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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2편 1절-2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1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원래 구원이란 성도가 변화 부활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갈고 닦은 영능의 실력대로 신령천국을 영원 궁극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으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구원을 눈에 보이는 육신의 개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원래의 구원은 하나밖에 없는 것인데 타락한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육신의 개념으로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과 오해되지 않기 위해, 예수 믿으면서 잘못되지 않고 정확하게 살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두 가지의 구원을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 다른데, 인간의 구원개념은 눈에 보여지는 육신적인 면으로 말을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눈에 보이는 육신의 개념으로 구원을 말한다면 이건 인간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진리중심의 생각을 버리게 되면 일반생각으로 들어가게 된다. 반대로 진리말씀을 붙잡고 살면 영 주격적인 사람이 된다. 자기의 사는 삶이, 즉 자기의 사고방식과 가치판단과 평가성, 그리고 오각의 오감성, 그리고 몸 신체의 모든 움직임이 영 주격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의 삶이 일반인들에게는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고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면 육신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이 때 뭐라고 기도를 하느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기도를 해야 하느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땅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믿는 사람처럼 세상의 소원 목적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면 구원을 이뤄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도는 어떻게 기도를 하겠느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몸이 아프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 몸이 낫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는데, 성경대로 정신이 바로 들어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성도는 몸이 아플 때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느냐? 안 믿는 사람과 내용이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다르다. 달라야 한다.
몸이 아플 때 안 믿는 사람은 육신을 위해 기도를 하는데 믿는 사람은 뭘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느냐? 영의 일이 잘 되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 성도는 영 주격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거니까 이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영을 위해 기도하는 거다.
믿는 사람은 몸이 아플 때 영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데, 왜 영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느냐? 몸이 아프면 영도 아픈 거냐? 어떻게 기도를 하는 것이 영을 위한 기도냐?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은 의의 병기로 쓰여질 몸이니 건강해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교회에 못 나오니까 내 몸을 건강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더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한다면 자기 몸을 건강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 주격으로 들어가는 거다.
자기가 몸이 아플 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으로서 내 몸이 이렇게 아프니 안 믿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내 몸을 건강케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건 누구를 걱정하는 거냐? ‘내가 훌훌 털고 일어나서 은혜를 받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과, ‘빨리 몸이 나아서 낚시도 다니고 놀러도 다니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영 주격의 기도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를 할 때 내 몸을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픈 나에게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이게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는 지혜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 자기가 존귀 영광스럽게 되는 지식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방인들이 신을 섬기는 것과는 질이 다른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 몸이 아플 때 평소의 자기의 마음가짐을 생각해 봐라. 성경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니 마음을 좋게 가져야 한다. 그러면 두뇌회전도 빠르고 마음도 즐겁고 기쁘다. 그러지 않고 세상만사에 신경을 쓰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둔해지고, 남을 잡고 싸우고, 이러면서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 그래서 영 주격으로 기도를 하라는 거고 영을 위해 살라는 거다.
예수님께서 아픈 병자에게 안수도 하시고 말씀으로 고치기도 하셨는데, 예수님 당신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하나님의 말씀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병자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전달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건 없이 교인들에게 무조건 안수를 해 준다? 성경은 그런 게 아니다. 예수님 당신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당신의 언행심사 전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움직이는 거다. 눈동자 굴림도, 생각하는 것도 전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움직이는 거다. 주님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거다.
영의 생명의 구원과, 육신의 생명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거냐? 영이 살아남은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의해 좌우된다. 육신의 죽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제한된 육신의 시간과,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따라 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위해 정해놓은 법칙을 잘 지키면 육신의 자연생명이 유지가 되지만 이 자연법칙을 어기게 되면 육신의 목숨, 자연생명은 죽게 된다. 활동정지다. 죽었다는 것은 활동정지라는 말이다.
육신의 자연목숨은 인간이 자신의 육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연장이 될 수도 있고 회복이 될 수도 있도록 허용이 되어있다. 그러나 영혼의 죽고 사는 것은 절대로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니다. 육신의 생명은 인간이 약이나 주사 등으로 어느 정도 연장하거나 회복시킬 수 있는 거지만 영혼의 생명은 인간이 그 어떤 약이나 주사로도 살릴 수도 없고 회복시킬 수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고, 성장적인 면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다. 그래서 인도자들은 자기가 성도들에게 주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순수한 진리본질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아닌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이런 저런 것을 슬슬 먹이게 되면 성도들의 성의 성장에 그만큼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거짓된 종들은 이걸 전혀 생각을 안 한다.
목회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독극물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믿는 사람은 달라붙겠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은 영의 성장을 막는 독극물이다. 믿는 사람이 영 주격으로 살면 그런 복이 전혀 없는 거냐? 아니다. 복이 두 배로 들어온다. 사람이 만들어지고, 일반축복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만들어지고, 또한 영적 축복도 받게 되니 손해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잠언을 봐도 이게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로 영이 거듭난 중생 이후에는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성장이 되느냐, 멈춰 있느냐?’ 하는 면을 신경 써야 한다. 부모들이 어린아이를 낳았으면 이제 육신적으로나 이성 면의 기능과 지능이 성장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이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 성장이 되느냐, 멈춰 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순종에 달려있는 것이니 늘 이 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성도에게 있어서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달려있는 것이니 성도는 이 면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고, 이제부터는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야 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다윗이 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느냐?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의 구원이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성도의 구원은 절대로 다른 데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보내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다. 그러니 인간에게 자꾸 기대려고 하지 말아라.
그러면 뭐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거냐? 첫째, 기본구원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두 번째, 이룰구원 성화구원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성화구원에서 있어서 인간 자기가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성화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거다. 학생들이 수학공부를 잘 하려면 선생님이 수학의 공식을 알려줘야 한다. 공식을 알면 문제를 잘 풀 수 있고 응용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무엇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육신이냐, 영혼구원이냐? 영혼이다. 기도가 이렇게 되어있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도 자기의 구원이 누구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그러니까 마음이 누구만 바라보아야 하느냐? 전 인격이 하나님을 향해져 있어야 한다. 육신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활동과 사건과 환경들과 교체되는 모든 것들은 성도의 영혼구원을 위해 있는 거다. 이 영혼구원을 제일 가치 있게 여기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받게 된다.
2절: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반석’이란 넓고 큰 바위를 말한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집은 홍수가 나도 절대로 쓸려가지 않는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기초로 하여, 말씀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은 세상 사망적인 모든 이론과 주장성에 감염되지도 않고 절대로 휩쓸려가지도 않는다. 이것은 천국에까지 보존이 된다. 이것이 성도다윗이 말하는 구원이다.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는 것은 아무리 좋고 훌륭하고 선하고 의롭고 영광스럽고 행복한 것이라도 전부는 영원히 사망계로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라고 하는 거다. 다윗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신앙의 중심 사상으로 ‘오직 주만 나의 반석이시요’ 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자기의 구원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오직 돈이 나의 반석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돈은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빼앗아 가면 빼앗기는 거고, 불나면 불에 타지는 거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인간 자기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자는 자기의 정신과 사상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진리에 올려놓고 높은 산성 위로 올라가서 살게 된다. 자기의 차원을 인격적 도덕적 지식적으로 올린다.
성도는 반드시 이 성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만이 악한 죄악세상이 홍수처럼 범람하여 일어날지라도 요동치 않게 된다. 인간 자기의 삶이 영원히 구원으로 보존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 내려가면 휩쓸린다. 내려가면 유혹과 미혹을 당한다. 세상바람에 휩쓸린다. 사람이 되어먹기를 그 차원밖에 안 되면 그 차원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고, 이러면 세상의 바람에 휩쓸린다. ‘안 휩쓸린다’가 아니라 자기의 깨달음의 차원이 저질적이면 그만 휩쓸리는 거다.
산성은 적군이 정복하지 못할 높은 곳에 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보면 선악과 따먹은 정신 사상은, 이방 불신세상의 지식은 진리지식에 살고 있는 자를 정복할 수 없다. 생각이 미치지를 못한다. 질적으로 올라갈 수 없다. 하나는 하늘의 지식이고 하나는 땅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 차원을 알아라. 땅의 지식은 성도에게 먹히게 되는 거지 절대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성도를 잡아먹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게 뭐다’ 하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믿어야 한다.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을 어느 정도로 알고, 어느 정도의 신앙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이방 불신자들에게나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끌려간다면 자기의 신앙의 차원이 낮은 거다. 그들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그들에게서 자기의 노동, 시간, 물질을 투자했다면 이 모든 게 사망계로 날아간 거다. 그 증거가 뭐냐? 신앙이 자라난 게 없다.
비진리적 이론과 주장이 침투할 수 없는 곳이 산성이다. 모든 사상의 진가가 분별이 된다면 이 사람은 산성에 사는 거다. 진리생명의 세계,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의 세계가 성도 자기가 거할 위치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 다음 가는 거다. 여기를 떠나서 세상 타락된 사람들과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같다면 이 사람의 차원은 낮은 거다.
높은 지식의 수준에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의 수준이니 이 신앙의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을 내다보면 다 분별이 된다. ‘이 사람은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고, 이 사람은 아주 위험하구나. 이 사람은 아주 교만하구나. 이 사람은 순 사기꾼이다’ 이런 게 분별이 들어간다. 자기가 예수 믿으면서 진리이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속는 률이 그만큼 적은 거다.
이런 신앙은 세상의 그 어떤 유혹과 미혹에도 감염을 받지 않는 거룩의 세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진리이치로 가르칠 수 있고, 진리로 인도하고, 생명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 이런 신앙자를 그 무엇이 와서 진리로부터 떼어놓겠느냐? 진리로써 주님과 인격적 결합이 되어있는 사람을 누가 떼어놓을 수 있겠느냐? 아무도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신앙의 차원이 올라가야지 1년을 믿으나, 10년을 믿으나, 30년을 믿으나, 50년을 믿으나, 오늘 나온 사람과, 10년 믿은 사람과, 50년 믿은 사람이 신앙의 차원이 똑같다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예수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소원 목적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면 이게 무슨 꼴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