들이 소리가 난 쪽을 쳐다 보았다. 그 곳에는 술에 취해 빨갛게 상기된 로이드 듀폰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살인마 자식! 내가 니 놈을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차가운 표정의 크리스토퍼 리브는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니 목이나 조심하시지. 혹시라도 오늘밤 더러운 창녀가 귀신이 되어 널 데리러 올 수도 있으니."
그러자 로이드는 분노를 참지 못해 크리스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로이드를 말리며 2층의 접대실로 데리고 올라가버렸다. 로이드는 올라가면서도 온갖 입에담지 못할 욕들을 내뱉으며 끌려가 듯 올라가버렸다.
연회장은 조용해졌다가 로이드가 사라지자 곧 다시 본래의 즐겁고 시끄러운 분위기로 돌아가버렸다. 크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 술을 마셨다. 로이드를 끌고간 사람들은 2층 접대실의 소파에 그를 눕혀 놓고 그 방에 불을 끈채 나왔다.
"제기랄.... 일라이자...."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혔다. 어두운 방안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는 그저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는 쌀쌀함을 느꼈다.
"창문이 열려 있나...."
그리고 그는 비틀거리며 베란다로 걸어나갔다. 순간 그의 눈에 비치는 사람의 형상. 그는 못믿겠다는 듯이 눈을 비비고는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자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일라이자.... 날 데리러 왔소...?"
1층의 연회실. 노부인이 베너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무래도 로이드가 걱정되는군요. 한번 2층 접대실에 올라가서 그를 살펴보고 와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글라디스 백작 부인."
시끄러운 분위기를 싫어하던 베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베너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이런... 조금 많이 마셨나...."
그리고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가볍게 때리고 다시 올라갔다. 접대실로 들어가는 문 근처에는 한 사람도 없이 고요했다.
베너가 접대실의 문을 당기자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로이드씨? 계십니까?"
"......."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나오질 않자 베너는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밑으로 내려가기 보다는 조용한 그곳에서 잠시 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문에 머리를 기댄 베너에게 문안 쪽에서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일... 라이자..."
순간 베너는 뭔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 것은 마치 마더구스 사건 때와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베너는 눈을 번쩍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으로 문을 향해 박으며 소리쳤다.
"로이드씨? 괜찮아요? 젠장!"
그는 문 옆에 장식 해놓은 갑옷에 검을 빼들어 검의 문고리를 향해 배리 찍었다. 그러자 문은 금속성의 파열음을 내며 벌컥 열리고 베너는 검을 든 채 문안으로 뛰어 들었다.
"로이드씨? 어디 계십...!"
베너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베란다에는 안개와도 같은 백금발을 지닌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 여인의 맞은편에는 핏기 없는 표정의 로이드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미 그의 눈빛에는 동공이 풀려있었다. 베너가 그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로이드씨...?"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베너를 향해 그녀가 뒤돌아보자 베너와 눈이 마주치고... 그리고 베너의 몸은 멈춰졌다. 그녀의 모습을 본 베너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에서 맴돌다가 겨우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세상에.... 일...라이자?"
백금발의 머리결. 하얗고 투명한 피부. 그리고 그 위에 뭍은 핏방울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붉은 루비빛 눈동자.... 아니, 피빛 눈동자라고 하는 것이 더욱 어울릴 것이었다.
베너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도망치려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잡고 있던 로이드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는베너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한걸음씩.... 한걸음씩....
베너의 몸은 완전히 경직되어서 고개조차 돌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녀가 베너 앞으로 다가왔다. 베너는 다만 식은 땀을 흘릴 뿐,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베너의 얼굴로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오는 그녀는 힘없이 웃고있었다. 아름다운 미소. 아름다운 악마의 미소였다. 갑자기 베너는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느끼는 편안함. 그녀의 손이 베너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자 베너는 순간적으로 쾌감과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베너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정확히는 베너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그리고 베너는 눈이 감기기 전에 보았다.
그녀의 살며시 벌어진 입술 속의 붉은 피가 뭍은 예리한 송곳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