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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재반격과 중공군의 제4차 공세
제 1 절 개 요
1. 전선 상황 요약
대관령 횡계리
차항리
[제천지역 돌파구]
홍천 유천리
하진리 용평리조트
중42군 국9사
창봉리 창동리(봉평) 속사리
국7사 발왕산
양평 지평리 중39군, 중40군 횡성 용평
미23연 장평리
곡수 주암 북5군단 북2군단
미1기병 영27여 국6사 판대리
후포 원주 국3-18연 평창
미187연 국9사
여주 도돈 국7사
국3사
주천
미7-31연
제천 미7-32연 영월
장호원 목계 주포 국8사(-)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신정공세로 서울에서 철수한 후 '51. 1. 7일 평택-삼척을 있는 37도선으로 철수하여 재정비 하였다. 다행히도 1. 7일 이후 서부전선에는 예상과 달리 평온한 상황이 도래하였다. 당시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전력이 소진돼 평택까지 진출할 능력도, 더 이상 밀어붙일 힘도 없었다.
반면 중공군이 갑자기 사라지자 국군과 유엔군은 초조감이 커지고, 장병들의 사기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여기에 중동부 전선의 원주 돌파구가 계속 확대되면서 국군 과 유엔군 내에 패배의식이 만연해져 갔다.
반면 적은 서울을 탈환하자 주력을 중동부전선으로 돌려 국군을 무력화 시켜 이곳에 돌파구를 형성한다는 계산 하에 북한군 2개 군단이 투입되었고, 그들은 원주를 점령하여 중앙선을 통제하여 나아가 대전 또는 대구로 진출할 용이한 접근로를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 제2사단에 의해서 그들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그 남동쪽 제천-영월 돌파구에 그들의 제2전선부대들이 침투하여 아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국군 제3사단, 제7사단과 미군 제7사단의 협동작전에 실패하고 전 전선은 일시적 평온에서 유엔군이 적을 찾아나서는 형국으로 바뀌어 갔다.
미 제8군사령관은 '51. 1월 15일을 기해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토록 명령했다. 이 작전의 결과로 유엔군은 수원-여주 이남지역에는 중공군의 소부대 규모만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아군은 1월 25일을 기해 일제히 반격작전으로 돌입, 작전의 주도권을 만회하였으며 2월 초순에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횡성-하진부리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한다.
국군과 유엔군에 강력한 반격을 받은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 전선에 대해 집중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2월 11일 밤에 횡성-홍천간의 삼마치고개와 지평리 일대에 9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이른바 중공군의 제4차 공세(일명 2월 공세)로 불리는 이 공격으로 인해 전술적 요충지인 지평리와 횡성-원주 지구에서 피아간 격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지평리의 미 제2사단 제23연대는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끝가지 사수하였고, 미 제10군단은 원주-제천에 형성된 돌파구로 남하중인 중군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중공군의 제4차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이 기간중에 동부전선의 국군의 피해가 상당히 컸지만, 한편으로는 유엔군은 중공군이 보급문제로 5~6일 밖에는 작전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중공군 제4차 공세를 격퇴한 국군 과 유엔군은 킬러작전을 전개하여 '51. 3월 초에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한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의 재탈환과 38도선 진출을 위해 리퍼작전을 3월말까지 전개해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제 2절 유엔군의 재반격
1. 개 요
유엔군의 재반격작전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평택-원주-정선-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이 '51. 1. 15일부터 반격작전에 돌입하여 중공군의 제4차 공세(일명 2월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2월 11일 김포-양수리-횡성-하진부리까지 진출한 작전이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로 중동부 전선의 원주-단양-정선을 잇는 대규모 돌파구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 12일 원주지역 전투에서 미 제2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원주를 지켜냄으로서 원주 돌출부 위기가 수습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 무렵 중공군과 북한군은 수원-원주-강릉을 연결하는 선에 전투부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중공측의 팽덕회 사령간은 아군의 37도선 후퇴를 그들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판단, 1월 8일 추격중지명령을 내렸다.
한편 미 제8군사령관은 중공군의 압력이 없자 '51. 1. 15일을 기해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 위력수색을 실시토록 명령했다. 이에 미 제1군단 제25사단이 연대전투단을 편성하여 수원까지 위력수색을 실시하였고, 미 제9군단도 미 제1기병사단이 1월 22일 수원-여주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위력수색결과 작전지대내에 소규모 병력만이 있음을 확인한 유엔군은 1월 25일, 일제 반격을 감행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만회하였다. 유엔군은 2월 초에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횐성-하진부리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중공군과 북한군은 제3차 신정공세 이후 병력 보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보급문제와 휴식문제,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제9병단은 동상, 질병, 도망병 등 문제로 4만명의 비전투손실이 발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조.중 연합사령관 팽덕회는 1. 8일 전군에 공격중지 명려을 내리고 부대 정비와 휴식을 명하였다.
이 때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는, 중공군 제50군과 제38군 제112사단이 한강 남안 교두보 진지를 장악하고, 제42군 제125사단이 남한강 동쪽에 위치하며, 북한군 제1군단의 2개 사단이 한강 이남에 위치하여 유엔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가운데, 나머지 부대들이 서울, 고양, 동두천, 마석우리, 가평과 김화지구에서 휴식과 정비를 실시키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1월 25일부터 전 전선에서 반격을 가하자, 공산군은 휴식과 정비를 중지하고 즉시 방어작전으로 전환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로 공세를 벌여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킨다는 방침을 마련하였다.
(2) 작전계획
공산군은 계속된 작전으로 많은 병력 손실과 피로에 지쳐 있었고, 과도한 병참선의 신장으로로 유엔군의 공격에 취약하고 혹시나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우려로 1월 8일 제2전선 부대을 제외하고는 공격을 중지하고 수원-김량장리-이천-여주-원주선에서 추격을 멈추었다.
실제 북한군은 원주지역 전투에서 미 제2사단에 제12사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자 북한군 사ㅕㅇ부는 1월 20일에 후방침투작전을 중지하고 평창부근으로 철수하라는 며령을 하달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 공산군의 부대배치는 중공군 제50군 제150사단이 수원-김량장리 도로 북쪽에 , 주력은 서울-수원간에 위치하였다. 제38군은 제112사단이 광주 경안리 지역 경계를 담당하고 주력이 금곡리와 사릉리 지역에, 제39군은 문산지구에, 제40군은 의정부, 동두천, 영평지구에, 제42군은 제125사단이 양덕원리 서북쪽에 위치하고 주력이 가평지구에, 제66군은 김화지구에 위치했다. 그리고 북한군은 제1군단이 인천-영등포 지구에, 제2군단이 횡성 지구에, 제5군단이 홍천-횡성 간에 위치하였다.
나. 유엔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지도 및 방침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의 평택-안성-장호원-원주-하진부리-주문진을 연하는 D방어선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국군이 담당한 중동부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이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침투식 기동으로 원주-주문진 선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1. 1. 15일 방어선을 64KM 남하시켜 원주-삼척선으로 수정하고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을 이 선으로 철수하게 하였다.(수정된 D방어선)
하지만 1월 12일 원주쟁탈전에서 미 제2사단이 최종 승리를 거두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공세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하고 소위 "분쇄기식 전술"이라는 작전방침을 하달 하였다. 이는 작전의 목적이 지역 확보가 우선이 아니고 적을 최대한 살상하는 것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제압하기 위해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를 최대한 할용하여 최대의 출혈을강요하면서 적의 주력을 아군의 화망 속으로 유도한 다음 지상 및 항공화력으로 집중 강타하는 것이다.
(2) 작전계획
미 제8군사령간의 방침에 따라 우선 서부 전선에서는 접촉이 단절된 중공군의 배치, 규모,장차의 기도 등을 탐색하고, 중동부 지녁에서의 적의 압력을견제하기 위한 제한된 "위력수색작전(울프하운드 작전 : 부대 애칭")을 계획 하였다.
'51. 1. 15~22일까지의 위력수색작전 결과 소규모 적만 있다는 것을 확인한 아군은 1월 23일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더 강력한 부대로 파괴적인 위력수색작전을 구상하고 , 이를 "썬더볼트 작전"이라 명명했다.
이 선더볼트 작전은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전차로 증강된 미군 1개 사단과 필요시 국군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한강까지 수색작전을 펼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와 더불어 미 제8군사령관은 중동부 전선에 공산군의 대규모 병력이 홍천에 집결한다는 첩보를 수집하고 이를 포위 격멸한 후 중동부지역의 전선을 북상시킨다는 목적하에 "라운드업 작전"을 계획하였다.
(3) 지휘관계 및 전투편성
이 무렵 전투편성은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사단. 영 29여단. 터키여단으로 평택-안성선에, 미 제9군단은 장호원-남한강에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 국군 제6사단, 영 제27여단, 태국 대대, 그리스 대대이고, 미 제10군단은 남한강-원주선에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5사단, 국군 제8사단, 미 제187공정연대, 네덜란드 대대, 프랑스 대대를 두었다.
국군은 제3군단이 영월-정선에 제3사단, 제7사단, 제9사단을 두었다. 그리고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 지역에 수도사단을 두엇다.
이 밖에 예비로 미 해병1사단, 필리핀 대대, 캐난다 대대, 벨기에 대대등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특이한 지휘관계를 보면 제8사단의 사단장이 이성가 장군에서 최영희 장군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연대장 중에 초기전투부터 제8사단 제10연대장으로 활약하던 고근홍 대령이 권태순 대령으로 바뀐 것과 제7사단 제5연대장 박승일 대령이 김인철 대령으로 바뀐 점이다.
이성가 장군은 38선 이남으로 철수작전시 부대지휘를 여대장들에게 맡기고 사단사령부만 차량화하여 철수함으로서 결국 연대들이 많은 피해를 가져온 것으로 보직해임 되었다.
고근홍 대령은 덕천-영원지역 전투시 '50.11월 말에 전사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그 군인다운 용맹함을 기려 육사 1기생들이 현재 철원 강포리지역에서 제6사단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나오는 근홍교가 있는데 이 다리를 준공시 명명하게 되는 일화가 있다.
박승일 대령은 지금 관광지인 고석정에 있는 승일교의 다리명에 일화가 있으며 박 연대장 또한 '50. 11월 말 덕천지역 전투시 전사(일부는 포로가 되었다 전사했다고 함)한다.
3. 전투 경과
가. 서부. 중서부지역의 한강선 진출 작전
(1) 위력수색작전
오산-한강선 진격전은 '51. 1. 15~2. 10일까지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이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50군 예하의 병력을 물리치고 한강선까지 진출한 작전이다.
"울프하운드 작전"이라 명명된 이 위력수색작전은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에게 임무가 주어졌고 킨 소장은 제27연대장에게 전차. 포병. 공병 각 1개 대대식을 증원하여 정찰대를 편성하였다.
군단에서는 정찰대를 보호하기 위해 측후방에 엄호부대를 동행시키는데 제25-24연대의 2개 대대와 제90야포대대, 수원-김량장리간 도로를 차단하기위해 미 제3사단의 제15연대 제1대대와 제15전차중대, 그리고 제65연대 제2대대와 제65전차중대에 북상명령을 하달하고 ,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를 김량장리 남쪽 5KM 지점의 천리에 배치한다.
위력수색이 개시된 1. 15일 제25-27연대 주력은 오산으로, 서해안은 발안장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미 제27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천리로 진출한 국군 제12-2대대는 별다른 접촉없이 천리에 진출했다. 하지만 동일 축선으로 진출한 미 제3사단 제15연대 제1대대와 2개 전차중대는 천리 북쪽 김량장리 부근에서 약 600~800명의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철수에 앞서 수원 남쪽 500M지점에서 발견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위하여 항공폭격을 유도하였으며 미 제1군단은 1,375명의 적을 사살하고 5명을 포로를 획득하엿다. 이에 반해 미군은 전사 3명에 부상지 7명이었다.
1월 23일 제8군 정보참모는 중공군의 주력이 한강과 수원-여주 사이에 있으며 항공정찰 결과 공산군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에 미 제8군 사령관은 총공세 대신에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강력한 위력수색을 실시하기로 하고 파괴적 위력수색을 계획하게 되는데 "썬더볼트작전"이라 명명하였다.
이 작전은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전차로 증강된 1개 사단에 필요시 국군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1월 25일부터 작전을 개시해 한강까지 수색작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발안일대 서해안-오산-천리-여주를 연하는 선이 공격개시선이었다.
(2) 용인 전투('51. 1. 25~27)
용인전투는 미 제1군단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여단이 선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51. 1. 25일 부터 용인 김량장과 151고기 점령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해 27일 치열한 백병전 끝에 목표를 탈환한 전투다.
수지 단국대(죽전캠퍼스)
풍덕천동
구성지구
언남동 172
구갈2지구(신갈동)
적 국1-15연
한국 민속촌 지곡목장
227 234 적
151 적 김량장 적
고매동 적
185 빈장산
동탄지구 신도시
"흔적이 별로 없는 김량장-151고지 전투현장"
터키여단은 185고지를 백병전으로 25일 탈취하고 26일, 09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김량장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이 계속되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된 가운데 일몰 직전에 시가지에 돌입하지만 전방의 고지 탈환은 실패 하였다.
한편 신갈의 151고지를 공격하는 터키 주력은 청천강 군우리에서의 치욕을 싯기위해 "알라"신을 외치며, 중공군이 151고지상에 토치카를 구축하고 있어 항공폭격에도 견디어 내며 결사항전을 하여 정오부터 시작된 공격이 오후 5시 30분에 목표를 탈환 할 때까지 처절한 백병전이 계속되었다.
1월 27일 정오까지 이 일대의 작전을 종료하고 국군 제15연대에 인계하고 수원으로 이동해 갔다. 이 작전에서 터키군은 김량장리에서 77명, 151고지 전투에서 397명 등 474명의 중공군을 사살하였으며 대부분이 개머리판에 의하여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고지에서 30분간의 백병전 상황은 U.P.I 기자에 의해 생생한 모습으로 전 세계에 타전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전투현장을 찾아 지목동일대 마을회관과 김량장동과 유림동 등을 찾아가 지역주민을 만나고 실제 전투현장을 찾아 올라 갔으나 그렇게 많은 개인호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실제 중공군이 토키카 등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전투를 했다면 그 흔적이 많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중공군이 진출간 미군의 항공폭격과 네이팜탄 사격으로 대대병력이 전멸했다는 가설도 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전투다. 혹시 우리가 엉뚱한 곳을 찾았는지 신갈 민속촌과 수원 C.C 등 전수 조사를 해 보았지만 우린 성과가 없었고 주변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미군 불폭탄에 다 타 죽었다는 이야기가 대다수 였다. 아마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는, 혹은 살아있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할 수는 있다. 어쨌든지 죽은 중공군 시체를 다 처리했을리는 없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3) 수리산 전투('51. 1. 31~2. 6)
수리산 전투는 미 제25사단 제35연대와 터키여단이 서울 재탈환을 위해 '51. 1. 31~2. 6일까지 중공군 제150사단과 공방전을 펼친 전투다.
미 제1군단은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해 수리산과 관악산을 점령하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 이에 따라 군단은 서해안으로부터 터키여단, 미 제25사단, 국군 제15연대, 미 제3사단을 병진 배치하고 국군 제1사단 주력을 예비로 하여 전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1월 27일, 공격계획에 의하면 미 제25사단은 미 제35연대를 주공으로 하여 수리산을 점령하고, 좌측에서 터키여단이 소사방면으로, 우측에서 국군 제15연대가 모락산을 공격한다는 것이였다.
1월 31일 07:30분을 기해 공격준비사격을 시작으로 공격이 개시되었지만 진전이 없었다. 2월 1일, 좌측의 터키여단과 합동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합동공격을 감행하지만 연대 규모의 중공군의 저항으로 탈환에 실패한다.
안양동
수암봉398 산본동 바리산
중150사 태흘봉489 군포시 모락산
의왕시 백운산
수암동 수리산474
451
터키군 미군
속달동 광교산
부곡동
둔대동 대야지구
반월저수지
2월 2일, 미 제35연대는 11시를 기해, 터키군은 2시에 일제히 공격을 다시 시작하여 12시에 미 제35-2대대가 수리산 474m를 점령한다. 이 때 터키군이 수리봉 정상에서 서쪽으로 우회해 440고지(수리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800m)와 431고지(440고지와 동쪽으로 연결된 고지)를 탈환한다.
그런데 이때 중공군은 440고지의 남쪽 기슭에 위장이 잘된 진지를 구축하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터키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야간이 되어 431고지의 터키군과 수리산의 미 제35-2대대를 공격하여 터키군은 모든 장비와 보급품울 유기한채 철수하고 미군은 2월 3일 10시까지 백병전을 전개하여 사수하였다.
이에 미 제25사단에서는 예비로 있던 제27연대-3대대를 터키군과 투입하여 440고지 공격을 4차레에 걸쳐 공격하여 2월 6일 마침내 점령하였다.
"유해발굴 결과"
여기서 440고지의 위치가 모호한바 우리가 탐사한 결과 수리산에서 수암봉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있는 봉우리로 판단이 되며 우리는 터키군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찾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지역 일대에서 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또한 451고지 밑에 있는 바람고개 바로 위 등산로상에서 3구의 유해를 찾아냈지만 유품이 대다소 중국것으로 아마 중공군이 죽어서 묻혀있었던 곳이다.
(4) 모락산-관악산 전투
이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서울 재탈환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한 1월 31~2월 9일까지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 모락산은 서울 진입에 꼭 점령해야 할 산으로 미 제1군단장은 미 제3사단을 적정이 강한 수원 동쪽의 55번 도로축선에 투입하고, 신갈-김량장리에서 격전을 치른 터키여단은 서해안으로 이동시키고, 안성에서 군단 예비로 주보급로를 경계중인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로 모락산 공격에 투입하였다.
국군 제15연대의 좌측은 미 제3-35연대이고 우측은 미 제3사단이었으며 제15연대장 김안일 대령은 1월 31일 미 전차 지원하에 2대 대대 병진으로 공격으로 389고지의 모락산을 정면 공격하였다.
이 당시에 모락산에는 대대 규모의 적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국군 제15연대는 제1대대를 우측방으로 투입하여 광교산과 백운산 일대의 적정을 파악하기 위한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우측방에서 진출하는 미 제3사단 제65연대의 진출을 엄호하였다.
2월 1일, 1, 2대대가 전방, 제3대대가 예비로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으며 2월 3일 좌일선 제2대대가 모락산을 탈환하는데 우일선 제1대대가 피해가 커서 제3대대와 교대하였다.
국군 제15연대가 2월 4일 모락산을 탈환하는 싯점에 미 제35연대가 좌측 수리산을 탈환하자, 미 제1군단장은 "알렌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미 제25사단의 전방 적 진지를 돌파한 후 한강으로 진출, 인천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김포공항 서쪽의 적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리고 우전방 미 제3사단은 검단산과 청계산을 경유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도록 하엿다.
이 무렵 공산군 , 중공군 제50군과 북한군 제1군단 주력은 6일 저녁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고 일부 병력만 한강 이남에 배치하였다.
한편 한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관악산을 점령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장에게 점령을 독촉하였고, 극동 해군사령관에게 적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인천지역에 대한 위장상륙작전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5연대로 관악산 점령을 명하였고 제15연대는 2월 9일 08시를 기해 제2대대와 제3대대로 관악산을 공격하였다. 연대는 당일 9일 10시 20분에 관악산을 점령했고, 10일 11시 30분, 노량진-영등포로 이어지는 한강선까지 진출하였다. 이후 미 제1군단은 김포와 인천지역의 잔적소탕을 병행하면서 인천-영등포-대모산으로 진출, 서울 공격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5) 인천-서울-곡수리 진출
신정공세 이후 조중지원군사령부는 피해회복 및 부대정비를 하고 2월이 되어야 총공세로 전환할 것으로 판단 되었다. 따라서 유엔군과 국군이 신속히 부대정비를 하여 대규모의 공격작전은 하지 못 할 것으로 그들 또한 판단했다.
그러나 유엔군이 위력수색작전에 이어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으로 접근하자 당황한 공산군은 1월 27일 서둘러 휴식과 정비를 중지하고 유엔군의 공세에 대비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장에게 기갑부대로 서해안 저지대로 진격하고, 제5공군은 한강 이남에 강력한 항공폭격으로 적을 고립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격의 범위도 확대할 것을 결심하여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장과 국군 제3군단장에게 29번도로 축선으로 집결 중인 북한군 제2, 5군단의 재편성을 저지할 수 있도록 서부전선의 한강 진출과 유사한 작전을 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에따라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5연대(미 제25사에 배속), 미 제25사 제35연대, 터키여단으로 1월 31일 부터 안양남쪽의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였다. 우전방 미 제3사단은 검단산과 청계산을 경유하여 한강까지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안양으로 후퇴한 적도 관악산에 배치된 제47사단과 합류하여 방어거점을 강화하고, 인천에 대기 중인 제17사단도 이 지역으로 증원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장에게 관악산을 공격하도록 하고, 적의 증원을 차단하고 북으로 퇴각을 강요하기 위해 극동 해군사령관에게는 인천에 대한 위장 상륙작전을 요청하였다.
국군 제15연대가 '51. 2. 9일 관악산 공격을 개시하여 10일, 노량진-영등포 선으로 진출하여 우인접에서 먼저 한강변에 진출한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미 제25사단 기갑부대도 10일 인천으로 진출하였는데 적이 갑자기 인천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인천 위장상륙계획도 취소 되었다. 미 제25사단은 인천-영등포 도로를 점령한 후 계속하여 김포공항과 김포반돌로 진출하였다. 이대 미 제1군단은 인천-영등포-대모산으로 진출, 한강 도강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우인접 미 제9군단은 2월 들어 적정이 경미하여 2월 8일 까지는 무난히 한강변으로 진출할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남한산과 양자산으로 연결된 산악지대로 접근하면서 도로망의 결핍과 기상악화로 항공지원이 원활하지 못해 진출이 완만하였다.
미 제9군단은 2월 5일 , 국군 제6사단의 제19연대를 미 제24사단에 배속하여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9일부터 10일 사이에 적의 완강한 교두보가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교두보지역은 서쪽의 경안리에서 동쪽의 양평에 이르는 24km로, 한강에서 남쪽으로 6~10km 불거져 나온 U자형 지형이었다. 교두보 전방에는 남한산과 양자산 외에도 태화산, 천덕봉, 등 수개의 감제고지가 있었다.
결국 유엔군의 한강선 진출작전은 인천-서울-양평선이 목표였으나 , 남한산-양자산을 남겨 둔채 일단 종료하였다.
나. 중동부 지역의 제2전선 차단작전과 위력수색작전
(1) 적성리 전투
적성리 전투는 '51. 1. 12~1. 15일까지 미 제10군단 예하 특수작전단의 작전통제를 받고 잇던 국군 특공대대가 경북 문경 동로면 적성리 계곡에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10사단 소속의 1개 연대를 섬멸시킨 전투이다.
중공군의 신정공세, 제3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는 동안 북한군 제2군단 예하 4개 사단(제2.9.10.31사)이 주동부와 동부전선에서 홍천-횡성-원주 선으로 종심깊게 침투하여 단양, 문경, 영즈, 안동 일대에 제2전선을 혀성하였다.
이로 인해 중동부와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과 제1군단은 홍천-주문진의 방어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51. 1. 5일 육군 명에 의해 영월-삼척선(일명 황우선)으로 철수하였다.
1월 9일 이형근 준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영월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좌전방에 제7사단을 영월 북동쪽 완택산 일대에, 우전방 제9사단을 정선부근에 각각 배치하고, 군단 예비로 제3사단을 춘양에 배치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2군단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국군 제3군단과 미 제10군단 사이에 간격이 생기자 이를 통해 제10사단을 선두로 병력을 침투시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려 하였으며 이들의 최종 목표는 단양을거쳐 대구에 도달하는 것이였다.
중동부전선의 상황을 분석한 미 제8군사령관은 원주로 내려오는 북한군 제5군단이 아니라 북한군 제2군단이라 판단하고 제10군단장에게 이들을 격멸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1월 11일 상주부근에 대기 중인 군 예비인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을 안동으로 이동시켜 미 제10군단에 배속시키고, 안동-영덕간 도로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함흥에서 철수하여 마산에 대기중이던 미 제1해병사단을 영천-경주-포항지역으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경계를 강화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제천-영월 사이를 방어하기 위해 문막 동쪽에 있는 국군 제5사단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국군 특공대대(배동걸 소령)로 하여금 황장산 기슭의 적성리를 수색정찰 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국군 특공대대는 1월 11일, 안동에서 차량으로 점촌에 도착하여 12일 미명에 적성리로 들어가 경찰 및 청년방위대원과 합류하여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12월 13일, 적이 꽹과리와 북을 치며 파상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15일까지 백병전을 감행하며 미군의 항공폭격 지원을 받아 결국 특공대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적 사살 1,247명, 장교 7명과 사병 72명 생포, 반면에 아군 피해는 전사 9명, 부상 2명, ㅣ군 부상 2명, 민간인 사망 4명, 경찰 부상 1명, 청년방위대원 전사 7명 등이었다.
이 전과보고를 받은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헬리곱터로 참모를 대동하고 직접 특공대대를 방문하여 격려했으며 1월 16일 충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현장 탐사 및 탐문결과
나는 이 지역에 대한 탐사 및 탐문을, 증평에서 포병연대장으로 재직시 상주 일대와 문경지역에 대해 수시로 찾아가 확인하게 되었다. 문경 동로면 경천호에 가면 서쪽 호변 수평리에 경찰 전공비가 있다. 바로 전쟁전에 침투한 북한군 유격대대와 전투를 벌인 경찰의 전공비다. 이곳 적성리는 그 북쪽에 있으며 남쪽에는 912M의 공덕산이 동쪽은 677M의 무명고지가 있는 석항리고서쪽은 943M의 국사봉이 있고 북쪽에 1077M의 황장산이 있는 깊은 산중이 적성리다.
적성에서 벌재를 거쳐 북으로 가면 단양이고 좌로 가면 제천이 나오는 곳으로 월악산 국립공원의 동남쪽 자락에 있는 교통의 요지다.
"북한군이 가매장된 곳이 없다"
이곳에 가면 청년방위단의 전공비가 있고 아직도 사주방어를 했던 교통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04, '12) 지역 경로당과 어르신을 찾아다니며 관련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그렇게 많이 죽은 북한군 제10사단의 병력이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분들이 없다는 것이다. 1200명이 죽었다면 대단한 전투이고 그 당시의 학교나 경찰지서 등이 다 있는데 지역 주민이 이걸 모를 리가 없는데 특이한 지역이다.
일부 주민은 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대부분이 이 지역분들로 나중에 하나 둘 유족들이 시신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지만 추측건데 황장산에 피난 또는 북한군 오열에 속아서 그들의 꾀임에 빠져 아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내몰려진 주민들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 배동걸 특공대대의 비밀
미 제10군단의 직속부대인 한국군 특공대대는 일본에서 편성돼 흥남지역에서군단 철수작전을 엄호하고 '50. 12. 24일 연포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로 철수해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 12월 25일 울산 신불산(1209M)으로 이동해 공비토벌작전을 하던 중에 명령을 받고 1월 10일 안동에 도착했다.
(2) 남대리 전투
남대리 부근 전투는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3사단이 주축이 되어 '51. 1. 14~22일까지 영월 동남쪽 남대리 일대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옥석산, 어래산 등지에서 격멸한 전투이다.
남대리는 영월 영춘면에 있으면서 소백산맥을 끼고 충북과 경북이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샇여 있으면서 백두대간을 이용하여 남북으로 오가는 산악 접근로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을 넘어서면 경북 봉화지역이다.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군 제2군단은 '51. 1. 12일 현재 제10사단이 단양-안동지역에, 제2사단이 단양 원만허(남대리 서쪽15KM), 제31사단이 남대리에, 제27사단이 망경대산(주문리 북쪽 4KM)에 각각 침투 중이었다.
675M
미7-17연대 봉래산 국7-8연
완택산 신동(정선)
영월 916M 석항리 국7-3연대
국7-5연대
계족산 응봉산890M
북9사 북27사
망경대산 1,088M 예미산
국3-23연대
대야리 제7-5연대
고씨동굴 옥동리(김삿갓면) 녹전리(정선 중동면)
태화산1207M
,북2사 국5-35연대
형제봉1207M 어래산1063M
제천 북31사
의풍리(김삿간 유적지)
단양
미7사(-)
비로봉 국5-35연대 남대리 선달산1236M 박달령 옥돌봉1244M
1440M
국3-22연대
주실령 춘양
아호리 국5-27연대
국3-18연대 문수산1207M
풍기
북10사 봉화
영주
이에 국군 제3군단은 제9사단을 군단 우측부대로 송계리-정선-후천 간에, 제7사단을 군단의 좌측부대로 후천-완택산-두평 간에 배체하고 에비인 춘양에 집결 중인 제3사단을 남대리로 투입하였다.
군단을로 부터 이동 명령을 받은제3사단은 1월 9일 명령을 받고 1월 12일 남대리로 추진시켰다. 제3사단은 제23연대는 녹전으로 이동하여 제7-5연대를 지원하고, 제22연대의 1개 대대를 군단의 후방을 방호하기 의해 주문리로 이동시키며, 제18연대를 남대리로 북상 시키게 된다.
남대리 부근의 전투는 1월 15일 제22연대가 주실령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어, 제18연대는 선달산 공격에 나섰다. 선달산 공격은 16일 04시에 4시간에 백병전을 감행하여 점령하고 이 후에 적의 야간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제22연대와 제18연대는 남대리 공격에 들어가 18일까지 점령하고 19일에는 제7사단에 배속되었던 제23연대가 제18연대와 교대하여 들어와 그 우측의 제7사단 제3연대와 병진공격을 실시하여 남대리 의풍리에 들어온 적은 그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기간중에 국군 제3사단은 1,462명을 사살하고 67명을 생포하였으며 사단은 전사 42명, 부상 113명, 실종 43명이었다.
"의풍리의 어죽"
나는 지난 20여년을 격전지를 탐사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는 것이 그렇게 많은 전사자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라는 의문점이다. 이곳도 원주지구나 문경 적성리와 비숫한 곳으로 모두 몇 천명의 적군이 죽었다. 그 당시 아군이 주도권을 확보하기에 적군이 시신을 수습해 갈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지역 주민들이 들어와 대부분 가매장 하거나 군인이나 경찰의 통제로 일정한 곳에서 화장을 했을 텐데 그런 사실을 말하는 참전용사나 지역 주민을 만나지 못했다.
"춘양 도래기재에 화장터는 흔적도 없다."
이곳도 나는 어래산뿐만 아니라 문수산 선달산 옥달봉 등 다 올라가 보았다. 박달령, 도래기재도 춘양에서 다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춘양 서벽리의 한 지역주민이 본인이 옥돌봉과 도래기재, 구룡산 능선에서 어린 시절에 유해를 단가에 들고 나와 화장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도래기재 좌측을 함께 동행했지만 그 흔적이 없었다.
와석리로 들어가 어래산을 오르고, 의풍리에갔을 때는 한여름날 늦은 오후였다. 그런데 동네에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솥걸이에불을 피우고 있다. 다가서 보니 바로 옆 냇가에서 민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엄청 잡았다.
동네분들이 붙잡고 먹고 가라는 간청(?)에 주저앉아서 배고픔을 해결했다. 어죽을 처음 먹었지만 배가 고프니 정말 맛있었다. 동네분들 이야기가 한 30년전에만 하더라도 어래산이나 선달산에 오르면 해골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멧돼지의 밥이 된 용사의 뼈"
나무를 하던 시절에는 올라가 숱하게 보았는데 어느날부터는 안보이는데 그게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던 시절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떤 호는 한구덩이에 유해가 서너구가 있기도 한데 멧돼지 떼가 나타나 다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멧돼지 떼가 산 한 능선을 다 쓸고 간다고 한다.
와석리 젓동개에서 민원이 왔다. 본인이 직접 어래산 중턱에서 유해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김삿갓 마을에 들러 묘소에 묵념을 올려드리고 와석리로 갔다. 젖동개 끝에 있는 집주인이다. 하지만 함께 동행은 못하고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우리만의 탐사를 했다. 그리고 발굴팀을 투입해서 발굴을 했지만 유품만 몇점 찾았고 유해는 없다. 아니 1,500명의 적군을 사살했다면 뭔가 근거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정말 아리송하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도 북한군보다 아군이 더 많이 들어와 있었지 북한군은 공비수준으로 별로 없이 밤에 주로 내려와 먹을 것을 가져가는데 이때는 눈도 많이 오고해서 흔적도 명확해 북한군이 굴이 아니면 숨기도 어려웠다 한다.
오히려 일반 피난민들이 계곡같은 곳에 들어와 있다가 미군 비행기 폭격에 더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었다.
(3) 영월 부근 전투
영월 부근 전투는 국군 제3사단이 남대리 전투에서 동북방면으로 공격하는 동안에, 국군 제7사단과 배속된 제3-23연대가 '51. 1. 19~24일까지 석항-두평 등 북쪽에서 영월을 공격한 전투다.
국군 제7사단은 '51. 1. 8일 영월로 철수한 후 제3군단의 좌측부대로 제3연대가 영월 동쪽 두평에서 원택리까지, 제8연대가 신촌에서 연하동까지 배치되어 적의 후방 침투를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정선-영월지역으로 공격하던 북한군은 북한군 제2군단이었다. 북 제9사단이 망경대산과 응봉산을 장악하고 일부가 마대산(김삿갓면)과 소백산맥 쪽으로 남진하고, 북 제2사단이 풍기에 이르고 있었고, 북 제10사단이 영월에서 국 제7사단과 대치중이었으며, 길원팔 유격부대가 영월에서 국군 제7-8연대와 격존 중에 평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 제3군단은 단양-영월 돌파구 확장을 차단하고 공세이전하기 위하여 국군 제7사단은 1월 14~15일 사이에 제8연대는 완택산-삭항사이를 점령하고, 제5연대는 대야리로 진격하고 남한강 연변에 진지를, 제3연대는 14일에 석항-녹전간에 위치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적의 증원부대가 투입되기 전에 영월을 탈환하기 위하여 '51. 1. 19일 08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8연대를 우일선, 제3연대를 좌일선으로 석항-운교산에서 공격하여 영월을 탈환하고 제5연대는 현위치(남한강변)에서 대기하다 예비로서 의명 석항 북서쪽 935고지를 점령토록 하였다. 사단에 배속된 제3-23연대는 와석리의 930고지와 의풍리, 어래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단은 주로 망경대산-응봉산 방향으로, 한쪽은 외룡리-옥동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1월 21일 영월에서 단양으로 흐흐는 남한강변까지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따라 적은 분산철수하개 되었고 제8연대가 계족산을 점령한데 이어 1월 24일 미 제7-17연대와 합동으로 영월을 공격하게 된다.
51. 1. 24일의 영월 공격은 제3연대가 주공으로 투입되었으며 영월 북방 675고지와 봉래산을 백병전과 화력전으로 점령하고 미군과는 한반도 지형이 있는 일곡일대에서 연결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1. 19~24일까지의 전투에서 1,044명을 사살하고 41명을 생포하였으며 사단의 피해는 전사 71명, 부상 90명 실종 2명이었다고 기록된다.
"녹전 운교산에 1개 소대를 눈속에 묻었다는 용사님의 눈물"
제7사단 참전용사 한분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현충원에 왔다가 들렸다고 한다. 찾아오신 것은 본인이 제7사단 제3연대 출신인데 녹전리에서 1개 소대가 적의 기습으로 전사하여 겨울이라 땅도 못파고 눈속에 묻고 왔다며 녹전에 가면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얼마 후에 나는 용사님을 차에 모시고 정선 녹전으로 갔다. 녹전 초등학교도 확인하고 외룡리 삼거리에서 지역 주민을 만나 운교산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고장골로 들어가 지역주민의 제보지역을 탐사했다. 그러나 모두 밭으로 변하여 이미 훼손된 곳이다.
"혹시 저 산 꼭대기에 가 봤습니까?"
"그럼요, 올라서면 꽤나 넓어요. 둘레가 500M도 더 됩니다."
"내가 그곳에 '51. 1월말인가 올라갔다가 1개 소대를 눈속에 파묻고 저 반대편 강가(옥동천)로 내려갔더니 아마 외룡리인데 경찰들도 강둑에 몇이 전사해 있었는데" 참전용님의 이야기다.
"내가 저 위에 동네 형들과 자주 올라가 탄피나 실탄을 주어왔는데 탄통에 실탄이 가득한채로 있기도 했는데 사람뼈는 어쩌다 있지 별로 없었어요. 오히려 아까 가보았던 고장골에 시신이 좀 쌓여 있었지"
"연하계곡의 응봉산은 가보았습니까?"
"그럼요, 화원이라고 고장골 서쪽에 성황골이 있는데 그곳으로 올라서면 망경대산을 쉽게 올라갑니다. 능선이 평평하게, 말이 1,000고지이지 별로 힘도 안들고 응봉산까지 가는데 탄피는 많이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별로 못보았어요"
우리는 영월읍으로 갔다. 이곳에서 1박을 하고 가려는데 참전용사님이 집에 일이 있다며 가야한다고 한다. 그래서 버스터미널에 모셔다 들이고 막차 표를 드렸다. 저녁은 함께했다.
다음날 읍내 참전용사 전우회를 찾아가 안내를 받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전투를 한 분이 없기에 아쉬웠다. 대부분 이야기가 영월읍을 끼고 주변을 아군이 장악하여 북한군이 읍내에서 주로 죽었다고 한다. 읍내 길가를 걷지 못할 정도로 시체가 가득했는데 모두 당시의 나이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들것같은 것으로 드렁다 강가 모래밭에 묻었는데 다 씻겨갔다는 것이다.
천문대가 있는 봉래산이나 그 서쪽 발산도 국군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온 북한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제대로 무장도 없었고 몇명이서 총 한자루씩 들고 있고 수류탄만 많이 들고 다녔다 한다.
"태화산 굴을 가보셨나요?'
한 분이 질문을 하셨다. 태화산에 가보았느냐는 것이다.
"아니 못갔습니다. 전사에 태화산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이 없어서"
"그곳에 올라가다 보면 굴이 있어요. 굴에서 피난민들이 많이 있었는데 미군 비행기가 폭격해서 밖에 있던 사랃들이 많이 죽었어요. 그때 경찰도 있었고 군인도 몇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렇습니까. 필히 탐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군인이 있었다면 올라가야 합니다."
"녹전 고장골에서 '08년 1구, 김삿갓면 옥동리에서 '09년 고, 김영철 하사 발굴"
하지만 우리 조사팀이 올라가 본 결과 별다른 것을 찾지못해 발굴작전은 없었다. 그러나 참전용사 증언과 지역주민의 제보등을 종합하여 우리는 2구의 국군 용사님을 발굴하여 현충원에 모셨다.
(4) 홍천 포위 공격
서부와 중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진격이 한강선에 다다르고 있을 때에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1월 24일 제2전선부대 차단작전을 종료하고 1월 29일부터 지평리와 횡성 일대에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였다.
미 제10군단의 미 제2사단은 한강진출의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여주-원주를 연하는 선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로서 지평리까지 수색정찰을 실시하였다.
미 제2사단과 미 제24사단의 합동정찰대는 1월 29일 중공군의 보급품을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지평리 부근의 쌍터널을 목표로 정찰을 실시하였으며, 이미 중공군 제42군 예하 제125사단이 터널을 내려다 보이는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정찰대는 항공지원과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의 증원으로 구출되기는 했지만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51. 2. 1일, 중공군은 2개 연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개시해 옴으로서 쌍터널 부근에서 하루종일 공방전이 벌어졌고 중공군은 대량 피해를 입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미제 10군단은 쌍터널전투의 승리 이후 홍천 점령을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홍천은 전략 및 전술적 요충지로 신속히 양익포위로 적의 증원거점을 분쇄하고, 동시에 후방침투에 실패한 후 국군 제3군단 정면에서 퇴각 중인 북한군 제2군단을 추격함은 물론, 아군이 홍천-대관령-강릉 선으로 진출하기 위한 유라한 발판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3군단과 협조된 공격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을 "몰이" 즉 포위한다는 의미로 "라운드업 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에 국군 제3군단을 작전통제하도록 하였으며, 라운드업 작전의 목표는 Q-Q선(석항-횡성-방림)으로부터 R-R선(양평-홍천-풍암리)까지 진출하는 것이였다. 이를 위해 미 제10군단장은 지평리-횡성에 미 제2사단을, 횐성 남동족 치악산 북쪽에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 평창 남서쪽 주천리에 미 제7사단을 각각 배치하고, 공격제대로 좌전방에 국군 제8사단, 우전방에 국군 제5사단을 투입하여 홍천을 포위 공격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미 제2사단은 1개 야포대대(증강), 자동화기포대, 차량화 보병부대로 편성 된 제21지원부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8사단을 직접지원하고, 미 제7사단도 이와 유사한 규모의 제7지원부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5사단을 지원토록 하였다.
이 계획에 의하여 미 제10군단의 우익인 국군 제3군단이 영월-정선 선에서 북진하여 공격 개시일인 2월 5일까지 평창에 도착, 북한군 제2군단을 공격해 미 제10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임무가 부여되었다.
한편 미 제10군단은 좌로부터 미 제2사단(지평리), 제187공정연대전투단(횡성), 미 제7사단(평창)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주공으로 투입될 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이 제천, 영주 부근의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국군 제2사단에 인계하고 원주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제8사단은 느우리에, 제5사단은 평장리의 공격 대기지점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8사단장, 최영희 장군은 '51. 2. 5일 08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하여 주공인 제21연대를 5번 도로(홍성-홍천)를 따라 벽학산-독재봉-오음산으로 기동하여 홍천을 점령하고, 중앙의 제10연대는 성지산을 점령한 후 상오안리, 홍천 서남족-양덕원리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좌전방 제16연대는 6번도로(횡성-용두리)를 따라 증안리로 진출, 화채봉을 넘어 용두리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공격간 우전방 제21연대는 독재봉을 공격하던 중 2개 중대 규모와 격전을 벌이고, 좌전방 제16연대는 6번도로 북쪽 초원리 467고지 일대의 종공군에 의해 진출이 저지 된다.
2월 7일, 제8사단은 6번도로 상에 제16연대가 풍수원 성당 서쪽 증안리(도원리)에, 중앙의 제10연대가 이목동(유원리)에, 우전방 제21연대가 대삼마치-오음산 남쪽으로 진출하여 3개 연대 병진의 공격거점을 확보하였다.
사단의 공격은 2월 8일, 우전방 제21연대가 오음산(930m)을 공격 하면서 중공군 제66군 예하의 제198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되며 항공지원과 전차, 포병의 지원하에 8일~10일사이에 대공방전이 벌어지고 중앙의 제10연대와 ㅘ측의 제16연대는 증안과 도원리 일대에서 전선 돌출을 우려하여 수색정찰에 집중하였다.
이 무렵 국군 제8사단의 우인접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전선을 재조정하고, 좌인접 미 제2사단이 서남쪽에서 돌출부를 형성하여 제8사단은 사실상 군단 전선 중에서 가장 돌출된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오음산930
484 438 감투봉 637
대삼마치 제21연
유목정리 신대리 시동리 창봉리 독재봉
345
학담리
갈기산 685 신촌 벽학산
332
풍류산449 금물산 776 723 학곡리
증안 도원리 성재봉 787 457
제16연 제10연
덕갈매기 유현리 초원리
응봉 686 금대리
한편 홍천 우측방 제5사단은 2월 5일 08시를 기해 공격개시선인 평창-횡성간 도로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조항리-소사리-하대리-상하가리까지 별 저항없이 진출했다. 그러나 6일, 이튼날부터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우일선인 제27연대가 주봉(896m),용마봉(1,026m), 자주봉(889m)을 점령하고 둔방내리로 진격했지만 좌일산인 제36연대가 하궁리와 용둔리 일대에서 진출이 저지되었다.
국군 제5사단장 민기식 장군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27연대로 화동리를 장악하여 적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하고, 제36연대와 제35연대로 적의 주요거점인 포동리와 유동리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에따라 2월 8일, 제27연대가 화동리를 점령하고 유동리를 기습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실패했다. 여기에 중앙의 제36연대는 암곡산 후방으로 연결되 능선에서 3일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진전이 없고, 추가로 좌전방에 투입된 제35연대가 국사봉을 점령하고, 2월 9일에 적의 주력이 완강히 저항하던 317-412-247고지를 돌파하여 섬강 남쪽으로 진출하여 북한군 제6사단의 지휘소가 있던 포동리를 양면에서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삼배리 유동리 국5사
국3사 포동리 화동리
독재봉 횡성호 갑천리
송전리 제3-23연 대문동 제3-22연
홍도산 국사봉 구방리 하대리 삽교리
자주봉
옥동리 정금산 정금리 889
개전리 영영포리 둔방내리
제5-35연 제5-27연
제5-36연 유용리 용마봉
횡성읍 추동리 용둔리 하궁리 주봉 1044
896
산전리
상하가리 소사리 조항리
원주 소초면 평장리
미 제10군단장은 제8사단의 진출이 어렵게 되자 군단 예비로 있는 국군 제2사단을 투입하려 했으나 아직도 중공군 신정공세시 충격으로 전투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에 제8군사령관에게 국군 제3군단의 예비인 제3사단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2월 8일 국군 제3군단은 좌전방 제7사단이 평창 북쪽의 창동으로 진출 중이고, 우전방 제9사단도 정선 부근의 한강 계곡을 통과하여 하진부리 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군 제7사단을 후속하고 있던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평창 북쪽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7사단을 증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 국군 제3사단의 미 제10군단 배속을 승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군 제3사단이 창리부근에서 출발하여 2월 10일 홍천 포위공격의 우전방 제대로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 지역인 횡성-홍천 도로의 우측방을 인수받았다.
이에따라 제3사단장은 제23연대가 좌전방으로 송전리에, 우전방 대문동에 제22연대, 예비로 제18연대를 원주 소초면 평장리에 위치시켰다.
따라서 2월 10일 현재 오음산지역에 제8사, 삼배리 지역에 제3사, 유동리 지역에 제5사가 야간 방어로 대비하였다.
이 당시에 공산군은 서부전선에서 일부 병력으로 한강 남안에 교듀보를 확보하고 유엔군의 전진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을 중동부 전서네 집결시켜 유엔군을 종심깊이 유인하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른바 중공군의 제4차 공세, "2월 공세"가 시작 되는 것이다.
(5) 대관령 확보
태백산맥 서쪽의 제3군단이 적 제2전선부대 소탕작전을 마치고 홍천포위 작전의 우전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진출을 개시하였다.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도 제3군단의 진출을 지원하기 대관령과 강릉을 공격하게 된다.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비교적 중공군의 신정공세시 전선이 경미하여 38도선 북족 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으나 아군의 전반적인 전선 조정을 위해 1월 10일경, 송계리-삼척선으로 철수하였다.
군단에 배속된 수도사단은 제1기갑연대를 좌전방 송계리에, 제26연대를 우전방 묵호에, 제1연대는 사단 바로 옆 삼척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연곡천
운계봉 북-69여
수-1연
죽현리 경포호
황병산 수-1-3대대 남대천
수-1기갑 적-1개대대
칠봉산 비행장
오봉산 구산리 아산 수-26연
운산리
대관령 탑동 금광리 아전리
횡계리 도마리 수-1연 산성우
9사 ‡ 수도 수-1기갑 수-26연
화난봉 목계동
옥계
↓
묵호
이때 사단 정면의 적은 사단이 주문진 부근에서 신방어선(황우선)으로 철수하는 틈을 이용하여 인민군 제69여단 및 길원팔 유격부대 약 6,000여 명이 강릉부근까지 남하하여 강릉-구산리선에서 유격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제1군단은 좌측의 제3군단과 연결을 유지하면서 강릉과 구산리-대관령을 확보한 다음, 경강국도 북방의 황병산-운계봉선까지 전진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수도사단은 2월 3일, 송계리-묵호선에서 주공인 제26연대가 강릉을, 조공인 제1기갑연대가 대관령-구산리를 공격하게 되었다.
제26연대는 옥계로 진출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기갑연대 제1대대는 선발대로 백복령을넘어 구산리-임계 도로의 삽당령으로 이동하여 연대주력의 구산리 진출을 엄호한 후, 화난봉 동쪽 부근에서 400명의 적 유격대를 발견하여 기습공격을 감해아여 격멸하였다. 사단 예비 제1연대는 송계리로 진출했다.
아전리 구산리 일대에서 저항으로 진출이 더디게 되자 사단장은 제1연대를 중앙으로 투입하여 제3대대가 죽현리로 진출하면서 적이 후방차단을우려하여 적 제69여단은 강릉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2월 7일 10:00시에 제26연대가 강릉을 점령햇다.제1연대는 운계봉으로 진출하고 좌익의 제1기갑연대는 황병산을 점령하였다.
4. 전투 결과
1951.1월 25일부터 실시된 썬더볼트 작전 시기에 유엔군은 작전개념을 수색정찰에서 지역확보로 전환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자신간을 되찾았다. '51.2.10일경 서부전서에서의 선더볼트작전은 공산군의 남한산 교둦보를 제외하고 본래 목표로 삼은 한강 남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중동부전선에서는 라운드업 작전이 이루어졌다. 이 작전은 중동부전선에서 적의 압력을 제거하고 서부전선의 선더볼트 작전과 보조
를 맞추어 한강 남안에서 홍천으로 연결되는 선을 확보함으로서 서울 탈환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작전과정에서 국군이 선봉을 미군이 후속부대의 임무를 분담하면서 연합작전을 실시하는 것은 서부전선의 썬더볼트작전과는 정반대되는 병력운용을 하였다.
라운드업 작전은 예정대로 2월 5일에 개시되었다. 그러나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미 제1군단이나 제9군단처럼 철저한 수색작전은 불가능하였다, 작전 개시 후 3일 동안은예정대로 제한목표들과 총제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공산군의 저항이 심하여 더이상 전진이 어려웠다. 오히려 공산군이 미 제10군단의 우측과 국군 제3군단의 좌측으로강력한 반격을 시도해 왔다. 결국 공격 제대는 홍천을 점령하는데 실패한다.
제3절 중공군 2월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
1. 개 요
중공군의 2월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은 2월 1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하고 3월 31일 38도선까지 진출한 작전이다.
'51. 1.15일부터 시작된 위력수색작전의 결과로 유엔군은 수원-여주 이남 지역에는 중공군이 소규모 부대만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1월 25일부터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2월 초순에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횡성-하진부리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 전선에 대한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횡성-홍천간의 삼마치 고개와 지평리 일대에 9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여 2월 11일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의 2월 공세다.
이로인해 지평리와 횡성-원주 지구에서 대 격전이 벌어져 미 제2사단 제23연대 전투단이 지평리를 사수하여 중공군을 격퇴하고, 미 제10군단은 원주-제천의 돌파구로 남하하는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중공군의 2월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비록 국군의 피해가 상당히 컸지만 유엔군은 중공군의 보급체계가 상당히 취약하고 작전 지속일 수가 5~6일밖에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중동부 지역으로 침투한 적을 격멸하기 위한 "킬러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의 결과로 3월 초에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의 재탈환과 38도선 진출을 목적으로 한 "리퍼 작전"을 3월 말까지 전개해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51. 2월에 접어들어 공산군은 가평-홍천 지역 집결과 원산에서 재편성이 끝난 중공군 제9병단을 중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춘천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때 공산군은 일부 부대로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을 교착 견제하고 주력을 동부전선에 집결시켜 유엔군을 종심깊이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공산군은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50군을 인천-영등포에, 중공군 제38군은 한강 교두보에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이 중동부전선에서 홍천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공산군은 중공군 제42군을 지평리 부근으로, 제39. 40. 66군을 양덕원리-홍천 일대로 추진배치하고, 동부전선의 북한군 제2. 3. 5군단도 홍천 동쪽으로 2월 9~11일 사이에 집결 완료하였다.
팽덕회는 이번 전역에서 9개 사단의 절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횡성과 그 이북 지구의 미군 1개 연대, 국군 1개 사단을 층층이 절단 분활하여 포위 섬멸하려 했다.
이와같은 계획에 의거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 제50군과 제38군 제112사단, 북한군 제1군단이 유엔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다가 2월 7일에 일부 엄호부대만 놓고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제38군은 중서부 전선의 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남한산과 양자산 일대의 한강 남쪽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특히 팽덕회는 제42군과 제66군 예하 제198사단으로 유엔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면서, 후방지역에 집결중인 중공군의 주력부대인 제39. 40. 66(-)군을 중부전선 일대로 집중시켰다. 제39군은 고양, 제40군은 동두천, 제66(-)군은 김화 일대에서 출발하여 홍천 이남 지평리 일대로 80~130km를 야간에만 행군하여 2월 9~11일 사이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나. 유엔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작전기도 및 방침
중동부 전선의 공산군의 행동이 증가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좌 인접 부대인 미 제9군단이 한강이남 교두보의 적을 격퇴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 제2사단이나 국군 제8사단 주력이 돌출되어 고립되거나 군단 전투정면이 과도하게 신장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다라 미 제2사단의 진출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에 미 제8군 사령부 정보참모 대리인 퍼거슨 대령은 리지웨이 장군에게 중공군은 보급등의 문제가 있지만 한국에서 유엔군을 몰아내기 위해 2월 15일경 공세로 전환할 것이라 보고하였다. 적의 진로는 영주를 향한 한강계곡과 29번도로를 따라 원주로 가는 진로가 될 것이며 양 방향 다 마지막은 충주로 향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미 제8군은 이러한 보고에 대비해 예하부대에 적극적인 방어준비를 구상하지 않았다.
(2) 지휘관게 및 전투편성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미 제3사단, 미제25사단, 국군 제1사단, 영 제29여단, 터키여단으로 편성되고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6사단, 영 제27여단(태국 대대 배속)으로 편성 되었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5사단, 국군 제8산사단으로 편성되고 미 제10군단의 우인접 부대인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제3사단, 제7사단, 제9사단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동해안의 제1군단은 수도사단이 편성되었다.
3. 전투 경과
가. 횡성 전투
'51. 2. 5일,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 8사단으로 홍천-풍암리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격을 개시했으나 적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이에 2월 11일에는 제3군단의 예비인 국군 제3사단까지 투입하여 오음산-포동리선까지는 진출했다.
그러나 바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인 이른바 2월 공세에 부딪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가 원주 점령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 접근로상에 위치한 횡성일대에서 피아간에 대혼전이 전개되었다.
미 제10군단이 맞이한 공산군은 중공군 4개 군단과 북한군 2개 군단으로, 중공군은 제40군(제124,125,126사)이 양덕원리 북방일대, 중공군 제66군(제196,197,198사)이 삼현리 일대에, 중공군 42군(제124,125,126사)이 지평리 북족에서공격을 서두르고 있었고, 예비로 제39군(제115,116,117사)이 양덕원리에 있었다.
그리고 북한군은 제5군단이 횡성 동북방 풍암리에, 제3군단은 예비로써 양구-인제 부근에서 제5군단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한편 아군은 국군 제8사단이 증안리-오음산 선에 제16,제10, 대전차공격대대, 제21연대를 모두 일선에 배치하고, 국군 제3사단이 위섬배-추동리에 이르는 구간에 제23, 제22연대를 배치하고 제18연대는 예비로 옥동리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구방리-하대리 정면에 제35, 36연대를 배치하고 예비로 제27연대로 하여 공격 준비를 하였다.
한편 국군 제8사단의 서측방에는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국군제5사단 동측방에는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51. 2. 11일 17시를 기해 중공군이 횡성공격을 개시하였다.
먼저 국군 제8사단 정면으로, 중공군 제42군의 124사단이 상물안리,석자동을 공격해 제39군 제117사단과 제42군 제125사단의 진로를 개척하고, 제66군 주력이 2월 11일 19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 제66군의 제198사단이 제21연대와 제10연대의 공간을 뚫고 후방으로 침투하여 창봉리에 이르러 미 제21지원부대와 B지원팀을 우회 도로를 차단하였다.
2월 12일 01시에 국군 제8사단 사령부와 모든 연대간의 통신 연락이 두절되었다. 중공군 제198사단의 침투식 공격이 성공하자 국군 제3사단 지역으로 공격하던 중공군 제197사단의 일부 병력 300여 명이 남서쪽으로 침투하여 5번도로상 창봉리 일대의 미 제21지원부대와 그 엄호부대인 미 제38연대 제1대대진지로 접근하였다. 결국 미 제21지원대는 400명의 인원 손실과 제503포대 등 중화기 대다수를 유기한 채로 철수를 감행해야 했다. 제21연대는 완전히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중앙의 국군 제10연대는 같은 시간에 중공군 제120사단이 갈기산을 넘어 야음을 틈타 깊숙히 침투하여 연대의 후방인 제6번도로 초원리에 나타남으로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고 포병 제50대대, 제20포병대대(-), 제10, 16연대 지휘소등이 모두 적의 기습으로 지휘마비됨에 따라 각 부대들은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남으로 철수하게 되고 제10연대장 권태순 대령이 전사했다.
좌익의 제16연대는 중공군 제39군의 117사단, 116사단의 공격으로 후방이 적에게 노출되어 지휘마비 상태가 되었다.
2월 12일 04시에는 중공군의 선두부대가 횡성의 사단 지휘소를 급습함으로서 통제불능으로 빠지고 사단은 제10군단장에게 보고하고 주포리로 이동하게 되며 이 당시에 각 부대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포대에 명령지를 담아서 연락기를 이용하여 공중에서 살포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2월 12일, 10시에 제8사단은 국군 제1군단(2. 12일 미 제8군 통제로 군단 지휘부가 국군 제3.5.8사단을 통제하기 위해 들어 옴)으로 배속이 전환되고 이후 제8사단은 2월 15일 지휘소를 황강리에 두고 제10연대가 선매리, 제16연대가 사창리, 제21연대는 2개 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으로 이동하여 제5사단의 석기암전투를 지원하게 되었다.
횡성전투 결과 국군 제8사단은 전사 또는 실종된 인원이 장교 323명으로 여기에는 제10연대장과 전 참모, 제16연대의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과 30명의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다. 사병은 7,142명이었다. 장비손실은 포 14문, 트럭 68대, 무전기 249대, 박격포 87문, 로켓포 137정, 기관총 164정, 자동화기 102정, 카빈소총 2,389정, 소총 4,096정이다.
국군 제3사단은 12일 9시경, 중공군 제197사단을 향해 공격했지만 오히려 13시경 정면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1개 연대가 포위되어 횡성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제66군은 신속히 횡성 후방의 곡교리-덕고산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여 했으나 국군 제3사단의 저항으로 퇴로 차단에 실패하였다.
사단이 철수하는 동안에 제23연대는 마옥리 부근에서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제18연대는 미 제2사단의 우전방으로 배속중인 제187공정연대전투단에 재 배속되어 홍성 북쪽의 섬강 부근에 진출하여 창봉리에서 철수하는 미 제21지원부대를 엄호했다.
이때 국군 제3사단의 우인접 부대인 국군 제5사단은 12일 아침 군단 전투지경선 부근의 공격목표를 공격하다 북한군 제5군단의 강력한 반격과 중공군의 후방위협을 받게 되자 정오 무렵에 철수를 개시히였다. 당시 제5사단은 적의 추격으로 포병대대만 손실이 없고 공용화기는 정반 정도, 그리고 병력은 4개 대대 정도만 남았다.
2월 12일, 제10군단장은 미 제8군사령관이 입회한 작전회의에서 횡성 포기와 원주방어를 건의하고 이날 늦게 지평리-원주 간의 새로운 방어선을 조정하였다. 미 제2사단은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을 배속받아 지평리에서 원주 북쪽 29번도로를, 그리고 군단보다 북족에 진출해 있는 우인접의 국군 제3군단과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29번도로에서 원주 북동쪽의 군단 전투지경선까지에 국군 제3, 제5사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한국군 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미 제7사단 제31연대를 평창 남쪽 도돈리로 배치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국군 제3, 5사단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 사령부가 배속되고 동해안의 수도사단은 제3군단장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미 제10군단장의 명에 따라 철수를 계속 하게된 제3, 5사단은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받아 양 사단은 다수의 피해를 입고 제3사단은 원주 남동쪽에, 제5사단은 제천 북쪽에 새로운 진지를 편성했다.
반면 원주 방향의 중공군은 14일 이후에 재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군 제5군단은 계속 공격을 하여 군단의 좌전방 제3사단은 상남리 부근에서 방어중이고, 제5사단은 주천리일대에서 방어중 제36연대가 돌파되어 8km를 후퇴하였다. 제8사단은 군단 예비로 주포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시 제3사단과 제5사단의 철수가 단행되어 제3군단 좌전방에 약 30km의 공백지대가 생겼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2군단의 쇄도를 우려한 제3군단장은 횡성 동쪽의 창동리선에 배치된 제7, 9사단을 약 20~25km 남쪽으로 철수시키게 되고 국군의 철수를 추격해 온 북한군 제9, 제27사단이 평창을 점령한 다음에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하였다. 따라서 국군 제7사단과 국군 제5사단간의 11km공백구역이 발생하게 되는데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이곳으로 투입되어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지난 2. 11일부터 18일까지 계속된 이 지역에서의 중공군의 2월 공세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중공군의 기록에는 횡성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 12,000여 명을 살상하고 각종 포 139문, 각종 총기 6,200정, 전차 7대, 차량 550대를 노획했고, 그들은 각종 포 21문, 총기 1,232정을 잃고 4,1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가-1 : 횡성지구 전투 관련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발굴 비교
(1) 참전용사 및 지역 주민 증언
탈북 참전용사 이규일(81세. 제3-22-1대대, '10) : 나는 '50. 12월에 입대하여 3사단으로 가서 홍천 북쪽, 요즘 신남인가 하는 곳 전방에서 싸우다 춘양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다시 올라와 횡성 윗쪽으로 올라갔는데 공격도 하기 전에 중공군이 나타났다. 나는 그때 중공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하는데 한쪽에서 피리불고 징치고 난리가 났다. 앞에서는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었다. 깜깜한 밤에 춥기는 하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더라 .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동료들이 다 없어졌다. 나는 옥동리라는 강 이남에서 탈출하다 어느 집에 숨어 있는데 포로가 되었다.
"어느 계곡인지 북한군이 1개 대대 병력을 기관총으로 다 쏴 죽였다"
나는 포로가 되어 바로 인민군에 입대하여 현장에서 인민군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당시에는 대대장도 잡혀있고 수백명이 있는데 그놈들이 선별하여 일부는 어디로 데려가고 또 많은 인원을 바로 군복입고 있는 그대로 수류탄을 주고 전투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횡성에 강이 하나 있는데 그 강근처 어디 계곡인데 엄청난 포로를 집어넣고 총으로 마구 갈겨 다 죽였다. 괜히 골치아프다면서 현장에서 어느 군관동무라는 놈들이 몇마디 물어보고 선별한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북에서 '57년도에 제대하여 생활하다 '08년도에 들어왔다.
지역주민 횡성 압곡리 마을회관 전교장(92세. '13) : 전쟁이 났는데 정치 공작대가 바로 들어왔더라. 이미 학교 교장까지 임명하여 왔는데 3개월간 김일성 노래 등 가르침. 내가 당시에 27세로 국민학교 선생이였는데 처음에는 전쟁이 난지도 솔직히 몰랐다. 1.4후퇴 대는 미리 통제되어 대구 팔공산지역에서 피난갔다 왔다. 3월에 들어와 보니 마을은 불에 다 타버리고 아낙네들만 남았더라. 중공군이 밤에는 집에서 함께 잠을 잤는데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수집된 총이 7천자루였다"
학담지역에 갔더니 철무가 수천개가 길가에 깔려있고 동네 뒷산에 소총을 수집해 보니 7천자루가 넘었다고 한다. 산에는 중공군 방망이 수류탄이 쌓여 있었다.
지역주민 최승규외 다수(72세. 압곡리) : 어린 나이지만 산떠리작업(울력으로 산에 있는 시체, 무기 등 회수)에 따라 다녔다. '51. 3월 이후에 산에 올라가니 시체가 수없이 많고 수동입구에서는 구덩이 파고 대량으로 묻는 모습도 보았다.(현재 마을 입구 길인데 포장되어 있음) 동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면 서로 다른 마을쪽으로 시체를 옮겨놓는다. 그러면 다음에 가면 다시 우리동네쪽에 와 있다. 당시에 이장들이 통제하여 데리고 다녔다.
학곡리 소년병의 증언 : 나는 어려서 피난도 안가고 계속 있었다. 전쟁이 나고 북한군이 왔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얼마있다 북한군 장교가 따라서 가자고 해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북으로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온다고 하고 도망쳐 산속에 숨었는데 바로 국군이 왔다.
"여기 중공군 1개 소대는 묻혀 있어요"
어르신은 당시에 15살로 군대에 갈 나이는 아닌데다 키가 워낙 작아서 누가 잡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피난을 안가고 있어도 큰 문제가 아닌데 1. 4후퇴 때도 그대로 있었고 다시 국군이 왔다. 이번에는 국군이 와서 8사단이라고 하는데 군인들과 함께 다녔다. 지역에 대부분 남자들은 다 없고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여자들만 있으니 그래도 할 일이 있었다 한다. 하는 일이냐 밥 날라주고 실탄박스 날라주고 하는 일이다.
바로 집 뒤에 1개 소대가 올라가 그곳에 같이 있다 중궁군에게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는 마당에 용케도 살아나 집에 가만히 있는데 미군 비행기가 폭격해서 집이 반이 타버렸다. 아군이 많이 죽었는지 중공군이 많이 죽었느지는 중공군이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중공군은 대부분 미군 비행기 포격에 죽었고 아군은 주로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
얼마 있으니 바로 다시 국군이 들어왔는데 6사단이 들어왔고 워낙 주변에 많이 죽어있으니 피난에서 들어온 사람들과 남아 있던 사람들이 다 파묻고 했는데 본인 집 들어가는 좌측 길 입구에 밭이 하나 있고 돌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중공군을 1개 소대는 끌어묻었다고 한다.
지역주민 제보로 발굴된 김창수 소위 : 이 지역에는 모두가 증언자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다 한마디씩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공근면사무소 좌측으로 남쪽에 제36사단 연대본부가 있다. 그 연대본부 울타리를 끼고 들어가면 면사무소 바로 뒤에 있는 무명고지 아래 동네다. 그런데 면사무소 앞에서 점심을 먹다가 한 분이 우리를 보고 본인 동네가 전쟁터고 본인 집에서 소대장이 곡주를 마셨다 한다.
" 소대장님 저기 적이 쌔까맣게 옵니다"
본인 집이 원래 주막집이 아니고 그래도 살만한 집이라 먹을 것이 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대장이 다른 하사관 두명과 와서는 돈을 준다며 막걸리 한 잔 달라고 했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가 나섰다.
"저어 술은 마침 받아 논 것이 있는데 안주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안주요. 그냥 술이나 주세요"
"아니 저 산위에 전쟁이 일아났다는데 어떻게 여기에..."
"그야 죽는게 별거있나요. 총 맞으면 죽는거지. 먹을 것이라도 배불리 먹는데 최고 입니다.
그러면서 마루에 걸터앉아 산쪽을 바라본다. 어머니가 바로 앞 텃밭에서 파를 뽑고해서 찌게도 나왔다. 계속 총소리는 요란하고 수류탄 도 터지고 비행기도 날아와 난리인데 소대장이 자포자기 상태로 술상앞에 앉아 있다.
몇잔이 주고받고하는 사이에 병사가 달려왔다.
"소대장님 진지가 뚫여서 백병전입니다."
"야 백병전해, 하라고?"
그러면서 다시 술잔이 비우지고 하사관들이 허겁지겁 떠나고 소대장과 전령만 남았다.
"야 김일병, 고생한다. 이리와 한잔 해"
"전사한 김소위"
이제는 소대장이 전령과 술잔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점점 총소리는 가까워 지고 있었다.
이윽고 소대장이 일어서 문밖으로 나가고 바로 앞 산언저리에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갔을 때 바로 그곳에서 총소리가 몇방 났다. 중공군이 우리 집을 포위하고 있다가 나오는 소대장과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혼자서 뭘 해보겠는가. 전령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조용한 시간이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바위 부근을 확인하니 소대장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대로 놓고 와서 얼마가 지난 후에 다시 나가 그 근처에 묻어 주었다. 중공군도 여럿 죽어서 있는데 나중에 다 모아서 한곳으로 가져갔는데 그 장소는 모른다.
또한 동네 들어오는 커브길 옆에 논이 있는데 그 곳에도 볏짚을 깔고 국군을 몇구 묻었다고 아버지한테 들었단다.
우리는 이곳에서 2002년 발굴작전을 실시하여 제보자 집 앞 밭언저리에서 한구의 유해를 찾았는데 팔찌가 나오고 거기에 군번도 있고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커부길 옆 논을 발굴하여 아직도 썩지않은 짚에 나란히 일렬로 누워 계신 7분의 용사님을 우리는 발굴했다.
참전용사 김정호(제8-10-2대대. '15) : 나는 제8사단 제10연대 제2대대 소속으로 횡성지구 전투에 참가하였다. '51. 2. 12일 횡성 신촌에서 포로가 되었다. 당시에 우리 연대장도 전사하고 살아난 사람이 별로 없다. 포로가 되어 처음에는 춘천 어딘가 갔다가 일부는 다시 차에 실리어 갔는데 들리는 소문은 북한군이 되어 전투에 참가한다고 했다.
"동상과 질병으로 엄청 죽어나갔다" "수용소 뒤에 몇 백명이 묻혀 있다"
부상자들도 많았는데 치료는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일부는 걸어서 다시 북으로 갔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다시 평강으로 해서 나는 천마 포로수용소(압록강 변)로 갔다.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전우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하다. 나는 어쨌던 살아있으니 말이다. 천마 포로 수용소에서는 병들어 죽거나 하면 포로수용소 뒤에 묻었다. 한두명이 아니고 몇백명이 묻혀 있으니 찾기도 쉽다.
횡성 신촌일대에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때는 기습을 당해서 총도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포로가 대부분 되었다. 중공군이 사방에서 피리불고 꽹과리 치고 난리라 어리둥절하다가 다 붙잡혔다.
참전용사 박무호(제8-21-2-6중대) : 나는 '50. 9. 9일 군에 들어가 제8사단으로 갔으며 막바지 영천전투에 참가했다. 북진해서 북한지역에 가서는 제대로 전투 한 번 못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중공군은 목숨을 파리보다 더 쉽게 생각한다. 총도 없이 그저 피리불고 꽹과리 치고 난리법석을 떨면 우리는 포위되어 다 죽근줄 알고 서로 살겠다고 산속으로 뛰어들어가 도망치다 보면 적군 속에 들어가 앉아 있더라
"얼마가 죽었는지 모른다, 100명 보충하여 한 번 전투하면 2~30명 살아남는다."
음력 1월 1일인지 횡성에 들어가 오음산을 공격하러 갔다. 그런데 공격하려는데 갑작스레 뒤에서 요란스러워 보니 중공군이 뒤에 나타나 우리는 포위 되고 말았다.
또 북진당시 영원지역에서 당한 악몽이 되살아나 모두들 총이고 뭐고 다 벌이고 뛰었다. 그런데 이미 남쪽은 포위되어 있으니 거꾸로 북쪽으로 뛰었는데 그만 포로가 되었다. 우리는 38선으로 후퇴하여 춘천 동쪽 소양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전투를 하다 철수해 내려간 적이 있다. 그때는 북한군과 싸웠다.
보충되는 신병은 대부분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위주로 고참병은 소대에 몇 명 정도인데 하룻밤 전투를 하고 나서 병력을 점검하면 100이 2~30명 밖에는 안모인다. 죽었느지 도망간건지 붙잡혀 갔는지는 모른다. 그럼 또 신병이 온다.
"나는 인제북방에서 탈출했다."
춘천 소양강 밑에 어딘가에 끌려갔더니 포로가 수두록하더라. 매일 아군기가 폭격을 해대니까 낮에는 산속에 숨고 거기서 사상교육을 받는다. 포로 심문은 대충받고 몇가지를 물어보고 뭘 기주나느지는 모르지만 어깨에 딱지를 붙이는데 색깔이 다르다.
말하기를 그놈들에게 적극적인 찬성자는 바로 해방전사로 다시 전선에 내보내고 계급이 높다던가 좀 말을 잘 안들으면 밤마다 불러내서 어디로 가는데 북으로 간다고 하더라.
나는 여기서 걸어서 금강산 어딘가 갔는데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그들 전방에 보급대원으로 선발되어 먹을 것을 전선에 옮겨주는 임무를 주었다. 지금 인제인지 양구인지 금강산과 가까운 곳인데 밤새 지게에 지고 산을 올라가서 전달하고 또 걸어서 돌아온다. 몇 번을 하고나서 믿었는지 조금 행동의 여유가 생기는데 나는 기회만을 보고 있다가 어느날인가 비행기 폭격이 가해지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뛰었다. 그러니 누가 잡을려고 하지도 안했고 산 능선을 따라 얼마를 오니 국군을 만나게 되어 과정 이야기를 하고 원대복귀하게 되는데 하필 그날이 내가 입대한 날과 같은 9월 9일이더라
지역 주민 박상호(초원리) : 내가 어려서 전쟁이 났다. 처음에는 전쟁인줄도 동네사람들 모두가 몰랐다. 그러다 동란때는 우리는 충주로 피난갔다 5월에 들어왔다. 들어오니까 동네집들이 대부분 불타버리고 움막처럼 짓고 살았다.
"돌맹이 숫자보다 많은 죽은 군인의 머리"
미군들이 수시로 들어와 유해를 찾아가고 신고하면 돈도 주었다. 시체가 얼마나 많은지 도곡리 일대는 돌맹이 숫자보다 죽은 군인 머리숫자가 더 많았다. 지금은 길이 크게 뚫여 있지만 그때는 좁았는데 얼마나 폭격을 했는지 바위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 집에서 멀지않은 곳, 그러니까 지금 마을회관이 있는 길이 그당시도 있었고 8사단이 있었다고 한다. 새벽에 중공군이 기습을 하니 정신 못차리고 차량도 버리고 모두가 도망쳐 무슨 행정서류가 바람에 날려 그 앞산일대를 다 뒤덮었다고 들었다. 이곳은 어디든지 파면 탄피나 뭐가 나올거다.
우리가 피난에서 들어왔을 때는 중공군 시체가 가득했다. 국군이나 미군은 보질 못했다. 중공군은 복장이 달라서 바로 안다. 처음에는 북한군을 보았지만 나중에는 북한군을 보질 못했다. 중공군도 보지는 못했지만 복장이 솜바지같은 것을 입고 있다.
지역주민 염상헌(횡성읍) : 나는 실제 전쟁을 목격하지는 안했다. 너무 어려서 부모님 따라서 어딜갔다 여름이 다 되어 들어왔다. 우리 동네는 읍네인데 바로 이에 홍도산이나 국사봉, 섬강이 있어 전쟁터였다고 한다. 어릴 때 산에 가면 탄피가 많았다고기억된다. 특히 영영포리 뒷산에 유해가 많았다. 중공군이 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국군 3사단이 몰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5사단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개전리 일대로 중공군 전사에 본인들이 포위하여 아군을 대량 전사시켰다고 함"
제보자가 말한 곳은 횡성 바로 북쪽으로 좌측에 섬강이 흐르고, 강너머가 독재봉과 벽학산이 있어 제8사단 제21연대가 최초 오음산 공격을 위해 진출간 적의 저항이 강력했던 곳이다. 또한 바로 윗쪽이 삼배리로 제3사단이 제사단의 좌측으로 들어간 곳으로 실제 우리 전사에는 제3사단이나 5사단의 전투는 잘 묘사되지 않았지만 이미 중공군이 제8사단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옴으로서 제3사단이 아마도 후퇴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횡성바로 북쪽은 대부분 개발되어 당시의 밭이나 야산은 별로 없다. 또한 국군이 들어온 이후에 정말 논밭뿐만 아니라 이 일대 산에는 시체가 가득했다도 한다. 그걸 울력으로 지역 주민들이 나가서 수습하여 대부분 불을 질러 화장해 버렸고 어쩌다 섬강가에 묻히기도 했지만 모두 수해가 날때마다 다 씻겨가 지금은 보이지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제보다.
"마옥리 주민의 똥이야기"
나는 사실 이곳 횡성의 왠만한 지역은 다 돌아보았다. 지역 주민도 수없이 만났다. 하지만 제보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 북한군이나 중공군은 민폐를 끼치지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사람이기에 흑망이 있는 법이다. 어쨌든 이곳은 미군이나 국군의 민폐가 많다고 하는 곳이다. 묘하게 강하나 사이인데 중공군을 보지못했다고도 한다.
동란(1.4후퇴)이후 미군과 국군이 이곳 횡성에 들어왔다. 그런데 국군이 앞장서서 미군을 데리고 다닌다. 집마다 와서 부상병이 숨어있는지 조사하는 일이지만 여자가 있는 집은 자주 온단다. 그러니 망을 보고 있다 얼른 숨어야 한다. 왜냐면 잘못하며 바로 현장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그런 어느날 미쳐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군인아저씨가 미군과 나타났다. 이미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마냥 숨어 살 수만도 없고 해서 급한김에 화장실의 똥을 한바가지 퍼서 다리에 발랐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게 하였다. 자꾸만 문을 열어달라하여 결국 열어 주고 이불을 들추라해서 몇번 만류했는데 강요를 하니 이불을 들추었다. "왁~, 그 이후로 군인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 잊지 못 할 고, 최병창 용사님"
우린 강릉 운산리에서 의미있는 발굴을 했다. 지역 탐사중 일대의 오봉산이나 칠봉산 드을 다 올라가고 황병산. 노인봉이나 운계봉에도 올랐다.
이 일대의 연곡천이나 사천천은 초기 전투시에 국군 제8사단이 전투를 벌인곳으로 이미 몇 번에 걸쳐 유해발굴 작전을 실시하여 2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08년 황병산 1구, 차항리 일대와 횡계리는 '07~'10년 사이에 8구를, 미노리. 판교리. 노동리. 연곡 신왕리. 동덕에서 21구(이중 신왕리에서 제8사단 참전용사 김재홍 발굴), 안인리 전방 불화산에서 3구 등이다.
그런데 '07년도 운산리를 지나다 우연히 한 동네 아저씨가 본인 집 근처에 수도사단 하사 1명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을 하시나요?"
"사실 내가 묻었던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묻었는데 그걸 말하지않고 있었는데 TV를 보니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지요"
"그럼 아저씨 혹시 올해 연세는?"
"연세는 아니고 나이가 당시에 7살인데 뭘 알겠어요. 이 앞에서 전쟁이 나서 총알이 뿅뿅 날아다니는게 신기해서 구경도 했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는 이곳 일대가 소나무 밭이라 잘 안보여요."
"장가를 들어 유족이 있을거라 했어요!"
"꺽기가 하나인가 둘인가 있는데 아버지가 나중에 말한 것이 기억이 나요. 그리고 장가도들어 유족이 있을거라 했어요."
우린 다른 일정을 미루고 아저씨 집 바로 옆의 텃밭을 파기 시작했다. 우리가 직접 휴대중인 발굴도구와 아저씨 집에서 삽을 가져와 파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반지가 있고 도장에 이름이 있다, "최동창"
처음에 도장이 나왔는데 한문이라 알 수가 없어서 바로 강릉시청 앞에 도장집을 찾았다. 그리고 확인한 이름이 최동창이었고 군적을 확인결과 수도사단이 맞았다. 하지만 유가족이 기록에 없다
우린 방송에도 내고 백방으로 유족을 찾으려 유가족 탐문관들을 투입하여 노력했지만 못 찾았다.
"유족이 있어서 DNA감식이 이루어져야 신원확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8촌이내의 유가족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가 찾은 몇몇의 감식은 일치하지 않했다. 그러면 무명용사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잘못된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 대한민국이 하고 있는 감식법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한 5년은 지났다. 어느날 누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이름은 최선생이라며 바꿔달라고 한다. 그리고 전화를 들었더니 대뜸 질문이다.
"지금 유족이 확인되면 무슨 혜택이 있나요?'
"네, 만약에 참전용사로 누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는데 유족으로 인정을 못받아 보상을 받지못했다면 가능합니다."
"그럼 부모가 받고 있다가 돌아가셨으면 처자식이 없으면 끝인가요?"
"죄송합니다만, 현행 법은 그렇습니다"
"형제에게는 아무런 헤택이 없다 이거지요"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점을 보고하여 현재 다른 유족에게도 얼마간의 보상그을 주는 제도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럼 DNA감식 할 필요도 없네, 괜히 잊어졌는데 속만 상하지... ."
"혹시 고, 최병창 용사님 유족이 아닙니까?" 나는 언듯 생각이 나서 물었다. 하지만 답은 안타깝게도 안하겠다 한다. 전화하신 분은 최동창 용사님의 동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대화중에 반지 이야기도 했고 장가간 이야기도 하고 하지만 보상금이 없다고 하니 그만 힘없이 전화를 끊겠다고 한다.
"다음에 집안끼리 이야기좀 해보고 하게 되면 전하할게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2) 유해 발굴 결과
"피해 현황과 유배발굴 결과, 그리고 현충원 안장 유해 및 위패와는 너무 다른 전사자 현황이다."
횡성지역은 사실 전지역이 유해 매장지역이다. 또한 현재 생존해 계신 제8사단 참전용사님 분중에 많은 분이 이곳 횡성지구 전투를 언급하신다. 제7사단 참전용사님들은 덕천 비호산 전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묘하게 제3사단이나 제5사단의 참전용사님께서 이곳 전투에 대해 언급하신 분이 별로 안계신다. 사실 제5사단도 4개 대대밖에는 남지않고 와해된 사단이였다.
사실 단순 기록만 보면 제8사단은 약 8,00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 처리되었다. 미 제21지원대도 2,000여 명이 히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적어도 묘비나 위패현황에 비슷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제8사, 5사, 3사단 모두 제대로 된 현황 기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주요전투 피해 기록도 없는 횡성지구 전투"(사창리전투, 현리전투도 없다)
6.25전쟁 기간 동안 이 3개사단의 부대별 미수집 유해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3사단은 717명, 제5사단 917명, 제8사단 1431명이다.(6.25전쟁 국군 유해소재 증언집, '01. 국방부 6.25전쟁 기념 사업단) 또한 주요전투 피해현황기록에는 아예 횡성지구전투는 기록도 없다.
"위패 및 묘비 현황 비교"
아니 전사에는 장구하게 나와 있고 그 많은 참전용사님들이 살아 계시고, 사실 탈북참전용사님 중에도 8사단이 많은데 위패현황에도 횡성지역은 없다. 영월은 10명이 있다. 사창리도 없고 현리도 없다. 묘비현황에는 횡성이 211명, 영월이 146명이다.
이런 기록의 비교가 얼마나 전사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의 사단장이 그래도 최영희 장군으로 나중에 국방장관도 하신 분인데 제1사단의 다부동 전투와는 너무 다르다. 다부동 구국용사회가 있어 백선엽 장군의 지원하에 거의 5,000여 명의 명단이 다부동 전쟁기념관에 각인되어 있다.
실제 유해발굴은 횡성일대에서 지난 20년간 250여 구가 발굴 되었다. 주로 창봉리 일대에서 85구, 금대리 일대에서 99구기타 횡성일대에서 78구 등이 발굴 되었는데 신기한 것은 미군은 한구도 없었다. 만명 이상 죽었다는 중공군의 유해도 그렇게 많이 발굴되지 않았다.
"우리집 옆 골짜기에 유해매장 추정 봉분이 다수 있다?"
횡성 도곡리 소구니봉 일대에서 17구를 발굴했었다. 그런데 이곳 도새울 지역에 들어와 사는 한분이 의미있는 제보를 하였다. 본인의 집 바로 옆에 골짜기가 평범하게 있는데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요상한 밋밋한 묘지같은 것이 엄청크게 몇군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는 시굴을 해 보았지만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골짜기라 물이 조금 나긴 하는데 다 부패해 버린 것인지, 하지만 유품에 관련된 어떤 징후도 없어서 나는 발굴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나. 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는 1951. 2. 13일부터 16일까지 미 제2사단 제23연대(프랑스 대대 배속)가 원주 서북방 지평리에서 중공군ㄴ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전투이다.
당시 지평리는 홍천-여주 축선상의 병참선의 중심지였다. 미 제2사단 제23연대전투단은 2월 3일부터 이곳에 배치하였다. 이미 미 제2사단과 미 제24사단의 합동정찰대가 1월 29일 중공군이 보급품을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지평리 남서쪽 쌍터널을 목표로 정찰을 실시하였다.
당시 중공군 제42군 제125사단이이 터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선점하여 들어오는 미군 정찰대를 공격하였으며 프랑스군의 증원으로 2월 1일까지 2개연대 규모의 중공군을 물리친 적이 있고 중공군은 뒤로 퇴각하였다.
중공군 제4차공세는 공세 초기에 중공군의 주력이 횡성지구에 집중되고, 일부 병력이 지평리 지구의 미군을 견제하는 것으로 계획 되었다.
중공군 제39군(-)은 2월 공세 개시일인 2월 11일에 남한산에서 지평리로 이동을 완료하였다. 2월 11일 17시에 시작된 중공군 2월 공세로 횡성지구의 유엔군 방어선이 급속하게 무너지자, 조중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12일 08시에 한국군 제8사단은 이미 대부분 섬멸되었다며, 지평리의 적을 포착하여 섬멸하라 하였다. 이에 따라 제40군 제119사단으로 하여금 제39군 주력 및 제42군 제126사단과 함께 13일 저녁 지평리의 미 제23연대를 포위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지평리의 제23연대전투단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장호원에서 전열을 정비중이던 제9군단 소속의 제5기병연대가 2월 14일 제23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17시에 한강을 도하해 곡수리 남쪽 2km 지점의 무촌리에 진출하고, 23시 30분 곡수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2월 15일 07시에 제5기병연대는 제23연대와의 연결작전을 개시하여 직접 연대장도 전차에 탑승해 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고 17시 15분 망미산을 공격중인 제23연대 전차와 연결 되었다. 결국 중공군은 16일 새벽부터 이 일대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지평리전투에서 미 제23연대전투단이 중공군에 가한 손실은 총 4,946명으로 추산되고, 미 제5기병연대도 5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반면 미 제23연대전투단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었으며 부상자들은 헬기와 차량으로 모두 구제되었다.
한편 14일 미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한 미 제9군단의 영 제27여단은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지평리 부근으로 이동하엿고, 국군 제6사단(제19연대 결 : 미 제24사단 배속)도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9연대 제1대대 좌측 공간지대로 이동하였다. 2월 15일 지평리-원주 사이 북서쪽으로 진출한 영 제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은 국군 제6사단이 간현리로, 영 제27여단이 주암리로 진출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은 2얼 18일 판대리를 경유하여 초원리로 진입하여 중공군 2월 공세시 국군 제8사단의 제10연대와 제16연대 작전지역을 수색하여 전사자 및 유기된 장비를 다수 회수하였다.
이후 국군 제6사단과 영 제27여단은 양평 북방으로 이동하여 미 제8기병연대의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재반격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나-1 : 지평리지구 전투 관련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발굴 비교
"미군 자료에 나와 있는 한국 노무자 80여 명의 진실은?"
"프랑스군 자료에 나와 있는 한국군 유격중대의 진실은?"
나는 지평리에서 유해발굴 작전을 '01년도부터 하여왔다. 처음에 유해발굴 계획은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이었다. 그러나 창녕지역 유해발굴에 이어 지평리지역 유해발굴을 하다보니 시비거리가 되었다.
"적군 유해발굴하여 아군으로 둔갑시켜 숫자를 늘리려 한다?"
나는 처음부터 이 두곳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였다. 국군만 전투한 곳을 선정하여 계획하였고 선행 탐사도 해왔다. 그런데 탐사간에 해당지역 주민을 만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듣던 중에 미군이 전투한 함안지역이나 창녕, 그리고 지평리에 경찰이나 국군이 들어왔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분들의 제보가 있어서 실제 해당지역을 찾아가 알아보니 개연성이 충분히 있어 전사적 진실규명 차원에서라도 발굴 작전을 해봐야겠다고 판단하여 발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규모로 투입을 못하고 기동발굴 개념으로 1개 소대정도 규모만 투입하여 2주정도 발굴을 하는것인데 막상 하고보니 대규모 발굴지역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발굴팀을 투입하고 보니 여기저기 제보자가 나타나는데 국군이나 경찰, 학도병, 노무자등 우리가 법에 실린 그 대상이 다 해당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이 나를 더욱 분발하고 많은 것을 알게 했다."
그랬더니 몇번의 언론 보도에 이슈가 되는 사업으로 거듭나자 비판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시기의 계급으로 혹시나 내가 그 공석 하나를 뺏앗아 갈까봐 미리 경고하는 눈치다. 나는 당시 근무처장과 인참부장께 왜 발굴하는가를 위한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녹취록을 만들어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고 전사를 세밀히 분석해야 하고 참전용사님을 만나 증언을 들어야 하고, 지형탐사를 통한 발굴 가능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값비싼 카메라며 녹음기며, 휴대용 비디오 촬영기까지 모두 내 돈으로 사야했다 . 당연히 적금을 해약하여 최초에 사기 시작한 것이 아마 한 2천만원 정도는 소요 되었다. 카메라 4~6대, 비디오 3대, 사진 인화 등에 많은 투자를 하여 보고서에 첨부하였고 실제 해당지역에서 유해가 나왔다.
"한국인 관련 자료를 찾으려 미친(?)변사장을 만나다"
이 지평리지역도 최초 '00년도에 2월 달에 지평리에서 전적기념행사가 있었다. 눈비가 내리는데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날씨기 매우 추웠는데 어느 노신사가 콧물을 흘리면서 미군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나가서서 대화 내용을 들어보았다. 물론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만 대화의 틈새에 끼여 한국인 변사장(이때는 잘 모르고 있어 선생님이라 칭함)님께 어떤 분들이며 하시는 일은 무언지 등을 물어 보았다.
"미군측이 넘겨준 한국인 노무자 81명의 기록"
하지만 단지 그들은 투기념행사에 참가한 주한미군이고 전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변사장의 설명은 좀 달랐다. 이들에게 부탁하여 본인이 미 제23연대 전투단의 전쟁기록을 영문판으로 받아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료를 하나 내놓는데 한국인 노무자가 당시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다.
정말 소중한 기록을 지역 향토문화사가 미군측에 요청하여 자료를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카피하여 발굴계획 작성시 관련자료로 내놓아야 한다.
"지금까지 발굴돤 유해는 '08~'14까지 100여명이다"
용문 갈지산345m 월산리 노기산486m
지평리 봉미산247m
월산저수지 모라치고개
추읍산 583m 배미산396m 석불역 망미산324m
칠보산 318m 망미터널
매봉산299m 무왕리
곡수리 대평리
주 발굴지역은 월산저수지 인근 야산일대로 '01년도에 5구를 시작으로 '08년도에 50여 구, '09년도에 50여구 등으로 대부분 월산 저수지 둘레에서 발굴 되었고 곡수리에서 지평리로 들어오는 옥현리 일대에서도 발굴 되었다.
"프랑수 대대에 국군 1개 유격중대가 있었다"
지금 지평역 근처에 프랑스군 참전비가 있는데 이곳 일대가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다. 지평역 서북방향인데 우리 전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배치도에 보면 명확하게 "K" 글자가 선명하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유해발굴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해야할 곳이다.
"전사에 언급이 없는 양동 금왕리 지역 유해 탐사 및 탐문"
용두리
증안 도원리
비룡리 더렁산488m 갈운리 469m
가현리 내현
단월면 삼가리 비룡산527m 윗벗고개
매봉산370m 벗고개 349번 지방도로
342-345번 지방도로
노기산486m
그락산 326m 석밭재
고송리 턱걸이 고개 금왕리 석화리
수리봉401m 삼각산539m 금왕산488m
무왕리
전양고개 망미터널
양동 오크밸리 원주
여주 주암리 판대리 갈현리
어느날 용두리에서 점심을 먹고 도운리(증안리)를 가려다 중간에 349번 도로를 타고 갈운리-양동방향으로 들어섰다. 진달래가 피는 5월 초인데 좌측으로 보이는 산의 경사가 심한 것이 뭔가 있을 것같은 예감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오르니 고지가 나오는데 개인호가 즐비하게 있다. 방향을 보니 주로 남쪽이나 좌우측에 있는 도로를 보고 굴토를 한 것으로 보아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글토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무명 469고지 일대부터 남쪽으로 금왕산에 이르는 종격실 능선에 수백개의 개인호가 굴토되어 있다. 우리는 금왕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르신들 안보견학날이란다. 그러니 어쩔수 없이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고 우리는 일대의 요소요소를 탐문 탐색하였다.
"고송리에 중공군 지휘소가 있었고, 미군 포로들이 다수 죽었다"
우리는 고송리 삼선당에 들어가다 할머니 한분이 살고 계신 집에 갔다. 할머니는 건강하셨고 기억도 또렸하였다.
"할머니 혹시 미군이나 국군을 보셨나요?"
"저기 위에 땅을 밀어버린 곳이 군인이 여럿 죽여서 묻어버린 곳이여"
"할머니께서 직접 보셨습니까?'
"내가 시집와서 큰아들이 태어나서 얼마 안되는데 전쟁이 났지. 그러니 처음에는 전쟁도 몰랐는데 북한군이 왔고 동란때는 중공군이 와서 여기에 높은 분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 놈들은 상당히 신사야."
"혹시 누가 죽었는지요?"
"그야 내가 몰라요. 그런데 여기에 미군이 여렷 끌려와 있었어요. 묶어놓고 있는게 아니고 군복입고 돌아다니는데 숫자가 많았어요. 병원같은 것도 있는데 거기서 여럿 죽었다고 해. 그러면 들어다 묻은 곳이 지금 다 도쟈가 밀어버린 곳이야."
"국군이나 경찰은 못보셨나요?"
"북한군은 보았서도 국군은 잘 몰라요"
우린 다시 구락산 밑으로 갔다. 이 동네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을 찾아서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만난 분은 어린 국민학생이었고 미군이 구락산과 매봉산에 올라가 있었고 본인이 직접 옆에 가서 먹을 것도 얻어먹고 심부름도 했다고 한다. 무전기를 들고 있어서 무전기도 만져보았고 뭐리고 하면 비행기가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가 미군차량이 전복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몇을 묻었다는 곳이요"
"그럼 누굴 묻었느지 아시는지요, 군인인지 아니면 민간인인지?"
"우리가 알기로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묻혀있다고 알고 있어요"
우리는 이곳을 기초굴토해 보았지만 유품이나 뼈 등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벗고개로가서 비룡산까지 올랐다. 제보 내용대로 개인호가 많이 있고 매봉산 고지 정상 부근에는 개인호가 크게 글토되어 미군이 점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위벗고개지역에 탐문결과 '51. 2월경에 중공군과 미군이 많이 왔다갔다 한다. 벗고개일대는 전투가 많이 벌어져 전쟁이 나고 얼마간에는 많은 시체들이 있었다고 한다. 더렁산에도 올랐다.
더렁산에서 석밭재로 내려서는 능선길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개인호는 349번도로 우측의 469고지에서 금왕산에 이르는 곳이 훠씬 많다.
"우리 동네는 일본놈도 묘를 써주고 오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아요. 미군도 몇구 묻혀있다 미군이 발굴해 갔어요"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마을회관에 갔다. 많은 어른들이 오셨다. 우리가 갔다온 탐사 결과와 지역 주민 제보 내용을 이야기하니 몇분이 추가적인 제보를 해 주었다.
"이 동네에 일본인 묘소가 있다 얼마 전에 일본으로 유족들이 파 갔다."
일제시대에 이 동네에 살고 있던 일본인인데 아무리 왜놈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보복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서로 일본인을 보호해 주었고 아파서 죽은 사람도 묘도 잘 만들어 관리해 주었단다. 그래서 일본에서 그 후에 유족들이 너무 고맙다고 찾아왔고 유해를 발굴하여 일본으로 옮겼다고 한다. 물론 일본인들이 이 동네에 금일봉을 전달도 했다.
"미군들이 포로가 되어 수없이 저 길을 따라 걸어갔고 죽어서 3구를 묻었는데 미군이 파갔다"
이 동네가 미군과 중공군이 직접적으로 전투를 하지는 안했지만 이 주변에 중공군 지휘부가 있어서 인지 미군 비행기 폭격이 매일 있었다. 고송리라는 곳에 중공군 연대본부가 있었다. 미군은 바로 길옆에 죽어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잘 묻었고 얼마 있다 미군이 찾으러 와서 알려주어 발굴해 갔다.
"우체국에서 만난 이종윤 할아버지의 눈물"
나는 금왕리 마을회관에서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그냥 보내면 안된다며 앉으라하여 결국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정말 고맙고 인간미 넘치는 동네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단다.
동네에서 취나물를 주어서 집으로 보내기 위해 우체국으로 갔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셨다. 서울에 있는 딸에게 취나물을 보내려 한단다. 뭐하는 군인이냐고 물어서 국군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을 한다고 했다.
"혹시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내가 8살에 전쟁이 났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고 아버지 어머니와 누님 두분이 있었는데 모두 충주 문경까지 갔다 왔어요"
"그럼 중공군을 보셨나요?"
"중공군만 본게 아니고 북한놈도 보고 미군도 보고 다 보았지"
"그렇군요. 그럼 죽은 군인의 모습을 혹시나 보았는지요?"
"누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나가서 동네분들과 묻고 다녔고 나는 따라는 갔는데 지금 길이 넓어지면서 없어요"
"중공놈이 착하다고? 무슨 소리야 우리동네 할머니 모두가 가쟁이 벌리고 걸어다녔는데"
"중공군이 있으면 동네에 피해를 안준다고 하던데 여기도 그랬나요?"
"누가 그래요?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아니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들으니 중공군은 같은 방에 잠을 자도 절대 여자는 안건드린다고 하던데요?'
"다 거짓말이야. 오히려 북한놈이 그랬어. 그 빨갱이란 놈들이 설쳐대고 다녔지 북한군은 잠시 왔다고 그냥 갔어. 그런데 우리 동네에 중공군 높은 놈하고 몇이서 있었는데 무슨 지휘소라고 해. 아니 동네에 남아있는 여자는다 잡아갔어, 할머니도 잡혀가서 나오면 제대로 걷지를 못해요. 너무 아파서. 무슨 소리야 뙤놈들이 가장 악질이야!"
나는 정말 놀라운 증언을 들었다. 그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 못한다고 한다 동네에 남아있던 사람은 다 아는데 그 사람들이 다 죽고 이제는 소문만 듣고 이야기 한다고 한다. 본인 할아버지는 실제 목격한 당사자라고 하시며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이런 전쟁은 다시는 나서는 안된디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