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탕자의 비유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11~32).
성경이나 설교 예화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곧잘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비유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놀랍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비유는 바로 “탕자의 비유” 이야기이다. 이 “탕자의 비유”에는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집을 나간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비유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느끼며 감탄하게 된다. 다음은 그 비유를 편지로 각색해 본 것이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한번 쯤 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아들을 기다리는 어떤 아버지의 편지
사랑하는 아들아!
아직도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인사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채, 커다란 가방을 손에 들고 네가 총총히 집을 떠나가던 그날을...
이 아빠 엄마와 형, 우리 네 식구가 가졌던 아늑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그리고 또 아무 부러울것 없이 다 가지고 누렸던 풍족함과 안정을 무겁고 부담스러운 제재와 지루함으로 몰아 부치며, 자유를 향해 떠나겠노라고 유산을 받아 쥔 채 바람처럼 집을 나서는 너의 모습은 내겐 충격 그 자체였다!
내 사랑이 정말 그렇게도 네게 아무 의미없는 것이었더냐?... 정말 나의 사랑이 그렇게도 너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느껴졌더냐?... 따뜻한 가정과 함께 나누던 그 사랑스럽던 교제들이 진정으로 너를 숨막히게 하는 구속으로 여겨지더냐?... 그렇게 차가운 얼굴이 되어서 이 애비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 만큼?...
네가 떠난 뒤로 뒷 숲에서 노래하던 구구새의 노래 소리는 슬픈 흐느낌으로 변하고, 정원의 흐드러진 꽃들의 화려한 빛깔도 의미없는 퇴색함으로 이 애비에게는 다가온다.
함께 대화를 즐기며 가지던 주말저녁 식사 때가 오면, 그리고 식탁 가득히 차려진 맛있는 음식, 그 중에서도 네가 좋아하던 음식이 상위에 올려진 것을 보면, 나는 슬며시 수저를 놓고 멀리 네가 떠난 산등성이를 바라다 본다. 눈가에 이슬이 맺혔는지, 산등성이 고갯길이 흐려져 뿌옇게 보이고, 방금이라도 네가 “아버지!”하고 부르며 나타날 것만 같아 귀를 곧추 세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지내는지...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도 문을 열어 놓고 잠든다. 새벽에라도 혹시 네가 돌아왔다가 잠긴 문을 보면 두드릴 용기가 없어서 다시 돌아갈까봐... 그동안, 수 많은 날들 동안 뒤척이며 밤을 지샜다만, 내가 자꾸 그러면 네 엄마가 더 신경을 써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이제는 네 엄마 곁에서 잠든 척하다가 네 엄마를 재워 놓고는 슬며시 빠져나와 새벽녘이 될 때까지 별을 세며 너를 기다리곤 한다.
너 생각나니? 네가 어렸을 때 이 아버지와 함께 별을 세며 하던 말 말이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아빠를 모시고 별나라를 여행시켜 드리겠다고 하던...아무리 세어도 끝이 없는 별을 세다가 내 품에 살며시 잠든 너를 안고 오던 감촉이 아직도 팔에 느껴지는구나! 그 별은 아직도 높이 떠서 나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내 팔이 허전한거냐?... 너도 혹시 저 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젯밤에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 하고 부르며 네가 들어서는데, 어찌나 그 미소가 아름답던지!... 너를 번쩍 안으려는데, 깨니 꿈이었다. 잠깐이라도 네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포근했는지... 그러나 한편으로 얼마나 더 허전하던지!...
얘야! 베고 자는 배개는 편안하니? 너는 유난히 푹신한 베개를 좋아했지!... 아직도 네 방에는 네가 좋아 하던 책, 모아 놓은 그림들, 그리고 네가 베고 잠들던 푹신한 베개가 주인을 기다리며 덩그마니 놓여 있다.
아들아!
오늘도 네 방에 들어와 네가 떠난 뒤로 언제나 그랬듯이 불을 켜 놓는다. 그리고 네가 없는 책상을 행여 먼지라도 앉을까 손으로 쓸며 마음 속으로 기원해 본다. 네가 어서 속히 돌아 오기를... 그리고 돌아오면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옛날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살거라고... 너는 영원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네가 돌아오기를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이 비유에서 배우는 교훈
1. 죄의 처참한 결과
성경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롬 1:22)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바로 비유 중에 나오는 탕자의 경력(經歷)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한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한 감사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들로써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특권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받기를 원했다. 그는 현재의 낙을 누리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장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 집에서 떠나 “먼 나라”로 갔다. 돈을 넉넉히 가지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이 젊은이는 자기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 곳에는 그렇게 하면 네게 해가 될 터이니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이것이 옳은 일이니 이 일을 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악한 동무들은 그로 하여금 더욱 큰 죄에 빠지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기적인 목적으로 달라고 해서 받은 유산과 재물을 방탕하는 일에 다 허비해 버렸다. 그의 귀중한 청춘은 허송되었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와 지력(智力), 그리고 젊은이의 유망한 전도와 영적 포부,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정욕의 불꽃에서 소멸되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유대인에게는 몹시 천한 직업인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때 자기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뽐내던 이 젊은이는 지금에 와서 자기가 노예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를 매혹시키던 찬란하고 번쩍거리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와서는 속박의 쇠사슬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다. 돼지 외에는 다른 아무 친구도 없는 쓸쓸하고 흉년이 든 그 지방에서 그는 땅 위에 홀로 앉아 배가 너무 고파서 짐승이 먹는 팥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 그가 잘 살때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돈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던 친구들 중에 그의 친구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허랑방탕하며 즐기던 오락은 이제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는 전에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그의 자만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도의심은 위축되고 의지력은 약해져서 믿을 수 없게 되고, 그는 인간 중에 가장 가련한 자가 되었다.
여기에 묘사된 죄인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한가! 비록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둘러싸여 살지만 방종과 죄악적 쾌락에 몰두하는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것만큼 슬픈 일이 없다. 죄인은 감사하지 않은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마치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권리로 생각하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감사도 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사랑의 봉사도 하지 않는다. 가인이 자기의 살 곳을 찾기 위하여 여호와 앞을 떠나간 것처럼, 또는 탕자가 “먼 나라”로 떠나간 것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롬 1:28).
2.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선택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직도 그러한 사람을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감화를 끼치고 계시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탕자는 자기의 고생이 자기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깨닫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말한다.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같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보증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은 금 쇠사슬이 되어 위기에 처해있는 모든 영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고 말씀하셨다.
이 방탕했던 아들은 피곤하고 무거운 발을 끌면서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도 한 분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상거가 먼데”도 그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 한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눈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몰라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 아들의 목을 오랫동안 꼭 안고 있었다.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정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수종하는 남녀 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소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을 받고 잊어버린 바 되었으며 영원히 그의 죄가 도말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에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2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고 하신다.
3. 영접하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마치 탕자처럼 죄인이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그분께서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디딘다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그 순간에 그분은 그것을 아신다.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눈물을 아무리 은밀하게 흘릴지라도 그분은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마중 나가지 아니하시는 때는 없다.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은혜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는 은혜를 만나기 위하여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우리의 천부께서 죄로 더럽혀진 옷을 우리에게서 벗기시고 새 옷을 주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마치 스가랴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처럼 주께서는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슥 3:4, 5)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구원의 옷” (사 61:10)으로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입히실 때, 우리는 마치 “양우리에 누”운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시 68:13)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집나간 방탕한 아들을 기다린 아버지의 사랑은, 그리고 돌아오자 아무 꾸중없이 덥석 아들을 안아 받아들이며 가장 좋은 옷과 반지를 끼우고 다시 아들됨을 인정해주는 아버지의 놀라운 자비의 모습은, 늘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비유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고 언어와 국경의 차이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할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분의 사랑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최고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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