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1949년 4월호 제43권 제4호(54〜57쪽)
최도마 신부 전기(一)
一, 머리말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님은 그 일생의 편형(片形)이나마 여러번 소개되여있으나 그동기동창이신 최도마신부의 일생은 오직 옛문헌(文獻)에 숨겨있음이 유감스러운일중에 하나이다.
금 一九四九년-이는 최도마신부의 탁덕승품백주년(四월 十五일)이오 유학을 마치시고 무쌍한 고통과 싸우신후귀국하신지 정이 백년이되는해다.
이 기회에(극히 외람스러운 일이라고 느끼며) 최신부님의 일생에서 쪼각쪼각이나마 아는그대로 기록하고저 붓을들었다.
二, 다래꼴
최도마신부의 태생지는 다래꼴이다. 이는 「달레」신부의 저서 대한천주교회사에 기록된바이오(1, 달래 二, 160) 이미 작고하신 「삐숑」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도서관으로부터 사본하여가져온 대한천주교회사에 관한 문헌중 제一회 대한신학생의선서문(宣誓文)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선서문의 역문을 가톨릭청년지(靑年誌) 제十八호 九페이지에 그대로 소개하면 아래와같다.
『제1회 조선신학생의 선서문.
一八三六년 十二월 二일. 조선신학생이 수업한 신학교교장…………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인하여 하노라.
나에게와 또한 나의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목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허락하느뇨? 허락하옵니다.
나에게와 또한 나의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수석성직자들에게 장상의 허가없이는 그들의 지정하지아니한 다른지방이나 다른회로 가지않을 것을 허락하느뇨? 허락하옵니다.
외방전교회신부, 조선선교사, 조선교회의 부득이 수석으로있는(이아래 서명한) 나는 이 소년들 즉
최방지거. 야고버와 황안아의 아들, 태생지 경기도남인.
최도마. 태생지 충청도 홍주 다래꼴.
김안드레아. 태생지 충청도 밀내 솔뫼(-주-원문에는 놀매로 오식)
이들이 오주예수 고상앞에서 복음성경우에 손을대고 一八三六년 十二월 二일에 서약함을 받었음. 베두루, 필리벨도, 모방. 조선 선교사』
대한천주교회사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고 연구를 거듭쌓어오던 「삐숑」신부는 최도마신부님의 태생지 「다래골」이 현재 어디있는지 알고져하였다.
충청도 홍주(洪州)라 하였으니 이는 충청남도에 있던 옛고을 이름이다. 그렇나 현재는 홍주군이 없고 홍성군(洪城郡)이 있으며, 홍성군은 옛날 홍주군의 지역그대로인것도 아니다. 여하간 「다래꼴」하였으니 이는 어느 한촌(寒村)의 속명이오 현재도 그렇게 부르는지 알길없는일이었다.
「삐숑」신부는 충남합덕(合德)본당 「빼랭」신부를 방문하였다. 「빼랭」신부는 합덕지방에 二十여년간 포교하였고 아직 주재중이며 또한 한국천주교회사에관한 연구가 깊은 신부님이시다. 물론 「빼랭」신부도 최도마신부님의 태생지가 다래골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렇나 다래꼴은 어덴가?
두분 신부님의 회합은 오직 다레골이 어덴가? 하는 결론으로 그쳤다. 합덕지방 연노한 회장들과 유지교우들에게 질문하였다. 대답은 약속한 듯 일치하였다.
「글쎄유 다래꼴이 어델까유?」
다래꼴은 어데인가?
그후 얼마간 「빼랭」신부는 교우들과 대화할때에 화제중 하나는 흔이 이것이였다.
어느날 타지방에서온 교우와 대화중에 다래골이 청양(靑陽)땅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최도마신부의 태생지 다래꼴은 청양땅에 있다. 청양군 전교는 예산(禮山)본당신부의 담당이다.
여기에 요안유신부(兪漢枉)의 다래꼴 방문기(訪問記)를 소개함도 흥미있다고 보아 소개한다.
「최도마신부님의 태생지 다래꼴이 예산지방인 청양땅에 있다는 말을듣고 예산읍본당 유아오스딩(柳鳳九)신부님과 만나 이후 기회보아 다래꼴을 일차 방문할 것을 약속하여 두었다.
一九四四년九월五일 오전아홉시경이다. 유아오스딩신부님과 나는 다래꼴을 방문차 자전거를 타고 예산시를 떠났다. 가을의 공기는 여향자들의 기분을 돕는다.
대흥(大興)을 지나고 광시(光時)를지나 「꽃바위」라는 주막거리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다래꼴을 물었다. 근방사람들은 「다래꼴」하니 즉시 알고 그곳까지의 노정도 잘 안다. 다래꼴이 현행되는 속명이라는 것을 알때에 반가웠다.
꽃바위에서 다래꼴까지 직노로는 三十리밖에 안된다. 그렇나 길이 험한편이오 더옥 몇일전 폭우로인하여 자전가 행노는 못될것이니 신작노로 청양읍을거처 돌아가는편이 나흐리라 한다. 돌아가면 五, 六十리가량 된다. 우리는 대로를 취하여 떠났다. 마침그근처에 교우들의 거주하는 촌낙이 있어 회장님택에서 점심대접을 후히 받고 떠나 청양읍에 도달하였다. 때마침 방곤훈련중이였다. 훈련인지 실지인지? 여하간 나나드나 방공훈련에 질색이다.
공습경보중이라 통행을 금하므로 일시 숨을 돌리고 도망하듯 기회를 엿보아 다러났다. 갈길이 바쁘다.
청양읍에서 대천역(大川驛)으로 통한 큰길로 약 六十리가량 가면 화성면(化城面)사무소 소재지로 합천(合川)시장이 있고 다래꼴은 그 근처라고 알어두었다.
청양읍에서 좀 나아가면 고개가 시작된다 자동차가 통하는 큰길이지만 자전거를 장거리 끌어야한다.
고개우헤 올러서니 앞으로 오직 첩첩산이다. 그렇나 자전거로 고개를 나려오는데는 상쾌하기 짝이없다. 고개넘어 언덕을 나려올때에 한참동안이나 흰빛자갈이 깔려 흡사 백설이 만적한 느낌이 있었던 것은 아직 기억에 새롭다.
합천시장에 드러서니 때마침 가던날이 장날이었다. 그러나 쓸쓸한 기분이 돌뿐이었다. 잠시 쉬고 곧 다래꼴을 물었다. 시장뒤로 구비처 흐르는 냇물을 건너 바라보이는 동리는 곧 「검바위」요 대래꼴은 검바위에서 산중으로 약 一킬로쯤 드러간다. 묻고 물어서 이윽고 목적한 「다래꼴」동리에 들었다!
상금 최씨가 살듯하여 최씨택을 찾으니 동리에서 제일 커보이는 집을 가리킨다. 묻는 객들의 차림차림이 그런집을 찾을듯하게 생각한모양이다. 주인을 찾어 인사한후 찾어온 뜻을 말하니 주인 최병훈(崔炳勳)씬느 친절히 대하여준다. 그는 당년 四十六세 상식이 넉넉한분으로 보인다.
다래꼴은 청양군화성면농암리(靑陽郡化城面農岩里)에있다. 그리고 농암리는 삼구(三區)로 난호인다. 1, 현암(玄岩) (검바위 或 거문배). 2, 주동(舟洞)(배울). 3, 장수구(長水區)
다래꼴은 장수구에 있고 전에는 상월리(上月里)라고 불렀다 한다.
「다래꼴」을 「다래촌」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다래촌도 옛날부터 교우촌이오 교회사상에 가끔 볼수있는것이나 이는 경기도이천군상월면(京畿道利川郡上月面)에있고 권(權)회장님집안이 옛날부터 살어온 촌이다.
다래꼴은 다락골(樓洞)의 와전이다. 다래꼴을 찾기 전에는 산 과실로 다래나무가 많어 다래꼴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였더니, 그실은 동리를 에워싼 산형이 누각(樓閣)의 기둥과 같다하여 「다락골」이라 한다.
다래꼴은 동이 좀 터저 입구가 되었으나 역시 매봉재(鷹峰峙)가 막었고, 서편에 불당굴(佛堂岩)이오, 남은 화랑배(花郞岩), 북은 자사배(子思岩)가 솟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최도마신부님이나 기타 치명자들에 관한 문헌이나 재료를 얻고저하여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최병훈씨는 곧 족보를 가저왔다. 최도마신부님의 있을만한 장소에서 아무리 찾어도 알길이 없다. 혹 분명이 따로 있지나 않을까하였으나 그럴법한데도 없다. 이 족보는 근대에 만든것이다.
병훈씨는 그선대에서 천주교를하였다는 것을 전연 모른다. 전에 웃어룬들게 오직 집안에서 그전에 미국가신분이 한분 계셨다는 말을 들었다 한다. 혹 최도마신부님의 유학가신 사정에 관한것이나아닌가 의심난다.
혹 가보(家寶)나 없나 하고 물었다. 주인은 다시책자 하나를 내오며 옛날것이라 할 것은 이것하나가 있을뿐이라 한다. 표지에 야당유적(野堂遺蹟)이라고 씨였다. 일목 책자의년조가 높다는 것을 느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