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같은 외 1편
김상미
내 마음속 다정함이 자꾸만 그대를 떠올립니다
전화벨이 울리길 기다리고
그대가 불러준 노래를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듣게 합니다
순한 핑크빛이 좋아지고 연두색이 좋아지고 하늘색이 좋아지고
내 감정의 통로에 하나둘 불이 켜지는 게 간지러워
길을 가다가도 멈추어 서서 웃습니다
웃는 능력은 곧 사는 능력이라고 그대가 말했지요
맞아요, 나는 살고 있어요, 살고 싶어요
웃음이 만들어내는 다정하고 기쁜 거품 속에서
내가 없는 척, 그대가 없는 척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요
지금 내가 보는 것이, 내가 상상하는 것이, 내가 꿈꾸는 것이
다시 내 내면으로 들어와 퍼져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 내 방향이 된다면
나는 그 길로 쭉쭉 가겠어요.
그 길에서 그대에게로 열린 창 하나 만나면
오래오래 그 앞에 서 있겠어요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그보다 더 가슴 쿵쿵거리는 일은 없겠지요
나는 아직도 이런 촌스러움이 좋습니다
그대를 떠올릴 때마다 눈부셔지는 세상
어딜 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삼라만상
그리고 그 속에서 시를 쓰고 시를 읽으며 웃고 우는 사람들
다정한 햇살 속에 깊이깊이 자신을 담그며
죽을 때까지 그 햇살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 곁에 활짝 핀 접시꽃 같은
겨울 사진
사진을 찍는다. 돌돌 말려 있던 풍경들이 양탄자처럼 펼쳐진다. 겨울은 내가 좋아하는 계절. 나는 그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우울을 찍는다. 우울한 도시, 우울한 사람들, 우울한 도로… 우울은 어둠과 소외를 녹여 만든 멜랑콜리아 표 차 한잔. 내 사진 속의 여인들은 방금 그 차를 마시고 외로운 겨울 극장에서 나오는 눈(雪)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초조히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을 위해 밥을 짓는, 그런 여인들이 아니다. 예술은 예술이고 삶은 삶인, 조금은 비정한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셔터를 누른다. 우울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차가운 겨울 풍경은 그 자체로 한 장의 엄숙하고 우아한 상실, 나는 그 풍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겨울은 내가 좋아하는 계절. 그 속에서 나는 우울과 추위의 끝을 찍는다. 몇 마리 비둘기들이 구구구 운다. 겨울 사진을 찍는 건 추리소설을 쓰는 것처럼 신중하고 영리해야 한다. 나는 계속 셔터를 누른다. 태양이 그 진로를 이탈한 듯 점점 어두워지는 우울한 도시, 우울한 사람들, 우울한 도로…
김상미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외 3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매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