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이하 쌍용차)의 체어맨이 만 2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시장에서 물러 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 하반기부터 “체어맨W를 2017년 연말까지만 생산하고 2018년 3월에는 판매도 중단할 방침”이라는 쌍용차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한 보도가 잇따르면서 체어맨의 단종은 기정사실로 굳혀지고 있다.
쌍용차 체어맨은 자동차 기업 쌍용자동차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로 그 의미가 각별한 차다. 하동환 자동차연구소 시절부터 버스 등의 상용차와 SUV만을 만들어 왔던 쌍용차 역사 상 최초의 승용자동차이자, 본격적인 최고급 대형 세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어맨은 등장 당시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세단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1997년 첫 등장 이래 20년을 이어 내려 온 최고급 세단, 체어맨의 일대기를 되짚어 본다.
라이벌의 등장, 그리고 고난의 세월
그러던 중 1999년, 체어맨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 온다. 현대자동차가 절치부심 끝에 완성한 ‘초대형 세단’, 에쿠스(EQUUS)가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다음해인 2000년에는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계열분리로 인해 독립하게 되었다. 그동안 대우자동차의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해 왔던 쌍용자동차로서는 상당한 위기 상황이었다.
게다가 2003년에는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 온다. 당시 쌍용자동차의 주채권 은행인 조흥은행이 쌍용자동차의 지분을 중국의 상하이 자동차(上海汽车, SAIC)에 넘긴 것이다. 이에 따라 쌍용자동차는 상하이 자동차를 모회사로 두게 되었다. 이 시기는 쌍용자동차에게 있어서 고난의 시절 ‘제 2막’이라 할 만했다. 홀로서기에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한민국의 중소규모 자동차 제조사가 외국, 그것도 당시 자동차산업계에서 후진국으로 치부되고 있었던 중국의 제조사에게 그 지분이 넘어갔다는 사실은 스스로 자동차 강국을 자부하고 있었던 대한민국 사람들로서는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2003년, 쌍용차는 체어맨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뉴 체어맨’을 내놓았다. 뉴 체어맨은 석굴암을 모티브로 한 외관 디자인 뿐만 아니라 ESP(차체 자세제어장치)와 에어서스펜션 등의 선진적인 장비들을 도입하며 내실의 강화에도 힘썼다. 여기에 새롭게 도입한 3.6리터급 가솔린 엔진을 준비했다. 이 엔진은 에쿠스의 3.5리터급 대배기량 라인업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전해진다.
쌍용차는 품질의 개선과 신규 트림 신설과 같은 꾸준한 상품성 개선 작업을 가하여 뒤늦게 등장한 강적에 대응해야 했다. 에쿠스의 공세는 실로 대단했다. 에쿠스는 2000년도에 총 10,949대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형차 1만대 판매’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신예인 에쿠스는 호평과 함께 꾸준히 판매량이 늘었고 2002년에는 월드컵 공식 의전차량으로 지정되면서 연간 판매량이 무려 17,238대까지 뛰어 오른다.
그러나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과 계속된 악재에도 불구하고 체어맨의 판매는 줄지 않았다. 비록 2000년에는 수출포함 6천여대를 팔아, 숫자 상으로 크게 밀렸지만 2001년에는 8,288대로 판매량이 늘더니 2002년에는 출시 이래 처음으로 1만 대 이상인 12,076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에는 12,791대, 그 다음해인 2004년에는 14,563대, 2005년도에는 무려 15,466대를 팔아 치우며 출시 이래 9년 동안 내리막 없는 성장을 지속했다.
반면 에쿠스는 2003년에 판매량이 14,205대를 기록하며 2002년의 위세가 한풀 꺾이더니 2004년에는 12,561대로 떨어진다. 2005년에는 여기서 다시 회복한 14,205대의 판매고를 올리게 되지만 이미 1위의 자리는 쌍용 체어맨에게 내준 뒤였다. IMF의 여파로 장기 불황이 이어지던 2000년대 초반, 체어맨은 지속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며 쌍용자동차를 견인했다. 체어맨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2006년부터다. 2006년, 쌍용 체어맨은 약 1만 1천여대가 판매되었으며, 2007년에는 1만대를 밑도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쌍용자동차에게 있어 고난의 세월이었다. 상하이 자동차 인수 이후 쌍용자동차는 로디우스-카이런-액티언으로 이어지는 신차를 연달아 개발해냈다. 하지만 이들 차종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괴이한 디자인과 더불어 경쟁사에 비해 부족한 상품성으로 시장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만들어진 신차들 중 유의미한 성공을 거둔 모델은 액티언의 픽업트럭형 파생 모델인 액티언 스포츠 밖에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상하이 자동차는 2008년, 쌍용자동차에 대해 법정 관리를 신청하고 경영권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물론, 인수할 때 약속했던 재투자 등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속된 말로 ‘먹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새가 되었다. 그 이후 이명박 정부는 쌍용차를 회생시키기보다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가하여 다른 곳에 팔아 넘기기 쉬운 상태로 만들려 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오늘날 ‘쌍용차 사태’로 불리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단계적인 복직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하이 자동차는 이 당시에도 쌍용자동차에 대한 투자를 통해 성장시키는 것보다 쌍용차가 가지고 있었던 기술을 빼돌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2009년, 상하이자동차의 기술 유출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고난 속에 이루어진 새로운 변화 – 체어맨W
하지만 그 어려웠던 2008년, 체어맨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10여년 간 체어맨을 개발하고 개량하면서 세단 모델에 대한 노하우를 얻은 쌍용자동차가 10여년 만에 체어맨의 완전 신형 모델, ‘체어맨W’를 개발해 낸 것이다. 체어맨W는 2007년 4월에 열린 서울모터쇼에서 ‘WZ’라는 이름의 컨셉트카로 선보인 뒤 2008년 2월부터 시판을 개시했다.
체어맨W는 선대 체어맨이 국내 시장에서 이룩한 최고급 세단으로서의 품격과 첨단 이미지를 계승하는 선진 장비들을 대거 탑재했다. 차량의 기본 구조는 기존 체어맨의 W124 기반 플랫폼이 아닌,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W220)의 구조를 기반으로 한 신개발 플랫폼을 도입했다. 이로써 당시 시장의 요구에 맞는 한층 커진 차체 크기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디자인 면에서는 현대적이면서도 지나치게 튀지 않고 중후한 감각을 강조한 점이 돋보인다. 이 때문에 체어맨W의 디자인은 등장 당시에도 상당히 보수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구매 연령대가 높은 대형 세단 시장에서는 상당한 호평을 얻었다. 또한 국내 완성차 업계 최초로 5.0리터급의 V8 엔진과 승용차량 최초의 상시사륜구동을 적용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 엔진은 기존의 6기통 엔진들과 마찬가지로, 메르세데스-벤츠의 엔진을 도입한 것이었으며, 상시사륜구동계는 보그워너에서 공급했다.
체어맨W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각종 첨단 전자 장비들을 대거 채용하고 있었다. 레이더를 이용하여 선행 차량과의 간격을 유지해 주는 레이더 크루즈 컨트롤을 비롯하여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어도 자동으로 바퀴를 잠궈주는 전자식 주차브레이크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고급 모델에는 17개의 스피커로 구성된 하만카돈의 사운드 시스템을 탑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실내는 사용할 수 있는 최고급의 소재를 아낌 없이 사용하여 선대보다 한층 고급스러워진 감각을 뽐냈다. 여기에 앞좌석 무릎에어백을 포함한 총 10개의 에어백이 적용하는 등, 안전에도 신경을 썼다.
그리고 3년 뒤인 2011년, 상용차는 체어맨W의 페이스리프트를 내놓았다. 하지만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디자인은 기존과는 달리, 다소 호오가 갈리는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이 때, 쌍용자동차가 가진 고급 세단 기술을 총동원하여 제작한 최고급 리무진 모델, ‘서미트(Summit)’도 이 시기에 출시되었다.
쌍용차는 체어맨W를 출시하기는 했지만 기존의 체어맨을 곧바로 단종시키지 않았다. 이는 쌍용차가 안고 있는 고민 중 하나인 부족한 제품 풀을 만회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단종을 면한 뉴 체어맨은 ‘체어맨H’로 개칭되면서 체어맨W의 하위급 모델로 재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차량의 각종 사양이 조정되었고 가격은 3~4천만원대 수준으로 낮춰, 현대 제네시스(BH)와 그 이하의 차종에 맞섰다. 또한 적극적인 프로모션 등을 통해 떨어지는 판매량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기본적인 설계 자체가 이미 구식화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체어맨H의 경쟁력 저하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체어맨W와 H는 2010년대를 기점으로 판매량이 점점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체어맨H가 2015년을 기해 끝내 단종 수순을 밟으면서 체어맨W 혼자 강대한 경쟁자에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현대자동차의 독주를 막기는 어려웠다. 특히 현대자동차가 2016년에 독자적인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를 론칭하면서 이미 시장에서도 피로감이 드러나고 있었던 체어맨의 경쟁력 저하는 가속화되었다. 쌍용차는 ‘체어맨W 카이저(Kaiser)’라는 이름의 2차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한 시대를 풍미하고 20년동안 이어져 내려왔던 쌍용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은 2018년을 끝으로 쓸쓸히 퇴장하게 되었다.
체어맨W는 선대의 체어맨과 여러 모로 닮은 행보를 걸었다. 두 차 모두 쌍용차가 대내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태어났고, 데뷔 초기에 각종 첨단 기술을 앞세워 시장을 선도한 점, 그리고 기본적인 설계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핏줄이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쌍용차는 체어맨이라는 이름을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하다. 자사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가 큰 차인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종식 現 쌍용차 사장은 최근 “단종한 체어맨의 후속 모델을 구상 중”이라며 “차세대 체어맨은 초호화 대형 SUV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체어맨의 이름을 잇는 초대형 호화 SUV는 2021년경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보다도 SUV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쌍용자동차인만큼,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체어맨의 모습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