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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건넸던 목걸이가
어느 기생 목에 걸려있는데…
아직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열다섯살 사미니 지혜는 공양보살과 장 보러 가는 날이 가장 즐겁다.
밀양 장날은 언제나 흥청거린다.
그때 지혜가 발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호박 목걸이! 옥색 비단 저고리에 분홍색 비단 치마를 입은 귀부인이 목에 걸고 있는 호박 목걸이!
분명 지혜가 일곱살 때까지 차고 다녔던 목걸이였다.
호박(琥珀)은 송진 같은 나무의 진이 수천만년의 세월을 두고 화석으로 변한 보석으로 투명하고 단단하다.
발그레 투명한 호박 속의 점박이 무당벌레! 늦가을 짧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 그 귀부인은 저잣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지혜는 미행하여 그녀가 들어간 집이 기생집 춘향옥이란 걸 알았다.
늦은 저녁 공양을 마치고 요사채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호박 목걸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다섯살 지혜 목에 손수 걸어주셨던 집안 대대로 내려온 그 목걸이.
지혜는 틈만 나면 사자평에 올라가 뛰고 달리며 몸을 단련했다.
심마니 지혜 아버지는 구만산·천황산·재약산을 헤매며 약초를 캐고 일년에 한두차례 산삼도 보며
세식구는 단란하게 살았다.
무남독녀 지혜는 아버지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심마니 아버지는 산을 헤매다가 지쳐서 돌아와도 지혜를 업고 집을 몇바퀴 돌고 나서야 밥상을 받았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웬 젊은이의 부축을 받고 들어왔다.
최 궁수라는 젊은이는 허우대가 멀끔하고 친화력이 대단했다.
지혜는 사냥꾼을 삼촌이라 불렀다.
그날 밤 사냥꾼은 문간방에서 잤다.
지혜 아버지와 최 궁수는 자주 어울렸고 최 궁수는 툭하면 지혜네 집에서 자고 갔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 눈이 많이 오는 날엔 사냥을 접고 지혜 아버지가 없을 때도 지혜네 문간방에서
제집처럼 잠을 잤다.
최 궁수와 지혜 아버지는 몇날 며칠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더니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둘이 얼추 두달을 잡고 함경도 개마고원에 가기로 했다.
전인미답의 산이 많아 백년 묵은 산삼이 즐비하고 개마고원 족제비 꼬리털은 붓장수가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는다는 것이다.
떠나기 전날 밤 일곱살 지혜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잤다.
이튿날 아침 사냥꾼과 심마니가 밥상을 물리고 개마고원으로 떠날 때 지혜는 호박 목걸이를 벗어
아버지 목에 걸어줬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두달 안에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이듬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해 이른 봄, 어머니는 지혜를 큰집에 맡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큰아버지·큰엄마·사촌들이 지혜를 하녀처럼 부려 먹었다.
4년을 종노릇 하다가 큰집을 나와 열두살에 막솔암 사미니가 되어 이제 열다섯살, 하루도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밤이 깊었다. 입동이 지난 밤공기는 서리를 깔면서 싸늘했다.
춘향옥 꽃담을 훌쩍 넘은 괴한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은장도를 꺼내 술 냄새를 풍기며 곤히 자는
행수기생 희멀건 목을 칼날로 지그시 눌렀다.
“으으으으악!” 지혜는 한손으로 호박 목걸이를 낚아챘다.
“이 목걸이 어디서 났어?”
“모, 목숨만 살려주시오. 청도 사는 최 대인이….”
“최 대인? 젊을 때 사냥꾼이었던 최 궁수?”
“마, 맞습니다!”
청도에서 최 대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밤은 깊어 삼경일 제 고래대궐 같은 기와집 꽃담 안으로 독을 넣은 돼지고기를 던져넣고 기다렸다.
삽살개 두마리가 조용해졌다.
지혜는 날렵하게 담을 넘어 사랑방 문을 열고 살며시 들어가 코를 고는 최 대인의 목을 은장도 칼날로
지그시 눌렀다.
팔년 만에 보는 최 궁수는 살이 뒤룩뒤룩 쪘다.
“허억, 누구야!”
“삼촌, 저 지혜예요.”
“지혜야, 네 엄마를 봐서 목숨만 살려다오!”
“엄마?” 최 대인을 묶어놓고 안마당을 건너 안방으로 들어갔다.
세살쯤 되는 아기는 자고 있고 갓난아기는 어머니 젖을 물고 있었다.
“지, 지혜야!” 무당 손의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최 대인 저 인간이 아버지를 죽인 살부지수(殺父之讐)라는 거 알고나 있어?” “네가 잘못 알고 있다. 개마고원에서 저이는 족제비를 잡고 너희 아버지는 산삼을 캐느라 자연히 서로 헤어지게 되었대. 지혜야, 엄마 손 한번만 잡아다오.” 지혜는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사랑방으로 가 최 대인의 두 발목 인대를 잘라 앉은뱅이로 만들고 피바다가 된 사랑방을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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