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인류와 소통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신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주제는 “인류와 소통하시는 하느님”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하느님은 인류를 창조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전달하셨다. 당신의 생명, 당신의 전부를 전달하셨다. 인류와 소통을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먼저 소통의 길을 트신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 소통을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으로 선포하셨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신의 온몸을 바치셨다.
그런데 인류는 도무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인류와 소통을 원하시는 하느님을 깨닫지 못한다. 인류는 소통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어쩌면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전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귀를 막고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하느님나라가 모든 사람 안에 와 있다고 선포하시는데 우리는 눈을 감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은 우리들 자신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 안에도 와 계신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의 겉모양만을 보지 말고 그 안에 와 계시는 하느님을 보도록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보기 싫은 사람을 떠나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나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져야만 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로써 우리는 인간과 소통하려고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는 하느님의 뜻도 거역하고, 하느님의 소통을 알리는 예수님의 복음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통의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고통과 죽음의 현실과도 소통하게 된다. 고통과 죽음을 없이해야 행복하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죽음을 사랑하신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이 겪는 온갖 고통과도 소통하신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나병환자와도 정신병자와도 소통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직 예수님께 매달리며 아프지 않게 해 달라, 고통을 없애 달라, 부자 되게 해 달라며 내 소원만 빌었다. 마치 한번 아픔에서 나으면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한번 부자 되면 평생 행복할 것처럼.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소통을 모르는 이런 사람들에게 생각을 고쳐먹어라, 고통을 사랑하도록 하라,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역설하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한다.
소통한다는 것, 정말 힘든 일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교회는 그야말로 소통의 종교이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처럼 소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나라를 다스리는 많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소통에는 관심이 없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의 옷을 몸에 걸치고 있지만
그 옷은 언제든 입고 벗어버릴 수 있는 옷이며 언제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다. 하느님을 겉옷 두르듯 몸에 걸친 사람들이 어찌 소통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소통은 자기를 세상에 전달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이 소통의 마음을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당신의 전부를 이 세상에 전달하셨다는 말로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전달하셨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죽게까지 하셨다고 가르친다.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까지를 세상에 바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면서까지 세상과 소통하신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은 자기 자신을 죽음에 부치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느님은 우리가 보기에 인간답지 않은 얄미운 인간을 위해서도 당신을 팔아 그들 안에 들어와 계신다.
소통이 힘든 이유는 자신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통이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볼 눈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부와 권력과 명예의 겉모양에만 연연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시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는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말씀하신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를 보도록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물의 겉모양에 머물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을 보도록 하라. 하느님과 소통하도록 하라. 숨겨진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숨겨진 것을 듣는 귀를 가져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을 다 팔아야 한다. 또는 가진 것을 다 처분해야 한다. 소통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처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다 처분한다는 것은 ‘강부자’와 ‘고소영’에 묶인 마음뿐 아니라 자존심을 처분함은 물론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느님도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고결함과 존엄성을 팔아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까지 붙이지 아니하셨는가?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이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셨다.”(필립 2,6-7)
지금 정부가 국민과 소통이 안 된다면 이것들을 처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팔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소영’의 ‘소’가 교회의 이름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다. 교회를 처분해야
소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처분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기도 행위도 처분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는 물론이고 그들이 기도하는 하느님도 처분해야 한다. 그들이 기도하는 하느님은 그들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만든 우상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신 것은 그가 인간의 이런 욕심을 처분했기 때문이다.(1 열왕 3,5-6ㄱ.7-12).
하느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솔로몬의 청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너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네 말대로 해 주겠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감탄하여 하신 말씀에 보통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은 부지기수의 인간으로부터 부지기수의 청을 들으실 것이다. 그 청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교회에 나와 하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무병장수하게 해 달라, 고통을 없애 달라,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 남에게 영광이 되게 해 달라, 성공하게 해 달라, 심지어는 ‘고소영’이 되고 ‘강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런 기도 다 제쳐두고 오직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소통하는 통치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청하는 것을 다 처분한 그의 마음을 보게 된다.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당신 아들의 생명까지를 처분하신 하느님이시거늘 어찌 솔로몬의 기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는가.
그렇다.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로써 소통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가 말해졌다.)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시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모든 성인의 통공도 하느님의 이 소통에 근거한다. 하느님의 자기 소통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와 친한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소통한다.
이미 죽은 사람과도 소통한다.(우리가 연미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소통한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살았거나 나보다 뒤에 태어나 살게 될 사람,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마음을 돌릴 때는 그들 안에 와 계시는 하느님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것과 같다. 이에 솔로몬은 그들의 마음 안에도 숨어계시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마음을 달라고 청한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어떠한 처지에 있든 하느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을 고백한 것이다. 세상의 온갖 잡소리에 귀가 막혀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여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결국 하느님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귀를 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에게 왕의 목표는 백성을 듣는 것이요 이를 통해 하느님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을 듣는 자는 백성을 듣는다.
그리스도는 목숨을 바쳐 하느님과 인간과 소통하셨다. 그 때문에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목표이다. 바오로가 로마의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 8,29)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모상이 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그 뒤를 이어 우리가 둘째 셋째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소통하여야 하고, 예수님처럼 소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소유와 성공을 처분하고 자기 몸을 희생으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하고 세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통, 이것은 인간됨의 근본이다. 우리의 위정자들이 ‘강부자’와 ‘고소영’을 처분하고 하느님과 소통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인간적인 인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종교인들이 자기의 권위를 처분하고 소통의 예수님을 닮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교회가 자기의 무병장수와 권력과 명예를 처분하고 인간을 하느님과 소통하게 하는 길잡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성당에 나온 것은 우리의 인생이 소통의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미사를 통해 우리가 소통의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