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정월에 최유(崔濡)가 원 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의 궁고문(弓庫門)을 포위하니, 도지휘사(都指揮使) 안우경(安遇慶)이 일곱 번 싸워 이를 물리쳤다. 최유가 산에 올라 우리 군사의 수효가 적고 후원군이 없는 것을 엿보고는 군사를 일곱 부대로 나누어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나오니, 우리 군사가 도망해 돌아와서 문 안으로 들어왔다. 중랑장(中郞將) 최흑려(崔黑驢)가 말에서 내려 창을 쥐고 문 밖에 서 있으니 최유가 전진하지 못하였다. 흑려가 우리 군사를 뒤에서 호위하여 천천히 몰아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가 다시 나가서 싸웠는데 적군이 도병마사(都兵馬使) 홍선(洪瑄)을 사로잡으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달아나서 안주(安州 평남)를 지켰다. 최유가 선주(宣州 평북)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왕이 찬성사 최영에게 명하여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달려가서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길에서 도망하는 군사를 만나면 목을 베어 군중에 돌리니 군령이 비로소 엄숙하여졌다. 또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 명하여 동북면(東北面)에서 정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이성(泥城 평남 창성(昌城))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李珣)과 도병마사 우제(禹磾)ㆍ박춘(朴椿)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우리 군사의 기세가 다시 떨쳐졌다. 최유의 척후 기병이 정주(定州)에 이르니 안우경이 정예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쳐서 이를 패퇴시키고, 그 장수 송신길(宋臣吉)을 사로잡아 죽여 몸뚱이를 쪼개어 군중에 돌리니 최유가 기운이 꺾였다. ○ 평창현령(平昌縣令) 배중련(裵仲連)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불법을 자행하므로 가산(家産)을 몰수하였다. ○ 황상(黃裳)을 동북면 도순토사(東北面都巡討使)에 임명하였다. 여진의 삼선(三善)ㆍ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ㆍ삼살(三撒)을 침범하므로 교주도 병마사(交州道兵馬使) 성사달(成士達)에게 명하여 정예 기병 5백 명을 내어 이를 치게 하였다. 처음에 북방 사람 김방괘(金方卦)가 우리 도조(度祖)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삼선과 삼개를 낳았으니,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에게는 고종 형제였다. 여진 땅에서 나서 자라 완력이 남보다 세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 북쪽 변방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함주(咸州 함북 함흥(咸興))에서 대대로 자라 은혜와 위엄이 그 전부터 쌓이니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우러러보고, 여진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며 스스로 조심하였다. 이때에 와서 삼선ㆍ삼개가 태조가 가서 서북면을 원조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진을 꾀어 크게 침략을 자행하고 함주를 함락시키니, 지키던 장수 전이도(全以道)ㆍ이희(李熙)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해 돌아왔다.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方信)과 병마사 김귀(金貴)가 화주(和州 함북 영흥(永興))에 진군했다가 역시 패하여 물러나와 철관(鐵關 함남 덕원(德源)의 북쪽)을 보전하였으니, 화주 이북 지방이 모두 함몰되었다. 관군이 여러 번 패하자 장수와 군사가 기운이 꺾여 밤낮으로 태조가 도착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 대호군 김두(金斗)가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군졸들이 춥고 배고파서 도롱이를 입어 몸을 덥히고, 말 한 필을 쌀 한 말로 바꾸었다. 길에서 죽는 자가 잇달았으며, 걸식하고 있는 도망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얼굴이 매우 초췌하니 이웃 사람이나 친구라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살아 돌아온 자가 백 명에 겨우 한두 사람뿐이었는데 권세 부리는 신하가 왕의 총명을 가려서 아뢰지 않으니 체복사가 연이어 가더라도 군중의 허실을 왕이 끝내 알지 못하였다. ○ 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지용수(池龍壽)ㆍ나세(羅世)가 좌익(左翼)이 되고, 이순(李珣)ㆍ우제(禹磾)ㆍ박춘(朴椿)과 우리 태조가 우익(右翼)이 되고, 최영이 중군이 되어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패배한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내어 힘써 싸우지 않았다고 말하니,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꺼렸다. 이때 적이 수주(隋州 평북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에 둔쳤는데, 여러 장수들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내일 싸움은 그대가 홀로 맡으시오." 하니, 태조는 여러 장수들이 자기를 꺼리는 줄 알고 조금 걱정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튿날 적이 세 부대로 나누어 쳐들어오므로,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우로 갈라서 각기 적의 한 부대씩 맡게 하여 힘을 내어 쳤다. 태조가 탔던 말이 진흙에 빠져 매우 위태로웠는데, 말이 힘을 내어 뛰어서 솟구쳐 나오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태조가 적의 장수 두서너 사람을 쏘아 넘어뜨리자 적이 그제야 패주하였다. 두 늙은 장수가 칼을 뽑아 마구 치니 적이 벌써 패하여 도망하였고 티끌과 먼지만이 하늘을 덮을 뿐이었다. 처음에 최유가 몽고ㆍ한족 군사에게 이익으로 꾀기를, “고려왕이 장수와 군사를 협박하여 서북면을 지키게 하였으니, 신왕이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싸우지도 않고 흩어질 것이다. 일이 성공되면 고려의 재상 이하 사람들의 가산을 상으로 주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이를 믿었다. 압록강을 건너오자 우리 군사가 굳게 막고 한 사람도 항복하는 자가 없었다. 몽고ㆍ한족 군사는 우리가 그들을 꾀어 깊이 들어오게 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는가 의심하더니, 달천에서 패전하자 그제야 최유의 꾀에 빠진 줄 알고 밤에 거짓으로 우리 군사인 것처럼 하여 큰 소리로 떠들며 경동시키매, 최유의 군사가 그 진영을 불사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압록강까지 이르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인우(柳仁雨)ㆍ강지연(康之衍)ㆍ안복종(安福從) 등이 피곤해서 뒤떨어져 있으므로 이를 잡아서 죽였다. 저들 군사 중에 연경(燕京)에 돌아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가 연주(延州)에 쳐들어오니 최영이 그의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물리쳤다. ○ 김광조(金光祚)를 동북면 도순위사(東北面都巡慰使)에 임명하였다. ○ 2월에 우리 태조가 서북면에서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가 되었다. 한방신(韓方信)ㆍ김귀(金貴)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진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ㆍ함주(咸州) 등의 주(州)를 모두 수복하였다. 삼선ㆍ삼개가 여진 땅으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태조에게 의지함이 더욱 중해졌다. ○ 김일봉(金逸逢)을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삼고, 우리 태조를 밀직부사로 삼고, 단성 양절 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 한방신에게 채단(彩緞)을 내려주고 우리 태조와 김귀에게 금띠를 내려주었다. ○ 경천흥(慶千興) 등이 개선하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어가를 맞이하는 의식과 같이 하여 백관들은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교외에서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고, 여러 장수에게 적신의 전택과 재물을 주었다. ○ 서북면 도병마사 정찬(丁贊)의 휘하 목충(睦忠)이 종형 인길(仁吉)의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으니, 정찬이 이를 제어했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목충이 원한을 품고 정찬이 덕흥군과 서로 통한다고 무고하여 순군부에 가두니 정찬이 근심하고 분하여 졸하였다. 정찬은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무예가 있었다. ○ 한방신과 김귀가 개선하니 왕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 신유일에 혜성이 나타났다. ○ 3월에 왜선 2백여 척이 하동(河東 경남 하동(河東))ㆍ고성(固城 경남 고성(固城))ㆍ사주(泗州 경남 사천(泗川))ㆍ김해(金海)ㆍ밀성(密城 경남 밀양(密陽))ㆍ양주(梁州 경남 양산(梁山))에 침범하였다. ○ 좌정언(左政言) 김제안(金齊顔)을 파면시켰다. 처음에 환관 한휘(韓暉)가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첨의평리에 임명되었는데, 간관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한휘는 김제안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왕에게 참소하기를, “신은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고 눈서리 내리는 한데서 거처하며 외방에서 적을 막았습니다. 제안은 나이가 어린데 외람되이 언관에 있으면서 두 마음이 있어 신의 사첩(謝牒)에 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달천(㺚川) 싸움에 참가한 장사(將士)들의 사첩에도 아울러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장수들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짓입니다."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 원송수(元松壽)를 꾸짖기를, “제안은 경의 족인인데 경이 전선(銓選)을 관장하면서 제안을 끌어들여 간관을 삼은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하니, 송수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제안을 옥에 가두려 하니, 수시중 경천흥(慶千興)과 밀직부사 송인적(宋仁績)이 간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이 왕에게 나아가서 아뢰기를, “제안은 간관이니 옥에 가둔다면 후대에 전하를 어떤 왕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일어나서 내전으로 들어갔으나 옥에 가두지는 않았다. 제안이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아니하니,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억지로 나오게 하여 한휘의 고신에 서명하게 하고는 마침내 파면시켰다. ○ 전라도의 조선이 왜적에게 막히어 운행되지 못하므로 왕이 동북면의 무사와 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동강ㆍ서강의 전선 80여 척을 뽑아서 우도병마사(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 이선(李善)에게 명하여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엄호하게 하였다. 변광수의 배가 대도(代島)에 이르니 내포(內浦) 백성으로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도망해 와서 고하기를, “적이 이작도(伊作島)에 군사를 매복시켰으니 경솔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선이 듣지 않고 북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먼저 나아가니 적이 배 두 척으로 맞아 싸우다가 속임수로 물러가더니 조금 후에 적의 배 50여 척이 포위하였다. 병마판관 이분손(李芬孫)과 중랑장 이화상(李和尙) 등이 앞서 적과 싸우다가 모두 적에게 살해되자 여러 배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넋을 잃어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자가 10에 8, 9명이나 되었다. 변광수와 이선 등이 형세를 관망하면서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니, 싸우던 병졸이 크게 부르짖기를, “병마사는 어찌 사졸을 버리고 물러가시오. 조금만 머물러 국가를 위하여 적을 격파하십시오." 하였으나, 광수 등이 끝내 구원하지 않았다. 병사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크게 패하였다. 부사 박성룡(朴成龍)만이 힘을 다하여 싸워 배를 온전히 보전하여 왔는데 몸에 두서너 개의 화살을 맞았다. 병마판관 전승원(全承遠)이 판관 김현(金鉉)과 산원(散員) 이천생(李天生)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이 추격하였으나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적의 배 두 척이 갑자기 서쪽에서 측면으로 공격하자 사졸들이 능히 지탱하지 못하고 모두 물에 뛰어들었다. 승원만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서너 곳에 창을 맞고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을 잘 쳤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다. 밤에 돌아와서 배에 오르니 군사 하나가 화살에 맞고 물에 몸이 빠져 뱃전을 붙잡았으나 힘이 없어 능히 올라오지 못함을 보고, 승원이 배 가운데로 끌어올려 밤낮으로 배를 직접 저어 3일 만에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하였다. 돌아온 것은 광수(光秀)ㆍ선(善) 등의 배 겨우 20척뿐이었다. 교동ㆍ강화ㆍ동ㆍ서강에 통곡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광수 등은 끝내 죄를 받지 않았다. 전라도 도순어사 김횡(金鈜)이 조선을 거느리고 내포에 이르러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 되었으나, 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 김횡의 뇌물을 받고 도리어 칭찬하고 왕이 내온(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을 내려주고 맞이하여 위로하니 사람들이 매우 분개하였다. ○ 여름 4월에 강절(江浙) 지방의 장사성(張士誠)이 만호(萬戶) 원세웅(袁世雄)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회남(淮南)의 주평장(朱平章)이 만호 허성(許成)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 5월에 경상도 도순문사 김속명(金續命)이 왜적 3천 명을 진해현(鎭海縣)에서 쳐서 이를 크게 깨뜨리고 병장기를 바치니, 왕이 의복과 술과 금띠를 내려주고 전사(戰士)에게 차등 있게 관작을 주었다. ○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嵒)이 졸하였다. 암의 그 전 이름은 군해(君侅)이다. 두 번이나 시중이 되어 법도를 조심스러이 지키어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으며, 집에서는 살림살이에 간여하지 않고 책으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예서(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 일찍이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치면서 그 아들 강(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명심해라. 나는 이미 늙어서 실무의 직책도 없고 간관의 직책도 없으니 마땅히 왕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직무를 삼을 뿐이다." 하였다. 후에 충정왕의 묘에 배향되었다. ○ 대호군 이성림(李成林)과 전교부령(典校副令) 이인(李韌)을 보내어 강절에 답례하였다. ○ 6월에 이공수(李公遂)ㆍ홍순(洪淳)ㆍ허강(許綱)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판서 이자송(李子松), 판사 김유(金庾)ㆍ황대두(黃大豆), 부령 장자온(張子溫), 북부령(北部令) 임박(林樸) 등과 함께 서신을 만들어 대지팡이 구멍에 넣어 정량(鄭良)ㆍ송원(宋元)을 샛길로 보내 보고하기를, “덕흥군이 영평(永平)에 있고, 최유는 원 나라로 돌아와서 권세 있는 자에게 결탁하여 많은 군사를 일으켜 동으로 가기를 꾀하고 있으며, 황제에게 청하기를, '덕흥이 본국에 돌아가게 되면 장정을 다 징발하여 천자의 위병(衛兵)에 충당하고, 해마다 양향(糧餉)을 바치며, 또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만호부(倭人萬戶府)를 두고 왜놈들을 불러 와서 금부(金符)를 주어 상국의 원조가 되도록 하오리다.' 하였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이와 같사오니, 국가에서는 덕흥군이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지 말고 방비를 더욱 신중히 하소서." 하였다. ○ 명주(明州)의 방국진(方國珍)이 사신을 보내와서 침향(沉香)ㆍ궁시(弓矢)와 옥해(玉海) 등 서적을 바쳤다. ○ 가을 7월에 여러 도의 양가의 자제를 뽑아서 8위(衛)에 보충시켜 상번(上番)하여 숙위하게 하고, 5군(軍)에 나누어 예속하여 서울 4문 밖에 주둔하게 하였다. 강릉도의 자제만은 그 도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방비하게 하였다. ○ 오왕 장사성이 사신을 보내와서 옥영(玉纓)ㆍ옥정자(玉頂子)ㆍ채단(彩段)을 바쳤다. ○ 8월에 왕이 시중 유탁(柳濯)ㆍ경천흥과 찬성사 최영을 불러 이르기를, “오인택(吳仁澤)과 김달상(金達祥)이 전주(銓注)를 맡아 현량(賢良)을 밀쳐 버리고 친인(親姻)을 추천 임용하며, 공로는 기록하지 않고 뇌물 준 자만 보니 천지의 화기를 손상하여 재앙이 옴이 여기에서 연유했다. 마땅히 먼 지방으로 물리쳐서 하늘의 재앙을 내리는 뜻에 응답해야 된다." 하였다. 이때 인택과 달상이 도당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자리에서 교지를 선포하고 인택은 청풍군(淸風郡 충북 제천(提川))으로 귀양보내고, 달상은 옥주(沃州 충북 옥천(沃川))로 귀양보내니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금 후에 달상을 한양윤(漢陽尹)에 임명하였다. 전 군부판서 오영주(吳英柱)와 삼사판관(三司判官) 오영좌(吳英佐)를 귀양보내니 모두 인택의 아들이다. 영주 등이 그 어머니의 말을 따라 소경 석천록(石天祿)에게 점을 치기를, “최영과 이귀수가 어느 때에 배척되겠느냐." 하니, 천록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누설되어 영주 등이 죄를 얻게 되고, 천록도 역시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었다. ○ 9월에 호군 장자온(張子溫)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승상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등이 이르기를, '고려왕이 공은 있고 죄는 없는데 소인에게 곤욕을 치르니 어찌 소인을 먼저 다스리지 않으랴.' 하면서, 황제에게 아뢰어 왕을 복위하게 하고, 최유를 함거(檻車)에 실어 본국으로 송치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온에게 금대와 쌀ㆍ베 등의 물품을 내려주고 상호군으로 임명하였다. ○ 홍순(洪淳)ㆍ이자송(李子松)ㆍ김유(金庾)ㆍ황대두(黃大豆)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황제가 원 나라에 있는 고려 사람에게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게 하니, 김첨수(金添壽)ㆍ유인우(柳仁雨)ㆍ강지연(康之衍)ㆍ황순(黃順)ㆍ안복종(安福從)ㆍ문익점(文益漸)ㆍ기숙륜(奇叔倫) 등이 모두 이에 붙어 따랐다. 홍순ㆍ이자송ㆍ김유ㆍ황대두는 피하여 따르지 않고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원 나라에서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기전룡(奇田龍)을 보내어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시켰다. 도당에서 왕에게 교외에서 맞이하기를 청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고 백관에게 명하여 맞이하게 하고, 또 이르기를, “만약 내가 교외에서 영접하지 않는 이유를 조사(詔使)가 묻거든 마땅히 대답하기를, 과군(寡君)이 일찍이 상국에 죄를 얻어 폄작(貶爵)되었으니 지금 복위되었다 해도 황제의 명령을 받기 전에는 감히 조사를 영접하지 못한다고 하라." 하였다. 원 나라의 사신이 행성에 이르자 왕이 편복을 입고 나아가 조서를 듣고는 그제야 면복을 갖추고 절하였다. ○ 원 나라에서 최유를 잡아 보내니 순군옥에 가두었다. ○ 이공수(李公遂)를 영도첨의(領都僉議)로, 홍순(洪淳)을 지도첨의 겸 감찰대부(知都僉議兼監察大夫)로, 이자송(李子松)과 김유(金庾)를 밀직부사로 삼아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었다. ○ 찬성사 이인복(李仁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왕의 복위를 사례하게 하고, 동지밀직사사 왕중귀(王重貴)에게는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11월에 최유가 처형되었다. ○ 전녹생(田祿生)을 감찰대부로, 염지범(廉之范)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밀직부사 한공의(韓公義)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 ○ 죄수를 사면하였다. ○ 전 판삼사사 손홍량(孫洪亮)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 12월에 왜적이 조강(祖江)에 쳐들어와서 관리(關吏)를 죽였다. ○ 풍저창사(豐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하여 환관에게 쌀을 내려주게 하였더니, 득년이 이 명령이 양부(兩府)를 경유하지 않았다 하여 명을 받들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자 하였으나, 찬성사 최영이 아뢰기를, “책임은 신등에게 있사오니 득년의 죄가 아닙니다." 하므로, 이에 득년을 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