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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받기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전도서 11:9-10
Rejoice, young man, during your childhood, and let your heart be pleasant during the days of young manhood. And follow the impulses of your heart and the desires of your eyes Yet know that God will bring you to judgment for all these things. So, remove grief and anger from your heart and put away pain from your body, because childhood and the prime of life are fleeting. Ecclesiastes 11:9-10
아마도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지금처럼 건강에 대한 관심이나 상식이 증대되었던 적이 없을 것입니다. 백세가 안 되서 죽거나 혹 병이라도 걸리면 사회 낙오자라고 낙인이라도 찍을 기세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과연 무엇이 자신에게 적합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건강은 생명에 근거하고 이 생명이 운행하는 데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Maybe we live in the time when people concern about health more than any other time through the whole history. If someone can not live longer than 100 years or sick, people might blame them as losers. However, it is not easy to find which is proper for myself among the tons of information. Fundamentally, health must be based on life, while there is a significant principle on there.
병은 지나치거나 모자란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두 상태의 원인을 제거하면 건강한 상태가 되는데 이는 결국 적당한 상태를 말합니다. 몸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 모자라거나 지나친 상태가 되면 몸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불편함을 제거하는 방향, 즉 모자라면 더 증대하는 방향으로, 또 지나치면 감소하는 방향으로 어떤 작용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이 때 이러한 불편을 견디지 못하면 몸이 할 역할을 약으로 처방하여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증상은 없어지지만 이러한 일이 계속되면 몸이 할 역할이 없어져서 계속 약에 의존하거나 결국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Disease is the status to be excessive or insufficient. If we would get rid of these two conditions, which will be called healthy, the proper status. If a body is on the status of being excessive or insufficient, we feel uncomfortable. Then the body will do something in the direction to remove the uncomfort. However, in this feeling of uncomfort, if we can not stand for it, we would take medicine. Then, the symptom might be disappeared, but the body would do nothing for that, so we should be dependable on the medicine, which will lead us to illness eventually.
인격에 대하여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몸이나 인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위에서 말한 지나치거나 모자란 상태인데 이러한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욕구와 상황입니다. 물론 욕구는 안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밖의 상황은 잘못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안의 욕구도 인격 내면의 잘못된 상황 속에서 나옵니다. 밖의 잘못된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이고 내면의 욕구는 뒤틀린 인식으로부터 나옵니다.
Regarding to personality as well, same kind of idea will be applied. Trouble on personality as well will be caused from insufficiency and excessiveness, as well as the body. What makes this statud is desire and situation, while desire reveals the inward situation. The wrong teaching works outwardly, while twisted inward recognition will be revealed as desire. Outward wrong teaching comes from wrong value of the world, and the the bad desire is to be revealed from twisted recognition.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인격 중의 생각 부분에 머뭅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냐 하는 질문과 굉장히 근접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 동안 말씀드린 바대로 나라는 존재, 나의 인격은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는 내가 인식하는 내 자신의 영역이 있고 인식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Now our concern would stay on the part of thinking, which is very closed to the question who I am. As we have shared so far, personality is consisted with many parts. One of the things we need to realize is that there is the part we can recognize, while the other can not be recognized or controled.
흔히 시대 탓, 세상 탓, 조상 탓을 하지만 실상 자신의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들이 쌓여서 이룬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나름의 동기가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에는 의지나 혹은 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때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여기까지는 다 나 자신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분입니다. 의지와 감정은 때로 상호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We used to complain the time, family, or situation, however, our lives and living is the result of lots of choices, while each choice has its own motivation, including work of intension and emotion. All these part is to be participated with myself. Sometimes intension and emotion are cooperative or stand against each other.
문제는 생각부분입니다. 생각은 위에서 언급한 선택과 의지, 그리고 감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소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생각이 다 내게서 나온 것이니 다 나 자신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나오는 것은 그 아래를 형성하고 있는 사고의 체계로부터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의지나 생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입니다.
Matter is thinking, which includes intension, emotion and choice, however, while some of thinking can not be controled. Every single thinking comes from myself, which reveals myself, however, we should not choose every single thinking. The source of the thinking is the system of recognition, which can not be changed by intension or thinking.
의식에도 적당한 혹은 적절한 분량이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오는 동안 경험된, 혹은 인식된 개념들이 지나치게 많아져 있거나 혹은 모자라게 되어있게 되면 나 자신도 모르는 의식 속의 불편함이 욕구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것들도 생각으로 표출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식에 떠 오른 생각들이 모두 내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당연히 내게 떠 오르는 생각들을 살펴 선별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There is the proper status on the recognition system as well. If we have a certain recognition excessively or insufficiently through the experience of the past, that part will be revealed as uncomfort desire through our thinking. So not every thinking will bring positive consequence. We'd better do a job to select which thinking we would choose.
소위 ‘내 맘 편하자고’ 하는 것은 몸에 나타난 증상치료와 같습니다. 즉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그 불편함을 통해 분별력이 생기고 의식체계에 변화가 일기까지 기다리는 것을 하지 않으니 점점 더 맘 편하자고 하는 조치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다양한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중독은 맘 편하자고 하는 감정의 요구가 의지를 꺾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불편함을 잠시 가지고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If we would select only for the comfort, which is like symptomatic treatment. It works at once, but if we would not learn from the comfort, we will be fallen into a kind of addiction. Then, eventually, the desire of emotion overwhelm intension. To keep uncomfort for a while is to bring the wisdom.
이것들은 오늘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내 자신이 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고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영의 소생과 영혼의 구원이 이루는 가장 근본의 회복입니다. 이를 주께서 하시고 복음으로 알리실 때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더불어 나의 의식이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Through all those concerning, we have shared about the role of myself how to live my own situation. However, we'd better know that we can not live my own life for myself. To change the system of the recognition must be possible only with the revival of spirit, which is the beginning of restoration. The Lord has done this, informing us, while we listen to that with our faith. With this faith, we would like to distinguish through our recognition, which is our life and living.
주일공과
하늘에도 길이 있고 땅이나 바다에도 길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살아가는 데에도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주님과 함께 마음속에 있는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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