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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섬이 되어버렸다
봉쇄령(lockdown)이 내리고 하루 하루가 지나면서 우리는 모두 섬이 되어버렸다. 섬이 된 우리가 떠있는 바다는 푸른 파도가 평화로이 넘나들고 하얀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다가 아니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속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물결이 사방을 둘러싼 불안의 바다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세상은 너무 잘나가고 있었다. 쇼핑 몰에는 물건이 흘러 넘쳤고 고급 백화점엔 내로라하는 유명 브랜드의 상품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유혹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였고 태평성대를 즐겼다. 밤마다 도시의 음식점과 유흥가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쾌락을 탐닉하는 사람들에겐 밤이 짧은 것이 한일 따름이었다.
그런 중에도 지구촌 어느 한 구석에서는 항시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음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은 역사이래로 언제나 있어왔으니 내 나라에서 벌어지지 않는 한 그냥 뉴스거리에 불과했고 가난한 사람들도 언제나 주변에 있었지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고 하였으니 공연히 나서서 괜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에 의한 전염병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사람들은 크게 개의하지 않았다. 전에도 비슷한 병들이 돌았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있었다. 이번에도 그냥 그러다 몇 사람 걸리고 몇 사람 죽고 지나갈 것이니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개인 뿐이 아니라 나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전염병은 과거의 병들과 달랐다. 전염력이 너무 강했고 치사율도 높았다. 전염병이 발발한 중국 우한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끔찍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와 사망자의 숫자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하늘길과 바닷길을 통하여 무서운 속도로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뚫고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전세계의 과학자와 의사들이 머리를 쥐어짰지만 병의 원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뚜렷한 치료 방법도 치료약도 없었다. 급기야 모두가 생각해 낸 최선의 방책은 병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한 차단이었다.
Stay Home, Stay Safe
티브이에서도 SNS에서도 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집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Stay home, Stay safe의 구호를 외쳤다. 병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첨단의 과학과 풍요의 문명을 자랑하던 인류가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삽시간에 철저히 무너지는 모습은 참담하기만 하다. Stay Home, Stay Safe라는 구호를 들을 때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남긴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명언이 생각난다. Stay Home, Stay Safe의 자세는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이다. 창궐하는 전염병을 막을 길이 없으니 최선의 수비로 방어하자는 이야기다. 반대로 Stay Hungry, Stay Foolish의 자세는 아주 적극적인 자세이다. 사람은 배가 고파야 부지런해지고 어리석다고 생각해야 현명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가 부르자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던 시대를 까맣게 잊었다. 그리곤 너무 먹어 불어난 살을 빼려고 땀을 흘리고 시간을 쏟는다. 과학이 발달하고 손안에 쥔 스마트 폰 하나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하니 사람들은 스스로가 지혜롭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 창궐하게 된 코로나 19는 결국은 인재(人災)이다. 배부르고 오만한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잡스의 말대로 인간이 배고픈 자세로(stay hungry)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stay foolish) 살아왔다면 오늘같이 재난을 당하여 꼼짝 못하고 갇혀서(stay home)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stay safe)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큰 섬에서 작은 섬으로, 그리고 보다 작은 섬이 되어 버린 우리 모두
처음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전염병이 창궐한 나라로부터의 들어오는 사람들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겁을 먹은 모든 나라들은 국경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크고 작은 모든 나라들이 서로가 고립되어 섬이 되었다. 하지만 국경이 봉쇄되기 전 이미 나라 안에 들어와 있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당황한 각 나라의 정부는 다시 나라 안의 지역과 지역을 차단하였다. 이제는 지역과 지역이 고립되어 섬이 되었다. 그러나 병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계속 퍼져나가자 각 나라의 정부는 국민 모두에게 자가격리(自家隔離, Self-Isolation)를 명하였다. 국민 모두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기 집에만 머물러야 했다. 드디어 가정과 가정이 고립되어 섬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 내에서도 누군가 증상을 보이면 집안 한 구석에 유배시키고 최대한으로 다른 가족과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야 했고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야만 했다. 가정이라는 작은 섬마저 쪼개져 불완전한 기형의 섬이 되어버린 상황이 오늘 창궐하는 전염병 아래의 모든 세계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어느 시인이 쓴 ‘섬’이라는 시(詩) 전문이다. 하지만 그 시인이 지금 우리와 같은 상황 아래 놓였어도 위와 같은 시(詩)를 쓸 수 있을까 의문이 간다. 섬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섬 밖에 있을 때이다. 내가 이미 그 섬에 들어와 있다면, 그리하여 그 섬의 일부가 되어 있다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언제든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섬을 나가는 길이 하늘길이던 바닷길이던 모두 끊어져버렸다. 우리 모두가 망망대해에 그것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바다 위에 온전히 고립(孤立)된 섬이 된 것이다. 섬을 프랑스어로 île라고 한다. 그런데 이 île의 어원(語源)이 ‘고립(孤立)된’ 이라는 뜻의 형용사 ‘isolé’ 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자가격리를 영어로 self-isolation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 모두가 섬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왔던 필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의 섬(the island of the dead)
길이 모두 끊겨진 섬은 더 이상 가고 싶은 섬도 낭만적인 섬도 되지 못한다. 봉쇄령이 내린 뒤 며칠 동안 집에 갇혀 지내다가 나는 문득 아놀드 뵈클린(Arnold Bocklin)의 죽음의 섬(the island of the dead)이란 그림이 생각났다. 흰 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이 역시 흰 천으로 감싼 관을 지키고 서있는 작은 조각배가 황토 빛 바위로 이루어진 섬에 도착하려 한다. 바위 섬 한가운데에는 너무 키가 커 위압적이며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두운 색깔의 나무들이 서있다. 바다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전체적으로 기괴하면서도 으스스하면서도 어딘지 환상적인 분위기가 그림에서 풍겨나 온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아놀드 뵈클린은 무명의 화가였지만 이 그림이 의외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유명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 그림을 좋아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 ‘죽음의 섬’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는 낭만적인 정서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앉아서 노를 젓는 사공의 앉은 방향이 섬을 향해 노를 젓는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섬을 떠나갈 방향이다. 비록 작은 조각배에 불과하지만 이 섬이 육지나 다른 섬과 연결이 차단된 섬이 아니라 작은 뱃길이라도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죽음의 섬’은 죽은 자가 묻힐 곳이지만 거기서 묻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바깥 세상과의 길이 열려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은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떤 섬이 되어있는가?
우리 모두가 작은 섬이 되어 있는 지금은 냉철한 눈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 섬이 되어있고 앞으로 어떤 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2차대전 이후 인류가 겪는 최대의 환란이라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모두는 현실을 직시하며 왜 우리 모두가 섬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며 이 사태를 이겨나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힘들다고 포기하고 절망하면 우리의 섬은 기껏 대다수의 사람이 죽은 뒤에나 가고 싶어하는 뵈클린의 그림과 같은 ‘죽음의 섬’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사공의 앉은 자세로부터 어딘가에 섬을 빠져나갈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섬은 죽음의 섬이 아닌 다시 삶을 찾아 나갈 수 있는 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운의 섬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그의 책 ‘섬’ 중의 ‘행운의 섬’이란 단원에서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자가격리가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이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한 것이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잘 입어야 했고 좋은 차를 타야 했고 큰 집에 살아야 했다. 자가격리가 시작된 뒤 우리의 비싼 옷들은 옷장에 걸려있어야 했고 고급 차는 주차장에 서있어야 했고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큰 집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집안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나의 삶에 왜 이다지도 많은 것들이 필요하였던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럴 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엄정하게 자신의 삶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남의 눈에 비친 내가 아니라 내 눈에 비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 동안 밖으로 밖으로만 나돌다가 집에 돌아오면 서로 입을 닫고 지내던 가족들도 서로 소통을 시작하며 가족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틈만 나면 짐 싸 들고 여행을 떠났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집안에서만 생활하며 밖으로 나가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흔히 견문을 넓히고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하지만 사람이 돌아보아야 할 가장 커다란 세상은 자기 자신이다. 칸트는 팔십 평생 고향 쾨니스버그를 떠나지 않았지만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세상을 쏘다니는 대신 자기 자신의 내부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도 이번 기회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가정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갖는다면 우리 모두의 섬은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 아니라 장 그르니에가 말하는 행운의 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19가 죽음에 이르는 병인가?
전염병이 발발하자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에 빠지는 이유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병의 치사율이 의외로 높다는 점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또는 이탈리아와 같은 선진국에서의 치사율이 10% 안팎이니 사람들이 겁먹을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아직도 백신 즉 치료약이 나오지 못했고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기에 병에 걸리면 환자 스스로 이겨나가거나 아니면 죽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이유 이외에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뉴질랜드의 경우는 확진자 1,000명이 넘었지만 사망자가 1명에 불과하다(2020년 4월 8일 현재). 치사율이 0.1%가 안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공포에 떨고 있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를 절망에서 찾는다. 사람들이 희망보다는 절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 확진자의 수가 한 자리에 머물다가 별안간 두 자리의 수로 뛰었을 때 사람들이 보인 추태를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총을 사러 총포상 앞에 가서 줄을 섰다. 또 어떤 이들은 슈퍼에 가서 쌀과 밀가루를 있는 대로 사고 심지어는 화장지를 산더미 같이 샀다.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이를 우리말로는 사재기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패닉 바잉(panic buying)이라고 한다. 공포에 질려서 하는 행동이지만 이는 곧 절망의 몸짓이다.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들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면 죽음으로 이끈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을 병들게 하는 코로나 19보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절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絶望)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는 말은 성경의 요한복음(11장 4절)에 나오는 말이지만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대표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서문을 이 말로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는 병에 걸려 죽어서 이미 무덤 속에 있었다.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도 친지들도 모두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예수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이 말로 그의 책의 서문을 시작했다. 예수도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을 보는 시각이 우리와 달랐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사람들이 말하는 육신을 죽게 만드는 병이 아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은 끝이 아니고 삶의 한 과정이고 새로운 삶에 이르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죽음이 종말이 되는 병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병이 절망이다.
절망은 크게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과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절망’으로 나뉜다. 두 번 째 절망에 빠진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고’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절망에서이건 사람들의 대부분은 절망 안에서 주저앉아 버리기 쉽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는 지금 전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있다. 모든 나라가 다투어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봉쇄령을 내려 국가도 사회도 가정도 개인도 모두가 고립된 섬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점점 확산되어 가는 병의 소식을 들으며 공포와 불안의 노예가 되어서 그냥 하루 하루를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럴 때에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절망이라고 하면 지나친 역설일까? 절망은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동물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절망할 줄도 모른다. 사람이 한번도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최대의 불행이 될 수 있다. 절망 자체는 비참하고 힘든 것이지만 이를 벗어나려는 참된 노력을 통해 ‘내 자신’을 찾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는 우리로 하여금 철저히 절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 절망 속에서 우리는 그 동안 바깥으로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만 맡겨놓았던 ‘내 자신’을 찾아야 한다.
고립된 작은 섬, ‘내 자신’
철저한 절망 속에 허덕이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 우리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나의 존재가 모든 길이 끊어진 작은 섬이 되어 무한한 절망의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끊어진 길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다시 아놀드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으로 돌아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죽은 뒤에 자기가 묻혔으면 하는 죽음의 섬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절망 중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떠서 그림을 살펴보는 사람은 돌아앉은 사공의 자세를 보고 탈출할 길이 있음을 깨닫는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통로라고 믿는 사람에게 이 길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은 끝이 아니고 그 속에서 우리가 ‘내 자신’을 찾고 깨어나면 축복이 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다. ‘죽음의 섬’의 그림에서 돌아앉은 사공의 자세를 보고 길이 있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지 몰라도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속에서 내 자신을 찾고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한다.
이 고난의 시기에 집안에 갇혀 살면서 나의 삶과 내 자신을 돌아보며 또한 이제껏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왔는가를 묵상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 삶 속에 신(神)은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떤 신을 믿고 살아왔는가?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신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결정은 각 개인이 해야 할 일이지만 혹시라도 그 결정에 도움이 될까 하여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끝으로 인용하며 이 글을 끝낸다.
‘이처럼, 절망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2020년 4월 8일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