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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하느님, 자연, 인간] 공동의 집 지구에서 지금 무슨 일들이
지난해 인상적으로 본 영화 가운데 ‘인터스텔라’가 있다. 영화의 배경인 미래 지구, 주곡인 ‘밀’은 멸종되어 인류는 옥수수에 의존해 사는 심각한 식량 부족 시대이고, 땅은 죽어 시시때때로 거대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써야만 하고 흉작은 해마다 반복되며 아이들은 폐병으로 시들어간다.
영화는 말한다. “보물처럼 소중한 이 세상이 우리에게 떠나라고 하지.” 이 영화는 고도 산업화 이후 땅이 갈라지고 물이 부족하며 단작(單作)으로 다양한 생물종들이 죽어가는 인류의 심각한 생태계 위기를 보여주는 묵시록이었다.
보물처럼 소중한 이 세상이 이제 우리 인간을 내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처럼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아프게 하고 잘못 다룬 적은 일찍이 없었노라고 말한다. 지구 생태계의 심각한 훼손은 이제 ‘사실’이다. 도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교황이 말하는 생태 위기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지구 생태의 위기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오염과 기후변화(「찬미받으소서」, 20-26항, 이하 「찬미받으소서」 생략), 둘째, 물 문제(27-31항), 셋째, 생물 다양성의 감소(32-42항), 넷째, 인간의 문제들(43-52항)이다.
이러한 인류와 지구의 변화와 생태계 위기의 근간에는 ‘신속화’의 문제가 있다. 인간이 발전해 온 속도가 자연의 느린 생물학적 진화 속도에 비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빠름과 지속적인 변화가 공동선이나 온전하고 지속가능한 인간 계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의 해마다 기후변화로 자연재해가 지구 곳곳을 덮치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후쿠시마 인근 태평양에서 강진이 발생했고, 40분 뒤 15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육지를 덮쳐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2013년 11월 필리핀을 덮친 슈퍼 태풍 하이옌으로 7,89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올해 4월과 5월 진도 7.8의 대지진으로 네팔 전역의 집과 건물이 무너지며 9천여 명이 죽었다. 미국 뉴스 전문 채널의 방송 CNN은 “삶들과 역사가 무너져 내렸다.”고 탄식했다. 이 모든 자연재해의 원인은 인류의 공공재인 ‘기후’ 변화 때문이다.
“많은 과학적 연구는 최근 수십 년간의 지구 온난화가, 대부분 인간 활동의 결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 곧 이산화탄소, 메탄, 산화질소와 같은 화학물질들의 농도가 매우 짙어졌기 때문에 주로 발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23항).
2013년 지구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400ppm을 넘어섰다. 지난 65만 년 동안 300ppm을 넘어선 적이 없던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이렇게 올라간 것이다. 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실가스의 농도 증가로 ‘기후 변화’라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온실가스 배출 상위 10개국은 중국,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 독일, 한국, 캐나다, 이란, 영국 순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부터 10년 동안 이산화탄소가 146% 증가했다).
기후 변화는 다만 더워지는 날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수면 상승, 홍수와 가뭄, 식량 위기, 물 부족과 같은 인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기후 변화’가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도전과제이며. 수십 년 안에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고, 그 피해자는 대부분 가난한 이들이 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25항 참조).
생명 유지를 위한 물 문제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물’이다. 따라서 깨끗한 식수는 생존에 가장 중요한 문제다. 오늘날 물 부족 현상은 특히 아프리카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은 안전한 식수를 확보하지 못하거나, 농산물 생산이 어려울 정도의 일상적 가뭄에 고통 받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난한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물의 질이다. 날마다 많은 이가 수질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수인성 질병과 더불어 미생물과 화학물질이 일으키는 질병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이 많고, 이질과 콜레라로 많은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적절한 규제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특정한 광업, 산업 활동으로 배출되는 오염물질이 땅으로 흘러들어 지하수가 오염되고, 세계 곳곳에서 사용하는 합성세제와 화학제품이 강과 호수와 바다로 흘러든다. 다국적 대기업들은 물을 사유하려 하고 있다. 만일 다국적 기업들이 물을 통제한다면 분명 21세기의 커다란 분쟁 요소가 될 것이다(28, 29항 참조).
생물 다양성의 감소
인간의 근시안적인 경제와 상업, 그리고 생산 활동으로 자원이 착취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숲과 삼림지대의 파괴와 훼손은 생물종들의 죽음과 급격한 감소로 이어진다. 근시안적 생물에 대한 착취는 생물종을 인간이 활용 가능한 단순한 ‘잠재적 자원’으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근시안적 관점은 고속도로, 재식농업(플랜테이션), 특정 지역에 대한 울타리, 댐 건설 등과 같은 개발행위로 자연 서식지를 파괴하고, 동식물들이 더 이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게 만든다(35항 참조). 그 결과 많은 생물 종들이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또한 4대강 사업으로 지금도 강 생태계와 물고기들이 죽어가고, 올해는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사업의 추진이 결정되어 산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설악산은 산양을 비롯한 수많은 멸종 위기 생물의 보금자리이다. 이제 케이블카가 설치되면 멸종 위기 동식물의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습지대가 경작지로 바뀌면서 발생하는 엄청난 생물 다양성의 상실(맹그로브 습지 파괴), 바다와 대양에 사는 해양식물의 무절제한 포획, 열대와 아열대 바다의 산호초 파괴로 물고기와 갑각류 등의 죽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인간 환경에 결정적 피해
인간 또한 생명권과 행복권을 누리는 피조물이며, 고유한 존엄성을 지닌 종이다. 환경 훼손과 잘못된 개발, 버리는 문화가 인간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연환경의 악화로 가장 가난한 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물고기 개체 수의 감소는 다른 생계 수단이 마땅치 않은 영세 어민들에게 특히 어려움을 주게 됩니다. 수질 오염은 특히 생수를 사먹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해수면 상승은 주로 해안 주변에 사는 달리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48항).
자연환경 훼손과 변화로 인간 환경에 결정적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수십 억 명에 이른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 대한 ‘다른 이들의 소외’이다. 같은 어머니 지구에서 살아가며 생태, 경제적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대부분을 우리는 ‘부가적’으로 생각하며, 거의 마지못해 대하며 쳐다보고 있다. 생태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사회경제적으로도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우리는 지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며,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또한 외면하고 있다.
생태 위기의 원인
이제껏 살펴본 지구의 생태 위기에 대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 단어로 말하자면 ‘시장’이다.
“이익 증대를 목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는 이 체제 안에서, 절대 규칙이 되어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56항).
창조주 하느님의 자리에 놓인 절대자 ‘시장’은 경제와 기술의 동맹으로 만들어졌고, 이들의 즉각적인 이익과 무관한 모든 것은 배제되고 죽게 된다. 이 체제는 투기와 경제적 수익 추구를 앞세우는 체제이며, 시장에 의해 강요되고 주입된 ‘나쁜 소비습관’(환경오염과 교통, 쓰레기 처리, 자원 손실, 삶의 질과 관련된 문제들에는 관심없는 습관)으로 더욱 강화된다(50, 54, 55항 참조).
새로운 신, 시장의 신봉자들에게 ‘분배’는 그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보편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소수를 위한 소수의 소유와 권리, 이것이 시장의 사도신경(Credo)이다. 더 암울한 것은 소수가 만든 시장의 권력에 맞서는 문화 또한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대안의 길을 찾아나서거나, 후손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지도력이 부족하며, 생태계를 보존하고자 하는 법적 틀 또한 시장의 수하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대안은 있다. 일부 나라에서 환경 개선의 좋은 본보기가 나오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오염되었던 강을 정화하고, 원시림을 복구하며,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 생산과 대중교통의 개선에 진전을 이루었다(58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본보기가 “모든 이가 여전히 긍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의 모든 약점에도 우리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관대함과 연대와 배려에서 나오는 행동이 샘솟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58항 참조).
과학적 맹신과 생태 중심적 맹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모든 창조물들을 보살펴야 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 중용(그리스도교 인간 중심주의)을 취한다면 해결 방법은 분명히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현재 불균형의 영향을 줄이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하는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161항).
일상적으로 행동하기
작은 일상적 행동으로 피조물 보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고결한 일이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 물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관대하고 품위 있는 창의력에 속하는 것입니다”(211항).
쉽다. 일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실천들이기에 희망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행동들이야말로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관대하고 품위 있는 창의력”이라며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 일상의 행동이 사회에 선을 퍼뜨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실을 가져올 것이다(212항 참조). 민들레 홀씨 같은 희망의 퍼짐이다.
일상적 행동과 함께 세계적 관점에서 ‘공동 계획을 가진 하나의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164항 참조). 공동계획을 통해, 기후 변화를 위한 졸속하고 안이한 해결책인 ‘탄소 배출권’ 거래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세계 공동재’(특정 국가나 개인이 독점할 수 없는 자연 자원) 전체를 다루는 ‘통치 제도’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174항 참조).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거대 자료(Big data)’ 시대, 탈 근대화 소비의 이미지 시대, 매체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집착적인 소비주의를 벗어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현명한 삶을 배우고, 깊이 생각하며, 넉넉히 사랑하는 방법을 너무도 빨리 잊었다. 정보의 소음 속에서 자기 성찰과 대화, 사람과 편견 없는 만남, 그리고 그 결실인 참된 지혜를 잃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은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삶의 방식을 전해준다(222항 참조). 곧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확신이다.
적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능력, 바로 검소함이다. 검소함 속에 생태계 보호와 공동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적 평화’를 이루고, ‘사랑의 언어’인 자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수행의 방식이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우리가 사랑의 작은 길을 가고, 평화와 우정의 씨앗을 뿌리는 친절한 말, 미소, 모든 작은 몸짓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권유합니다. 또한 온전한 생태계는 폭력, 착취,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단순한 일상행위로 이루어집니다”(230항).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는 세상은 ‘생태문명의 세상’이다. 생태문명은 ‘사랑의 문명’이며, ‘돌봄의 문명’이다. 이제 우리의 일상 속 생태적 몸짓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가고, 돌봄의 문화가 온 세상에 스며들도록 하자.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생태 문명 세상을 위해, 일어나 걸어가자(마태 9,5 참조).
[경향 돋보기 - 하느님, 자연, 인간]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환경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알려져 있으며 환경다큐멘터리 진행자이자 박물학자인 데이비드 에튼버러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내용도 더없이 좋았지만 그중 에튼버러의 질문에 대해 오바마가 밝힌 입장이 마음에 와 닿았다. 환경이 파괴된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놓고 10년쯤 지나니까 다시 자연이 회복되더라는 것이다. 자연의 회복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뜻이겠다. 오바마는 국가 정책 입안자로서 거시적 차원에서 환경문제를 바라보았고, 환경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힘이나 몇몇 단체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을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음을 알려주었다.
환경문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그렇게 얻은 메시지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제 소개하려는 두 편의 영화는 언뜻 환경영화처럼 보이지 않지만, 영화에 함축된 의미를 꼼꼼히 챙겨보면 환경문제에 관해 소중한 암시를 얻어낼 수 있다.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마루 밑 아리에티’(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애니메이션, 일본, 2010년, 94분)는 2010년 여름 일본에서 대단한 흥행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단순히 상상력으로 건설한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기억에 남을만한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의 깊이가 더해졌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영국 출신의 작가 메리 노튼의 소설 The Borrowers(빌리는 이들)를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도 심각한 주제를 찾아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향으로 재탄생해 생각할 거리를 듬뿍 전달받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자체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소인(小人)족의 생활에 대한 세부적 설명이라든가, 그들이 인간세계로 넘나들 때 겪는 규모 차이의 묘사라든가, 첫 장면에서 끔찍할 정도로 광포했던 고양이가 아리에티의 다정한 길잡이로 바뀌는 설정 등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표현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역시 하야오의 혼이 깃든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그의 조수 역할을 했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하다는데 앞으로 기억해 둘만한 이름이다.
어린이들은 곧잘 상상의 세계에 빠져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다. 이를테면 ‘마루 밑에 무엇인가 작은 게 살고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발전시키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마루 밑에서 뛰어다니는 작은 사람들을 실제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어른들은 ‘난감한 녀석!’이라며 고개를 흔들 테고, 어떤 어른들은 ‘네가 본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어느 쪽일지 모르겠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훌륭한 우화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실벵 쇼메 감독, 극영화 · 코미디, 프랑스, 2013년, 107분)도 ‘마루 밑 아리에티’에 못지않은 특이한 영화, 곧 아주 별난 프랑스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 묘사와 변화무쌍한 화면들의 이어붙임이 눈과 귀를 얼마나 즐겁게 만드는지 모른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프루스트는 그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과연 우리의 기억은 우리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만들 수 있는가? 영화에 따르면,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독약이나 진정제를 먹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주인공 폴(귀욤 고믹스)은 한심한 남자다. 서른세 살의 노총각에 이모들과 같은 집에 살고,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려는 목적에 열심히 연습하지만 준우승만 한 두 차례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이모들의 댄스 교실에서 재미없는 반주나 해주는 처지다. 그의 삶 가운데 가장 대책 없는 부분은 입을 도통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 때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그의 말문을 막아버린 까닭이다.
그렇다면 폴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는 게 과연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심리학자들은 괜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내다가 자칫 상처를 건드려 심각한 외상 장애를 입게 될지 걱정한다. 또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모들의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벵 쇼메 감독은 모든 우려를 거슬러 단언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억을 회복해야 하고, 왜 오늘의 내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만일 겁이 나서 지금 이대로 덮어두고 산다면 오늘의 나는 공허한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 환경영화인가
앞에서 두 영화가 환경영화의 범주에 드는지 선뜻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가 지닌 함축성을 간과해서 나온 말일 뿐이다. 실제로 ‘마루 밑 아리에티’의 경우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에서 인간들 사이에 숨어사는 소인들의 생활방식을 아기자기한 만화언어로 보여준다는 면을 강조했다. 그리고 영국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사실도 곁다리로 알려주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폴의 인생을 프루스트의 사상으로 풀어낸 것도 가상하고, 인간심리의 원초적인 차원을 건드린 것도 상업영화로는 쉽지 않았을 텐데 아주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다는 점을 높이 샀다. 또한 두 영화 모두 환경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처음에 아리에티가 정원에서 월계수 잎사귀를 따다가 자기 방에 가져오는 장면이 나온다. 아리에티의 방은 꽃과 잎사귀들이 이미 들어차 있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정원을 유지하고 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프루스트 부인(앤르니)이 자신의 아파트에 꾸며놓은 정원과 흡사한 설정이다. 그곳 개인의 은밀한 정원에서 이 두 사람은 온갖 필수품을 공급받는다. 아리에티의 엄마는 월계수 잎사귀 한 장을 손에 들고 방을 나가며 이 정도면 일 년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기까지 한다. 자연의 생산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다음으로 아리에티와 프루스트는 자연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프루스트 부인은 아파트의 개인정원에서 온갖 약초를 제조하여 사람들의 치료에 사용한다, 최소한의 대가를 받으면서. 말하자면, 그녀의 안식처이자 연구실인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원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연이 제공하는 치유를 맛보게 해준다. 또한 얼마나 은밀하게 정원을 관리했던지 아파트 관리인은 부인이 죽은 뒤 집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정도였다.
아리에티 가족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물건을 빌린다(사실 훔친다는 표현이 맞다). 하지만 꼭 필요한 만큼만 빌린다. 그 과정은 언제나 아슬아슬해 일촉즉발의 위기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들 소인족이 깊숙이 숨어있으면서 물건을 빌리는 이유는 바로 인간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대도시는 소인족이 사는 곳을 진즉에 빼앗아 그들을 한적한 시골로 내몰고, 이제는 시골까지 찾아와 인간 문명을 퍼뜨린다. 소인족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작은 정원뿐인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참혹한 현실은 아리에티와 심장이 약한 소년 쇼우의 만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소년은 공기가 오염되고 환경이 열악한 도시에서 살지 못하고 시골에 요양을 와 있다. 채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소녀와 며칠 뒤에 있을 심장병 수술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14세 소년이 풀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달려들려는 고양이를 열심히 제지하는 중이다.
소년은 소녀에게 예언한다.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수많은 존재가 이미 멸종되었고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는 67억의 인간은 마침내 ‘소인’ 종족마저 멸망시키고 말 것이다. 소년의 말대로 몇 명 남지 않은 소인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의 당연한 예측을 온몸으로 항변한다, 자기 종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또한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라도 쓸 것이라고, 그러니 소년이 반드시 소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다시 자연이 되려면
이 장면이 던져주는 메시지에 필자는 완전히 정신을 뺏기고 말았다. 67억에 달하는 인간은 그저 자신들이 쾌적하게 살려고 자연을 유린하고 파괴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에게 겨누었던 칼은 결국 방향을 돌려 인간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의 내부 저 아래쪽 마루 밑에 살고 있는 소녀 아리에티를 겨냥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인족의 멸종은 곧 인간 자신의 멸종인 셈이다. 만일 인간 소년 쇼우가 소인 소녀 아리에티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인간도 스스로 파괴되고 말 것이다.
쇼우는 아리에티의 가족을 돌보아 주었고, 그들은 무사히 위험에서 빠져나간다. 아리에티는 쇼우와 작별하면서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며 담장 위에 올라서서 자기 몸보다 더 큰 쇼우의 검지를 껴안는다. 그리고 아리에티가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남기며 담장 밑으로 훌쩍 뛰어내릴 때 눈물이 공중으로 잠시 흩날린다.
실개천에 주전자를 타고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는 아리에티의 가족 옆으로 큰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이를 두고 북극 바다 한복판에서 향유고래를 만나는 감동에 비길 수 있을까?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음.” 쇼우와 아리에티의 만남처럼 폴과 프루스트 부인의 만남도 우연히 이루어진다. 어느 날인가 폴의 책상에 쪽지가 놓여있다. 말이 좋아 책상이지 죽은 엄마 사진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모빌 아래 어린 시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괴상한 책상이다. 뒤집어 말해 폴의 책상은 무엇인가에 가로 막혀있던 기억을 되살리고자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해 보는 공간인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은 매 번 헛수고에 머물렀지만 말이다.
폴의 엄마는 과연 어디 있을까? 대답은 간단한데, 폴의 저 깊은 기억 속 어딘가에 어머니가 숨어있었다. 사실 그곳에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있고 심지어 비극적인 부모의 죽음까지 들어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곳까지 찾아가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폐 청년 폴에게 마담 프루스트의 등장은 축복이다. 그녀가 자신의 정원에서 딴 약초로 특별하게 제조한 차를 한 잔 얻어 마신 뒤 폴은 과거로 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매번 부인을 찾아갈 때마다 폴은 점점 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가까워지고 마침내 한 장면을 기억해 낸다. 거대한 그랜드 캐니언 벽화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더니 온 인상을 찌푸리며 폴에게 큰소리를 내질렀다. 당시 폴은 겨우 유모차에 실려 있던 아기 신세였는데 말이다. 그 잔인했던 기억 이후, 폴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프루스트 부인은 아파트에 불법으로 정원을 가꾸며 사람들에게 정체불명의 약초를 제공해 생계를 유지하는 자유분방한 여인이다. 어느 날 시내 공원 한복판에 심긴 나무 한 그루를 지키려고 그 나무에 자신을 묶기까지 하는데, 그녀가 얼마나 자연 친화적인 사람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무 한 그루를 지키는 게 곧 지구를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목숨을 건 것이다. 부인이 죽기 전에 폴에게 던지는 충고는 간단하다. “네 인생을 살거라!(Vis ta vie!)” 프루스트 부인은 폴이 진실과 대면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로써 영화에서 주어진 그녀의 임무를 다하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정원에서 얻는 지혜는 폴을 통해 건강하게 이어지리라. 감독의 용기 있는 선언에 한 표를 추가한다!
인간은 자신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만 자연은 더 큰 생명력으로 인간을 감싸 안아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할 기회를 준다. 문제는 그 사실을 깨달아 인간이 자연을 다시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만일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인류는 조만간 멸망할 테고, 백만 년쯤 뒤에 다시 한 번 바다에서 생명이 시작될 것이다. 인류가 그만큼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여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리는 시절이 도래한 셈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마태 3,10)
환경에 관한 영화 세 편을 더 소개한다. ‘와일드’(장 마크 발레 감독, 극영화, 미국, 2014년, 119분)와 ‘러브 인 아프리카’(카롤리네 링크 감독, 극영화, 독일, 2001년, 140분)와 ‘원령공주’(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 일본, 1997년, 135분)인데 틀림없이 소중한 메시지를 얻을 것이다.
[경향 돋보기 - 하느님, 자연, 인간] 환경문제에 대한 우리의 숙제
그동안 교황님들의 계속된 호소에도 환경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졌고, 앞으로도 더 심각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좀 더 낫게, 오래 잘 살기를 바란다. 인간의 타고난 욕구로서는 정당한 것이겠지만, 절제와 조화가 부족하기에 환경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번에 환경문제에 집중하여 발표하신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하느님께서 본디 원하신 삶으로 성숙해지도록 안내한다.
우리의 깊은 내적 회개가 필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비, 낭비, 환경 변화의 속도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 최대한 ‘쥐어짜는’ 데에 이르러, 현재의 생활 방식은 재앙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161항, 205항 참조).
지구는 환경문제로 위기의 상황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곧, 환경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깊은 내적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영성은 인간의 몸이나 자연, 세상의 현실에서 분리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피조물과 건전한 관계를 맺도록 참된 회개와 내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환경 위기를 극복하는데 획일적인 해결책은 없다. 각 나라와 지역의 특성과 고유한 문제와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에너지 절약의 장려와 교통 체제 개선 등은 각 나라가 함께 공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들의 연속성을 위하여 모든 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열린 토론과 교육이 절실하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소비를 줄이고 좀 더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발전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태위기의 심각성은 우리 모두 공동선을 생각하고 인내와 절제와 관용을 필요로 하는 대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앞서 환경문제를 염려하면서 발표한 많은 문헌에 이어 교회 구성원들과 지구촌 전체 인류에게 이 시기에 참으로 어울리는 지침이다. 이 회칙은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더 깊이 깨달아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다함께 협조하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외친다. 이러한 염려와 환경문제를 다룬 문헌들이 발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악화되어 있을 것이다.
교육을 통해 환경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등 서구의 선진국가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 나라의 지도자들은 당시 점점 커져만 가던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문제들의 현상과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끊임없이 발굴해 나갔다.
또한 가정과 학교, 교회와 언론매체 등을 통해서 강도 높은 교육과 실천 운동을 전개하여 오늘날 환경문제에 대한 모든 국민의 의식화가 이루어져 있고, 지속 가능한 개발과 태도를 통해 환경 친화적인 삶이 되려고 끊임없이 진단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헌을 작성하려는 교황님의 수고와 좋은 내용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의 실천 의지에도 생태계와 환경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고 앞으로도 더욱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 또한 앞의 수많은 문헌들의 뒤를 이어 교황청의 좋은 회칙 목록에 새겨지고 인용되며, 학문적 실천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머물게 될 가능성이 높다.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환경문제는 매우 복잡한 요소들이 서로 얽혀있어서 몇 가지 지침들로는 해결될 수 없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가 노동과 분배를 통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가해자요 피해자라는 사실은 큰 어려움이다.
“실제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신 교황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실제 상황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점검해 보자.
지구의 환경문제
사람이 모여서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환경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인구 분포가 많은 큰 도시에서는 분뇨와 쓰레기로 공기오염과 토양오염 그리고 식수부족과 식량난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어 흔적이나 기록만 남은 채 폐허가 된 곳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전에는 이러한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나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여유의 땅들이 있었고, 오늘날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놓인 문제는 인류가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로 최근까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지구 전체에 걸쳐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를 탐험할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고, 지구에 작용하는 온갖 물리 · 화학 · 생물학적 법칙을 알면 그 오묘한 조화와 상호작용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지구의 평균 반지름은 6,370km이고, 표면적은 5억 1,010만㎢이며, 육지의 면적은 1억 4,940만㎢이다.
태양계에서 인류가 살 수 있는 다른 행성이나 위성은 없고, 태양계를 벗어나 다른 천체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인류는 지구의 조건에서 태어나 지구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지구적인 존재인 것이다.
지구 위의 생명체들은 지구가 제공하는 땅과 물과 공기 그리고 태양이 제공하는 햇빛을 재료로 하여 서로 복잡하고 엄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는 지구 생태계의 식물이 햇빛을 광합성한 것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허락하는 만큼 번성할 수 있고,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때에는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다툼으로 죽게 된다.
지구촌의 생태계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의 개체수에는 한계가 있다. 어느 한 종이 지나치게 불어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이 원리에 따라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경작하지 않고 생태계가 주는 것을 채집과 수렵에만 의존할 때, 지구 생태계가 문제없이 지속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약 2억 명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에는 약 7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해마다 약 1억명씩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많은 문제가 있고 이전에 없던 문제들이 새로 발생하는 것이다.
70억 명의 인구가 선진국 수준으로 소비하면서 살아가려면 지구가 세 개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온갖 환경문제와 갈등 그리고 다툼들이 발생하고 더욱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교황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개인들의 선한 의지나 더 나은 기술 개발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새로워져야 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좀 더 합리적이고 자발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생태계의 법칙에 따라 고통이 올 것이다.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토양오염과 산업재해와 폐기물 그리고 기아와 질병, 갈등과 전쟁 등이 필요에 따라 약하게 또는 강하게 개입하여 생명체의 수를 조절하거나 멸종시켜 버린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환경문제는 우리가 여기서 더 나아가면 파국이 올 수 있다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우리나라는약 10만㎢ 크기의 땅에 약 5천만 명이 살고 있다. 50여 년 전인 1960년대에는 1인당 연간 소득이 100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보다 두 배로 늘어난 인구가 개인당 3백 배 정도의 많은 소득으로 생활함에도 각 개인과 사회의 갈등과 불안은 오히려 더한 것 같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지구촌에서 인구를 늘리거나 제한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땅과 물 그리고 식량이다. 우리나라의 면적은 약 10만㎢로, 이것은 지구촌 땅 1억 4,940만㎢의 1,500분의 1이다.
이 땅에 지구촌 인구 70억 명의 140분의 1인 인구밀도는 1㎢당 5백명으로 세계에서 일반 국가 가운데 방글라데시, 대만 다음으로 높다. 이는 가로세로 100m 안에 다섯 명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마다 가로 20m 세로 100m정도를 차지하는 셈이다.
우리나라 땅의 65%는 산지이다. 그리고 약 7%는 도시며, 약 8%는 강과 호수, 습지와 잡종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작지는 약 20%인데, 이 좁은 경작지에서 일 년 동안 먹을 식재료를 다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은 22%에 지나지 않았다. 해마다 1,500만 톤을 수입해 필요한 곡물을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에서 이 정도의 곡물을 안정적으로 수입하려고 돈을 버는 것도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수천만 톤의 철광석과 석탄, 석유와 가스, 그리고 각종 원자재들을 수입하여, 전국에 산재한 엄청난 수의 산업체에서 자동차와 배, 반도체와 각종 가전제품 등을 만들어 수출하고 돈을 번다.
부산물로 해마다 엄청난 양의 각종 폐기물과 폐수, 오염된 공기가 배출되어 이 땅 어딘가에 묻히거나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 더 이상 경작지를 넓히기 힘든 지구촌 사정을 생각하면 곡물을 수출하려고 시장에 내놓는 양이 지금처럼 계속 유지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평균 약 1,150mm 정도의 비와 눈이 내려 약 1,150억 톤의 물이 공급된다. 그 중 약 260억 톤 정도가 댐과 저수지에 저장되어 활용된다. 지금과 같이 평화롭고 전기가 잘 공급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면 5천만 명이 이 물을 안정적으로 이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전기가 부족해지거나 수돗물로 공급할 물의 취수와 정수에 문제가 생기면 마실 물은 구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상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은 여러 가지 요소가 얽히고 설켜있다. 다양한 종류의 갈등과 투쟁, 궁핍과 넉넉함, 기쁨과 고통,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 다양한 종교단체들, 신앙생활과 냉담 등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어 이러한 모습의 삶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좀 더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부에서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내수를 진작시켜야 한다며 더 많은 소비를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각 가정과 학교, 언론매체와 사회, 각 종교단체, 특히 교회는 지금보다 더 센 강도로 국민과 교우들에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야 한다. 또한 좀 더 차분하고 환경 친화적인 삶으로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도록 끊임없이 계몽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노력이 이 땅에 완전한 사회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땅으로 황폐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