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아와 무더위, 태풍으로 인해 지친 여름날에 초록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조선의 카타콤바이자 내륙의 제주도라고 불리는 신리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신리는 조선 후기 당진 고대 손씨 손자선의 선조들이 간척한 월경지였는데요.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가장 큰 교우촌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신리성지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한데요.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도 삽교천 수계를 통해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이 연결될 수 있는 비밀 입국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인해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콤바(비밀교회)로 불리게 되는데요.
순교자 기념공원 곳곳에는 경당이 보입니다. 천주교가 조선의 곳곳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 위앵 신부의 경당인데요. 경당의 틀은 공통되지만 순교한 분들의 모습과 업적이 다른것 처럼 경당의 모습도 조금씩 다르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경당안에는 그분들의 모습과 경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읽어봐도 좋을 듯 하네요.
성 다블뤼 주교의 동상과 그가 거처했던 주교관인데 이 집은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충남기념물로 지정 되었습니다. 병인박해 때 신리교우촌이 파괴되면서 이 집도 주인을 잃었다가 이후 1927년 이 지역 교우들이 모금을 통해 이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다 1964년 새롭게 복원 했으며, 2004년 해체 복원되었다고 하네요. 초기 건축 장소에 사용되었던 기둥, 대들보, 주춧돌, 상량 등은 재사용 복원 되었다고 합니다.
다블뤼 주교는 이곳에서 조선순교자 약전과 순교자 비망록 등을 황석두 루가의 도움으로 저술했다고 해요. 또한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즉 미사를 하면 성당이요, 밥상이 들어오면 식당, 이불이 깔리면 침실이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해요. 더불어 이 집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였으며 삼천명의 교우에게 판공성사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방 아래에는 비밀공간이 있는데요. 다블뤼 주교가 천주교 관련 책을 저술하던 공간이라고 합나다. 책을 저술하기 위해 다블뤼 주교는 방에 구들장을 깔지 않고 지하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고 해요. 이 공간은 조선시대 제일 큰 교우촌의 중심에 자리한 현존하는 유일한 주교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리성당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데요. 김정신 교수의 황금비율의 설계가 성당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건축물로 유명합니다.
성당외부에는 예수님 상과 성인들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네요. 성당 앞마당에는 야외 미사를 할 수 있는 제대와 여러 행사를 할 수 있는 다블뤼 광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우편 화장실 방향에는 멋진 논뷰를 감상할 수 있는데요. 맑고 푸른 하늘과 여름햇살에 짙은 푸르름으로 무르익어가는 벼들의 싱그러움에 가슴을 탁 트이고 머리가 맑아집니다.
신리성지에는 순교미술관 1층에는 순교하신 분들의 모습과 업적이 벽면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순교미술관은 다블뤼주교, 성 손자선 토마스, 성 황석두 루카, 성 위앵 루카 신부, 성 오메트로 베드로 신부 5인을 중심으로 당시 신리성지의 천주교 역사를 들려줍니다. 그 중심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서울대학고 박물관장등을 역임한 일랑 이종상 화백의 순교 기록화가 있는데요. 이 작품들은 순수한 믿음의 재능 기부로 3년여의 작업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순교미술관은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따라 하늘전망대까지 이어지는데요. 계단으로 올라가면 요나의 고래 조형물이 보이는데, 계단을 오르는 시선에 따라 조형물의 모습이 다르게 보입니다. 하늘전망대 꼭대기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작은 십자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요. 위앵신부가 쓴 편지 중 400여명의 신자가 맞이했다는 내용을 보고 400여개의 철사를 엮어서 만든 십자가라고 합니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당시 천주교 집성촌이 형성되어던 거더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신록의 푸르름이 가득한 평야와 어우러진 모습이 더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네요.
※ 주소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