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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을 보니 나한은 오백을 헤아리는데, 눈은 물고기 같은 것, 속눈썹이 드리운 것, 붕새처럼 둘러보는 것, 자는 것, 불거진 것, 눈동자가 튀어나온 것, 부릅뜬 것, 흘겨보는 것, 곁눈질하며 웃는 것, 닭처럼 성내며 보는 것, 세모난 것이 있고, 눈썹은 칼을 세운 듯 꼿꼿한 것, 나방의 더듬이 같은 것, 굽은 것, 긴 것, 몽당비 같은 것이 있고, 코는 사자처럼 쳐들린 것, 양처럼 생긴 것, 매부리처럼 굽은 것, 주부코인 것, 밋밋한 것, 납작코인 것, 대롱을 잘라 놓은 듯한 것이 있고, 입은 입술이 말려 올라간 것, 앵두 끝처럼 생긴 것, (중략) 눈이 같으면 코가 다르고, 코가 같으면 입이 다르고, 입이 같으면 얼굴빛이 다르고, 모두 같으면 키와 체구가 다르고, 키와 체구가 같으면 자세가 다르다. (중략)[출처 : 이옥, 『완역 이옥전집 1』, 휴머네스트, 349~352]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는 나름 개혁적이고 사상이나 이념 등 문화 전반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몇백년을 내려온 기본적인 사회 구조를 흔들기에는 역부족인 면도 많았다. 경화세족이 전반적인 실권 세력으로 자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신진 사대부들을 밀어내는 일에 열중한 시대였다. 따라서, 출신이 경화세족이 아니거나, 양반 출신이 아니거나, 당시 청나라 등 선진 문화에 먼저 접하고 깨달음을 얻고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은 권력 체계에서 소외되는 상황이 다반사였다.
[내용 발췌 : 이옥, 『완역 이옥전집 1』, 휴머네스트, 349~352]
비천상의 춤사위를 들여다 보았다. 후덕한 얼굴에서 편안하고 따스한 느낌이 전해졌다.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 대웅전 사방 벽에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고, 대부분 춤을 추고 있다. 송광사에는 이력만큼이나 많은 보물들과 볼거리들이 많지만, 오백나한과 더불어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비천상들이다.
이 길을 올해만 세번째 들어섰다. 그만큼 나는 이 절에서 보고 싶은 것이 많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침 햇살을 받아 화려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어느 중년 여자 한분이 묵주를 손에 걸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절문으로 향하는 길가에 고인돌 한기가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이력을 알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얼른 절문 안으로 들어가,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을 재촉하는 것 같다. 이 부근에 오면 내 발걸음은 빨라지고 나도 모르게 총총 걸음이 된다.
이곳 전주와 완주, 익산 부근은 중요한 종교의 성지가 유난히 많다. 그 성지들로 가는 길들을 연결하여 '아름다운 순례길'을 만들었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점은 단일 종교의 성지 순례길이 아니라, 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종교를 떠나 각 종교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성지를 모두 연결했다는 점이다. 자기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울려 살아가는 참종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좋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어느 하나의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종교와 문화가 새로운 정신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평화의 발걸음이다. 또, 까마득한 먼 옛날 우리들에게 ‘참’을 알려주고자 뜻을 높였던 성자들의 혼과 자취를 느끼며 스스로 맑은 영혼을 지닌 성자가 되어 보는 특별한 여행이다.
출처 : 전북연합신문(http://www.jbyonhap.com)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 한분이 앞서 가시면서 금강문과 천왕문에서 문을 지키는 부처들에게 묵례를 하셨다. 그 모습이 너무 경건하여 차마 앞서가지 못하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갔다. 문들을 통해 보이는 대웅전과 부처님이 연등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 송광사는 일주문부터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부처님 까지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어 멀리 정문에서 부처님을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조선 후기의 시대적 한계는 소위 '방황하는 깨친 지식인'을 양산하였고, 그 중의 하나가 '이옥'이었다. 이옥은 정조 14년(1790) 중광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 상재생으로 있었으나, 정조 16년 작성한 글의 문체가 '패관소설체'로 지목되어 국왕의 견책을 받았다. 이후, 정조 19년에도 변하지 않은 문체로 지적되어 과거응시를 금지하는 '정거'에 이어 지방의 군적에 편입되는 '충군'의 명을 받았다. 이옥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유일하게 맞선 문인이었고, '괴이하고 불경스러운' 언어로 저잣거리의 인정과 풍물을 진술하게 그려낸 18세기 소품문학의 결정체를 남겼다.
문체반정이란, 조선 정조 때에, 당대에 유행하던 박지원풍의 한문 문체를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되돌려 바로잡고자 했던 정책. 18세기에 이르러 자못 활발했던 '문예 운동을 위축시키고 문학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발췌 : 다음 국어사전]
송광사 연등탑은 규모가 대단하다. 범종루 높이만한 탑이 연지에 설치된 것까지 포함하면 7~8개로 기억되는데 한결같이 크고 화려하다. 야간에 등불이 켜지면 상당히 화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오면 밤시간에 들려봐야겠다.
송광사는 산사가 아니라 백제식으로 평지에 자리하고 있고, 공간이 상당히 여유있다.
대웅전 건물이다. 사방의 현판이 모두 다른 이름으로 되어 있다.
신라 말기 보조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 이층 법당이었는데 조선 철종 8년(1857년)에 재봉스님이 일층 건물로 다시 세웠다. 대웅전 천장에는 부처의 진리를 찬탄하며 부처에게 음성과 춤 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다른 사찰의 벽화와 달리 채색과 선이 완벽하게 살아 있으며, 한국민중예술과 불교 미술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천장 벽화이다.
[발췌 : 다음백과, 완주 송광사 대웅전]
대웅전 뒷편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초록색 잎들을 세상으로 밀어내었다. 역광으로 빛나는 초록들이 대웅전 건물과 아주 멋드리지게 어울려 있었다. "눈이 부시는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구나" 나 혼자 중얼거렸다. 그 빛에 감탄하면서.
삼성각 뒤 대나무 숲과 주변의 풀들이 아직 지난 가을 색을 띄고 있었다. 일부러 사진을 흑백으로 해보았다. 무척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인다.
이옥은 처음에는 충청도 정산현에 편적되었다가, 경상도 삼가현으로 이적되어 사흘동안 머무르고 돌아왔다. 한양을 떠나 삼가현으로 갔다가 다시 귀경하는 기간은 한달여가 걸렸고, 그 길에서 그는 열편의 글을 남겼다. 이 글들을 남정십편(南程十篇)이라 하며, 그 안에 그가 종남산송광사에 머무르면서 쓴 글이 두편(「절寺觀」, 「연경煙經」) 있다. 「절寺觀」은 대웅전의 모습과 나한전에서 만난 500 나한상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고, 「연경煙經」은 사미승과 '담배연기'를 소재로 나눈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연경煙經」은 <향로전>이 배경이다.
대웅전과 지장전, 관음전을 돌고 삼성각을 잠시 들여다 본 후, 나한전으로 들어왔다. 나한전은 오랜 기간 동안 보수 공사중이고, 옆에 있는 간이 건물에 임시로 나한전을 꾸미고, 불상들과 나한상들을 옮겨 놓아, 참배를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삼성불을 사이에 두고 권속상들과 16나한상, 500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예전에도 송광사를 와봤지만, 근래에 나한전을 주로 찾게 된 계기는 얼마전 이옥의 글을 읽은 연유이다. 그가 묘사한 나한상들의 모습을, 나도 그렇게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우매함으로 몇번을 봐야 그의 표현을 일부만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이 여기를 여러번 오게 된 이유이다. 실은, 아직도 그가 묘사한 모습들을 다 찾아 보지 못했으니, 그것을 핑계로 이후로도 여러 번 찾게 될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송광사의 지리적 위치가 내 시골집과 멀지 않다는 것이다.
나한전에 들어가 간단히 참배하고,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 보면서 이옥의 글에 나온 표현을 찾아 보았다. 표현에 있는 상을 찾으면 반가운 마음도 들고, 찬찬히 살피면서 나 혼자 배시시 웃기도 한다. 가끔은 내 고개를 옆으로 하고 들여다 보기도 하고, 내가 나한상이 되어 본다. 이옥의 마음이 느껴졌다. 얼마나 혼자 웃고 즐겼을까.
'이 순간은 내가 곧 이옥이다.'
창문틈으로 햇빛이 들어와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나한상의 입술부터 어깨선을 따라 밝게 비쳤고,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보였다. 나는 그 빛을 한참을 따라 다녔다. 나한상의 표정이 진지하고 사유의 느낌이 들어 더 그 빛들이 뭔가 의미가 있어 보였다.
익살 맞은 표정의 16 나한상 중 하나.
500 나한상들중 조금은 익살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나한상들을 찾아 보았다.
이옥의 표현이 정말 예리하다는 생각이 나한상들의 표정이나 모양, 자세들을 보면 볼수록 더 강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임시 거처다 보니 몇은 겹으로 비좁은 곳에서 앉아 있기도 하고, 겹쳐져서 얼굴이 잘 안보이는 상들도 여럿이다. 얼른 보수공사가 끝나 다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 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입구쪽 정원에 자리한 홍매화와 부근의 꽃들과 나뭇잎들이 아침 햇살을 역광으로 받아 보석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 나는 그 풍경에 넋을 잃고 움직일 줄 모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여기 완주송광사의 또 다른 특색있는 장소이다. 대부분의 사찰에 있는 소각장이 이곳에도 있지만, 여기 소각장 앞에는 자그마한 돌부처 하나가 지긋이 눈을 감고 좌정하고 있다. 소각장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 곳이다. 뭔가 태워져 버려지고, 떠나가고, 때로는 이별의 아픔을 달래고 보내는 곳.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부처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처님 머리 위에도 봄색이 조용히 찾아 왔다.
얼마전 우리 가족 곁을 떠나간 '재롱이'를 생각하며 불전에서 참배를 드렸는데, 다시 한번 나는 이 곳에서 잠시 조용히 묵상에 잠겼다. 아이들이 재롱이가 입던 옷과 장난감들을 태워 보내달라고 종이 가방에 넣어 보냈다. 시골집으로 돌아가면 마당에서 태워 보낼 작정이었는데, '이곳으로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원에 할미꽃이 심겨져 있었다. 그 중에서 따로 혼자 있는 꽃을 찾아 담아 보았다. 할미꽃을 볼때마다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생각난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절입구에 있는 찻집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경내를 둘러보고 절문을 나서기 전 차한잔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이곳 찻집과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 내가 이른 시간에 왔다가 떠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조만간 이 찻집에서 여유를 가지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인연이 있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마음이 통하는 도반이 마주 앉아 같이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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