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19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21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복음 마르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어젯밤 책을 읽다가 커피가 마시고 싶었습니다. 누구는 밤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어서 밤에도 종종 커피를 마십니다. 드립커피를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드리퍼에 여과지를 끼운 뒤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갈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 여과지에 갈은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조금씩 넣습니다. 이것이 제가 커피 만드는 순서입니다. 간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여러 단계를 거친 뒤에야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됩니다. 물론 커피믹스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시는 아주 편한 방법이 있지만, 저의 경우 약간의 정성이 필요한 드립커피가 훨씬 맛있습니다.
누구는 “커피가 다 똑같지 뭐. 입에 들어가면 다를 것 없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커피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더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으니까요.
커피 맛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커피 만드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남녀간의 데이트도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사랑의 맛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데이트 하는 시간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데이트하는 시간이 아깝다면서 만나자마자 “집에 가자.”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하면서 그만 만나려고 하지 않을까요?
문득 ‘하느님 맛을 아는 사람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느님을 위해 쓰는 시간을 아까워할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당 가는 시간이 또 기도하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남들에게 자신은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과시용일까요? 단식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몸으로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헌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그 사랑이 부족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고,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단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고서는 단식에 어떤 의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맛을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그 맛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 사랑에 더욱 더 집중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느님의 맛을 알게 되고,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심에서 나오는 말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밝은 양심에서 나오는 말만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다(윌리엄 펜).
커피를 내리다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 찾지 못하면(‘좋은생각’ 중에서)
캐나다 금광 채굴 회사 ‘골드코프’가 경영난에 빠졌다. 생산 비용은 점점 늘어나는 반면 수십 년간 채굴한 광산이 고갈된 탓이었다. 새로운 금광을 찾아야 했으나 쉽지 않았다. 최고 경영자인 ‘롭 맥이웬’의 고민은 깊어졌다.
하루는 그가 한 강연회에 참석했다. 강연 내용은 소프트웨어 회사 ‘리눅스’의 이야기였다. 리눅스는 새롭게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를 무료로 배포했다. 그 뒤 전 세계 사용자로부터 개선 사항을 전달받아 제품을 향상시켰다. 덕분에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는 무릎을 쳤다.
“우리가 못 찾으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회사에도 비슷한 방식을 도입했다.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 기밀인 지질 자료를 인터넷에 모두 공개하고 ‘금 찾기 대회’를 열었다. 금맥을 찾는 사람에게는 60만 달러의 상금도 걸었다.
일반인부터 지질학자까지 전 세계에서 천여 명이 넘는 참가자가 모였다. 그들은 회사가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금광 후보지 110곳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그중 80퍼센트 넘는 곳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덕분에 골드코프는 위기를 벗어났다.
방법은 분명히 있습니다. 나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찾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끙끙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금맥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한 골드코프
오늘의 묵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알릴 때마다 흔히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회심하고 싶어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나 자신이 너무 낡고 고집스러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단식은 흔히 육신의 배부름과 욕망에서 생긴 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행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순수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유다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율법의 조항이자, 사회적 계약으로 전락했고, 단식의 참된 종교적 의미도 사라져 갔습니다. ‘경건한 이들’이라고 자칭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 주십니다.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이들에게 단식 행위는, 마치 혼인 잔칫집에 와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보다 홀로 떨어져서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독선과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싸워 이긴 뒤에 좋은 전리품의 일부를 취한 것을 두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라는 질책을 받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주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지난 성탄을 위해서 준비했던 구유와 장식물들을 치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정리하는 것은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공들여 만들 것들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그렇습니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잘못된 습관이 계속되면, 불규칙한 생활이 이어지면, 근심과 걱정이 떠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몸은 면역력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유사종교와 신흥종교에 사람들이 빠져든다고 걱정을 합니다. 기존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가기도 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가기도 합니다. 그들의 교리와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유사종교와 신흥종교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그것은 기성의 종교들이 사람들의 외로움을 위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숫자로만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교리, 제도, 조직은 잘 갖추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조직과 제도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직, 제도, 율법, 계명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희생, 헌신, 열정, 사랑, 나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갑을 억지로 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스스로 지갑을 열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제도와 조직에 안주하는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날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낡은 제도와 조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씨앗은 쪼개져야 새싹이 나듯이 우리는 늘 낡은 허물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 아래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8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