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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尼師今記’ 해설 2차분(5-8년)
* 들어가면서 유념(留念)사항* “이미 석탈해(昔脫解)시대 때, 5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분이 바로 ‘정성일 선생’입니다. 좌계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모두(冒頭)에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쪽과 일본열도 구주(九州)에 또 하나의 신라(新羅)를 펼치기 위해서 였던 것이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이를 오로(五路)-군사(軍事)와 ‘네 개의 번국(藩國)’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越南)‘하노이’지방과 운남성(雲南省)의 원강(元江) 주변에는 남로(南路) 그리고 오늘날 한반도 경주(慶州)부근과 일본 구주(九州)에는 수로(水路) 군사(軍事)가 각기 있어서 중국대륙을 사망 라지(四網羅之)한 것이 이미 석탈해(昔脫解)때 이루어 졌음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저죄(抵罪)라고 표현하고 있음은 이미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 1편에서 본바가 있습니다. 은연중 들어난다는 점입니다. 우리 고대사에 파급되는 의미가 이 정도로 크다.”고 과감히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에는 이런 와중(渦中)에서 생긴 여러 사회적인 문제점을 추스르면서, 정서적으로도 조화되도록 한 것으로 보면 된 다는 것입니다. 파사(婆娑)니사금 이라는 것입니다. <[南堂] ‘다섯 신라(新羅)’의 위치비정-사번국(四藩國),구주(九州),오로군사(五路軍事)> 다르게 보게 하는 ‘여러 정보’가 많이 담겨있고, 오독(誤讀)하기 십상인 문장들이 많이 숨어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니다. (이에) 왕(王)과 혜후(惠后)와 사성(史省)이 알천(閼川)에서 하늘에 빌었다. (形容詞)임이 분명합니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떠돌이별’인 경우는 이 천문도(天文圖)에 나타나지 않고, 이 별이 ‘떠돌이 별’로써 언급이 된다는 것이지요. 경우입니다. 이런 현상을 오성취수(五星聚宿)현상이라고 합니다. 이 별들이 28수(宿) 가운데 ‘특정 별자리’인 가령 루(婁)라는 별에 모였을 때 오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는 것이지요. - 박창범 선생이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적힌 고조선 기사를 천문학적으로 설명해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음 - 아무튼 이런 오성취수(五星聚宿) 현상은 오늘날의 천문학으로 계산을 해보면, “과연 이 때에 오성(五星)이 한 지점에 모였는가?”를 검증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있었다.”고 하면 이는 대단히 의미 있는 사료(史料)가 됩니다. 때문입니다. 혹왈성인출(或曰聖人出)이란 그 다음 기록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지요. 경성(景星)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광성(大光星)이 동북(東北)에서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초생달이 뜨는’위치와 비슷한 것이지요. 있습니다. 회삭(晦朔)에 - 그믐이나 초하루에 - 생겨나 달을 도와 밝게 비추게 한다. “남방의 붉은 기운과 동방의 푸른 기운이 서로 연결된 것이니, 남방에 있는 두 개의 누런색 별과 동방에 있는 한 개의 누런색 별의 세 별이 합해져서 경성(景星)을 만든다.”고 한다. 亦名德星 常出有道之國) 제목으로 올린 글입니다만 - 이는 현재 ‘남당 박창화’란에 있음 >> 더욱 강화되는 서성(瑞星)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아무튼 극히 좋은 일의 징조(徵兆)로써 이런 기사(記事)가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조짐이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祈禱)했다.”는 것입니다. 찾아내셨습니다. 속으로 하나가 되어 큰 협조로써 대업(大業)을 이루는 일이 사망라지(四網羅之) 즉 중국대륙 주변에 성공적으로 신라(新羅)를 에워싸게하는 일에 백제와 고구리가 협력한 일이 성공한 셈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를 후생(侯生)이라는 사람이 - 이 후생(侯生)은 수(隋)나라 시절 분음(汾陰)지방의 도사(道士)임- 지니고 있었 는데, 팔괘(八卦)를 거울에 새기고, 그 밖에 28수(宿)를 그림은 물론, 거울 주변에 거북이(龜), 용(龍), 봉(鳳), 호랑이(虎)를 진(陳)법을 치게한 거울입니다. 이 거울은 천지(天地)의 기후(氣候)를 다스리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대해서 소개를 하는 말이 “二十四氣之象形.”로써 기후(氣候)를 조절하는 거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적인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고대적 표현입니다. 것입니다. 이는 “호(戽)에게 명(命)하여 그 물(=수(水))을 호(扈)하게 하라.”라는 뜻입니다. 흔히 ‘파개’라고 말하지요. 이를 바다에 퍼 넣음으로써 (적조(赤潮)가 진 바닷물) 뒤에 뒤따르며(=호(扈)) 뿌리도록 했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삼월(三月)에 팔경(八鏡)의 작용으로 기상이변(氣象異變)이 속출(續出)해서 (적조(赤潮)가 생겨) 물고기가 많이 죽었다. (‘황토 흙’을 실은) 배(船)의 ‘파개-용두레를 뜻함-꾼’들에게 그 물(적조(赤潮)가 낀 물을 뜻함)을 뒤따르며 (황토 흙을) 뿌리도록 했다. 해설과 해석은 이미, 좌계가 <[南堂] ‘다섯 신라(新羅)’의 위치비정-사번국(四藩國),구주(九州),오로군사(五路軍事)> 의 글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기로 합니다. 이를 ‘정성일의 열쇠’라는 말로 압축해서 서술(敍述)하도록 합니다. (聖父-허루)의 딸 오라(烏羅)를 군모(軍母)로 삼았다. 굴(屈)공자(公子) 고을(古乙)을 호성병관(護城兵官)으로 삼았다. 혜후(惠后)가 목욕을 하고 하늘에 기도하며 말하기를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원하건대 남편(파사이사금)을 풀어 주시고, 지금 비록 잠깐이라도 바람을 그치게 해 주소서” (사람을) 지소례(支所禮)에게 보내어 백성들의 집이 무너 졌는지 묻게 하였다. 기상변화의 유기적인 변화를 첵크(check)하는 관습이 있었음이 드러난다는 면에서 중요한니다. 왜냐? 지소례(支所禮)는 서로군사(西路軍事)의 책임자였으니깐 말입니다. 파괴되었다.”와 같은 기록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라(新羅)의 기후(氣候)와 늘상 대비(對比)해서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慮也” 그 뒤에 딸의 이름이 모다(毛多)로 나오고 있습니다. 여겨 말하기를”로 해석해야한다고 봅니다. (出産)한 나이가 48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가 뒤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가?! 하필(何必)이면 신라-왕후인 성모(聖母)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 굳이 갖난 아이를 미래의 내 아내인 성모(聖母)로 할 필요가 있겠는가?”는 말씀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나의 딸 모다(毛多)를 성모(聖母)로 삼아 이로써 왕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베풀고 싶은 마음은 많지만 (*)이미 모다(毛多)가 ‘배달어미’로 있지 않는가?! 어찌 ‘미래의 내 아내인 성모(聖母)로 삼겠는가?! (*) 너는 오히려 풍성하고 뛰어나다. 사성(史省)이 있을 때는 말하지 말라. ( - 사성(史省)이 왕후 자리를 맡길 원하고 있기 때문임. ) 먼 앞일까지 잘 생각해보아라.”라고 말씀하였다. 八月 太君以暑疾崩 于日知宅 上與惠后臨泣曰 “父今棄我 何去” 太君曰 “歸侍先 今此願畢矣 骨門無相殘 努來無相欺 知之乎” 上曰 “諾” 太君乃崩 天地晦冥 上痛哀之 以父今禮葬 于壤井陵門 阿孝今堂皆殉之 不能 禁太君足 智多謀有 大功于社稷 又喜女色所 畜嬪妾 千有余人 生子女七百人 不能盡 知自神以來 初有之事也. 숫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자녀(子女)를 700여인을 두어서 (석탈해(昔脫解)께서 자신의 자녀(子女)를) 알아보기가 불가능했다.(=不能盡知)”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호색(好色)함과 많은 자녀(子女)두기는 ‘自神以來 初有之事也.’이라는 것이지요. 즉 <신(神)이 우주(宇宙)를 창조하신지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하. 憐之 其除死罪 而原之” “3월 왕과 혜후(惠后)가 서울 밖의 주군(州郡)을 돌며 위로했다. 가난한자들에게 창고를 열어 구휼하며 말하기를 (*)“삼황(三皇)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 남해(南海) 차차웅(次次雄),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께서 다스릴 때는 백성들 중에 도적(盜賊)이 없었는데 다 부유함으로부터 이다. 따라 형벌로써 그 댓가를 치루고, - 원래의 인권(人權)을 되찾게 했는데, 이에 백성들이 많이 저촉(抵觸)되는지라, (*) 짐(朕)이 그것을 심히 가엾이 여겨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게 함으로써 - 원래의 인권(人權)을 회복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로 할수 있습니다. 이는 석탈해(昔脫解)이사금때 이미 중국의 네 귀퉁이와 한반도 경주및 구주(九州) 북쪽에 신라가 들어섰고, 여기에 ‘벅수군’인 오로(五路)-군사(軍事)가 들어섰고, 석탈해 자신은 700여명이나 되는 자녀(子女)들을 중국 주변의 5곳 이나 되는 신라(新羅)에 ‘깔아 두었던 것’입니다. 원래의 인권(人權)을 보장받는 것을 뜻함 - 하였는데, 이를 파사(婆娑)니사금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사죄(死罪)를 제외하고는 다른 방법으로써 그 죄를 지불(支拂)하는 방법을 썼다는 것입니다. 라지(四網羅之)하는 굳건한 기반(基盤)을 다졌다는 것입니다. 들어간 것입니다. “사직(社稷)을 세우는 큰공이 있었다.”라는 말 뒤에 “또 여색을 좋아하시는 바가 계셔서(又喜女色所...)..”는 문맥(文脈)상 오기 힘든 용어입니다. 명백히 “사직(社稷)을 든든히 세우는 큰 업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冒頭)의 **** 들어가면서 ****에서 밝힌바와 같이 사망라지(四網羅之)의 무왕(武王)으로써의 토대를 닦은 것은 석탈해였던 것입니다. 무왕(武王)답게 저죄(抵罪)의 그물로써 엄격하게 관리를 하였던 것이지요. 임금이 파사(婆娑) 니사금이신데, 석탈해의 ‘딸’인 혜후(惠后)가 ‘배달어미’로 모셔졌다는 점이 또한 중요합니다. (四藩國)에 주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700여명이나 되는 신라의 왕자(王者)들과 공주(公主)들 입장에서 보면, 혜후(惠后)는 ‘친누이’이고, ‘친 언니’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번국(四藩國)을 통한 해외(海外)의- 이는 사해(四海) 밖을 뜻하는 것임 -의 입장을 ‘배달어미’인 혜후(惠后) 께 호소하기 용이한 것이지요. 지요. 일어섰기 때문에, 어쩌면 현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여인도 있었을것이고, 서로(西路)를 통해서는 실크-로드(silk -load)의 온갖 종족들, 남로(南路)를 통해서는 멀리 ‘인도’에서 온 여인들도 전부 석탈해의 빈첩(嬪妾)일 개연성이 있는 것이지요. 언니’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혜후(惠后)의 ‘배달어미’로써의 파워(power)는 결국 석탈해 - 작(鵲)태자의 자녀수 700여명에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이 나옵니다. 입니다. 2. 순사(殉死)를 거부한 석탈해(昔脫解)의 위대함. 들어서다.”의 뜻인 것입니다. 이유는 부사(副詞)로써 ‘막 순사(殉死)하려하자’의 ‘막’의 뜻입니다. 했지만, 불가능했다. 사전(事前)에 태군(太君)이신 석탈해(昔脫解)께서 금(禁)하셨기 때문이었다.”가 그 뜻인 것이 지요. 말라.”고 엄명(嚴命)했던 흔적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활’을 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知之乎” 上曰 “諾” 太君乃崩 天地晦冥 上痛哀之 以父今禮葬 于壤井陵 (*)門阿孝今堂皆殉之不能 禁太君(*) 足智多 謀有大功于社稷(*) 又喜女色所 畜嬪妾 千有余人 生子女七百人 不能盡知 (*) 自神以來 初有之事也. 8월 태군(탈해이사금)이 더위로 병을 얻어 일지(日知)의 집에서 죽었다. 왕과 혜후가 임종에 임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는 지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하자 태군(탈해이사금)이 말하기를 “(*) 선조(先祖)를 뫼시러 돌아간다. 금생(今生)의 이 세상에서 원(願)했던 바는- 이는 중국대륙(中國大陸)을 사망라지(四網羅之)하는 것임 - 끝냈도다!! (*) 에 있어서 서로 속임이 깃들지 말게 하라.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왕이 “알아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 하였다. (*)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장례(葬禮)에 준(準)해서 장례를 치루었고, (실제(實際)는 장인(丈人)과 사위 사이임) (*) 장지(葬地)는 양정릉(壤井陵)으로 하였다. (殉死)하려했지만, 불가능했다. 태군(太君)이신 석탈해(昔脫解)께서 ‘일체의 순사(殉死)’를 금(禁)했기 때문이었다. 셔서 당신 자신께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머니인 아리대모(阿利大母) 즉 가야계와 석탈해의 딸이자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왕비인 혜후(惠后)가 ‘갈등 -관계’가 해소되고, “손을 잡았다.”라는 조짐으로써 해설(解說)을 하고 있습니다. 있습니다. 파사로 이어지는 정권교체의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以明宣爲覆岩州太守 妻珥氏 복암(覆岩)태수 노을지(弩乙知)가 죽었다. 간주(干州) 혁고(革古)가 (*)유골(遺骨)을 (*) 수습하기를 청하여 허락 하여 장례를 지냈다. 길문(吉門)이 발량(發良)과 처(妻)를 바꾸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다. 모두 사성부인(史省夫人)의 사람들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婆娑) 니사금이 물리친 것과 상관되는 인사이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음을 해설(解說)하였습니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이 3년 5월조에 주간(州干)이란 명칭으로 나옵니다. 3년 5월조는 일선주(一善州)에 왕(王)과, 혜후(惠后), 그리고 사성(史省)부인이 행차했을때, 주간(州干)인 극시(克市)가 ‘낙랑왕(樂浪王)의 옥(玉)으로 된 그릇’을 바친 유명한 사건이 터진 것이지요. 칭하는 용어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신라가 사번국(四藩國)에서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제도를 쓴 흔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단군(檀君), 삼한(三韓)에서 천군(天君)이라 칭한 그 존재가 아닌가 하는 것을 조심스러운 가설(假說)로 세워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올린 아래의 글에서 밝혔기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10월 성부(聖父-허루) 각간(角干)과 태성(太聖- 파사(婆娑)니사금의 어머니인 아리대모(阿利大母))께서 더불어 (*) 순수(巡狩)하여(*) (한반도 경주(慶州)인)일선주(一善州)에 이르러 위로하여 (자기 딸인 치다(夂多)가 군모(軍母)로 있는 수로(水路)군사(軍事)에 신라의 강역군(疆域軍)을 중외(中外) 병마사의 자격으로) 군사(軍事)를 주었다. (자신의 딸인) 치리(夂理 - 치다(夂多)임)가 (*) 있을 수 없는 황당(荒唐)한 이유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 (이를 슬퍼해서) 해찬(海飡)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놀랍게도 정성일 선생은 “여기서 부여는 백제를 뜻한다.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곳이다.”고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 성부(聖父)인 허루(許婁)를 반대하는 세력이 손을 잡은 세력이 백제(百濟)라는 뜻도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백제는 자신의 국호(國號)를 후(後)에 남부여(南夫餘)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부여가 일찍부터 오늘날 복건성 쯤에 진출한 흔적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6년(A.D.131) 1월 왕(王)과 (‘배달어미’이신) 혜후(惠后)와 3분의 성모(聖母)가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골문(骨門)장로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 (그 연회(宴會)의 음식과 술을) 신하(臣下)들에게 나누어 보내어 들게 하였다. (*) 를 뜻함)적인 음(陰)의 세계의 샤만(shaman)인 아세(阿世)를 처(妻)로 한 사람인지라, 그 기운이 달문(達文)에게 옮길까 봐, 극양(極陽)의 식품(食品)인) ‘쌀’을 보내서 (이를 중화(中和)하게 하고) (*) 아기의 상태를 손수 살펴보 았다. 정성일 선생은 삼모(三母)가 (‘신라 왕의 부인 혹은 부인이 될 성모(聖母)를 뜻하며) 이런 삼모(三母)에 대한 기사가 5년 9월조에 있으며, 사성(史省)부인이 그중 한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처(妻)였었는데, 길문(吉門)이 발량(發良)과 처(妻)를 바꾸는 사건이 (4년 7월 조(條)에 나옴) 터졌을 때, 허루(許婁) 가 길문(吉門)이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하는 것에 분노 죽일려고 할 때, <총애(寵愛)를 이미 받고 있는 달문 (達文)이 말렸다. >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결혼의 결과로써 골품(骨品)이 결정되므로, 이런 결혼 자체를 ‘윗분’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있기 때문에, ‘정성일’선생은 “이미 말리는 그때에 달문(達文)은 허루(許婁)의 처(妻)였을 것이다.” 혹은 “그후에 처 (妻)로 바뀌어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배달화백을 하게 되면, 거문성(巨門星)에 -이는 국자부분의 북두칠성의 2번째 별임 - 해당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門)이 있는데, 왕(王)가 여왕(女王) 혹은 간주(干州 - 주간(州干)이에 들어가는 우선권(優先權)이 있는 사람을 소위 골품(骨品)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골품(骨品)을 지닌 자가 화백민주주의(배달화백)에 의해서 ‘비록 우선권’은 있지만, 이 거문성(巨門星)이 상징하는 문(門)을 통과해야하고, “문(門)을 닫아라”, “말아라.”는 권한은 일반 천독(天毒)에 있었고, 이를 총괄적인 관리를 하는 사람이 바로 골문(骨門)-장로(長老)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골문(骨門)-장로의 집에서 여는 연회(宴會)는 결국 ‘일반 천독(天毒)’들이 골품(骨品)의 우선권이 있는 사람 들을 인정해주는 ‘축제(祝祭)’였던 것이지요. 뜻합니다. 문제는 “이 월가(月歌)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인식입니다. 이는 고대의 ‘벅수군’의 상징이 바로 ‘달(月)’ 이었던 것입니다. “달하..노피곰 도댜샤..”로 시작하는 정읍사(井邑詞)를 뜻하는 것이지요. 성(聖)스런 노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월가회(月歌會)를 춘택(春宅)에서 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이 나옵니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라는 편(篇)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卞韓).백제(百濟), 고구리(高句麗),동부여(東扶餘) etc...로 계속 올라가 이윽고 고조선(古朝鮮)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신기한 것입니다. 會)를 부르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을 ‘또’란 명칭을 붙인 것은 <이러한 ‘벅수군’이 국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음으로, 국가(國家)의 반열(班列)에다 놓고, ‘또’란 말을 사용하여야한다.>는 편집방침이 결정되어 있는 듯 합니다. 나 ‘수제천(壽齊天)’이라든가, ‘벅수군’이라든가 하는 일체의 ‘연결고리’를 싹뚝 잘라버리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 니다. 이 ‘싹둑 잘라버림’이 다분히 고의적(故意的)인 것이라는 점을 좌계는 최근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game)’을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절강성(浙江省)에 경주(慶州)가 있었다는 것을 전당강(錢塘江)의 역류(逆流) 현상과 관련시키는 것 등을 보면 눈치챌 수가 있습니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제목을 붙인 것에서도 눈치 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짧다.”라는 또다른 엉뚱한 사실에 있습니다. 은 전부 끝나는 것이지요. 연접(連接)하였고, 노래 부르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가 뒤를 잇고, 이 우사절유택 (又四節遊宅)이란 편명(篇名)은 끝이 납니다. 바뀌어 ‘부유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환기(喚起)시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연출(演出)된 서술방법이라고 밖에는 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동야(東野) - ‘동쪽의 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연(自然) 자체를 하나의 택(宅)이나 궁(宮) 같은 건축물로 비유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동야(東野)로써 지정(指定)되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 총괄(總括) 군모(軍母)을 중심으로 배달화백을 연출하는 동(動)적인 마스게임 총괄(總括) 군모(軍母)를 그 중심(中心)에 두고,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영성문(靈星門)에 각기 가선(歌仙) 이 있으면서, 진법(陣法)을 배달화백에 맞추어서 ‘동(動)적으로 움직이는 마스게임(mass-game)’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許婁)의 부인(婦人)인 것입니다. (七月 善孝大母生宮公 女流宮公 于沙伐)”로 되어 있고 ‘정성일 선생’께서 “대모(大母)라는 직위(職位)는 공통적으로 허루(許婁)의 처(處)에게 붙인 칭호인 것 같다.”라는 해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지요. 오로군사(五路軍事)를 총괄하는 군모(軍母)가 됨은 명백한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이는 신라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조(條)에 나옴) 려면, 왕(王)과 여왕(女王)이 결혼해서 부모 양측이 모두 왕가(王家)인 성골(聖骨)이어야하고, 17관등 중에서 제1 위인 이벌찬(伊伐湌)으로부터 제5위인 대아찬(大阿湌)까지는 진골 출신의 귀족만이 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는 것입 니다. 그 댓가로 왕(王)을 비롯한 중요한 관직(官職)에의 ‘우선권’을 주겠다.”는 대타협에서 생긴 제도라는 것입니다. 즉 노력(勞力)의 댓가로 획득할수 있는 것이 바로 두품(頭品)이라는 신분(身分)이었고, “이 두품(頭品)의 품계(品階) 가 올라가야 획득할 수 있는 관등(官等)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game)은 노래를 바탕으로 진(陣)이 바뀌인다. - 잘 하면, 그 댓가로 최고(最高)로 내마(柰麻) 즉 17관등(官等) 가운데, 11관등을 차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것입니다. 를 통해 인류가 극복하기 힘든 ‘전쟁’과 ‘군사비(軍事費)’의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이 골품(骨品)을 넘어서는 방법도 개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다. 7월 조(條)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잘하면, 친(親)자식이 아니지만, 총괄-군모(軍母)인 선효대모(善孝大母)의 의자(義子)가 되는 법도(法度)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아마도 나이는 11-16 정도되겠지요. 되고, 이들의 칭호는 선동궁공(仙童宮公)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여자들은 무조건 선효대모 (善孝大母)를 ‘어머니’로 칭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내마궁공(奈麻宮公)으로 삼았는데, 이는 ‘벅수군의 총괄 배달어미’이신 선효대모(善孝大母)의 은총(恩寵)을 받아, 7명의 가선(歌仙) 가운데 ‘으뜸가는 궁공(宮公)’으로 판정받었기에, 작위(爵位)를 내린 것이다.”가 되는 것이지요. 지만, 내마궁공(奈麻宮公)이 수공(首公)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에, 그 보다 못한, 12관등인 대사(大舍), 13관등인 소사(小舍), 14관등인 길사(吉士)등을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것입니다. 인계하도록 하면서도, ‘배달화백’에 의해서 저 신라(新羅)가 펼치고 있는 세계에 들어가면, “배달화백의 천독(天毒) 으로 충분히 우리도 마음 놓고 잘 살 수 있다.”는 느낌이 충분히 제공되어서 실제 효과가 나는 듯한 ‘노래를 통한 지휘’를 정확히 해야만 ‘작위(爵位)를 받을 수 있는 궁공(宮公)’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대행사’였던 것인게지요. 일연(一然)스님이 말씀하신대로, 밤새도록 정읍사(井邑詞)를 부르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겠습니다. 2월달에 ‘거국적(擧國的)인 월가회(月歌會)’를 동야택(東野宅)에서 실시했는데, (‘노래로써 벅수군을 지휘한’) 가선 (歌仙) 7명에 대해서 (작위(爵位)로써) 상(賞)을 주었다. 성설(聖雪) 선동궁공(仙童宮公)이 내마궁공(奈麻宮公)으로 발탁 임명되었는데, 이는 (‘벅수군’의 총괄-군모(軍母))이신 선효대모(善孝大母)께서 은총(恩寵)을 베풀어 수공 (首公)이라고 판정했기에, 제11등 관등(官等)인 내마(柰麻)라는 작위(爵位)를 받은 것이다. (*)남로군사(南路軍事)의(*) 군모(軍母)로, 차문(車門)을 이방대사(理方大師)로 삼았다. 何如” 上乃慰惠后曰 “弟固兄之臣 雖貴在下吾妻之子 可以奉神 何可同論” 惠后大喜 以酒勸上 不止 종일 아이를 씻기며 떼어놓지 않고 말하기를 “이 아기가 용(龍)(*)큰 인물(*)의 형상(形象)이 있다. 반드시 큰 국가 를 만들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혜후(惠后)가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아들 덕공(德公)은 어떻게 하구요”라고 말하였다. 비록 귀하다고는 하나 나의 처(妻: 혜후)의 아들(덕공)의 아래에 있을 뿐이다. 이로써 (지마가) 신(神)을 섬김이 마땅 하다. 어찌하여 같음을 논함이 옳은가”라고 하였다. 혜후(惠后)가 크게 기뻐하며 왕에게 술을 권함이 그치지 않았다. 길포사(吉鮑祀)로 지금까지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에 나왔고, 이는 포석사(鮑石社)의 이칭(異稱)으로 여겼 었음. 그런데 위 원문에는 ‘行吉于鮑祠’로 되어있음. 이는 ‘행우길포사(行于吉鮑祠)’를 오기(誤記)한 것으로도 볼수 있음. 그러나 길포사(吉鮑祀)가 아니라 길우포사(吉于鮑社)가 별도로 있을 수도 있으나, 이다. 허루(許婁)가 아니면, (군사(軍事)의 움직임에 대한 접신(接神)능력을 통제하기가) 불가하다”하고는 중외 (中外) 상군모(上軍母)로 임명하고, 길포사(吉鮑祀)로 보냈다. (上曰 “阿世女豪也 非許婁則不可” 命爲中外上軍母 使吉鮑祠)는 구절이 있으므로 오기(誤記)가 확실해 보입니다. (行吉)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떠난 것으로 보아야하는 문장이긴 합니다. 된 것이지요. (吉鮑祀)로 길행(吉行)케 했는데 (*), 길포사(吉鮑祀)의 주인은 허루(許婁)와 아세(阿世)다. 백성이 많았다. 위 원문(原文)에 나오는 제거(齊居)는 2년 5월 조(條)에 의하면, 월복태자(月福太子)가 ‘고구리’에서부터 ‘해상(海上)’ 에 이르기 까지 온갖 신선(神仙)을 찾아다니며, 그 법도를 익힌 신선(神仙)가문과 화랑(花郞)가문을 총괄하는 사람 이었는데, 그 “법통(法統)이 제거(齊居)에게 넘겼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남도(南桃)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과 ‘배달어미’이신 혜후(惠后)께서 조회(朝會)를 받는 곳으로 파사니 사금기(婆娑尼師今記)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아세(阿世)라는 특이한 샤만(shaman)이 해외(海外)의 -이는 사로군사(四路軍事)를 뜻함 - 군사적(軍事的)인 움직 임에 대해서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에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콘트롤(control)하는 사람으로써 허루(許婁)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지목한 것이지요. 따라서 허루(許婁) 역시 무사(巫事)적 접신(接神)능력이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계속] 가배(嘉俳)의 비밀: ‘가림토-결승(結繩)’의 경연(競演)대회 원문(原文) 니다. 여자들을 거느리고 편당(偏黨)을 만들었다. (=을야(乙夜)에 일을 그만 두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의 다소(多少)를 살피게 해서, 진 편에서는 이긴 편에 사례(謝禮)하게 했다.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월음으로 뒷사람이 이 소리를 인연으로 해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했다. 순수한 의미는 ‘실(絲)을 움직여 어떤 체계적인 활동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조직(組織)이란 말에 직(織)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여러 인연(因緣)줄을 짜다’라는 개념을 살린 것이지요. 상호(mutual)언어습득 능력을 고도로 발휘하는 노우-하우(know-how)가 있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입니다. 으로 읽고, 뒷 글자를 음(音)으로 읽는 방법- 보면 “만났소. 만났소”는 말입니다. 내내 대화를 하다고, 그 족속이 “기왕(旣往)이면 이쪽 팀(team)을 만나겠다.”라고 판정을 하게 되면, “그 이긴 편이 ‘만나게 되는’ 경진대회(競進大會)가 아니었는가?”하는 생각을 하게하는 내용입니다. 가(嘉)는 ‘즐겁고, 뛰어난, 기꺼운 만남’등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배(嘉俳)는 ‘모르는 언어소통’을 위해서 보조(補助) 로 여러 가지 가면(假面)과 분장을 떠올릴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으로 보여주면서, 그 소리를 반복(反覆)하면, 한달 후쯤 대략 소통이 되게 하는 경진대회(競進大會)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닌 것으로 사서(史書)에 나오기 때문에, ‘길쌈내기’일 가능성보다는 ‘가림토’를 바탕으로 한 ‘결승(結繩) 경진대회’ 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것이지요. 언어를 시각화(視覺化)하는 장면을 선보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들이 다스리게 하고, 우(右)는 병관(兵官 : ‘벅수군 장교’를 뜻함)이 다스리고 하여, 신라의 사번국(四藩國)의 예하 (隸下)의 백성들을 신라인(新羅人)과 평등하게 다스리게 했다.” 경진대회’가 똑같이 2편으로 나뉘어져 사번국(四藩國)에 참여한 다양한 언어를 쓰는 번국(藩國) 예하민(隸下民)에게 까지 파급 시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이상 “ ‘길쌈내기’인가? 아니면 ‘결승(結繩) 경연(競演)대회인가?”의 해설을 마침 * 8월에 고정(高井)에서 ‘큰 가배(嘉排)’행사가 열렸는데, ‘배달어미’이신 혜후(惠后)께서 스스로 ‘가림토를 바탕으로 한 결승(結繩)의 시각화로써 쌍방향적인 언어소통’을 연출(演出)하셔서 백성들에게 시범(示範)을 보이셨다. 爲山宮也. 以權妻毛優 妻康造太子 行吉鮑祠 ‘정성일 선생’의 해석(解釋) 후(后)의 예로 장사지냈다. 성부(聖父)가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 (*)나의 처(妻)는 현명하여 나를 가르쳤다. (*) 현재 의 부귀를 보기를 버리고 떠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내 처(妻)의 사당(祠堂)을 짓기를 생각하고 이것을 산궁(山宮)으로 삼았다. 성부(聖父)의 권처(權妻)는 동녀(童女)로써 ‘고구리 사초(史抄)’에 등장하는 선처(仙妻)와 비슷한 입장인 듯. 여기서 수련해서 ‘벅수군’과 샤만(shaman)의 능력을 키웠던 것으로 보여짐. 또한 강조태자(康造太子) 역시 궁공(宮公) 즉 선효대모(善孝大母)에게 작위(爵位)를 받은 왕자(王者)로 보여짐. 추측일뿐, 더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의 기록을 봐야함. 금의 모, 유리이사금의 처)이 스스로 성부(聖父)의 정처(正妻)가 되기를 원하여 왕(王)이 그것을 따르기를 바랐으나, (*)제거(齊居)가 (태성이 성부의 정처가 되는 일을) 간언하어 시행(施行)하지 않았다. (*) 제거(齊居)는 신선(神仙)가문과 화랑(花郞) 가문을 2년 5월 조(條)에 들어나듯이 법통(法統)을 이은 사람이기 때문에,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자신이 제거(齊居)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밖에 없는 정신적 귄위가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12월 강조태자(康造太子)를 양정대사(壤井大師)로 삼았다. 월공(月公)을 부사(副師)로 보좌케했고, 성문(星門)을 도두(都頭)로써 보좌(輔佐)케 했다. 그런데 강조태자(康造太子)는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에 나오는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태자(太子)라는 명칭을 쓰면서도, 신기하게 그 부모(父母)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것과 관련, 이런 의자(義子)로써 차기 ‘벅수군’의 대권(大權)을 마치 성부(聖父) 허루(許婁)처럼 수행해 나가는 인물인 듯한 느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 관할하는 길포사(吉鮑祀)였는데, 강조태자(康造太子)와 결혼을 한 모우(毛優)가 이 길포사(吉鮑祀)에 보내진 것을 통해서 또한 짐작할 따름입니다. 문제는 부사(副詞)가 된 월공(月公)이란 표현에 곰곰이 따져보아야할 면이 있습니다.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 보다는 ‘벅수군’을 총괄하는 직책(職責)중에 하나로 여겨집니다. 즉 월공(月公)은 수시(隋時)로 바뀔수가 있으나, 언제나 강조태자의 부사(副師)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문(星門)이란 말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반 천독(天毒)을 일월성신(日月星神)과 비유해서 말할때에는 ‘별(星)’ 로 나타냅니다. 도두(都頭)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낭도(郎徒)들을 총괄하는 명칭입니다. 이는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가 워낙 길게 진행이 되기 때문에, 좌계가 해설(解說)한 내용과는 달리 ‘정성일 선생’의 해설이 더 정확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 ‘정성일 선생’의 해설(解說) 옮김 - 권처 모우나 월공, 성문 등은 강조태자의 감시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창고의 곡식을 대여해주는’ 역할을 창름(倉廩)제도를 고치도록 하고 (*) 그 부(部)의 군장의 책임을 묻도록 명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기부(漢祇部)의 역할 가운데, 창름(倉廩) 즉 ‘백성의 살림살이가 어려울때 곡식을 대여해주는 기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6부 연구를 함에 있어 새로운 사료(史料)가 나온 것이지요. 使吉鮑祠 대성대사(大成大師)로 삼았다. 아세(阿世)의 딸 도실(道失)을 가량(加良)에게 시집보내고 군모(軍母)로 삼았다. 성부(聖父)의 딸 과노(果老)를 군기(君己)의 처로 삼고 길포사(吉鮑祀)를 부리게 하였다. 를 순행(巡行)하여 (*)무기(武器)체계를 새롭게 준비토록(*) 하였다. 1. 마제는 눈여겨 볼 인물이다. 지마이사금의 장인이다. 교체된 듯하다. ‘정성일 선생’의 해석 기도하도록 하였다. ‘정성일 선생’의 해석(解釋) 삼고, 가서(可西: 허루의 딸)를 숙공(叔公)에게 시집보내고, 가해(可亥)를 대개(大盖)에게 시집보냈다. 태성(太聖)과 성부(聖父)에게 바쳤다. 그런데 이미 <[계속] ‘流沙-統制’로써 silk-load의 진입을 허가한 신라, 월남(越南)의 계림(鷄林)신라>에서 언급했 듯이 변산(卞山)은 바로 월남(越南)의 산원산(傘圓山)입니다. 이제 와서 바치는 것을 보면 태성(太聖)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또 수로왕(首露王)의 가락국(駕洛國)의 중심지가 광동성(廣東省)으로 나옵니다. ‘정성일 선생’의 직관(直觀)이 타당 한데, 태성(太聖)은 전체적으로 보면 금관가야 출신인 듯한 인상을 좌계는 받고 있습니다. 선효대모(善孝大母)는 ‘벅수군 총괄-군모(軍母)’이기 때문에 그 자식은 친자식이든 의자(義子)이든 의녀(義女)이든 간에 궁공(宮公)이란 칭호를 내림을 알수가 있습니다. 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허락’을 받는 ‘가족적 친밀감’이 있었음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 자매(姉妹)는 친-자매라기 보다는 성씨(姓氏)가 다르기 때문에, ‘벅수군’에서 의(義)-자매(姉妹)임이 역시 드러 난다고 볼수 있습니다. 대신하게 하였다. 내외(內外)의 곡식(穀食)을 (*)비축(備蓄)관리케 하였다.(*) 니사금에 의해서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태성(太聖)고 성부가 이 변산(卞山)에서 돌아올 때,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으 대동(帶同)하고 돌아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서 맡긴 일이 창름령(倉廩令)이란 것인데, 이는 7년 정월(正月)조에 소개된 창름(倉廩)과 관련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 ‘창고의 곡식을 대여해주는’ 역할을 창름(倉廩)제도를 고치도록 하고 (*) 그 부(部)의 군장의 책임을 묻도록 명 하였다. 이는 한기부(漢祇部)의 가장 요직(要職)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으로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원문(原文) 태공례(太公禮)로 장사지냈다. (*)변인(卞人: 변산주(卞山州) 사람들을 뜻함) 이 사당(祠堂)을 지어 대국신(大國神) 이라고 불렀다. 출우(出尤)를 나령군주(那靈郡主)로 삼고, 적지(赤旨)를 일모성주(一牟城主)로 삼았다. ‘쌀’을 내렸다.(韓那生 許婁子穀公 賜米)” 의 한나(韓那)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나대모(韓那代母)가 죽었을 때, “변인(卞人)들이 사당(祠堂)을 지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변인 (卞人)이 어떤 존재인가?”가 문제됩니다. ‘파견’되었지만, 변산주(卞山州) 자체에서 받들어 모신 군모(軍母)는 오히려 허루(許婁)에게 보내진 듯한 느낌을 주는 사료(史料)입니다. (四路軍事) 지역의 ‘벅수군’ 자체 내에서 군모(軍母)로 모신 사람은 성부(聖父)의 밀처(密妻)로 중앙에 몰려드는 것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四藩國)에서 ‘벅수군’의 성부(聖父)의 밀처(密妻)로써 보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나(韓那)는 신라의 제4 번국(藩國)인 변산주(卞山州) 추화주(推火州)를 포괄하는 군모(軍母)로써 중앙에 보내진 것이지요. 군모(軍母)라는 입장에서 대모(代母)로 칭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일으키게 하는 사료(史料)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사(記事)가 7년(A.D.132) 2월 조(條)에 “후리(厚理)를 성부(聖父)의 밀처(密妻)로 삼고 길포사(吉鮑祀) 로 보냈다. (以厚理爲聖父密妻 行吉鮑祠)”는 것을 통해, 그 가능성을 더욱 크게 하고 있습니다. 파악하게 하는 성지(聖地)’로써 항시 언급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글자로 변해서 임명된 것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以聖父密妻紇古 爲大母 修太子職事)” 그런데, 여기서의 태자(太子)는 제2의 허루(許婁) 즉 ‘벅수군’의 성부(聖父)로 수업(修業) 중인 강조태자(康造太子)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벅수군’ 중앙(中央)을 맡는 사람을 교육시키고 있으므로, 원래는 대모(代母)였으나, 대모(大母) 로 그 직책(職責)이 바뀐 것으로 생각됩니다. 해서 대국(大國)에 속하게한 신(神)이란 뜻으로 대국신(大國神)으로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태공례(太公禮)란 어떤 나라가 세워졌을 때, 그 초대(初代)왕(王)은 태조(太祖)로 모시고, 그런 기반(基盤)을 마련한 가계의 선조(先祖)를 흔히 태공례(太公禮)로 장사지내지요. 변산주(卞山州) 입장에서 보면, 한나대모(韓那代母)는 ‘대국신(大國神)’으로 모실만 한 여인(女人)이고, 또 신라(新羅) 중앙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런 대모(代母)를 많이 껴안음으로 인해, 신라가 자소국(字小國)으로써 그 기반(基盤)이 늘어나기 때문에 태공례(太公禮)로 모실만 한 것이지요. ‘정성일 선생’의 해석(解釋) 以太后禮葬 于蛇陵門 分骨于壤井及卞山 聖父請殉之 不許 열지 않았고 눈과 비가 그치지 않았다. 성부(聖父)허루)가 제거(齊居)에게 중외(中外)의 선무(仙巫)를 경도(京都)에 모이도록 하여, 큰 기도를 행하려 하였으나 기도 이전에 태성(太聖)이 죽었다. 왕이 태성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태후례(太后禮)로 사릉문(蛇陵門)에 장사지냈다(이 말은 태성이 파사이사금의 어머니임을 뜻함). 뼈를 나누어 양정(壤井)(석탈해의 무덤이 있는 곳)과 변산(卞山: 일지 갈문왕의 무덤이 있는 곳) 에도 장사 지냈다. 성부(聖父)가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허루가 왜 따라 죽으려 했는지 알 수 없다. 탈해이사금기가 없는 한계인 것 같다. 과 덕공태자(德公太子)가 3모와 8처를 거느리고 뜰에서 절을 했다. 월가회(月歌會)에서 궁공(宮公)들에게 작위(爵位)를 부여할수 있는 성부(聖父)의 정처(正妻)를 뜻하는 것이지요. 대해서 내마궁공(奈麻宮公) 내린 사건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릉문(蛇陵門)에 그 장지(葬地)가 있는 것이지요. (紙摩)를 떼어놓지 않고 계속 씻는 행위를 하자, “내아들 덕공(德公)은 어찌하시고요?”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장본인이다. ‘정성일 선생’의 해석(解釋) 마제(摩帝)를 (*) 안군사(按軍使)로, 노문(弩門)을 수로군사(水路軍事)로, 귀공(歸公)을 변산(卞山)태수로 삼았다. 골문(또는 화백)에 의해 좌지우지 된 모양이다. 生也. 에는 행길(行吉)로 표현함. 혜후(惠后)가 성부(聖父)(의 밀처(密妻)) 흘고(紇古)를 신정(神井)의 주인으로 삼았다. 기길(其吉)과 골치(骨夂)는 흘고(紇古)가 낳은 자식이다. 골문(骨門)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중요한 인물이나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성부(聖父)는 루마(婁麽)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조을(早乙)을 (*)품주(稟主)로써 (잉신(仍臣)으로 딸려 보내게 했다.(*) (四藩國)의 벅수군 군모(軍母)는 성부(聖父)의 밀처(密妻)로 옮으로써, 대모(代母)가 되는 것임을 우리는 살펴보았 습니다. 그런데, 이 대모(代母)가 ‘벅수군’의 차기 성부(聖父)인 태자(太子)를 교육시키는 직무(職務)를 담당할때에는 대모 (代母)에서 대모(大母)로 그 이름이 바뀌는 것을 위 본문(本文)에서 알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위 본문에 ‘태자’로 나온 것은 ‘신라 왕’이 될 후계자(後繼者)로써의 태자가 아니라, 성부(聖父)의 후계자가 될 강조태자(康造太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공(晉公)은 나이가 많고, ‘나이 어린 군모(軍母)’를 -따라서 당연히 허루(許婁)의 딸임-시집보낼 때, 잉신(仍臣)으로써 보내는 조을(早乙)을 품주(稟主)로 일단 임명하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품주(稟主)를 딸려 보낸다는 것은 결국 군모(軍母)가 맡은 역할이 이러한 ‘재정과 기밀’을 다루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잉첩(仍妾)은 ‘어리신 마님’을 대신(代身)해서 ‘성(性)적인 봉사’도 하는 것이 고대의 법도(法道)였습니다. 품주(稟主)로 임명된 조을(早乙)은 잉첩(仍妾)입니다. 9월 조(條)의 기록을 보면, 진공(晉公)의 ‘애’를 임신한 기사 (記事)가 적혀있습니다. 대모(代母)인 한나(韓那)의 사당)의 사당(祠堂)과 합하였다. 그 이름을 부르기를 쌍신(雙神)이라고 하였다. 사을나(沙乙那)를 (사당(祠堂)의) 주인(主人)으로 임명하였다. (*)또 이날 마지나(馬知那)를 ‘인?사 태두(刃?師大頭) 로, 영공(永公)을 전중랑(殿中郞)으로 임명하였다. (*) ‘정성일 선생’의 해석(解釋) ‘정성일 선생’의 해석 (爵位)를 수여하였다. 루마(婁麽)가 품주(稟主)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제 군모(軍母)로써의 역할을 담당할 만한 위치에 올랐음을 뜻합 니다. 그런데 잉첩(仍妾)으로 “따라갔던 조을(早乙)이 진공(晉公)의 애를 임신(姙娠)하고, 7품(品)의 대모(大母)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군모(軍母)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에 따르면, 동택(冬宅)은 가이택(加伊宅)으로 나옵니다. 가이(加伊)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모릅니다. 단 ‘아이누’사람들이 토지(土地)를 ‘가이(加伊)’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온천(溫泉)이 있는 토지’가 가이(加伊)의 뜻이 아닌가?”하고 추측해 볼수도 있습니다. 겨울에 월가회(月歌會)를 열려면 ‘따듯한 곳’이어야 하니깐 말입니다. 를 열었다. 지소례(支所禮)를 호성대사(護城大師)로, 군기(君己)를 성부(聖父)의 사신(私臣)으로 삼았다. (*) 선효(仙孝:대모)를 선도산(仙桃山)의 주인(主人)으로 바꾸었다.(*) ‘婆娑尼師今記’ 해설 3차분(9-12년) - 삼정(三正) (**) 알림 해석(解釋), 해설(解說)에 미흡한 점이나, 새로운 의견이 계신 분들은 남김없이 ‘댓글’로써 질정(質定)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회를 받았다. 以君己妻果弩妻夂良 以聖父密妻召于那妻君己 소씨(召氏: 명선(明宣)의 처, 도씨(都氏)의 여동생)를 처로 삼게 하였다. 노문(弩門)을 일선주(一善州) 태수로 삼고 치량(夂良)을 수로군사(水路軍事)로 삼고 활지(活祗)를 대성대사(大成大師)로 군기(君己)의 처(妻) (*)과노(果弩) 를(*) 치량(夂良)에게 시집보내고, 성부(聖父)의 밀처(密妻) 소우나(召于那)를 군기(君己)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7년(A.D.132) 2월 조(條)에 보면, “성부(聖父)의 딸 과노(果老)를 군기(君己)의 처로 삼고 길포사(吉鮑祀)를 부리게 하였다. (以聖父女果老 爲君己妻 使吉鮑祠)”란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과노(果老)=과노(果弩)’인 셈이지요. 이는 ‘간시(干詩)=간시(干時)’로 뜻이 달라도 음(音)만 같으면, 혼용 (混用)해 쓰던 습관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되었다.”는 것이 깊은 관심을 쏟아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 틀림없습니다. 대모(代母)로써 존재하였던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7년(A.D.132) 11월 조(條)에서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태공례(太公禮)로 장사지냈다. 변인(卞人: 변산주(卞山州) 사람들)이 사당(祠堂)을 지어 대국신(大國神)이라고 불렀다. 딸을 군모(軍母)로 해서 중앙집권적인 ‘대모(大母)-매개체’로 작용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사번국(四藩國)의 예하민 (隸下民)입장에서 의사결정이 번국(蕃國)에 모여든 소국(小國)들 입장을 필터링(filtering)하는 역할임을 7년 11월 조(條)에서 우리는 읽어낸 것이지요.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이른바 ‘쌍방향적인 통제’가 있게 하는 씨스템(system)의 탄력성으로 보여 지기 때문인 것이 지요. 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으로 삼았다.”하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결정’을 더 이상 필터링(filtering)할 필요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벅수군의 중앙-비서실장에게 처(妻)로 갈수 있었 던 것이지요. 대모(代母)를 보낼 필요가 있을까?!”하는 완벽한 통합이 된 지역이 있음을 뜻합니다.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가 워낙 긴지라, 혹 나중에라도 관련된 기록이 나올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친(親)히 만나보거나’, 혹은 왕(王)이 정식으로 의관(衣冠)을 갖추어서 삼정승(三政丞) 을 만나볼 때, 쓰이는 언어입니다. 즉 ‘각별히 신경을 써서 만남’을 뜻하는 용어인 것이지요. 왕(王)과 혜후(惠后)가 (*)각별히 불러 만났고, 위로(慰勞)하였다.(*) 쌀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성)주를 숙공으로 삼고, 가서(허루의 딸)를 숙공에게 시집보내고, 가해를 대개에게 시집보냈다. 나옵니다. 입조(入朝)했다. (加西與夫叔公 引其孿子 入朝)”로 되어 있어, 숙공(叔公)으로 되어 있으나, 1남2녀를 낳았을 때에는 ‘古陀耶君 加西 生一子二女’로 군주(君主)가 숙공(叔公)에서 가서(可西)로 바뀐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혼여행’을 길포사(吉鮑祀)로 떠나는 기록이 나옵니다. 길행(吉行)을 떠나게 했다. 길포사(吉鮑祀)의 주인은 허루(許婁)와 아세(阿世)이다. (四月 以君己爲大成大師 妻以聖父女加西 行吉于鮑祠 許婁與阿世主之)” 큼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접신(接神)능력으로써 파악하는 그런 인물로 파사니사금기(婆娑尼師今記)에는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律書): 병법서를 뜻하며, 강한 음기(陰氣)의 세계를 뜸함’의 기운(氣運)을 중화시키기 위해 극양(極陽)의 식품인 ‘쌀(sal)’를 갓난아기에게 내리는 샤마니즘 적인 처방이 누차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닐까 하는 추측을 일으키는 대목입니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聖地)로 묘사되어 있는데, 고타군(古陀郡) 혹은 고타야군(古陀耶君)이란 명칭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곧바로’ 컴뮤니케이션(communication)되는 지역으로 중요시여기는 성지(聖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이지요. 과의 통신이 원할 해야 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고타군(古陀郡)일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여 오늘날 경상도 안동지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통해 원거리 통신을 하는 장소(場所)를 뜻하는 것이라면, ‘다섯 신라’ 안에 두루 있었을 지명일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원거리-군사상황을 접신(接神)되어 알아내는 능력’을 이미 획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를 흔히들 권도(權道)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구리 사초(史抄)에 보면, 신기하게도 동녀(童女)가 노왕(老王)의 처(妻)로써 생활하는 것이 나오는데, 이를 선처(仙妻)라고 이름을 붙여서 해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정>라는 글이 한편 있습니다.) 하는 사료(史料)입니다. 권처(權妻)를 보내는 쪽은 해외(海外)의 여러나라들이 신라 왕에 의해서 자소(字小) 즉 이대사소(以大事小)의 대상이 되는 소왕(小王)의 ‘딸’일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어머니’라고 부르는 습관을 키우게 되고, 이러한 권처(權妻)제도는 신라 왕가(王家)로 하여금 ‘이대사소(以大事小)’ 하는 기풍을 키우는 것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위 기사에 나오는 현아(玄兒)는 그대로 남아서 출산(出産)을 한 경우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전(戰)은 전쟁(戰爭)의 뜻이 일반적이나,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는 용례(用例)에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활을 쏘아서 상입고 도망치는 짐승을 계속 쫓아다니다가 받힌다든가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出獵爲戰’의 뜻은 “사냥을 과격(過激)하게 해서” 정도로 하면 무난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9년 10월 조(條)에는 이 애공(艾公)의 딸을 다시 불태(不怠)가 낳는 기사(記事)가 있다. 후처(後妻)로 들어왔고, 애공(艾公)과 나이가 엇비슷했으리라는 추측이 간다. (*)불태(不怠)가(*) 그의 아들 예(애)공이 대신하도록 청하여 허락하였다. 이는 ‘쌍둥이’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알아보기 쉬운법입니다. ...(或謂韓公仲曰:「夫孿子之相似者,唯其母知之而已;利害之相似者)”에서 쌍둥이=연자 (孿子)에서 드러납니다. 1마리를 바쳤다. 왕(王)과 혜후(惠后)가 그 아이들을 보았다. 숙공에게 옷과 술을 내리고, 농사대두(農師大頭)에게 명하여 청우전(靑牛典)을 설치하도록 하고 청우(靑牛)를 기르도록 하였다. 들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父 聖父曰 “武臣思安非其道 可罪之” 史省曰 “身恙 而不許 非骨肉之情也” 乃勸聖父 許之 국경을 수비하느라 나가 있어 몸과 집이 좋지 못하고 자녀들 또한 경도(京都)만을 생각하고 있으며, 첩 또한 폐하 를 뵙기를 원하므로 첩의 부부가 일년 동안 휴가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가히 허물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자 사성(史省)이 말하기를 “몸의 근심이 있는데 허락하지 않는 것은 혈육(血肉)간 의 정(情)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내 성부(聖父)에게 권하니 (성부가) 허락하였다. (京都)로 돌아오게 하였다. 왕이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일지신군(日知神君)의 동쪽에 있는 길문(吉門)의 집을 (*) 짓도록 하였다.(*) 可赦汝母罪 吉門大喜 其名曰 功門 왔을 때 태어난 자식이다. 이때 나이 5세였고 예쁘고, 재주와 지혜가 있어서, 능히 성부(聖父)로 하여금 웃게 하였다. 성부(聖父)가 도문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로써 너의 어머니의 죄를 사면하게 된 것은 너의 공로다”라고 하자 길문(吉門)이 크게 기뻐하며 그 이름을 “공문(功門)”으로 바꾸었다. 맨처음 도문(逃門)-문(門: 길문(吉門)을 뜻함)으로 도망(逃亡)옴 -이란 뜻으로 썼다가 도문(都門) - 도시(都市)의 문(門): 이는 길문(吉門)이 건강이 안 좋아 경도(京都)로 옴을 뜻함 -으로 적었다가, 다시 도문(逃門)인지 도문(都門) 인지 모르는 ‘도문’이란 아이 이름을 공문(功門)으로 바꾸었는데, 그 사이에 아버지 길문(吉門)이 항시 개입이 되어 있는 구조(構造)로써 설명을 하고 있음. 명하여 그 이삭을 모으게 하여 (*)조정(朝廷)의 묘당(廟堂)에(*) 공물(貢物)로 바치게 하였다. 한제(閑帝)를 골모(骨母)로 삼았다. 에 또 다른 골모(骨母)가 등장하는지 유의해야할 장면임. 夢見 儒理尼今 以大穗授之曰 “可以爲神穗” 乃告 于尹公尹公曰 “大兆也 不可語人 可以驗之” 遂沐浴 行禱 而合宮 果 得神胎 公夫妻 自喜 于心曰 “吾夫妻 夂淪 不明 今有大慶 無以報神 只可垂憐民草 無失慈愛也” 삼니금(彡尼今)에 대한 가설(假說)’이란 글이 있습니다. (*) 의장(和白會議場)에 갔다.(*) 왕(王)과 혜후(惠后)가 그곳으로 행차하여 남자 노인들에게 술을 (*)내려주어(*) 들판에서 두루 칭송하는 노래를 (*)번졌다.(*) 이삭이 로구나”하였다. 이내 윤공(尹公)에게 고하여 말하니 윤공(尹公)이 말하기를 “매우 좋은 조짐이다, 다른 사람 에게 이야기를 말 하지 말라. (*)가(可)히 실험해 볼일이다.(*)”고 하고 드디어 목욕(沐浴)을 하고 신에게 기도한 후에 합궁(合宮)을 하여 그 결과로 (*)신태(神胎)를(*) 얻었다. 물결이 뜻하는 것은 배달화백을 통해서 통합범위가 한계가 있다.’는 좌절에 대해서 그렇지 않음을 뜻함 - (*) . 지금 큰 경사(慶事)를 (*)맞이하였으니 신(神)의 보답함이 없으리오?!.(*) 다만 민초(民草)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애로움 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꿈에 유리이사금이 나타난 것이 유리이사금의 장자로 바뀌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12월 알천에서 큰제사를 지냈다. 가야와 낙랑과 소문의 백성들 역시 줄을 서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집안의 등급에 따라 사람이 줄을 섰다. 집안이 넉넉해지고 사람들은 늘어났다. 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양곡을 주지 않았다. 개조차도 술지게미를 먹지 않았다. ‘배달화백의 통합범위가 한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뜻하는 신(神)의 보답이 없으리오?”입니다. 아시아(Asia)를 통합하는 긴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이것이 신라(新羅)와의 전쟁에 의해서 좌절되는 기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일은 스스로 소문으로 돌아가 주인이 되어 화친을 청하고, 셋째 청예는 금관(가야)로 도망쳤다.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서, 정책(政策)을 편 결과가 위 12월 조(條)에 나오는 것입니다. 민초(民草)를 사랑하고 자애롭게 대하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지요. 늘어나도록 하는 정책을’(*) 주도한 사람이 윤공각간 (*)임에 틀림없다.(*) (**) 고친 부분 끝 (**) 아들(조카)이다. 가기(加其)의 딸 가대(加大: 성부의 딸)를 처로 삼았는데 역시 성부의 사위다. 蝦盧爲理方大師 하사하였다. 장루(長婁)의 아들 장세(長世)를 남로병관(南路兵官)으로 삼았다. 하로(蝦盧)를 이방대사(理方大師)로 삼았다. 일종의 제천(祭天)행사였습니다. 그런데, 대축(大畜)은 ‘배달화백’을 할때에 출마(出馬)하는 사람의 가축(家畜) 으로 비유해서, 이를 ‘끌어주는’ 전문(專門)관료(官僚)를 관리하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귀한 사료(史料)로 보입니다.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김알지의 사망기사는 30년 7월조에 있다. “我有孫矣” 밝게 비추었다. 윤공(尹公)이 (*) 일찍이(=夙) 이루었던 - 사용하였던 - 각하여 그 이름을 주길 희망(希望)해서 ‘일성(逸聖)’이라고 불렀다. (*). 대수(大樹) 각간(角干)이 아이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에게 손자가 생겼다” 라고 말하였다. 모두 차서 이에 창고를 늘리도록 하였다. 혜후(惠后)가 그것을 허락하여 수로대사(水路大師)에게 명하여 백 척의 배를 치장하여 그 배편으로 보냈다. 삼니금(彡尼今)을 보내는 문제를 상의한 것 같다. 나군(多波那君)의 처(妻)가 다파나국(多波那國)의 삼니금(彡尼今)에게 갔다면, 다파나군(多波那君)이 죽은 곳은 신라(新羅) 그것도 경도(京都)부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자소국(字小國) - 이대사소(以大事小)로써 해외(海外)의 여러 소국(小國)의 왕(王)들을 모시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듯이 작(鵲)태자가 신라(新羅)에 건너가서 석탈해(昔脫解)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니다. 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波那國)에서 까지 가서 작(鵲) 태자를 낳게 되었는가?”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해서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운송(運送)해 주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듯한 인상을 준다. - 왜 고구리(高句麗) 유리왕이 그곳에 까지 가서 작(鵲)태자를 출산(出産)하게 되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간과(看過)하고 있습니다. 할 때의 광경(光景)을 묘사하는 글에 분명히 나오고 있습니다. 국호(國號)를 고구리(高句麗)라고 했는데, 이로 인(因)하여 고씨(高氏)로 삼았다.”함에서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는 것입니다. 2월 작씨(낙랑태수 시길의 딸)가 작(鵲)태자를 낳았다” 가서 신시(神市)의 여러 화폐로써 순방체제(淳厖體制)에 들어와서 활동할수 있도록 한 그 공로(功勞)가 작용해서 후계자가 되었음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이상 해설(解說) - 다파나국과 작씨(鵲氏), 낙랑왕 시길(祡吉)의 딸. 해설 마침(**) 옷을 내렸다. 군을(君乙)의 어머니 군문(君問)에게도 역시 자색 옷을 내렸다. 조회(朝會)를 받았다. 하로(蝦盧)를 대승대사(大乘大師)로 하고 계기(啓其:일직태수 백공의 아들, 9년 12월 기사 참조)를 이방대사(理方 大師)로 하였다.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왕의 건강(健康)을 구호(救護)하는데 애썼다.(*) 후(后)의 예(禮)로 사릉문(蛇陵門)에 장사 지냈다. 성부(聖父)에 속하게 하였다. 의미한다. 에게 오천석의 곡식을 하사하였다. 평정하였다. 上善之 어지럽힘이 더하여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묻자 마제(摩帝)가 말하기를 “신(臣)의 어리석은 계략으로는 색(色: 딸이나 종실(宗室)의 여자를 교환하는 일)을 통하여 서로 친(親)하게 되어 그로 인하여 통제함이 마땅하다” 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하였다. ≪참조문≫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 7월기사 8년 가을 7월, 왕이 "내가 부덕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맡았다. 우리나라는 서쪽으로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 에 접하였으나,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였으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삼아 품주(稟主)의 일을 대신하게 하였다. (좌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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