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풀갱어(Doppelganger)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말이다. 쌍둥이도 아닌데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이 생긴 사람을 도플갱어라고 말한다.
영어 설명을 보면 이렇다.
Doppelganger is a ghostly duplicate of a living person. 도플갱어는 살아 있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의 유령 같은 존재를 말한다.
이 말은 원래 독일에서 생긴 것인데 다양한 표현이 있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과 똑같은 대상 즉 환영(幻影) 혹은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 '분신·생령·분신복제' 등 이라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은 환영(幻影)을 본다는 뜻에서 차이가 없다.
오늘날에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으로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나타나며, 자신의 실제 성격과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평소 자신이 바라던 이상형 혹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꿈은 반대로 해석한다"는 말이 여기에 속할른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사람도 지나치게 자아도취가 심할 경우 스스로 그러한 환영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무협소설을 자주 읽는 사람이 날아다니면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도플갱어는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 각종 예술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이용되어 왔다.
스티븐슨(R.L.B. Stevenson)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도 도플갱어 이야기를 변형시킨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똑같지만 다른 두 여인을 통해 이데올로기로 나누어진 두 개의 유럽을 그린 폴란드 감독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v Kieslowski)의 정치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도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2019년이 시작되었는데 1월이 지나고 벌서 2월의 달력도 뜯어 내야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조금 당황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아니 벌서", "이렇게 빨리 시간이 흐르다니..." 또 하나의 내 자신인 도플갱어는 꽤 많이 상기된 모습이다.
프로이트(S.Freud)가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이었다.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프로이트가 타고 있던 열차 칸의 문이 복도의 화장실 쪽으로 덜컹하고 열렸다.
그 순간 프로이트는 열린 문 틈으로 잠옷에 겨울 모자를 쓰고 있는 슬퍼 보이는 어떤 남자를 보았다.
그는 그 남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냐고 물으려던 찰나 프로이트는 그 남자가 사실은 열린 문에 달려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S. 프로이트, [두려운 낯섦])
거울에 비친 도플갱어는 바로 프로이드 자신이었다.
사도 바울은 외쳤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분명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자신인 도풀갱어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또 외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바울의 개인적 고백은 현재형이다. I am(εγω ειμι)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가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과거에 죄인 중에 괴수였던 나를 주님이 용서하여 주셨다는 고백이 아니라, 주님이 과거에 죄인인 나를 구원하셨는데, 지금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의 도풀갱어... 이것이 바로 내 자신의 도풀갱어가 아닐까? 달력 한 두장 뜯어내는 소리에 이렇게 놀라는 것은 도둑이 제 발자욱 소리에 놀라는 격이 아닐까?. 이렇게 무능하고 겁이 많고 두려워 떠는 도풀갱어라니....
포도원 주인은 3년동안 헛걸음을 했다. 열매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내 진노했다.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7)
그런데 과원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눅 13:8)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나 자신의 도풀갱어만 보면 "찍어 버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과원지기 이신 주님의 ...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는 변호 때문에 나의 삶은 존재한다.
“주인이여,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