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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의식으로 섬기십시오
27: 1-8
1.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찌며
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찌며
4. 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만들고
5.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찌며
6.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찌며
7.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찌며
8.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대로 그들이 만들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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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TV 저널리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월터 크론카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언론가이고 CBS 앵커 출신입니다. 이 분에게 어느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성공 비결이 뭡니까?" 이 분이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방송이 나를 위해 있으니까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어요. 이 한 마디 속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을 위해서 직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40여년 동안 CBS와 인연을 맺으면서 '이 방송국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일했다는 겁니다. 주인의식을 가졌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의식이 없다. 주인의식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든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인의 마음을 품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지요. 안타깝게도 직장에서도 주인의식이 없는 직장인이 많다고 말하고 학교에서도 주인의식이 없는 학생이 많다고 말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주인의식이 없는 교인이 많다고 말합니다.
주인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받는 만큼만 일한다. 둘째, 시키지 않으면 안 한다. 셋째, 나 외에 무신경하다. 넷째,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섯째, 조직의 성장이나 발전에는 관심이 없다. 두 개 이상 YES가 나오면 경고이고, 3개 이상 YES가 나오면 주인의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에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받는 봉급보다 더 많이 일하세요. 아르바이트하는 분들이 계세요? 시간당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일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받은 것만큼 일합니까? 주인의식을 갖고 받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주인을 복 받게 만들어주세요. 요셉 덕분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애굽 나라가 복을 받은 것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여러분 덕분에 직장이 복을 받고 사장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는 교우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교회의 주인은 아니지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잖아요. 내가 주인의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실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는 교우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는 자신에게 엄청난 은혜가 된다는 겁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교회가 나를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맡고 있는 사역을 책임지고 섬기면 그만큼 존재의 영역이 커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신앙 생활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왕이면 받은 은사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기면 더욱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시대의 성막 제단에 대한 부분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막 문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은 죄인을 정결하게 하는 곳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를 씻어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이 성막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죄를 씻도록 하셨습니다. 번제단에서 짐승을 죽여서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오늘 성경 3절에 보면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다섯 가지의 보조기구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번제를 드릴 때에 다섯 가지의 기구를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에 나오는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기구들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다섯 일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다섯 가지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내용인데, 성경공부 하듯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강의와 같은 설교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재를 담는 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올 때에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번제로 드려야 했는데, 그 제물을 번제단에서 태웁니다. 제물을 태우고 나면 재가 남게 되지요. 이 재가 쌓이면 담아 두는 통이 재를 담는 통입니다. 재를 담는 통이 없으면 광야 바람에 재가 날려서 성막 안이 더러워지고 지저분해 질 것이 아니겠어요. 백성들에게 건강상으로도 좋지 못하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재를 담아 두는 통을 만들어서 재를 담았다가 진밖에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재를 버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서 경쟁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 일은 제사장들이 해야만 했는데, 서로들 먼저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산헤드린에서는 제비를 뽑아서 당번을 정하곤 했답니다. 뽑힌 제사장에게는 번제단에 올라가서 일하는 특권이 주어지게 된 겁니다.
여러분, 재를 담는 통은 요즘 교회에서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교인을 말할까요? 문제를 담는 교인을 말합니다. 교회에 못된 요소들을 꼭 안고 있다가 혼자서 어디론가 없애버리는 아름다운 교인을 말합니다. 요즘 교회에 재를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교인이 없으면 교회가 문제 때문에 정말 문제가 될 거예요. 이 모임에 가도 문제가 돌아다니고 저 모임에 가도 문제가 떠돌아다니겠지요. 그러나 문제를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있으면 걱정 없습니다. 마음에 담아서 다른 사람에게 퍼지지 않게 하니 문제될 것이 없지요.
교회 성장학에서는 문제가 많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일을 많이 한다는 말이거든요. 왜 일할 때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잖아요. 만일 문제가 생기는 것이 두렵다면 일하지 않으면 됩니다. 일하지 않으니 문제도 없을 것이 아니겠어요. 교회가 일하는 교인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죽습니다. 일하지 않는 교회는 퇴보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문제없는 교회를 찾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대답해 보세요.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면 천국에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는 죄인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죄인만 오는 곳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죄인이 모였으니 문제가 없을까요? 착각이지요. 죄인이 모였으니 문제가 여기저기에 나타납니다.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죄인이 의인으로 거듭나면서 재가 떨어집니다. 특별히 사역하다가 보면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이 재입니다. 비록 믿음으로 의인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으로 의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때에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지 않고 통에 담는 교인이 필요한 겁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덮어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마음을 가진 교인이 필요한 겁니다. 이러저러한 문제를 마음의 통에 담아서 밖에 버리는 교인이 필요한 겁니다. 이런 교인이 많을수록 은혜로운 교회가 되는 것이고, 재를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많을 때에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부삽이 있습니다.
번제단에서 제물이 타면 재가 남는데 이 때에 사용되는 것이 부삽입니다. 부삽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재가 석쇠에 붙은 것은 긁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재를 담아서 통에 넣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부삽을 만들어서 이런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부삽은 어떤 교인을 말할까요? 일하는 교인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면서 찌꺼기와 같은 것이 생깁니다. 믿음의 신앙공동체에서 시험을 받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부삽과 같은 교인은 이러한 것들이 생길 때에 상대방이 모르게 긁어내어서 치유하는 교인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인격적으로 감싸주면서 위로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에 굳어진 것을 긁어내는 교인을 말합니다.
사실 부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교인이 쉽지 않지요. 왜냐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교회는 두 종류의 교인이 있다고 하잖아요. 문제가 보이는 교인이 있고 문제가 보이지 않는 교인이 있어요. 일할 것이 보이는 교인이 있고 일할 것이 보이지 않는 교인이 있어요. 보이는 교인은 뭐를 보려고 보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교인은 보려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지요.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보이고 손님 같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뭐든지 보이게 되어 있어요. 해야 할 일도 보이고, 힘써야 할 일도 보이고, 감당해야 할 일도 보입니다. 현미경을 썼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손님 같은 교인은 대접받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누가 나에게 대접하나 이것만 보이지요. 여러분이 교회 일하는 것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열심히 일하는 교인이 있고 일하지 않는 교인이 있잖아요. 손발로 일하는 교인이 있고 입으로만 하는 교인이 있잖아요. 우리 좋은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대야가 있습니다.
대야 아시지요? 예전에 세수할 때에 사용하던 대야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각을 뜬 후에는 제단에 올려놓는데, 고기를 담아서 나르는 그릇이 대야입니다. 대야는 죄지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교인을 말합니다. 전도하는 교인이지요. 영혼을 구원하는 성도는 제물을 제단까지 나르는 대야와 같은 교인입니다.
교회 성장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느 교회나 10%의 전도 교인이 있는가 하면 10%의 잠든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11제자가 부른 사람들입니다. 그 120명 중에서 12명이 순교했습니다. 10%이지요.
여러분, 교회는 대야와 같은 전도하는 교인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전도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0% 이상, 할 수만 있으면 20%, 30%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많은 교인을 대야와 같은 교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야가 없는 번제단은 번제단이 아닌 것처럼 대야 교인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7월부터 3개월 동안 새생명축제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하셔서 대야와 같은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이잖아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열심을 다하여 전도하셔서 생명을 살리는 대야와 같은 근사한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고기 갈고리가 있습니다.
고기 갈고리는 S자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온 고기를 번제단에 올려놓는 역할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기능은 고기가 제단에서 불에 탈 때에 다른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는 대야와 같은 교인이 많아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도한 교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양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도를 해 왔으면 신앙의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어야지요. S고리로 연결시켜야 돼요. 교회는 고기 갈고리와 같이 사랑으로 붙드는 교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어요. 불신자가 교회에 한번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나올 줄로 알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알아요. 불신자가 교회에 한번 나왔다고 해서 교회를 이해하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예배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찬송이 되겠어요. 기도가 되겠어요. 그렇다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뭐하나 편안한 것이 없어요. 그들은 교회가 처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서먹서먹하고 어색합니다. 예배당을 들어올 때는 그렇지만 예배 끝나고 나갈 때는 굉장히 어색합니다. 비록 예배드리러 왔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이것을 기존 교인들이 모른다는 겁니다.
불신자는 교회에 처음에 왔을 때에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을 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먼저 믿는 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받기 원합니다. 기존 교인들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전화도 해 주고, 주중에 만나서 교제도 하면 감동을 받아서 다음 주일에 또 나옵니다. 이렇게 한주 한달 지나면서 찬송의 입술이 열려지게 되고 기도가 들리게 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은혜를 받고 신앙이 성장하는 겁니다.
누가 그러대요. 이민교회는 힘들게 일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얼굴이 굳어져 있대요. 웃는 이야기를 해도 웃지도 않고 우는 이야기를 해도 울지도 않는 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싸우고 온 사람 같아요. 어떤 때는 보기가 민망할 때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성도들이 사랑의 마음을 품고 녹이는 겁니다. 고기 갈고리처럼 사랑으로 붙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새가족반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인이 해야 하는데, 우리 좋은교회 모든 교인이 이런 역할을 감당한다면 참으로 좋은교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불 옳기는 그릇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성막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동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춰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마다 백성들은 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에 성막도 옮기는데 번제단의 불은 꺼야 했지만 불씨는 꺼트리면 안 되었습니다. 레위기 6장에 보면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이 이동할 때마다 불씨는 담아서 날랐어야 했습니다. 이 불을 나르는 그릇을 불 옮기는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우리 나라의 화로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불 옳기는 그릇은 불을 옮기는 교인을 말합니다. 교회는 불과 같이 뜨거운 교인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뜨겁게 해주는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성령을 말하는데, 성령을 받아서 뜨거운 교인이 있어서 불을 붙이는 교인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성도가 불이 있으면 불신자가 불구경 하게 됩니다. 성도가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예수 믿고, 그 열정을 가지고 직장에서 일하고, 그 열정을 가지고 가정 생활할 때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이 옮겨 붙습니다. 불신자가 불구경하다가 예수 믿게 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불이 있었다는 겁니다. 돌단이든 성막이든, 성전이든, 교회이든 하나님의 시작은 불이었어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좋아서 제단을 쌓지요. 이 때에 횃불이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이 불꽃으로 나타나십니다. 레위기 9장 24절에 보면 아론이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빌 때에 주님 앞에서부터 불이 나왔습니다 그 불이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기를 불사릅니다. 역대하 7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제물들을 태웁니다. 초대교회에도 보면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불길이 역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불로 역사하셨는데, 이 성령의 뜨거움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심령 속에 불을 꺼트리면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 불을 가지고 심령의 불이 꺼진 사람에게 붙여주어야 합니다. 불을 붙여서 그 사람이 살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교회 문지방을 밟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아쉬울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이 섬기라고 보내주신 교회를 중심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지는 생활이 온전한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이 제단에서 변두리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시겠어요? 주인의식을 가지고 중심에 서서 신앙 생활하시겠어요? 지금보다 예수님을 더 잘 믿어야 하지 않겠어요?
좋은교회는 나를 위하여 있다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만 드리는 수준에서 이제는 새가족반에도 참여하시는 수준으로 향상되시고, 소그룹 속회에도 참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헌신하는 수준으로 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로도 아낌없이 헌신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맡은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수준으로 신앙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번제단의 다섯 기구를 통하여 여러분이 영감을 받은 대로 교회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섬기라고 만들어주신 좋은교회에서 신앙 생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을 다하여 신앙생활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서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교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긴한 인물
출 27; 1-8
물레방아처럼 돌고 도는 인류 역사가 투쟁의 변천사라고 한다면,
그 변천사는 「인생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한 것이 아이러니컬합니다.
역사란 누구의 얘기입니까?
물론 역사의 중심 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얘기이며 저들의 얘기가 모이고 모여서 역사를 구성해 내는 겁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 모였으면 좋은 시대가 되어 좋은 역사를 기록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되곤 했던 겁니다.
한 역사적 교훈을 봅시다.
솔로몬 왕이 죽자 아들 되는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여로보함이 새롭게 왕된 르호보암께 간청했습니다.
왕상 12:4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니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이때 르호보암 왕은 의논했던 노인들과 의논했습니다.
노인들의 충언은 「왕이 백성들의 종이 되면 백성은 왕의 종이 되어 영영히 섬기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르호보암 왕은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측근들에게 의논했을 때 정반대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왕은 노인들보다 젊은 측근들의 주장을 따라 선정이 아닌 악정을 펴게 되었습니다.
왕상 12:14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정치하리라"
자! 여기서 무엇을 가리킵니까?
어떤 사람들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인생들은 웃고 울기도 하고, 역사는 희극에서 비극으로 기록된다는 겁니다.
결국 이일 후에 이스라엘은 얼마 되지 않아 북이스라엘과 남 유대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 됨됨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반공이 국시가 되기도 하고, 친북화되기도 하고, 누가 국방장관이 되느냐에 따라 같은 국군이지만, 같은 이북 배를 충돌하기까지 해서 무력 도발을 막기도 했고, 반대로 길잡이를 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TV의 사극을 보면 여인천하가 나오고 명성왕후가 나옵니다.
그네들의 됨됨이가 우리들의 과거 역사 였던 것을 볼 때,
좋은 역사 좋은 사회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됨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사람 교육 정말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공교육이 무너졌습니다.
교육개혁 한답시고, 개혁의 주체가 되는 교사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교권이 상실되고, 학생들은 학습의욕을 잃어 버렸습니다.
최근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들을 통한 조사 통계가 작성됐는데, 잘못된 교육개혁을 개탄하고 있음이 절대적이었던 겁니다.
이것 역시도 잘못된 인사, 잘못된 장관의 정책 탓입니다.
무너진 교육! 무엇을 의미합니까?
향후 30-40년 후에 가면, 아니 어쩌면 한 세기 후까지는 우리 나라의 미래가 소망적이질 않다는 증거입니다.
지금의 경제 대한민국을 일구워낸 주체들은 기성세대들로서 과거 공교육을 통해 교육받은 인물들입니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부흥에 요긴했던 인물들이요 세대들입니다.
30년, 40년전의 교육이 이제사 실효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교육 받지 않고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자란 아이들이 기성세대가 되는 30-40년 후에는 어떻겠습니까?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바로 잡는다 한들 바로 배워서 바른 인물 구실하기 까지는 한 50년, 어쩌면 100년이 걸릴 겁니다.
유럽의
벨기에라는 국가는 작아도 큰 국가입니다.
작은 국가로써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국민적 비결을 배우는데 1000년이 걸렸다고 벨기에 국민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1000년의 세월 속에 자멸보다는 공존 공생을 배웠고, 투쟁보다는 양보와 희생을 배웠기에 작은 길이 잘 소통되고 세계의 각종 문화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노라면 하나님의 숨은 사랑을 발견해서 감사 감격하는 일이 많은데 「번제단」되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만 주신 것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뚤어지고 망가진 인생들을 참 인생으로, 참 삶을 영위하도록 처방과 해법을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무엇인지 아시지요?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여 함이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것도 신구약 모든 성경은 「바른 사람」 만드는 지침서요 「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교훈서 라는 뜻입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민족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을 꼽습니다.
국가는 작고 민족은 적지만, 세계의 각 분야를 석권하며 크게 사는 까닭은 다른데 있질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교육이 무엇인가요?
각종 교회 학교의 수련회, 각부 세미나 등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진화론과 같은 헛된 신화와 알량한 철학에 물들은 인생들을,
부족할진언정 이스라엘처럼 성경을 가리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개인의 변화가 옵니다.
그들이 사는 가정에 변화가 옵니다.
사회가 변화되고,
후대에 기록하는 역사의 글이 다르게 장식됩니다.
오늘 성경이 분명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살리시는 번제단이라면 우리들은 번제단을 돕는 부속기구가 되어 세상을 살리고 인생을 살리는 요긴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디든 요긴한 인물! 매력적이질 않습니까?
1) 재 담는 통이 필요합니다.
번제단에서 태운 각종 희생제물의 재가 날린다면 거룩한 성소에 티가 생길 겁니다.
여기에 「재담은」통이 있었고 「뚜껑」이 있었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가정, 어느 직장, 심지어는 교회조차 「재」되는 문제는 있습니다.
권력 있는 곳에는 권력 다툼이 있고,
지식 있는 곳에는 자리다툼이 있고,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곳에는 시기, 질투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조차 천국에서는 누가 큰자냐?했던 것이 인간사의 재를 보여줍니다.
이거 누가 덮을 겁니까?
성도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기에,
세상 정욕, 욕망, 헛된 것인줄 알고 분토처럼 여길 수 없기에 「통」되어 쓸어 담고 「뚜껑」되어 덮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속은 터져도 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들춘「함」은 저주를 받고 허물을 덮은 「셈과 야벳」이 복을 받은 것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재통은 한계가 있습니다.
종종 내다버리고 비워야 하는데 버릴곳은 주님 앞입니다.
2) 부삽도 필요합니다.
부삽기능의 첫째는 부지깽 역할입니다.
나무가 잘 타도록 쑤석거리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재를 긁어 재통에 담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사회든 일 잘하도록 격려해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이나 실수한 것 보담 잘한 것 칭찬하고 더 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임무는 약방의 감초같이 꼭 요긴한 인물입니다.
제가 아는 모목사님은 부삽 같은 분입니다.
주변 목사님들과 관계가 좋으시고 긍정적이라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추진력도 있으셔서 총회, 노회, 교회 일을 척척해 냅니다.
그러나 앞서지 않고 뒤에서 다른 목사님들이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곤 합니다.
자연 필요한곳이 많아 피곤하고 때론 비난도 있지만,
그 비난이라는 것이 일 안 하는 사람들의 시기 질투이기에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3) 대야 같은 인물도 필요합니다.
고기를 담아낼 때 사용했던 큰그릇입니다.
고기를 담아 내지 않으면 제사드릴 수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제자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가나잔치집의 기적에도 종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깨끗한 거기를 위해서 미화원의 수고...
치안을 위해선 경찰의 수고...
평화를 위해선 국군용사의 수고...
예배를 위해선 준비자의 수고, 헌신 등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좋아집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힘들고 더럽고 치사하다고 외면할 때는 모든 것이 정지되고 섞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사회의 문제는 대야 같은 인물의 부족현상입니다.
화려한 인기 있는 좋은곳은 몰리는데 진정 대야는 없는 겁니다.
4) 갈고리도 필요합니다.
갈고리는 고기를 제단에 얹어 놓을 때 떨어지지 않도록 연결시키는 도구입니다.
아무리 참믿음, 참헌신이 있다하여도 사랑이 결여된다면 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모인곳에는 주님과 성도, 이웃과 이웃을 연결해야 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권위자였습니다.
바울과 사도들,
바울과 마가를 잘 연결 시켰던 겁니다.
5) 화로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차디찬 냉장고 같은 이성형보다는 따끈따끈한 사랑이 넘치는 감성형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꼬이는 사람은 대체로 「화로형」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유식하진 않아도 미남은 아니어도 열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멸하시는 불이기에...
열정의 소유자를 기쁘시게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번제단에게 이러한 부속기구는 필수입니다.
인생을 살리시는 주님에게 이러한 인물은 필수입니다.
교회는 이렇듯 요긴한 인물이 모여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과 같다할 수 있습니까?
요긴한 인물입니까?
점검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