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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미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영향
오덕교 목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말씀의 빛이 전혀 없이 무지와 미신이 지배하던 운둔의 나라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도 이미 120년이 지났다. 그 동안 미국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서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침례교, 안식교 등 여러 종파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한국교회는 다양한 신학의 집합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성경만을 신앙과 삶의 기준으로 삼는 등 신앙적 통일성을 이루어왔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확신이 교인들 간에 자리 잡은 셈이다. 때때로 현대주의 신학의 공격으로 성경적 신앙이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이를 잘 극복함으로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신앙을 지켜내었다. 이는 한국 교회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 곧 다양한 신학 풍토 가운데서도 성경적 신앙을 고수하고자 하였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들의 영향이 컸다고 단언할 수 있다.
1. 들어가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신앙은 한국 초대교회가 고백하던 신앙과 동일한 맥락을 유지해 왔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 그리고 성경의 교훈대로의 실천을 강조하는 등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에 충실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이 한국 교회 또는 장로교 전통과 전혀 다른 것처럼 묘사하여 왜곡된 입장을 취해 왔다.
곧 해방 이후 한국 교회 형성 역사를 기술한 김양선이나 1960년 대 이후 한국 교회의 변천을 기술한 민경배, 그리고 1970년 대 이후의 한국 신학의 맥락을 논파한 이종성과 같은 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이 배타적이고 극단적이라고 비판해 왔다.
「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를 쓴 김양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자로 “교회의 사람(a man of the church)이요 성경의 사람(a man of the Bible)이며 신조의 사람(a man of the Confession)”이었던 메이첸(J. Gresham Machen)을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자”라고 평하고, 그를 따르던 한국 선교사들에 대하여 “타 선교부와 비협동적 태도를 보인” 배타적인 사람들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는 메이첸 파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출옥 성도들을 가장 잘 이해하였지만, 그들의 배타적인 성격 때문에 장로교 총회로부터 배척을 받았다고 하였다.
연세대학교의 교수였던 민경배도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이 배타적이고 분리주의적인 무리였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사를 논하면서 고려파의 장로교 총회로부터의 분리를 메이첸 파의 영향으로 보았다. 곧 메이첸과 밴 틸(Cornelius Van Til) 아래서 신학 교육을 받은 박윤선 목사가 “한부선(B. F. Hunt, 韓富善) 및 하밀톤 선교사와 같은 메이첸(J. G. Machen)파 선교사들과 제협”하여 고려신학교를 세웠지만, 그들의 비타협적인 자세 때문에 일부의 목회자들이 반발하여 “1946년 12월의 진주에서 모인 노회에서 고려신학교의 인가 취소론이 대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곧 “메이첸파 선교사들의 자기 의적인 비타협적 태도와 소수의 열등한 자들의 광기 때문”에 고려신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하였고, 결국 총회로부터 분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신사참배를 지지했던 경남노회 소속 비재건파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을 비하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의 손에 한국 장로교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조국을 잊어버리고 타국에 예속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소행과 같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종성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을 아주 편협하며 맹목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1975년에 쓴 “한국 신학계의 좌와 우”라는 글에서 한국장로교 신학이 메이첸의 영향으로 아주 편협해졌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장로교는 신학적인 보수주의와 정통신학을 기독교의 전체적인 전통과 교리에 비추어 이해하지 않고, 그 가운데 일부분을 전통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인 이해가 편협하다. 따라서 그들은 메이첸(J. Gresham Machen)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그 결과 맹목적이며 근본적인 신앙에 빠지게 된 것이다.
메이첸의 영향을 받은 일부 소수의 광신 때문에 맹목적으로 성경을 강조하며 근본주의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한국의 장로교회 안에 메이첸 신학 사상을 맹종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음을 매우 불행한 일로 생각한다.”고 서술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이 교리 절대주의에 빠진 나머지 신학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그들의 성경 무오설에 대한 신앙은 ‘문자 절대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김명룡 교수도 웨스트민스터 신학이 아주 편협하고 비타협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몇몇 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이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에서 이탈했거나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들의 신학과 생활이 웨스트민스터 출신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현대주의적 성경 해석을 수용하는 프린스턴의 영향을 받는 통합 측 출신의 학자들로, 프린스턴의 입장에서 웨스트민스터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들의 평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웨스트민스터가 프린스턴으로부터 나오게 된 배경과, 그들이 추구해 온 신학 사상을 살펴야 할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 배경과 신학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은 장로교 신학의 보루였던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서 비롯되었다. 프린스턴의 좌경화는 교회가 세속주의 사상과 현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야기되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을 발표한 후 프린스턴대학교의 제임스 맥코쉬(James McCosh) 총장, 당대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던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와 라이맨 애봇(Lyman Abbott) 등이 진화론을 지지하였고, 그 결과 진화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 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교수였던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 1841∼1913)가 성경의 권위와 무오함을 부인하며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부정하는 등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였고, 반 다이크(H. J. Van Dyke) 등 현대주의자들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대신 새로운 신앙 고백을 만들 것을 주장하는 등 신학적 수용주의가 번지기 시작하였다.
현대주의의 도전에 대해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의 응전도 만만치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제임스 오르(James Orr),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인 버렐(D. J. Burrell), 찰스 어드만(Charles R. Eerdman), 벤저민 워필드(B. B. Warfield)와, 성공회 주교 뮬(H. C. G. Moule), 세대주의자 스코필드(C. I. Scofield), 부흥사 토레이(R. A Torrey), 남침례교 신학자 멀린(Mullins) 등 영국, 미국, 캐나다 출신의 64명의 보수주의자들은 로스앤젤레스의 부유한 실업가 라이맨 스튜워드(Lyman Steward)와 헨리 스튜워드(Henry Steward) 형제의 후원을 얻어 1910년에서 1915년 사이 「근본적인 것들: 진리의 증언」(The Fundamentals: A Testimony of the Truth)이라는 12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들은 이 책 250만 부를 미국 전역에 배포하여 세속주의와 현대주의의 해악을 널리 알렸다. 곧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내세워 진화론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몰몬교와 신령주의자(Spiritualists), 크리스천 사이언즈(Christian Scientist), 천주교회, 사회주의 운동을 비판하고, 죄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계시와 복음 전파 등을 역설하면서 보수주의 신학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장로교회는 세속주의와 현대주의의 영향아래 빠져 들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린스턴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현대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던 프린스턴신학교는 당시의 다양한 신학 사상에 대해 수용적이던 실천신학 교수 스티븐슨(Ross Stevenson)이 교장에 취임하면서 신학적 좌경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티븐슨이 공개적으로 신학적 자유주의에 포용적 입장을 취하자, 메이첸을 비롯한 다수의 교수들은 그에 반대하면서 성경의 무오와 권위를 옹호하려고 하였다.
특히 메이첸은 자유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비교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한 스티븐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1926년 총회를 설득하여 보수파의 핵심 인물인 메이첸의 승진을 불허한 후 프린스턴에서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였고, 프린스턴신학교의 개편안을 통과시켜 자유로운 신학 활동을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학교 내의 모든 활동이, 기독교적이든 비기독교적이든,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보장받게 되었고, 프린스턴의 좌경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주의자들은 1927년 전통적인 신학을 파수할 새로운 학교의 설립을 계획하였고, 1929년 총회 이후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 해 6월 17일 보수적인 목사와 평신도, 프린스턴의 교수진, 이전의 신학교 이사들이 뉴욕에 모여 좌경화 이전 프린스턴신학교의 유산을 계승할 학교 설립을 논의하였고, 7월 8일에는 여러 명의 장로교 실업가와 메이첸,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오스월드 앨리스(Oswald Allis) 교수 등이 동참하였다. 그리고 7월 18일에는 이전의 프린스턴신학교 이사들과 교수진, 학생 등 70여명이 모여 구 프린스턴의 신학을 계승할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필라델피아의 위더스푼 홀(Witherspoon Hall)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개교하였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단순히 하나의 학교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과 성경 중심의 신학을 고수하기 위해 세워졌다. 따라서 개교 이래로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을 가르치며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확신, 삶의 전 영역에서 성경의 적용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의 입장은 1980년대에 출판된 「신에 의한 통치: 개혁주의적 비판」(Theonomy: A Reformed Critique)에 잘 나타나 있다.
신율주의자(theonomist)들에 의해 개혁신학이 도전을 받자, 필라델피아와 캘리포니아의 에스콘디도에 재직하던 16명의 교수들은 신율주의자의 발흥을 경고하며 이 책을 써서 웨스트민스터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충만한 권위와 무오, 인간 이성의 권위에 대항하는 신앙의 변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전적으로 은혜롭게 해결할 뿐만 아니라 삶과 사상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그리고 하나님의 법의 실천적 권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장로교도들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것이며,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고백해 온 신앙이기도 함으로, 웨스트민스터의 신학은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이요, 한국 교회의 신앙과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3.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한국에 미친 영향
웨스트민스터 비판자들은 웨스트민스터의 신학이 비타협적이고 극단적이어서 한국 교회에 해를 많이 주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한국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원래 철두철미한 성경적 신앙에 기초하여 세워져 성경의 영감과 무오, 성경적인 삶과 실천을 강조하여 왔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몇몇 간증을 들어보자.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마포삼열(Samuel Moffet) 박사는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적 경향이 매우 성경에 충실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1909년에 한국 장로교 “선교회와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는 철저한 믿음과 열정적인 복음정신이 특징이었다.”고 논하였다. 1912년 발행된 「인터내셔널 미션 오브 리뷰지」(Th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는, 한국에는 “성경의 권위와 그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이 널리 퍼져 있으며,··· 한국 사람들은 성경을 그들 생활의 최심부에 가져다 놓고 있었다.”고 하였다. 곽안전(Allen Clark) 선교사도 성경이 한국 선교사역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면서 “한국에서 성경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초대 선교사들은 성경적 신앙에 기초하여 한국 교회를 세웠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노고에 힘입어 한국의 초기 신학 교육도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이었다. 1920년에 선교사 모임에 참석한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 설립 목적을 재확인하면서, “본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요, 모든 행위의 근거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진심으로 믿으며, 바로 이해하고, 중심으로 사랑하며, 명확히 해석하며,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충분히 또는 순수하게 전하기에 힘쓰는 복음의 사역자들을 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고 하였다. 1935년 「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 50주년 기념 보고서」에서 블레어(Herbert E. Blair)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신학이 성경 중심적으로, 한국에서는 “성경만이 강조되었으며, 성경만이 연구된 교과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과 장로교 정치 형태를 채용한 장로교인들은 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구 프린스턴처럼 성경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 없이 확실하게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가 추구해 신학의 방향과 맥락을 같이 하여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에 기초하여 웨스트민스터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 바른 신학의 기초 확립
한국의 초대교회는 성경의 영감과 절대적인 권위를 고백해 왔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주의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 프린스턴이 좌경화 되자, 한국에서도 성경에 대한 현대주의적 해석을 시도하려는 이들이 나타나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가 현대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이로 인해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두 신학 조류 간의 갈등이 있게 되었다.” 곧 1934년 일본의 청산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재준 목사가 모세 5경의 모세 저작과 성경 무오 교리를 부인하자, 한국 교회는 신학적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나누어질 정도로 어려움을 당하였다. 1935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 장로교 목사들이 현대주의 성경 해석 원리에 따라 저술된 「아빙돈 단권 성경 주석」의 번역에 참가함으로 신학적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고, 그와 함께 신학적 자유주의가 점차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전통적 장로교 신앙을 외치면서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고수한 이가 바로 메이첸의 제자였던 죽산 박형룡이었다. 죽산은 민경배가 지적한 것처럼 구 프린스턴에서 “메이첸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던” 신학자로, 신학은 “‘창작’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정신앙(正信仰)을 보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김재준의 신학이 그릇됨을 지적하고, 성경의 무오와 축자 영감을 주장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1935년 5월 이후 김재준 목사의 글을 신학지남에 싣지 못하게 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을 막고 성경적 신앙을 수호하였다. 그 영향으로 장로교 총회는 김재준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아빙돈 단권 성경 주석」 작업에 참여한 목사들을 징계하였다. 이로서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을 극복하고, 성경의 영감과 무오, 그리고 권위를 재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자유주의 신학은 한국에서 소외되었고, 성경적 신학이 보편화 되었다.
(2) 바른 신앙 운동 -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전개
비록 죽산에 의해 현대주의적 성경 해석과 신학적 포용주의가 제어되기는 했지만 그 영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신앙적 상대주의가 나타나고,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세속적 권위에 타협하려는 현상들이 일어났다. 한 예로, 일제가 황국신민화 운동을 전개하며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대로 사는 대신 시대에 타협하여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 의례라고 주장하였다. 김재준, 채필근, 김영주 등 현대주의 신학를 따르던 목사들과 프린스턴에서 공부했던 한경직 목사와 송창근 목사 등이 중심을 이루어 참배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의 사람들, 곧 메이첸의 제자들과 20여명의 메이첸을 지지하던 선교사들은 신사 참배가 우상숭배임을 역설하면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곧 한부선(Bruce F. Hunt), 마두원(D. R. Malsbary), 최의손(William H. Chisholm), 함일돈(F. E. Hamilton) 선교사 등 메이첸의 지지자들은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체포되어 국외로 추방당하였다. 그 가운데 한부선은 1935년과 1936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신학수업을 받았던 이로, 1938년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하자 즉석에서 일어나 신사참배 결정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메이첸의 제자였던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도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펴다가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이와 같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바로 웨스트민스터 출신이었고, 그들의 영향으로 수많은 성도들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고, 그 일부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3) 바른 신학 운동 - 고신을 중심으로, 교회 정화 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투옥되었던 성도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들은 출옥과 함께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죄를 회개하고 교계를 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권을 잡고 있던 이들은 회개를 거부하고 자기 합리화에만 급급했다. 이 때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 등 출옥 성도들은 교회 정화가 바른 신학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신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회개를 거부하는 교권주의자들과 신학적 포용주의를 취하던 김재준과 송창근 등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신학교를 대체할 새로운 신학교를 세워 성경적 신앙 운동을 전개함으로 교회 정화 운동을 벌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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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성도들은 “성경 중심, 진실 위주,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자”는 취지로 1946년 9월 20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때 메이첸의 지지자 또는 제자였던 한부선, 마두원, 최의손, 함일돈 등 4명의 선교사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등이 고려신학교의 교장 또는 교수로 참여하여 새로운 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메이첸 파의 신학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을 한국에 정착시켰으며, 그 결과 성경 중심적 개혁주의 신학 운동이 확산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한국 교회사 속에 성경적 신앙 운동, 말씀의 실천, 신학 교육을 통해 한국 신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에 부연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이 한국 교회에 끼친 신학 사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4) 변증적 성경 신학의 소개
합리주의 운동 이후 나타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적인 사상의 출현은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단편적인 문서들을 조합하고 편집한 인간적 작품이라는 고등 비평 사상을 낳았다. 고등 비평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에서 인간의 종교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들이 유럽과 북미에서 일어났으며, 그 결과 허다한 사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외적으로 고등 비평이 자리 잡는데 실패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논리적 사고나 철학에 기초한 서구 조직신학을 학문적으로는 반감없이 수용하였으나, 그것을 목회 상황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 사상에서 볼 때, 진리는 반드시 이치에 맞아 떨어지고 지적 이해와 동의를 전제해야 하나 동양적 사고 구조를 가진 대부분 목회자들은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선호하고, 지성적인 면만 강조하는 사상에 대해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이해보다는 감성적이고 전인적인 이해를 수용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성경에 대해 이처럼 단순하게 믿게 된 것은 웨스트민스터가 가르쳐 온 성경 신학과 변증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 신학은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프린스턴에 처음으로 소개한 학문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성경 신학은 찰스 하지(Charles Hodge) 때에 이르러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으로 나누어졌으며, 후에는 하지의 제자들인 존 머레이(John Murray)와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 그리고 리처드 개핀(Richard Gaffin) 등이 성경 계시의 발전과정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이들의 노고에 힘입어 성경을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즉,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그 영향으로 계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얻게 되었고,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입장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변증학은 밴 틸에 의해 확고한 기독교 신앙의 방패 역할을 했다. 밴 틸의 전제론적 변증학은 인간의 자율성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계시 의존 사색을 통하여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곧 자율의 틀을 벗어 버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전제하며, 성경이 모든 사고의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변증학의 영향으로 인간의 지성보다는 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성경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신학에 기초하여 보수 신학은 성경의 절대성과 성경의 하나님을 신앙의 기초로 삼아 왔다.
변증학과 성경 신학의 조화를 통하여 바른 신학을 세워 가려는 시도는 정암 박윤선 박사의 사역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정암은 웨스트민스터에 입학하여 학장이요 신약 학자였던 메이첸, 변증학자 밴 틸, 구약학자 앨리스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신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이 때부터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성경의 권위도 깨닫게 되었고, 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케 되었다. 그리고 이 때에 나는 성경 해석 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성경해석을 바로만 한다면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초자연주의(超自然主意)라는 사실이 나에게 명백히 알려진 것이다.
정암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성경 신학과 변증학을 통해 성경적 신학을 학습하고, 그것을 성경 주석 작업에 적용하였다. 성경 신학과 변증학을 통하여 성경에 드러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증거하고, 독자들이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등 그릇된 신학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암의 성경신학과 변증학적 사상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1976년에 저술한『성경신학』에 잘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신학은 주경신학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경신학적으로 취급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경학적으로 접근해야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계시사적(啓示史的)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시사적 연구란 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하고, 그 역사적인 위치를 중대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나타난 계시의 역사적 보조를 파악함에 따라서 거기에 나타난 계시를 확신함에 이르게 된다.
정암은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 성경 신학의 기본 원리”이며, 그릇된 인식에 의해 잘못된 신학 운동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는 밴 틸 박사의 “기독교 인식론"(The Defense of the Faith: Christian Epistemology) 에 의거하여 그의 주장을 펴면서,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곧 계시 의존을 통해서만 바른 신앙 운동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정암은 성경신학과 변증학의 조화 있는 신학 체제를 이룸으로 신학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성향은 단지 박윤선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한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며, 신앙과 신학의 궁극적인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는 현재 성경신학뿐 아니라,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에게서도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다.
(5) 학문과 경건의 조화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한국에 미친 영향 가운데 또 하나는 학문과 경건의 조화이다. 일반적으로 학문에 치중하다 보면 경건이 약화될 수 있고, 경건을 강조하다 보면 학문이 약화될 수 있으므로 구 프린스턴의 교수였던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하지(Charles Hodge), 워필드(Benjamin Warfield)는 신학이 사변적일 수만은 없다고 하였다. 말씀의 객관적 진리는 성도의 주관적 신앙 체험의 기초가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동기는 신령주의와 맞서는 변증적 자세와 함께, 신학이 성도들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복음이 올바로 전해져서 성도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그 진리에 대한 동의와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만이 유일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앤드루 호페커(W. Andrew Hoffecker)가『경건과 프린스턴 신학자들』(Piety and the Princeton Theologians)에서 증거하였듯이 전기한 학자들은 그 당시 체험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학에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와 함께 성도의 주관적인 상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교리적으로 보면 그들은 전통적 신학 노선을 중요시 여기는 ‘구파’에 속하여, ‘신파’가 주장하던 경험 일변도 신학을 배척하는 동시에 신앙의 주관성이 지닌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 프린스턴으로부터 시작된 ‘학문과 경건의 조화’는 웨스트민스터로 이어졌다. 메이첸이 독일에서 유학할 때 자유주의자들의 경건에 놀라고는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정암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할 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은 인물은 메이첸이다. 신약을 전공한 그로서는 당연하게 볼 수 있겠으나, 그가 받은 영향력은 단순히 학적인 면이 아니었다. 정암은 메이첸으로부터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메이첸 박사는 위대한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진실한 신앙가였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불철주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성경학자였으며, 모든 신학생들을 자시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신앙적으로 지도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메이첸은 교수 사역이 곧 신학생 목회 사역이라는 목회자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암 역시 평생토록 신학생의 목회자이자 한국 목사들의 목회자로 섬기려는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한국 신학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출신의 교수들 가운데 교탁을 뒤로 하고 목회에 전념하게 되면 귀한 열매를 맺을 목회자적 자질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점을 종종 확인하게 된다. 실상 교수 사역 도중에 목회를 선택한 다든지, 아니면 목회를 하다가 교수 사역을 하는 분들을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구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그리고 한국 교회로 이어지는 ‘학문과 경건의 조화’의 강조점에 의한 교육의 효과라 볼 수 있다. 이점에 대하여,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통을 지키고 학문과 경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분발하여야 할 것이다.
(6) 보수적 신학과 선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한국에 미친 영향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보수적인 신학을 유지하면서도 사회 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교와 신학의 조화를 통하여 잠자고 있던 한국 교회를 깨운 장본인이었던 간하배 선교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총신대학교 교수로서 풍부한 학적 지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라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창녀촌과 농촌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구석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몰매를 맞은 상처로 인하여 한쪽 다리를 절고 다니곤 하였다.
복음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당시의 선교사들의 역할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복음적이었다. 그러나 간하배 선교사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를 포함한 현대신학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책을 저술하여 한국교회에 알리는 등, 한국교회가 건전한 개혁주의적 신학전통에 기초하여 자리를 잡아 갈수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과 변증학은 그 당시 한국교회가 자유주의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의 선교적 열정은 향후 한국 교회의 방향성 설정에 긍정적인 영향력이기도 하였다.
(7) 인적 영향
웨스트민스터는 상기한 것과 같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고, 그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보수적이면서도 성경만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었다. 더 큰 영향력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수많은 학자와 목회자 등 인재를 배출한 데서 나타난다. 1930년 대에 한국인 최초로 김치선 박사가 졸업한 후 수많은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는 16명의 전현직 대학 총장들과,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 충현교회, 사랑의 교회 등 한국 최대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졸업생 가운데 다수가 신학교육 기관에서 교수로 사역하는데, 그들이 교수하는 학교만 해도 20여 개가 넘는다. 이와 같이 한국 신학계에 미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영향은 전 세계의 어떤 대학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최상급의 신학교라고 일컫는 프린스턴신학교나 유니온신학교, 하버드대학교나 예일대학교 출신보다 많은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다수의 목회자와 교수, 또는 총장들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치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학 운동을 펴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바른 생활 운동을 전개하면서 교회 정화 운동을 이끌고, 성경 신학과 변증학을 소개함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가능하게 하였고,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통하여 건전한 신학의 전통을 세움으로 한국 교회를 기름지게 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미래에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학생들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지원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1980년대만 해도 좋은 교수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재정적인 문제로 우수한 교수들을 유치하는데 실패함으로 미국 신학계에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1980년대만 해도 많은 한국 학생들을 받아들였으나, 1990년대 이후 입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높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높은 GRE 성적과 TSE 성적을 요구함으로 한국 학생들의 입학이 어려워지고 있다. 더구나 한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한함으로 많은 학생들이 복음주의적인 신학교들, 곧 풀러(Fuller Theological Seminary)나 트리니티(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로 진학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1990년대 후반부터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들의 한국 신학계 진출 비율이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 나아가게 된다면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21세기의 한국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미미해지거나 사라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웨스트민스터에 대한 장학금을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웨스트민스터는 한국 학생의 입학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입학의 문을 활짝 열어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선배들이 심어 놓은 바른 신학적인 전통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 주는 일에도 최선을 다함으로 성경만이 신학과 생활의 기초가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