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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1일(오순절 후 열네 번째 주일)
시편 84:1-12
문지기 신앙으로 승리합시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예전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과 대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아주 성실하게 목회를 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대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에게는 다른 목사님들과 같은 특별한 재주가 없습니다. 설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열정적인 것도 아니어서 목회에 성공할 특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일생을 성전 문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소원을 듣고 난 이후로 저는 그 목사님이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일생을 성전 문지기로 살고 싶다는 소원이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한 것 같아도 사실은 결코 소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도 그렇게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입니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 과연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편 84편 표제에 의하면,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를 지었던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성가대원 가문이었습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19).”
하지만 원래 고핫 자손은 다윗에 의해서 성전 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임명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역대상 9장 19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라의 증손 에비아삽의 손자 고레의 아들 살룸과 그의 종족 형제 곧 고라의 자손이 수종 드는 일을 맡아 성막 문들을 지켰으니 그들의 조상들도 여호와의 진영을 맡고 출입문을 지켰으며”
성전 문지기는 일차적으로 성전 문들을 지키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성전 문들만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라 자손은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순례 객들이 성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정결 법에 의해서 정결한지, 정결하지 않은지를 검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또한 고라 자손은 성전에 드릴 세금을 감독하기도 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전 문지기로 일하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킬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일하던 대제사장과 부제사장과 함께 성전 문지기를 바벨론 땅으로 사로잡아 갔던 일도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성전 문지기는 존귀한 직책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중요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분주한 생활로 인해 성전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먼 길을 걷는 순례 객들이 과연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에 올라왔을까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절).”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성전에 올라온 순례 객들은 성전 벽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가는 참새와 제비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과 같은 존재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3-4절).”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왜 성전 문지기로 있던 고라 자손이 이런 노래를 불러야만 했습니까?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과거에 성전 문지기로 봉사하던 고라 자손이 지금은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가 열왕기하 1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혔던 모든 금들을 벗겨갔습니다. 학자들은 아마 고라 자손도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지금 이 시를 지어 부르는 고라 자손은 자신과 자신의 선조들이 감당하던 성전 문지기직을 그리워하며, 그 일을 할 수 없는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상황만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과 감사로 봉사하던 모든 일은 아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과연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갈망을 가진 자가 아니겠습니까?
현실은 이방 땅에 끌려와 마음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고, 봉사할 수 없지만, 그 마음은 이미 시온, 즉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큰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가리켜 “마음에서 우러나 주를 따라가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 길은 순례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눈물 골짜기와 메마른 땅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과 갈망을 가진 순례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많은 샘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주중에 창세기 21장을 묵상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사라의 몸을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찾아가 여종 하갈과 그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도록 요청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던 여종 하갈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과연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광야에 길이 있습니까, 우물이 있습니까, 먹을 양식이 있습니까, 또 기거할 집이 있습니까? 광야에는 사람이 살아갈 여건이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런 위험한 광야에서 어떻게 연약한 여인과 아이가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어머니는 그 자식을 떨기나무 덤불 밑에 놔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이를 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을 불러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일어나 이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8).”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혀 주셔서 샘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눈을 밝혀 주셔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샘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을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 아이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로부터 광야의 어려움을 거두어 주신 것이 아니라, 거친 광야에서도 적응하며 활 쏘는 일로 먹고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가 장성하자, 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애굽 여인을 아내로 얻어 주었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고,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눈물 골짜기가 많은 샘으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광야가 떠나가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 우리가 광야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거친 광야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결국에는 광야가 여러분의 사냥터가 되고, 여러분의 거주지가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시편 기자는 중요한 곳 두 곳에 (셀라)를 붙여 놓았습니다. (셀라)가 무슨 뜻입니까? 시편에 보면 (셀라)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멈춰서 들으라.”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중요한 강조점 바로 뒤에 (셀라)를 붙여 놓습니다. “너는 멈춰서 이 말씀을 묵상해 보라.”는 거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84편에는 두 곳에 셀라가 붙었습니다. 그곳은 4절과 8절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4절은 성도들의 ‘찬송’을 강조하고, 8절은 성도들의 ‘기도’를 강조합니다. 두 번 반복되는 (셀라)가 이 시편에서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4절과 8절 사이에 있는 5절과 6절과 7절에 적용이 됩니다.
5절에서, 성도는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얻게 됩니까? 성도는 찬송과 기도로 주께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6절에서, 우리 인생의 눈물 골짜기에 많은 샘이 터지고,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는 축복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찬송과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에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얻고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찬송과 기도를 올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찬송과 기도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저는 안산에서 목회하시는 유재명 목사님의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27년 전, 나는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안산으로 내려가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목회를 하러 갑니다. 지금 보러 가는 그곳이 하나님이 주신 곳이라고 믿겠습니다.”
교회 집사님이 운영하는 부동산에 가서 돈은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 응답받고 왔노라 말하니 집사님이 나를 어느 허름한 지하실로 안내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물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하에서 물이 하도 올라와 예배를 드리다 말고 물을 퍼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강대상은 두 번씩이나 썩어 주저앉았습니다. 결국 아내는 몸이 망가지더니 결핵에 걸렸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다시 사역하고 있는데, 아는 선배가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여기는 목회할 자리가 아니니 이사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사모님만 아픈 것이 아니라 너까지 큰 일 치르겠다.”
그날 선배가 준 후원금을 손에 쥐고 강대상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몇 시간을 울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하나님이 보내셨다 믿었는데, 창립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보내셨다 선포했는데, 내가 어떻게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는 이곳에 죽으러 왔습니다. 여기서 나갈 때 죽어서 나가든, 부흥해서 나가든 하겠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순교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중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지하실 교회 안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도가 가득 차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지하에서 나와 5층 상가 꼭대기로 예배당을 옮겼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환경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이 흐르는 지하실에서도, 이삭 줍는 삶의 현장에서도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출처: 유재명, 「은혜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서울: 두란노, 2016); 「생명의 삶 Plus」(서울: 두란노, 2022년 8월호), 26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목마름과 갈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문지기로 살아가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비록 광야와 같은 거친 삶의 환경이라도, 저는 여러분이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