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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안토니오 영감님과 그 집 앞 나무 그늘 아래서 얘기를 하다가,
내가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서,
“영감님은 어디서 머리를 깎나요?” 하고 물으니,
본인은 ‘리께로(Riquero: 이 근방에서 제일 큰 도시. 면(읍) 소재지?)’에 가서 깎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럼, 언제 머리를 깎을 생각이신가요?”하고 혹시 머리 깎을 의향이 있는지 물었더니,
아직은 별로 깎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 길지 않은 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럼, 혹시 저하고 같이 리께로에 가셔서 머리 깎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영감님 머리 깎은 비용도 지불하지요. 그 것만이 아닌, 리께로에 나가는 비용 일체를 제가 내는 걸로 하고,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하고 물으니,
그리 싫지 않은 눈치이면서,
“모레(수요일) 나갈까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좋습니다. 그럼, 새벽에 나가야 할 텐데요......”했더니,
“여기서 나가면(6시 경) 거기서 오후 세 시차를 타고 돌아와야 하니......”하시기에,
“그럼, 점심도 먹어야 할 텐데, 머리 깎은 뒤 식당에 가서 점심도 먹고 돌아오는 걸로 하지요. 물론, 점심도 제가 사드리지요.” 했더니,
그저 웃기만 하셨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했다.
머리를 깎으러 가는, 여기 또 한 지구상의 끝마을에 있는 두 노인네의 나들이였던 것이다.
‘리께로’가 이 근방에서는 제일 큰 도심이라, 여기 주민들은 거기에 가서 부족하고 필요한 물자를 사오는 ‘읍내’라서 우리 역시 읍내까지 가는 나들이였던 셈이다.
이곳의 공식적인 외부 교통수단은 이렇게 일주일에 세 번(월수금),
‘리께로’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한 버스가 여기에 6시 넘어 도착하면,
6시 반 경에 여기서 출발해서 다시 리께로에 가고,
오후 3시에 리께로에서 출발한 버스가 다시 여기 ‘까보 끄루스’에 오면 4시 반경에, 출발해서 다시 리께로로 돌아가는 순환이었던 것인데,
그 중의 우리는 수요일 아침버스를 타고 나가 오후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던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그동안 버스가 오가는 걸 보니, 나가는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고, 이따금 들어오는 버스는 마을 초엽에서 내리는지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기도 했는데,
약속 날짜인 수요일 내가 그 버스를 타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해서 나가니,
종점엔 긴 줄이 서 있었다.
여기 쿠바는 대중교통수단이 그렇게 제한적이다 보니,(그렇다고 사람들이 차를 가질 만큼 잘 살지도 못하기 때문에) 도로를 가다 보면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늘 장사진을 이루고 있을 정도다.(그게 참 딱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건 내 우려일 뿐, 그래도 이들은 또 이 상황에 맞춰 잘만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평소에 안경을 끼지 않은 모습이어서 나는 영감님을 못 알아봤고, 나는 또 시내에 나간다고 마스크까지 껴서 그랬는지 영감님도 날 못 알아봐서,
우리는 약간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버스 시간에 나는 버스를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렇다면 영감님 댁에 뛰어가서 모시고 와야 할 텐데, 그러면 이미 버스가 출발한 뒤일 터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다른 사람들 다 타고 나만 남을 순간에 버스 창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서 보니, 영감님이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찾느라, 어쩌면 나는 그 버스도 못 탈 뻔 했다.
아무튼 그렇게나마 버스를 타긴 했는데, 나는 만원버스의 맨 마지막에 오른 승객이 되어 하는 수 없이 운전석 가까이에 서게 되었는데, 다행히 영감님은 의자에 앉으셨기에,
버스 삯이 얼마냐고 물으니 8뻬소라고 해서(여긴 싸기도 하다.), 10뻬소를 주니, 거슬러줄 생각도 하지 않고, 또 나 역시 거슬러 달라고 하지도 않을 만큼, 여기 돈의 가치가 없다는 현상이다.
버스는 역시 쿵쾅거리며 출발을 했고, (그나마 이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버스는 양호한 편이다. 여기는 다른 ‘깡통 버스(트럭)’도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낙후된 모습에 시설이다.)
여기 ‘까보 끄루스’ 입구의 그 ‘끝없는 숲길’을 역으로 달리는데,
나는 처음 여기에 오면서 그 멀고 지루해서 ‘질려버렸던 이 길’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특히 이 마지막 구간),
‘언제 여기를 한 번 내 발로 직접 와서 걸으며 사진도 좀 찍고, 가능하면 그림으로도 남기고 싶은데......’ 하고도 있었다.
그렇게 버스는 달리는데,
그 긴 숲길을 벗어나자 양쪽엔 야자수들의 밭이 펼쳐졌고, 이따금 그 쪽의 해변으로도 길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리께로’에 닿기까지에도 도로변에는 상당히 많은 집들이 있고, 거리 양편에는 ‘망고’나무가 한창 제 철을 맞아 끝도 없이 서 있는 모습에,
‘이 많은 망고를 다 어떡한다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고, 또 바나나 나무들 군락이 있어서 거기는 또 바나나 천지고,
군데군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또 적지 않아(촌락이 도로변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인구가 많지 않아 거의 단층집들이라, 전체적으로 보면 촌락이 상당히 넓어 보이는 편(아파트가 없으니)) 우리나라 6-70년대 모습일 것 같은데,
개인 차량이 없으니 거의 모두가 ‘깡통 버스(트럭)’를 기다리고, 그런 버스를 타고서도 서서 난간을 잡고 선 채 달리고 있는 모습들이 일상인,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달려 도심에 닿으니,
나는 영감님이 내렸는지도 몰랐는데 나를 부르기에 따라 내렸고,
“일단, 우리 여동생 집으로 갑시다!” 하시기에 영감님의 지시대로 따라 다니게 되었는데,
한 나무 울타리로 된 집에 초인종을 누르니 아무도 나오지 않아, 영감님이 불러도 소리가 없었는데,
“빵을 가지러 갔나 보니, 그냥 들어갑시다!” 해서 그냥 들어가게 되었다.
그 얼마 뒤 통통한 노파 하나가 들어오는데, 안토니오 영감님의 두 번째 여동생이라고 했다.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고, 오누이가 이런저런 얘기로 근황을 확인하다가,
그 여동생이 나를 위해 뭔가를 준비할 요량인가 보았다.
일단 시내 가까운 데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오라기에 우리는 그 집을 나왔는데,
영감님이 나를 데려간 곳이 리께로의 자기 친척들이 사는 동네였다.
바닷가였는데, 바로 바다와 이어지는 곳이기도 했는데, 거긴 바다 자체가 ‘까보 끄루스’와는 달랐다.
‘까보 끄루스’는 물색의 환상적인 카리브 해의 바다라면, 여기는 약간의 뻘도 있는(그 곶에서 안으로 많이 꺾어져 들어오는 만에 있어서인지), 얼른 보기엔 약간은 지저분해 보이는 바다이기로 했다.
그렇게 몇 집을 돌며 인사를 나누다,
“여기가 내가 태어났던 집이라오.” 하고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렇게 친척들 집을 한 바퀴 돈 뒤, 이제는 도심으로 나를 안내 했는데,
첫 날 여기를 지나면서 보니 그저 허술한 도심 같아 보였는데, 오늘 보니, 그래도 나름 규모도 있고 상권이 형성돼 있는, 곳이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사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거나 오가는 모습이, 우리의 시골 장날 같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엔 ‘도서관’도 있었고, ‘박물관’도 있었는데,
그런 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던지 나를 데리고 다니기에 나는 그저 따라 다니면서 이따금 사진을 찍기도 하는 등, 도시를 걷고 있었는데(확실히 도시라 생기가 느껴지기는 했다.),
여기는 ‘시장’이라고 해봤자 우리의 시장하고는 너무나 다르기도 하고 또 규모 면에서 너무 초라할 정도여서,
‘이렇게 장사를 해서 먹고 살기나 하나?’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고,
그렇게 시내 중심 광장 부근까지 가다 보니,
“근데, 이발소는 어딘가요?”하고 내가 물었던 곳이 바로 이발소 앞이었고,
한 젊은 이발사가 잠시 밖에 나와 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영감님이 뭐라고 하자,
“지금 바로 깎읍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물론 머리를 깎으러 나가긴 했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발소 앞에서 바로 들어가 머리를 깎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들어가니 두 사람이 머리를 깎고 있었는데,
여기는 이발소도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의자가 빙빙 돌아가기는 하던데, 한 쪽의 거울을 보고 앉는 게 아니라, 되는대로 앉아서 머리가 웬만큼 깎이면 거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깎으면 됩니까?” 하고 묻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머리 깎이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고 앉기도 하는 등,
우리와는 너무 다르고 느낌도 이상했는데,
그렇지만 나는 내 핸드폰에 있던 사진 한 장을(내 저장공간에 있는) 보여주면서 그렇게 깎아달라고 했고, 그도 눈치를 챘는지 어렵지 않게 가위를 들면서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토니오 영감님은 머리를 깎지 않을 모양이었다.
“왜, 깎지 않으시구요?” 해도,
“나는 다음에 깎지요.” 하면서 내 머리 깎이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계셨고,
그렇게 머리는 10 여분? 정도에 대충 깎인 모습이었는데,
가격을 물으니, 50뻬소라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돈으로 600 원 정도?
‘이렇게 싸서야 머리 깎는 일로 어떻게 밥을 먹고 살지?’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고,
나는 돈을 지불한 뒤,
내 휴대용 백에 들어있는 KF 마스크(1회용)를 세 이발사에 하나씩 선물로 주었더니, 너무들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싱겁게 머리를 깎았다.
그렇잖아도 여기 햇볕은 뜨거운데 머리가 길어서 짜증만 가중되었는데, 그렇게라도 머리를 깎으니 얼마나 시원하던지!
그런데 여기는 머리를 감겨주지는 않아, 개운한 맛은 없이 그 상태로 나오고 말았는데,
그러면서 도심을 조금 더 걸어,
영감님께 뭔가를 사드리려고 했는데(특히 고기),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기 자체의 물량이 적을뿐더러, 그걸 사려면 ‘치부책’이 있어야 했고, 나 같은 사람이 고기를 사려면 ‘비공식적’으로 달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래도 고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좌우간 이 나라는 ‘사회주의 경제’라 우리가 적응하기엔 너무나 다르고 이해 못할 게 많아,(돈이 있어도 사고 싶은 게 있지도 않지만 있다 해도 맘대로 살 수가 없고),
영감님 머리 깎아드리고, 점심도 사드리고, 뭔가 작은 마을에 사시기 때문에 필요한 게 많을 것 같아 사드리려고 했는데,
도대체 살 수가 없고, 머리는 안 깎으시겠다고 했고, 또 점심은 자기 여동생 집에 가서 먹자고 하니, 그저,
‘내가 여기에 왜 왔다지?’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지만 그냥 빈 손으로 영감님 동생 집에 갈 수가 없어서 거기 과자점에서 파는 몇 가지 과자 종류 중에서 두어 개를 섞어서 조금 샀는데,
동생집에 도착하니 지금 한창인 과일 다섯인가 여섯인가로 만든 ‘과일 음료’(?)를 내놓았는데, 우리가 밖에 나가 있는 사이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지 시원하고 맛은 좋았는데, 나에겐 단 게 흠이었다.
그래도 아주 성의껏 만든 과일로 된 음식이어서 맛있게 먹었다.
그런 뒤 여동생은 우리를 위한 점심을 준비한다고 했고(물자 배급을 못 받아, 음식 재료 자체가 부족하다고 불평을 하는 것 같았는데),
영감님은 그 집에 있는 엄청 큰 망고 나무에서 망고를 따기 시작했다.
아마 본인이 갖고 갈 것을 챙기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 영감님은 가만히 보니 그렇게, 본인의 집에 있는 과수에서도 본인이 직접 열매를 따서 나에게 맛을 보여주는 등의 행위를 아주 즐겨하는 분이라, 여기서도 그런 행위는 전혀 어색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여동생의 성의 있게 지어준 점심을 먹고,
내가 어떻게 ‘까보 끄루스’라는 마을에 찾아가서 안토니오 영감님과 친해졌으며, 이렇게 자신의 집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들으며 여동생은 감탄을 연발했는데,
내가 디카를 들고 또 ‘화가’라는 말에,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면서,
오래되어 낡은 사진 두 장을 꺼내오는 것이었다.
자신의 단 하나 뿐이었던 딸이라는데, 25살 무렵 교통사고로 죽었는데(5 개 국어를 했을 정도로 영특했다는데), 그 사진이 너무 낡아서, 그리고 여기 쿠바에서는 그 사진을 크게 확대하기도 쉽지가 않다며, 나에게 그 사진을 크게 확대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여기서는 안 되겠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한 번 시도해 보겠다고 했는데,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디카가 그리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묘수를 제안했고,
일단 그 두 장의 낡은 사진을 가지고 우리는 ‘까보 끄루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결국 좋은 디카로 그 낡은 사진 두 장의 이미지를 찍어 나에게 넘어와서,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사진을 확대해서 우편으로 그 분께 보내드리려고 한다.)
그런데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기 ‘리께로’의 버스 터미널에 가야 하는데, 영감님이 앞장서는데 방향이 달라서 물어보니,
아까 본인이 땄던 망고 등 여동생이 혼자 사는 오빠를 위해 또 바리바리 싸 준(음식 등) 걸 들고 걷기엔 너무 멀다며 마차를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께로 시내엔 승객을 대여섯 명을 태우고 갈 마차들이 자주 오가고 있었는데, 우리도 그걸 이용하려나 보았다.
물론 나에겐 신기한 일이기도 했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탄 마차는 여섯 명이 타게 되어,
‘이 더운 날 이렇게 많은 승객을 태운 말이 너무 힘들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말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가격은 5뻬소니, 우리 돈으로 100원도 안 돼, 이용하는 입장에서는 편해서 좋긴 했는데 말도 마부도 힘들 것 같아,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거기엔 우리처럼 그 근방의 또 작은 마을들로 돌아갈 많은 승객들이 각자의 행선지에 따라 열 명에서 스무 명... 그런 식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역시 안타까워 보였다.
(이런 모습은, 멕시코거나 모로코, 그리고 여기 쿠바도 마찬가지였다. 강렬한 햇볕에 나른하게 늘어진 사람들의 모습과 분위기가......)
물론 우리는 좌석에 앉아 올 수 있었지만, 다시 만원버스가 되어 쿵쾅거리며 버스는 출발을 했고, 쿠바 사람들의 땀내 나는 나른하고 고단한 삶을 싣고 달렸다.
그렇게 우리(두 노인네)의 읍내 나들이가 끝났는데......
물론 내가 지금 여기 쿠바 사람들의 가난하고 못사는 모습을 일부러 드러내 밝히면서 비하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짧은 한나절의 나들이에서 맞닥뜨린 내 감정을 여과 없이 나타낸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경우엔 늘 서글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여기 쿠바에 오기 직전 체류했던 ‘미국’에서거나, 우리 ‘한국’에서거나, 서부 유럽의 그 중 못 산다는 포르투갈만 해도 이렇진 않은데(동부유럽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웬만한 규모의 국가 살림이 있을 법한 ‘멕시코’나 ‘모로코’등만 해도 썩 낫다고 볼 수 없고,
여기 중남미인 ‘쿠바’를 비롯한(이제 두 번째 국가인데도) 이 부근의 많은 나라들과 남미 역시(‘칠레’ ‘아르헨티나’ 정도가 조금 나을까? 아니면 거기도 대충 이 정도일까?)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가 잘 사는 건 나쁘지 않은데, 그렇다고 이런 나라를 무시하거나 얕잡아봐서는 안 되는 것 역시 당연한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 결코 ‘우월감’에 그러는 건 아닌데도, 왜 이리 마음이 짠하고 안 좋은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내가 다니는 다른 나라들이,
적어도 우리나라만큼은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여기 보다는 우리나라가 잘 사는군.’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게.
그래야 거의 동등한 느낌과 생각으로 그들의 좋은 점은 함께 즐기고, 그들의 나쁜 점은 또 신랄하게 욕도 하면서(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생활수준이 엇비슷해야 나도 자유롭게 느끼면서 다닐 수 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나다 보니, 욕을 하게 되면 ‘우월감’에 그렇다고 할까 봐 못할 짓인 것 같고, 뭔가 안타깝고 안쓰러워하면, 그것 역시 ‘동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어서,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다.
예를 들자면, ‘스페인’ 정도만 돼도, 그들의 좋은 점은 얼마든지 나도 호응하며 즐길 수 있고,
당연히 그들에게도 나쁜 점이 있는데, 그럴 땐 또 얼마든지 나도 그들을 욕하면서 대응도 하는 게 자유롭고 맘도 편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