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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의 현대적 의미2
-주기도문에 대한 풀이-
독재에 대한 저항-지금의 이 국가는 벗어버려야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게 ‘하기야스데토 토 오노마 소우(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하는 말이야요.
‘거룩’이라 그랬는데, 그럼 거룩이 뭐냐? 그건 바로 ‘신성’이야요. 신성이라고 그러면 거기 이러구 저러구 말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독재자야요.
세상 정치에서는 독재를 미워하고 반대하지만, 종교에서는 하나님의 독재를 아주 원하는 거야요. 그건 왜? 그건 그 독재는 권력으로 하는 독재가 아니라 사랑해서 좋게 보아하는 독재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그걸 마땅히 다른 말로 표시를 해야겠지만, 다른 말이 없으니까 세상정치에서 하는 독재를 그 유형만을 보고 그 이름을 빌려서 이렇게 표시해본 거야요.
아무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민주주의란 건 없어요. 그래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그 한계 안에서 우리에게 십이분 자유를 준거야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섭은 안 해요. 내가 자진하여 알아차려서 하길 바라지. 어느 무슨 순간에 우리가 나쁜 생각을 해도 하나님이 곧 눌러서 ‘이자식아, 왜 그런 나쁜 생각을 하냐?’ 그러는 법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잘못 증거를 하는 걸 보고도 그저 아직은 미흡한 걸로 뒤 뒀지. 그때 벌을 한다든지 강제를 해서 어떻게 하진 않았어요. 왜냐 하면 그건 어느 땐가는 가면 제가 자라서 그걸 깨달을테니까 그때까지 가길, 제가 스스로 하길 허락해 두는 거지, 세상 군주들이 하는 모양으로 강제로 하거나 계획으로 또는 상벌이나 무슨 꾀를 써서 자기 권력 방향에 만족토록 하는 방법은 안 써.
세상에 있는 독재주의를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우리가 충성을 해야 하니까, 거기에 우리 전체를 바쳐야 하니까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도 있어서는 안 돼.
그럼 세상의 독재자 그것들이 어디서 그걸 배웠나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한테서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내셨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있도록 만드셨어. 그걸 세상 독재하는 것들이 모방을 해서 그렇게 해요. 그래 기독교에선 그걸 ‘사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인데, 이 사탄인 세상 독재와의 대결은 아마도 마지막 날까지 갈 겁니다. 이제 역사의 이 시대에서 우리가 몸으로 그걸 당하고 있어요.
‘거룩’은 곧 ‘신성’인데, 신성은 불가침한 거야. 그러니 거기에 우리가 이러구 저러구 입을 열 수가 없어. 무조건 온전하게 철저히 순종하는 맘이 있어야 돼. 그래야만 여기 이 땅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그 독재를 내가 하려고 하는-사이비한-잘못된 것, 그것이 바로 독재주의가 나오는 원천이야요. 그렇기 때문에 열심이 있는 혁명가가 혁명 후에는 또 독재를 하게 돼. 혁명을 하는 동안은 그가 다 구세주란 말을 들었지만, 혁명을 하고 나면 이제는 또 그 혁명가에서 해방이 돼 나와야 돼. 그래 내가 늘 말하는 말에 ‘이 세상에선 혁명을 해야겠지만 그러나 혁명을 할 수 없다’는 건 바로 그런 까닭에서야요. 모순된 논리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우리는 완전치도 못한 ‘사람’들 아니야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선하신 분이라고 하니까 ‘네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건 아버지 하나뿐이다 (막 10:18)하고 예수님 자신조차도 그 자리엔 서지 않으시려고 했어. 세상 철학으로부터 시비 제일 많이 들을 말이지만, 우리는 다 죄인이야요. 다 ‘원죄’를 가지고 있어.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원죄란 소리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아주 듣기 싫은 소리야요. 말이 좀 빗나가긴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 까닭의 하나는 바로 이 ‘원죄’란 말 때문이야요. 공산주의자들의 말로는 기독교가 원죄론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위협감을 줘서는 자본주의자들의 그 체제 밑에, 폭군들의 억압 아래, 세상 기존 독재체제 아래 사람들을 영구히 묶어 두려고 고의로 하는 짓이 다 그래요, 물론 이런 논리야 말로 기독교를 잘못 알아서, 기독교를 적으로 생각하여 왜곡한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언뜻 듣기에는 참 그럴싸한 말이거든. 그리고 현실적인 역사에서 볼 때는 또 그런 면이 노상 없었던 것도 아니고 했으니까, 젊었을 때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 참 그렇구나 하고 속기가 참 쉬워요. 그러니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가 젊었을 때는 참 어려워요.
그럼 어떻게 이걸 극복을 할 것이냐? 그건 아까도 말했지만 훈련을 해야 돼-간디를 보면 간디도 거저 한 거 아니야요. 남아프리카에 갔을 때, 그때부터 공동살림을 시작을 한 거야요. 남아프리카에 가서 얼마 있다가 독일계 유태인인 칼릴바하가 간디의 하는 일을 보고는 거기 찬동을 해서 땅을 내놓아 〈톨스토이 농장〉을 해가면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자기네 손으로 직접 윤전기를 돌려서 ‘보이스 오보 인디아 Voice of India’를 내고 했던 게 있었으니까 그 뒤 인도에 돌아와서 했던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거야요.
그래 우리도 우리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간디가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의 책만 보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 한다고 해서 그게 되냐 하면, 그렇게는 안 돼요. 더구나 지금 우리는 간디가 영국사람을 대하던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요. 우리의 이 역사는 이미 병이 들대로 다 들었지. 또 미국, 일본, 소련, 중공이 얽혀 있지. 우리 자신을 보면 밑천이라고는 병든 이 역사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거 없어요. 훈련을 해야 돼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의분심이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참여를 하는 것은 고맙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 안 돼. 우리가 우리에게 놓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어디 가서 뭣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뿌리를 박아야 하고, 그 뿌리 밖을 데를 찾아야 해요. 그건 훈련이 없이는 안 되는 거야요. 맹자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 선생님께 정권을 갖다 맡기면 맘이 움직이겠습니까 안 움직이겠습니까(부자가제지경상 득행도언 수유차패왕불이의 여차 칙동심부호; 夫子加齊之相 得行道焉 雖由此覇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그러니까 맹자 대답이 “아니다. 내 나이 사십이다. 안 움직인다(부. 아사십부동심;否. 我四十不動心)” 그랬어. 그래 또 제자들이 이름있는 몇몇 사람을 들어서 인물평을 구한 뒤, 그럼 선생님께선 무엇을 잘 합니까 물으니까 “나는 말의 뜻을 알며 호연지기를 기른다(아지언 아선양오호연지기;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그랬어. 그럼 그건 어떻게 길러지느냐를 설명하는 말이 “그 기는 의와 더불어 도로서 짝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기위기야 배의여도 무시뇌야;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라면서 “이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의가 모여서 되는 것이지, 저 멀리 어디 동떨어져 있는 의를 움켜다 갖는 것은 아니다(시집의소생자, 비의습이취지야;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라 그랬어. 맹자의 말 가운데 특히 ‘집의소생(集義所生)’이라고 하는 건 거저 슬쩍 넘어가선 안 돼. 호연지기는 의를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고심면려(苦心勉勵)해서 실패하면서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야만 길러진다는 거, 이거는 꼭 알아 뒤야 돼요.
속에 이렇게 기르는 것이 없으면-가령 데모를 한다고 해도 할 때는 여럿이서 하니까 서로 힘도 돼 주고 해서 용기를 얻고 하지만 그러나 잡혀가면 그때는 나 혼자야. 모든 걸 혼자서 당해내야 하는데, 이때는 속에 기른 것이 없으면 당해내기 어려울 거야요.
그런데 우리 형편을 보면 이렇게 지독한 탄압 밑에 있으면서도 데모가 수십 년을 두고 죽지 않고 계속돼 내려온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나 이런 정도만 가지고는 우리 앞에 가로 놓인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단 말이야. 그래, 그때 내가 쓰면서도 채 분명하게 모르면서 썼는데, 그때 ‘4.19는 헛총이다. 이담엔 다시 써먹지 못한다’ 그랬어.
그걸 물론 그때 왜 그런가를 쓰기는 썼지만 설명을 하면서도 내 속으로 “글쎄.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는가” 그랬어. 4.19는 비폭력은 비폭력인데 순수한 비폭력은 못됐어.
민중은 발가벗은 양심의 자기 희생만 지지해
‘헛총’ 이란 말은 정말 사람을 쏘자는 것은 아니고 총알이 없는 빈 총만 왔단 말이야요. 그래 대체로 비폭력적이었으니까 4.19가 성공이 됐지, 만일 각목이라도 들고 나와 야단을 하고 그랬다면 그만큼 성공했을 리가 없거든. 왜 그런고 하니 민중이 와서 떠받들고 지지하게 되는 것은 무장한 게 아무것도 없는-제 맘속에 있는 양심 하나만 알고- 발가벗은 몸으로 자기희생을 각오를 하고 불의에 맞서는 걸 볼 때만 그래요. 조금이라도 등을 대고 하는 것이 있으면 민중이 구경이나 하려 그러지, 거기 절대로 지지를 할 줄 아세요?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호소를 해서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될수록은 내가 순수하게, 흐리터분한 것 없이 철저하고 깨끗하게 희생이 되는 걸 보여줘서 그들의 양심을 때리게 돼야만 돼요. 그렇지 못하고 내게 무슨 변명거리라도 있거나 약간의 의심스러운 데가 있거나 그러면 민중은 곧 물러서고 만단 말이야. 그런 위기가 지금 자꾸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하는 이 운동, 이것이 참 속 깊은 데서부터 훈련을 하여 깊이 뿌리가 박혀서 나오는 운동이어야지, 일시적인 그때 그때의 감정이 위주가 돼서 되는 운동으로는 절대 안 돼요.
아마 불원간에 그게 판명이 되는 때가 오겠지……
그런 걸 보면 뭐 우리 이것만이겠어요? 세상에 있는 혁명이란게 다 그런 거야요. 그래 모두 다 실패작이지. 겉보기론 어느 정도 힘 있는 거 같아 보였어도 가다가 마지막에는 다 실패작으로 그치고 그랬어. 그러니 우리는 전에 있었던 게 다 실패가 된 것일수록 우리는 또 그렇게는 안 밟도록 하는 게 옳은 일이야.
그러니까 참 말하기 힘들어요. 더구나 일이란 게 ‘내’가 하고자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말도 내가 하는 거 아니고 어느 알 수 없는 이의 기계가 돼서 말이 나와야 되는데…… 그건 나만 아니라 누가 말을 해도 그래야겠는데 그 지경에 가기가 또 어디 그리 쉬워요?
그래 나는 될수록은 내가 손을 내밀어 그럴려고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어느 정도 안 할 수가 없고 그래서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는 거기에 내 속에 고민이 있는 데가 있어요.
이제는 정말 위기가 우리 앞에 닥쳐오고 있으니까 부족한 나로서도 말을 안 할 수가 없어 하는데, 그전 같으면 아주 냄새나는 기독교는 믿고 싶은 생각 본래 없었어요. 고 ‘예수’라고 하는 거는 아주 냄새가 나는 거야요. 첫마디에도 하나님, 마지막에도 하나님. 거 다 하나님 하나님 하는 소리. 그러면 제법 진실한 것 같은데, 거, 어딘지 냄새가 나는 종교가 됐어.
종교란 그것보다는 인간미가 있어야 돼. 인간미가 있다는 거는 상식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거야. 상식적인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아야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어. 그래 될수록은 냄새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이젠 부득이 해서 ‘데모가 주냐, 기독교 믿는 게 주냐? 어느 게 기냐? 둘을 걸쳐놓고 그러지 말고, 분명하게 해야 된다’하고 대단히 보수적이란 말을 들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말했어요. 될수록은 사이비한 것이 떨어져 나가고 순전한 것, 참인 것이 있어야 돼. 수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야. 마지막에는 예수님도 혼자서 십자가에 달렸지, 몇몇이 동정을 해서 공동으로 달리진 않았어! 열 둘 가운데 누구 하나 대신했다는 게 아니라, 엄중하게 길 가다 잡힌 구레네의 시몬이 대신 멨다는 걸 보면 예수님 참 외로우신 분이야요. 야아, 삼 년 동안 그렇게 다니며 가르쳤는데 겨우 그런 사람도 하나 없었느냐! 그래 그런 걸 다 아시니까 목자를 때리면 양떼들이 다 흘어진다(마26:31)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이제 당하면 너희가 다 흩어질 줄 안다(요16:32)그러셨잖아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속에 들어간 씨가 있는 걸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가셨어. 그래 그 씨가, 돌아가신 후에, 발아가 돼 나와서 기독교 교회가 나오게 된 거야.
이제 이런 걸 그거야 종교니까 그렇지 하고 생각하지만 말고 우리의 사회문제 싸움하는데다가 실제 적용을 해서 이걸 정말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남이하는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 자신 속에서 얻은 게 있어, 그 솟구쳐 나오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솟구치는 게 비록 가늘기는 실낱같이 가늘더라도 그게 힘이 있는 거지, 속에 살아 있는 게 없는 것을 아무리 단으로 묶어 놓으면 그게 굵어는 보이지만 거기서 힘이 올 리는 없어요.
하늘나라-세속정치에 지배된 국가주의를 초월
그런 걸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볼 때는 한 마디 한 마디 다 생각을 해봐야 돼. ‘파테르 헤몬 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우라노이스(οὐρανοῖς)는 순전히 정신계인데, 이 οὐρανοῖς 에서 Πάτερ 의 첫째 조건은 곧 ‘하기야스테토 토 오우노마 소우(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그래 천하 어느 한낱도 거기 반역자가 없어야 돼.
그러고는 ‘나라가 임하소서 엘타토 헤 바실레이아 소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이제 ‘나라’ 얘기가 나와요.
사람이란 아무래도 생각하는 주체는 ‘나’인데, 이 ‘나’ 를 모아서 '나라’를 이루어야 돼. 우리 이 현실 역사에도 그거 아니오? 인간이 있은 지는 오래지만 나라는 그 뒤 훨씬 내려와서야 된 거야요. 나라가 될려면 우선 말할 줄도 알아야지, 글도 있어야지, 제도도 만들고 협동도 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된 담에 조직을 해야 나라가 되는 거지. 그 자리에 못가 가지고는 인간으로서의 내 사명을 할 수가 없어.
그런데 그게 곧 ‘하늘나라’는 아니지. 아니지만 또 땅에 있는 그 나라 없이는 하늘나라를 드러낼 수 없어. 땅에 있는 나라는 그러니까 정신적인 걸 드러내는 그 기구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니 그 나라라고 하는 게 자기 자체 속에 제가 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주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이야.
인류 역사에 있어, 이날까지는 사람들이 아직 어려서 정치 없이는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었지만, 이젠 이만하면 정치에서 해방이 돼가지고 마지막엔 정치를 초월할 수가 있어야 참 인간이라 글 수 있지,아직도 정치에 매어있다 한다면 그건 상기도 어린이를 면치 못한 인간 아니오? 왜? 정치의 속성엔 건 아무래도 ‘강요’가 있어. 어떤 일을 내 맘과는 관계없이 내게 강제를 해.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나라를 자랑해 왔지만 나라가 전부도 아니고 또 참도 아니야요. 인류가 나라가 필요 없는 지경까지 가기 전에는 그 밑에서 자라야 하늘나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니까 필요해서 오늘까지 온 국가주의인데, 이젠 없어질 때가 됐는데 이게 지배하는 재미에 맛을 붙여가지고 안 물러서려고 그래.
세상 모든 게 다 그 모양이지요. 지식도 사람에게는 있어야지만, 또 그것 때문에 잘못이야. 안다는 건 좋은데, 지식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고하면 자기 아는 길 뽐내려고 해. 학자치고 뽐내지 않는 사람 없어. 그래 일반으로 있는 사람들이 배운사람을 자기 친구로 알아주지도 않아. 그건 이때까지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공부 못한 사람을 보고 “아, 저 무식한 것들” 하고 멸시를 해왔던 바람에, 이젠 배운 사람 개인으로야 뽐낼 생각이 전혀 없더라도 이때까지 지내온 문화의 그런 전통 때문에 그만 틈이 가요. 그게 바로 성경에 기록된 에덴동산에서 지혜, 시비를 알 줄 아는 마음이 있으면 너는 죽는다(창3:1-19,22-24) 그 말 했던 거 아닐까? 그런데 사실은 지식 없이는 문명이 없잖아요? 어느 편으로 보면 그 지식이란 거 참 좋은 것 같고 또 어느 편으로 보면 그것이 본래 싸움을 붙인 거. 심지어는 점잖은 덕행이 있다고 해도 “아유, 그이야 뭐” 하고 간격이 있는 것처럼 대해요.
그래, 이런 점으로 보면 노자, 장자의 생각은 참 놀라운 거야요. 그이들은 덕이나 지식이 있어도 일부러 꾸며서 없는 척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게 자기에게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아주 어리석어진다면 덕에 가깝다고 그랬어. 이건 예수님 말씀과도 통하는 말이야요. 가난한 사람 복이 있다. 겸손한 사람 복이 있다(마 5:3-12).
어쨌거나 이 세상에 정치라는 게 있지만 정치 가지고는 안 되는 건 이때껏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일반으로 있는 씨들을 지배하고 속여서라도 강제하려던 그런 것 때문에 일반 씨들과 틈이 생겨서 병이 들게 된 탓이야요. 그리니 이 껍데기로 있는 세상 정치를 청산해야 하니까 ‘엘다토 헤 바실레이아 소우(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영어로는 ‘다이 킹덤 컴 (Thy Kingdom come)’ ‘나라가 임하옵소서’ 한 거야. 우리가 당신의 나라 세울랍니다가 아니라, 임하옵소서야. ‘우리’가 들어가면 그건 결국 바벨탑이 되고 말아.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 정치에서 그래도 비교적 ‘우리’가 덜 들어갔던 게 서양의 중세시대인데, 그만 거기 또 잘못이 돼서 종교개혁을 하게 됐어.
그런데 종교개혁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됐냐면 하나님을 아주 내팽개치고 배반을 하기 시작했어. 교회가 잘못됐기 때문에 제도로 된 교회를 내쫓자는 건 옳은 말 인데 교회의 잘못을 마치 하나님이 잘못인 것처럼 착각을 해가지고는, 사람이 어려서 미개했을 적에야 하나님이 있지 이젠 하나님 없다, 종교 필요 없다 하고 생각하게 된 거야.
물론 미개하던 때 알았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은 아니지. 우리가 잘못 본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지. 그건 잘못 본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지. 그런 잘못 본 하나님은 물론 우리 생각에서 나가버려야지. 다분히 냄새나던 거,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종교 같지 않은 것들이 많이 없어지잖고는 일반사람들이 알아듣기엔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과 아주 인연을 끊을 수야 없지.
이런 의미에서도 종교가 고쳐나지 않고는 아까 은준관 교수가 말했던 개인대 국가 간의 싸움이 없어지지 않을 거야요.
옛날에는 나라라고 하는 거는 “아이구, 그거야 크신 분들이나 하는 거지”하고 생각을 했어.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들 크긴 뭐가 커요? 마음이, 생각하는 게 조그맣게 생긴 것들이 정치하려고 그러지, 맘이 크게 생긴 사람들이 어디 정치하려고 그래? 그러니까 역사상에서 사람으로서 제일인으로 낳던 이, 인간으로서 높다고 하던 이들은 하나도 정치 안했어. 공자, 맹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이런 사람들은 하나도 정치 안했어.
이 앞으로 지금 있는 이 인류가 만일 망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더 발달을 하려면 이때까지 있었던 어느 변동보다도 큰 굉장한 변화가 있어서 참으로 한 꺼풀 벗는 일이 있지 않고는 안 될 거야요. 그게 무슨 형식으로 어느 때 가서 될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특색은 이런 인류의 장래에 대해 놀라운 생각을 해내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이 앞으로 어떤 길이 있어야 할지 잘 몰라요.
아무튼, 사람들이 종교 필요 없다고 한다고 해서 속단하지는 마시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걸로는 종교를 미신이라고 내버릴 하등의 이유도 없어요. 세속주의의 말에 겁이 나서 우리도 그만 그런가 보다 그럴 건 없어. 자기 맘에 생각을 해서 할 일이지. 자기 맘이 모르는 건 또 알 날이 있을 테니까 착각을 한 건 도리어 용서를 받을 수가 있는데, 친구들의 말이 겁이 나서 믿으면서도 안 믿는 척, 또 안 믿으면서도 믿는 척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다 못쓸 것이야요. 자기 속에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분명하게 명시를 해가지고 정성되게 해야만 만약 일이 잘못될지라도 나중에 자동적으로 고쳐질 시기가 와요.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지금 우리 학생운동이 겉으로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대로 현상 유지를 하려면 그건 해나갈 수 있겠지만, 속으로 보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현상 유지를 해나가면 해나갈수록 점점 딜레마가 깊어 갈 거야요. 그러니 이게 바로 ‘호미난방(虎尾難放)’이야. 호랑이 꼬리를 애초에 잡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걸 쥔 다음에는 놀 수도 없고 쥐고 있을 수도 없고 난처해져. 아마 우리가 분명한 결단, 믿음에 대한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동안에 큰 무리가 턱 부딪쳐 오면 그만 망하고 말거야. 그래 변동되는 시대엔 그래서 어려운 거야요.
오늘 양식-자본주의의 경쟁논리에 대한 극복
이런 어려운 시대에 이 문제에 대한 최고의 가르침이 바로 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 ‘게네테토 토 테레마 소우, 호스 엔 오우라노 카이 에피 겐스(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 뜻이야 물론 하나님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우리도 뜻에서 사는 거야. 나는 자꾸 하는 말이지만 멋에 사는 게 아니라 뜻에 산다고 합니다. 멋은 피상적인 거야요.
요즘 소위 전통문화니 뭐니 해서 옛날 탈춤 같은 걸 많이 들먹이는데, 거기 뭐 망나니나 악한이 있고 그러는데, 거기 망나니나 악한 노릇에도 뜻이 있으면 맛이 있지만, 뜻이 없으면 그거 다 소용없잖아요?
나는 ‘뜻’ 이란 말을 어떤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 씁니다. 그건 왠고하니, 될수록은 아니 믿는 사람을 믿음으로 끌어들일까 해서 한 겁니다. 하나님이라 그러면 안 믿을는진 몰라도 뜻이라 그러면- “뜻이 있다. 사람들은 다 뜻에서 산다” 그러면 거기 대해선 누구나 다 “그렇지요. 뜻이 없는 법이 없지요” 그래요. 그럼 그때 “그 뜻이 바로 하나님이요,” 그러면ᅳ 그건 쉽게 받아들일 거 아니야요?
이제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뜻이야 땅에 이루어졌건 안 이루어졌건 간에 본래부터 있는 뜻이야요. 이제 그 본래부터 있는 뜻-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이 땅에서 실현이 돼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것도 ‘내가 해보겠습니다, 또는 ‘내가 세우렵니다’ 이루렵니다’ 하지 않았어. 그냥 ‘되게’ 해달라고 그랬지.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기본적인 근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이번에는 경제적인 조건으로 넘어 와요. 그게 바로 ‘일용할 양식 톤 알톤 헤몬 톤 에피오우시온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이야요. 톤 알톤 헤몬 톤 에피오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런데 ‘오늘 양식’이란다고 농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야요. 농사하지 말고 곡간에 쌓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라 농사를 해서 곡간에 쌓더라도 “이건 내 곡식이다. 그러니 먹으려면 먹고, 팔아먹고 싶으면 팔아먹고, 내 맘대로 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단 말이야요. 왜 그런고 하니 오늘 내 곡간에 있는 양식이라도 그게 내 소유가 아니야. 물론 농사를 내가 안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으로 농사를 해서, 내 곡간에 쌓았다고 그래도 그건 내 소유일 수가 없어. 소유자는 하나님이야. 아무리 내 곡간에 쌓였다 해도 오늘 저녁에 하나님이 내게 주시길 허락하면 내가 먹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못 먹는 거야. 하나님이 그걸 내게서 빼앗아가려면 얼마든지 당장이라도 빼앗아 갈 수가 있어.
뭐, 이런 거야 어디 나 한 농사만 이겠으며, 또 어디 농사만 그렇겠어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 목숨까지 포함해서 모든 게 그렇지.
사람들의 경제관념은 오늘 먹고 남은 걸이 다음을 위해서 저축을 하는데서부터 발달을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대신 인류가 망할 원인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란 말이야. 경제란 관념 속에는 이미 경쟁의식이 꽉 들어있는 거야요.
그리고 물론 ‘사람이란 경제적 동물이다’ 하는 건 이 세상 생물 가운데 사람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요. 다른 버러지들 가운데 개미나 벌이 경제에 대한 본능이 다소 조금 있기는 있어요. 그러나 그건 사람과는 달라. 그것들은 그저 본능대로만 하는 거야요. 의식을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요.
그런데 거기, 그 벌한테 배울 점이 하나 있어요. 벌이란 놈은 힘이 센 놈과 힘이 약한 놈의 구별이 없어. 힘이 세다고 해서 약한 놈보다 특권을 누린다든지 하는 게 없단 말이야. 가령 겨울을 당해서 통속에 식량이 모자란다면 모자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나눠 먹다가 나중에는 온 통이 고스라니 그대로 굶어 죽어요. 힘센 놈이 약한 놈을 통 밖으로 몰아낸다든지, 물어 죽인다든지 하는 법은 절대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안 그래. 사람의 경제관념 속에는 꾀가 있어 가지고 둘이 있다가 한 놈 없어지면 제 것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걸 알아. 열 놈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다른 놈 다 없어지면 열 배로 제가 더 잘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세상 정치하고 경제가 딱 맞붙어가지고 저희 놈들 뱃속만 차리려고 그래. 그래 세상이 더 어지러워요 옛날 농사를 주업으로 할 때는 그래도 덜 했어. 세상 꼴 보기 싫으면 산속에 들어가 내 손으로 내 밭 일구어 내 농사 내가 지어 먹고 그러면서 세상과 떨어져 살 수도 있었어. 그리고 실제로 또 그래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어요. 농사는 일일이 내 손으로 일해서 먹고 하니까, 농민들은 그래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요즘 노동자들에 비하면 좀 자유로웠다 글 수가 있어요.
그러나 요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해. 모두 기계에 매달려 있는 거니까 기계 주인 놈이 제 배짱 틀리면 가서 기계를 쑥 빼버리면 그만이야. 그렇게 되고 나면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거기 매달릴 수밖에 없어. 소위 문명이란 게 인간의 자유를 다 앗아갔어. 그러니 이 문명의 말로가 ……
사람이란 경제적인 동물이다 하는 거는 따지고 들면 ‘나’라고 하는 것 때문에 나온 거야요. ‘내’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소유욕이 뒤따라. 그리고 소유욕이 생기게 되면 경쟁이 나는 거는 또 자명한 일이고,
자본주의가 처음 나올 때는 그건 그래도 제법 좋은 점도 없잖아 있었어. ‘이건 내 자본이다. 내 것이다. 우리 서로 남의 것을 침범하지 말자’ 그래서 나온 거야요. 그러니 이게 대단히 발달한 거야. 적어도 힘센 놈이 남의 것을 약하다고 막으로 빼앗던 것과 비교를 한다면.
사람이 짐승과 다른 거는 바로 그런 점이야요. 짐승들이야 그저 본능대로만 하니까 거기 죄라는 걸 갖다 붙일 수가 없어. 어미가 새끼 먹는 걸 빼앗아 먹어도 “이 나쁜 놈의 개야” 그러지 않고, 또 새끼가 자라서 제 어미에게 붙어도 “이 음란한 놈아” 그러지도 않아. 거긴 죄가 없지만, 적어도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안 그래요. 딴 세계가 열린거야요. 철두철미 도덕세계가 열린 거야. 그래, 도덕이란 것에 복종을 안 할 수가 없어. 그러니 힘센 놈이 제일로 알던 그 시절에 비하면 자본주의는 대단히 발달한 세계야요.
그런데 거기, 그 자본주의가 타락을 하게 된 데는 바로 소유욕 때문이야요. 도덕에 복종해서 살려고 하면 거기 제일 방해가 되는 게 소유욕이야. 이건 끝이 있을 리가 없어. 여기 길거리에도 나가보면 다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나왔을 텐데도 또 뭘 사서 먹고 그 야단이 아니오? 그건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야. 장난으로 먹는 거지. 그거 안 먹으면 죽을까봐 그러는 건 아니야요. 그런가 하면 이 지구상에는 또 굶어죽는 사람이 하루엔가 한 시간엔가 오만 명씩이나 된다 그러잖아요? 또 우리나라 첫 퀘이커인 이윤구씨가 지금 UN에서 어린이 영양 문제 일을 하는 데, 모유장려를 했더니 세계 우유업자들한테서 “이 자식 죽여 버리겠다.”며 협박을 당한다니 참…… 그러니 세상이 문명해졌다 그러지만, 사람이 살아야 되는 그 근본 윤리에는 참 멀어졌어. 자본주의의 이 소유관념이 참 문제는 문제야요. 이런 걸 보면 자본주의는 이제 틀린 거야요.
그래 모든 종교의 첫째 교훈이 버리라고 하는 거야요. 무소유가 되야 한다. 버리고 버려서 마지막에는 나 자신까지도 버려야 한다 그래요. 어떤 이들은 사랑조차도 소유욕의 변태라고 하는 이들도 있잖아요.
예수님은 그걸 실행하다 간 분이야. 가정이라고 가진 것도 없고, 내 집이라고 고정 된 것도 없고, 그저 오늘 허락이 되면 되는 대로 살아간 분이야요.
용서-상대세계에서 평화를 위한 기본적 윤리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것들을 말하고 나서 이제 윤리적인 데로 가 이제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이레마타 헤몬(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야요.
사람이란 아무리 잘 믿는다고 그러지만 잘못을, 죄를 짓는 거야요. 그건 면할 수가 없어요. 본래 날 때부터가 그거니까. 그걸 하나님에 하나님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반문을 하고 싶겠지만 그럴 순 없지요. 그건 바울의 말마따나 만들어진 토기가 토기장이를 보고나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러면 되겠어요? 토기가 그런 모양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반문할 수가 없지요. 그건, 참 말하기 어려운 거야요. 우리들로서야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사람은 잘못이 없는 사람이 없지.
그러니까 우리 서로 잘못한 것을 용서할 줄 알아야 돼. 만약 서로 용서할 줄 모른다면, 저 사람의 것을 내가 용서할 수 없고 또 내 잘못을 저 사람이 용서할 수 없으면 옛날 무식했던 때 그랬던 모양으로 서로 죽여 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돼. 옛날에는 그래도 무식하니까 죽어도 말 못하고 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반지빠르게 라도 알았으니, 왜 죽이는 거요, 죽으면서도 반항하잖아요?
그러니까 죽일 수도 없어. 그래 서로 피차간의 불화만 쌓여가게 마련이야. 그래 이제 세계평화가 불가피해졌어. 그러나 평화가 어디 오게 됐어요? 반지빠른 지식 때문에, 소유란 거 때문에 법이란 거 때문에 서로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병이 골수에까지 파고들어서 이젠 이걸 고칠 수가 참 없어졌어. 이런 걸 어떻하지?
이제 그런 걸 생각을 한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대로 피차 서로 용서하는 길 밖에는 다른 게 없어. 그래야만 우리 잘못을 하나님한테 용서받을 수가 있지, 그러잖으면 이 세계 온전할 수가 없을 겁니다.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이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이레타이스 헤몬(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가르치신 것은 그래서야요.
평화를 하자면 지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은 있다가 할 셈치고, 우선 첫째로 해야 될 것은 서로 “피차간에 이거 잘못됐습니다. 미안하게 됐으니 우리 서로 맺힌 걸랑은 깨끗이 풀어버립시다” 하고 서로의 유감을 서로가 풀고, 풀어 줄 일이야요.
그런데 또 사람이란 약한 존재들이니까 이렇게 일껏 풀어놓고도 또 새로 잘못을 저지르게 돼요. 그리고 내 맘에서,속에서 잘못이 나와 가지고 시험에 빠지게 돼요, 그래 그런 걸 아시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르치신 기도에 이걸 넣으셔서 가르치셨어. ‘카이 메 에이세넥케이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드몬(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고 가르치신 건 다 우리의 약한 걸 아시니까 그런 거고, 또 우리는 언제나 이런 걸 -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내 스스로 내 맘을 다스려야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다 약하잖아요?
그래 시험에 빠지고 나면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빠지고 말아. 그래, 이제 마지 막으로 ‘아까 르후사이 헤마스 아포 토우 포네로우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신 거야요. 사람이란 이 몸뚱이를 쓰고 있는 담에는 아무리 나는 안 그러려고 그러지만 악에 빠지고 말곤 해요. 이 세상이란 누가 뭐래도 꽉 악이란 세력이 자릴 잡고 있어서 인간에게 대적을 하고 있어요. 그래, 이런 가운데서 해방이 되게 해달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거지요. 뭐 용기있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내가 이놈의 악한 세력을 한 번 두들겨 깨버릴 랍니다.” 그래도 그거 용기는 한 번 좋은지 모르지만 소용없는 거야요. 내가 뭔데 이 악한 세력을 깰 수가 있겠어요. 거기서 우릴 풀려나게 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뿐이야요. 그래 우릴 위해서 그걸 풀어 주십시오 했어.
이렇게 해서 주기도문은 다 끝난 거야요.
그런데 그담에 나오는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있습니다’ 하는 말이 문제가 되고 있어요. 그전에는 별말 없이 했던 건데 근래에 와서 학자들이 연구한 걸로는 오래 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고 그래요. 그래 지금은 이 구절을 그대로 하는 사람도 있고, 생략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은 좋은 말이야요. 뭐 주기도문에서 새로운 말은 아니지요. 위에서 다 나온 걸 다시 한 번 결말 지으는 말이야요.
그래 거기 호티(ὀτὶ)라는 말이 있어요. 호티는 영어로 하면 ‘포(For) 왜 그런고 하니’하는 말이야요.
주기도문을 첨부터 보면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고 다 우리를 위한 걸 구한 거야요. 그렇하고는 이제 마지막 결말로서 송영을 드려야겠는데 그게 바로 왜 그런고 하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하고 결론을 내린 거야.
그래 이걸 생략하기도 하더니만 또 얼마 전부터는 이건 참 중요한 말이다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이 지구의 제일 문제가 되는 건 ‘나라’ 때문이야요 나라. 그럼 나라가 뭣 때문에? 그건 권력 때문이야요. 그럼 권력은 뭘 낳지? 그건 영광이야.
참말 우스운 말이지만, 예수님 참 겸손한 분이야요.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신 분이야요. 요한복음을 보면 거기 그러잖았어요? 거기에 세상 사람을 보고 ‘한 마디로 해서 너희는 너희 영광을 취하지만, 나는 내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들끼리 이놈이 저놈을 칭찬해주고 또 저놈은 이놈을 칭찬해 주고 서로서로 주고 받는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지 인간들이 받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거야요.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미래국가의 모델
그러니까 나라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지, 우리가 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또 권력이란 것도 하나님이 가지실 것이고, 그 결과 권력이 잘해서 생기는 영광도 마땅히 하나님이 누리실 것이다. 내가 가질 것이, 우리가 누릴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바로 이 마지막 귀절이야요. 이건 하나님께 감사하는 걸로 마무리를 지은 것인데, 그게 곧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세 가지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 거야.
만일 이 말의 참뜻을 우리가 안다면, 그래서 그걸 정치가들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리고 정치가들이 이걸 알게 된다면 정치가들이 좀 달라지게 돼서 이놈의 정치도 달라질 거야요.
정치가들의 생각이 ‘본래 나라는 우리가 할 것이 아니다. 우리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우리가 그 직책을 여기 있는 동안 맡아서 할 뿐이다. 그러므로 권세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우리에게 어느 정도 허락해서 한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연히 권력의 결과로-잘됐으면-오는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지, 그걸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라면 지금 일이 왜 이렇게 됐겠어요? 지금 보다야 훨씬 좋아졌지.
하지만 사람이란 기어이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 있어. 나라를 내 맘대로 한 번 해 봐야겠다. 권력을 한 번 잡아봐야겠다. 영광을, 명예를 내게 돌아오도록 만들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어.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그랬어.
그래 이런 생각이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는 데에 커다란 가르침이 되는 거야요.
물론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지금 데모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해서 했던 말이야요. 데모를 하는 거야 첨부터 지지하는 거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에는 지금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지금까지는 거의 자연적인 감정 -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줬던 자연 그대로의 감정 - 인 의분심과 이상주의가 데모하는 그 마음에 우러나와서 그랬어요. 그러나 이제 이만큼 해왔으면 앞으로 올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게 있어야 돼. 그렇지 않고는 잘 못되기 쉬워.
그래 그걸 아까 은준관 교수는 개인대 국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느냐, 국가지상주의냐 하는 이 둘이 서로 싸워서 이러는 것이니까 이제 ‘제삼의 지대’ 제삼의 것이 나와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그럼 제삼의 것이 뭐야요. 그건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지, 별거 아니야요.
이제 이걸 우리의 현실로 사는 걸 좀 규모를 크게 해서 본다면 자본주의와 공산진영의 대립이야요.
그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왜 나왔느냐? 공산주의 처음 나올 때는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그런데 마침내는 미국과 둘이서 세계를 둘로 갈라 차지하게 됐거든.
그런데 이건 우연이 아니야요. 나는 늘 하는 말입니다만, 역사상에 미국과 소련은 본래 날 때부터 다른 나라하고는 달라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생각을 해가지고- 그저 자연발생적으로 된 나라가 아니라-적어도 이성을 써가지고 연구를 해서 만든 ‘이성적 나라’니까 그 의미가 달라요.
그럼 이 대결이 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건 물을 것도 없어요. 그건 깊이 생각지 않아도 분명해. 둘이 대결을 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기고 한 쪽은 완전히 패망할 거다 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만약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어느 한 쪽이 힘이 강해서 상대방을 이길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어서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야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완전히 때려 엎을 거다, 아니면 공산주의가 그 야단하는 걸 보니 자본주의를 깡그리 땅에서 몰아내고 공산주의 천하를 만들 것이다 하는 것도 역시 망상이야요. 그렇게는 안 될 꺼야요. 또 끝이 그렇게만 난다면 역사가 맛이 없어. 싸움이란 거는 그 싸움이 해결이 되려면 둘이 싸우고 있는 것 보다는 한층 더 높이 올라가야 되는 거야요. 보다 높은 층에서 보면 이때껏 싸웠던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군 하고 생각하게 돼요. 문제가 없이 돼서 싸움이 해결이 되어야지, 문제를 그대로 두고도 씨움을 그쳤다고 해보아야 그건 일시적인 중지일 뿐이야요.
그래 둘이 맞붙은 이 싸움을 해결하고 인류의 앞길을 밝히기 위해서는 제삼의 뭣이 나와야하지 않을까 그러는 것인데, 여기 은교수의 ‘제삼의 지대가 밝아온다’하는 소리는 대단히 좋은 소리야요. 현실의 이 잘못된 여기 있으면서도 두 분의 L씨를 예로 들어서, 지극히 소수이고 작은 것이지만 이제 거기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한 것은 참 뜻이 있는 말이지요.
이론적으로 해서 미래의 꿈을 그려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보다도 적으면 적은대로 이렇게 두 L씨들 모양으로 실천을 해보는 게 더 좋아요.
이런 문제는 두고 두고 생각을 해보고 또 생각만 해보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훈련을 해가도록 해야 돼. 실천이 곧 훈련이야요.
이런 건 뭐 꼭 예수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1984. 4 .21 문책:한해수
친우회보 1987년 봄호(14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