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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19) 성물에 대한 집착, 괜찮은건가요
문 : 아는 자매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방안이 온통 성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매님과의 대화 내용도 거의 영적이고 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버럭 화를 내시면서 “왜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느냐”고 소리를 치십니다. 저는 그런 자매뿐만 아니라 그 방에 들어가면 몹시 답답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닐까요.
답 : 우리 가톨릭 교회에는 성물에 대한 신심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물건을 축복받고 몸에 지니고 다니면 주님과 성모님께서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요. 이런 믿음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은 워낙 변수가 많은데다 우리의 인지 능력으로는 앞날을 알 수 없어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불안감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늘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 이런 힘겨운 마음을 달래 주고 안정시켜 주는 것이 바로 성물입니다. 그래서 전쟁터의 군인들이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늘 작은 십자가나 묵주, 성모님의 성물들을 몸에 지녔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는 다릅니다. 우상숭배란 하느님과 성모님이 아닌 성물 그 물건 자체를 신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성물을 통해 주님과 성모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고 지키려고 하는 것은 참 신앙이지요.
그러나 과유불급. 이런 성물에 대한 신심이 지나친 분들이 계십니다. 집안뿐만 아니라 온몸에 성물을 달고 다니시는 분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물에 집착하는 분들은 심리적 불안이 심한 분들이십니다. 무속인들이 부적을 섬기듯이 성물을 자기를 보호해 줄 부적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성물이 갖는 힘, 성물의 심리적 안정 기능은 우리 교회 안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으며 가톨릭 신심 중의 하나로 정착됐지만, 어떤 일이건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듯이 그런 신심 행위 역시 지나치면 심리적 문제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대체로 그런 분들 가운데는 개인적인 트라우마나 깊은 두려움이 각인되는 경험을 하신 분이 많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이미 인간 역사 안에서 자연신을 모시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섬기는 신의 이미지가 ‘공포의 대상’이란 것입니다. 주님처럼 죄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육화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전제군주처럼 군림하고 공포로 통치하는 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심을 가진 사람들을 ‘심리적 우상숭배자’라고 합니다. 실재하신 하느님이 아닌 마음의 문제가 만들어 낸 허상, 그것도 공포의 허상을 신처럼 섬긴다는 것이지요. 이런 분들은 외관상 엄청나게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주님과의 행복한 만남의 시간이 아니라 노여움에 사무친 신을 달래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할수록 심리적인 문제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어떤 가정의 가장이 아무 이유 없이 분노하면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까요? 아무 이유 없이 두려움에 떨면서 포악한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온갖 것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부모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진 아이들이 과연 성장하면서 정상적인 어른으로 클 수 있을까요? 여러 상담 사례를 보아도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위축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눈치꾸러기로 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욱이 그런 아버지에 대해 자기 마음을 말하라고 하면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등의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심리적 왜곡이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어 생긴 현상이지요.
따라서 그렇게 성물에 대한 집착, 성물이 없으면 허전한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불안감을 느끼는 분들은 그런 마음을 마귀 탓으로 돌리지 마시고, 심리 치료 특히 불안감에 대한 치료를 받으실 것을 권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시는 분이심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18) 성스러운 삶과 건강한 삶
문 : 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입니다. 대모님은 아주 조용하시고 늘 성당에서 기도하시고 봉사활동을 하셔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 대모님으로 모셨는데, 날이 갈수록 대모님과 사사건건 갈등이 생깁니다. 저는 성격이 외향적이고 놀기를 좋아해서 친구들과 맛집도 찾아다니고 좋은 영화와 연극이 있으면 보러 다닙니다. 대모님께서는 그런 저에게 세속적이라고 일침을 가하시더군요. 그 말씀에 제 마음이 찔려서 온종일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데 너무 마음이 답답해 결국 오래 하지 못하고 포기했습니다. 대모님은 다시 저에게 마귀가 들려서 그렇다고 하셔서 마음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또 제가 마음이 심란하다고 하면 마귀가 들렸다고 하십니다. 정말 마귀가 들린 건지요.
답 : 신앙적인 면이건 일상적인 면에서건 사람의 정신적인 건강성에 대한 판단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가 그리고 자신도 편안한가 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신은 불편하다면 ‘병적인 콤플렉스’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은 편안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면 ‘성격 장애’, 자기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들도 불편하게 한다면 ‘신경증 장애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모님이 자매님의 삶을 세속적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치게 영적으로 민감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적 신경증 증세’라고도 말하는데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과 세속을 구분하는 데 지나친 민감성을 보입니다. 기도와 성당에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해선 세속적이라고 단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행사할 때도 늘 못마땅하게 불평을 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문화나 예술에 대해서도 경직되고 폐쇄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본인들은 신앙이라고 확신할지 모르나 자칫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보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 상태가 분열증 초기일지도 모르니 조심할 일입니다.
또한, 이런 성향의 분들은 ‘종교적 자폐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흔히 ‘방주 콤플렉스’라는 증상인데 자신이 경험한 세상, 자신이 깨달은 것이 절대적이고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얼핏 보기에 신념과 신앙심이 대단한 분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생각에 도취하고 자기가 만든 신앙에 빠진 심리적 우상숭배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의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섬기고 성경의 말씀을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인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누이 강조한 바 있지만, 인간 삶의 영역은 영적인 영역과 정신적인 영역 그리고 육체적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 세 가지 영역이 균형을 이룰 때 그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만 빠져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영적인 세계에만 몰입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사람은 마음이 늘 하느님만 향할 수는 없고 또 그분께 대한 믿음을 늘 견고하게 유지할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원래 반듯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면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줍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욕망에 충실하고 약간은 흐트러짐이 있을 때 가장 사람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흔히 지진에 대비해 건물을 짓는 것에 비유되지요. 지진이 심한 곳에서는 건물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짓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내진 설계는 약간 흔들리게 짓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의 허술함이나 흔들림이 있어야 오히려 신앙인의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가끔 빈틈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분들을 대하면 숨이 막힐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이 아닌 로봇 같아서 말이지요. 완전함을 지향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삶을 사는 것도, 흐트러짐이 없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완전한 삶’이란 자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삶이라고 한 성인들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16) 말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문 : 작은 단체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최근 단체원들 간에 작은 말다툼이 화근이 돼 문제가 생겼습니다. 심지어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도 생겼고요. 제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말인데 왜 그렇게 민감한지 모르겠습니다.
답 : 자매님의 생각과 달리 말은 별것 아닌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상담가들은 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 갇힌 살인범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6초 이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감정이 상하는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욱하는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단지 6초밖에 안 걸린다는 것입니다.
말은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데 왜 그런 참혹한 결과를 불러오는가? 사람이 감정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마음에 여러 가지 상처와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아프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상처를 누군가가 건드리면 죽이고 싶도록 화가 나고 미워합니다. 바로 그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 비아냥거리거나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말들입니다. 그래서 말을 ‘보이지 않는 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말이 가진 위력이 무시무시하기에 말을 할 때는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옛말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한 아주머니가 버스를 탔는데 차가 갈 생각을 하지 않자 기사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아저씨 이 똥차 언제가요?” 그러자 기사가 넌지시 돌아보더니 “똥이 다 차야 갑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졸지에 똥이 돼버린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내리면서 일갈을 했습니다. “아저씨 같은 사람은 평생 버스나 몰아요.” 그러자 기사가 넌지시 그러더랍니다. “그래요. 아주머니도 평생 버스나 타고 다니세요.”
상담에서 말은 사람을 살리는 아주 중요한 수단입니다. 어떤 상담가에게 중년 남성이 찾아와서 덕분에 자기 인생이 살아났다고 고마워하더랍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 중년 남성이 자신이 청소년감호소에 있을 때 상담 시간에 해준 말 한마디가 자기 인생을 바꾸어줬다고 했습니다. 상담가가 그에게 “공부 잘하게 생겼는데 왜 이런 데 있는 거야”라고 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칭찬이라곤 들어본 적이 없던 그는 그 말을 듣고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는 것이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나온 적도 있지만, 상대방의 장점을 알아주는 칭찬, 잘되기를 바라는 덕담은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가치 있는 선행 중의 하나입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지혜와 심리적 상태를 알게 해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본당 사목을 하는 젊은 신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신부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본당에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어떤 본당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본당 신부가 하는 말의 내용이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한 젊은 신부가 미사 중에 떠드는 아이를 보고 야단을 쳤습니다. “아니 생기긴 영화배우처럼 생긴 놈이 왜 떠드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야단을 맞은 것은 기억이 안 나고 자기를 영화배우처럼 생겼다고 해준 말만 기억합니다. 젊은 신부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혜로운 말을 하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쥐잡듯이 야단만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야박하게 신자들을 다루는 사람들은 대개 열등감이 많거나 상처가 많은 사람이란 것이 심리 치료계의 정설입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농담과 유머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옳고 바른 내용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상하게 하는 칼 같은 말을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뽑을 때 유머지수 즉,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말을 얼마나 잘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말이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14) 혼란스러운 마음
문 : 저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마음이 심하게 혼란해지고 기도 드리는 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기도한다는 것이 왠지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성당에 가게 되질 않습니다. 성당은 마음이 정리된 후 가야 할 곳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이 옳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교리를 공부하면서 의문이 생기는 것도 고민입니다. 대모님은 아무 의심 없이 믿으라고 하시는데 전 의심이 많아 견진성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고민입니다.
답 : 많은 교우분이 자매님과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마주치는 혼란스러움을 말씀드리지요. 살다 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머릿속은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때로는 사람이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한 정서의 원인은 무엇인가. 믿음이 약해서 생긴 것인가. 아니면 악의 유혹인가. 심리 치료에서는 이것을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합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기 위한 과정이란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놓이면 내가 미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겠지만 이런 두려움은 당연합니다. 단지 이러한 생각에 발목을 잡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자칫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고통스럽게 기도를 하신 주님처럼 십자가와 성모님 앞에서 내 두려움을 털어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 안의 온갖 감정의 불편함을 고백하다 보면 심리적 안정감이 오고 회복도 빨라질 것입니다.
교리에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합니다. 간혹 신앙인이 의심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분들이 계신데, 사람의 마음은 그리 성숙하지도 강하지도 않기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당신 삶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의심 사이의 갈등이었다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더하겠지요.
의문을 갖는 것은 성숙한 신앙을 위한 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입증한 분이 아우구스티노 주교 성인이십니다. 성인께서는 마니교에 빠졌다가 끊임없는 의문과 물음을 통해 마니교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묻고 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각하는 신앙인이셨습니다. 물론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삶을 믿는 신앙생활은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적인 삶을 강조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심리적 균형을 깨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믿음에 제동을 거는 이성이 필요하고 의문과 물음이 필요합니다.
독자 여러분을 위해 작은 유머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떤 신부가 밤새 기도하다 마음에 믿음이 북받쳐 들떴습니다. 신부는 신자들을 모아놓고 “여러분, 주님께서는 믿음만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면서 강한 믿음을 가지라고 열띤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산은 말고 성당 마당의 저 돌덩어리를 믿음으로 옮겨 주시면 저희도 믿음을 갖겠습니다”고 했지요. 신부는 바로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돌만 옮겨 주신다면 제가 무엇이든 다하겠습니다.”
절절한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돌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실망하고 돌아가는 신자들을 보면서 망연자실해진 신부가 성당 안에 들어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산도 아니고 작은 돌덩어리 하나 옮겨 달라는데 그것 하나 해 주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신부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시면서 “돌은 옮겨서 뭐하게? 넌 왜 쓸데없는 데 믿음을 쓰려고 하느냐? 이놈아! 그리고 내가 네 부하냐? 너는 매일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기도할 때면 늘 나를 종 부리듯 하더라, 괘씸한 놈!”이라고 하셨답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12) 왜 성당에 나가는가
문 : 신자가 아닌 사람입니다. 제 친구 중에는 성당에 다니는 이들이 많은데 저는 아직도 성당에 나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일요일만 되면 뭐가 그리 좋은지 성당에 다 가고 저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성당에 가면 뭐가 그리 좋은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성당에 나가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 : 성당에 다니면 행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사람에게 중독되도록 돼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대화를 나누고 함께 노는 시간에 사람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아무리 큰 고민을 한 사람일지라도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면 심리적 신체적 회복이 상당했다는 것이지요.
성당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거대한 치유의 장’입니다. 일반적인 모임과는 차원이 다른 만남의 장입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다니는 것들은 매일 놀러 다닌다”고 힐난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야외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성당에서의 생활은 놀고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생활인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지요.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는 동시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즐겁지만 의미가 없으면 그 즐거움은 공허함을 줄 뿐이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당은 인간의 존재 의미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곳입니다. 인간의 행복,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하러 다닙니다. 어렵게 사는 분들의 집을 방문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날개 없는 천사 같은 분을 정말 많이 보았고, 그래서 우리 교회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깊어졌습니다. 상담소를 찾는 분 중에는 삶의 무의미함을 하소연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무의미’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허전하고 우울하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공한 것과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지요. 사회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이룬 어떤 분은 초창기에는 서로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서로 간에 정이 깊었는데, 성공을 이뤄가면서 서로에 대한 의심이 커져 대화가 안 되고 거리감만 느껴지는 것이 외롭고 참담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의미 없는 성공은 우울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미 있는 성공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삶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행복입니다. 사람들을 만나 얻는 기쁨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영적인 행복감입니다. 영적인 행복은 기도 안에서 얻어지며, 일상적인 차원이 아닌 영적인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행복감은 사람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수많은 사람이 겪는 우울증이나 불안증들이 어쩌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내적인 자유로움을 주는 것이 영적인 행복감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우리 교회 안에서 열심인 사람 중 영적 체험을 통한 행복감을 맛본 분들은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사막으로 산으로 하느님과의 만남만을 지향하는 삶을 가지려고 떠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가정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기도를 통해 영적인 행복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피정이란 시간을 통해 그런 행복감을 제공해 주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