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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자)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서울] 주님 어서 오소서/최승정 신부
대림 둘째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공동체는 첫째 독서로 이사야 예언서 11장의 말씀을 읽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자신이 환시하는 메시아 왕국에 대해 노래하는데, 그 왕국의 묘사에 앞서 예언자는 우선 그가 누구인가를 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우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햇순, 즉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임금의 혈통입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적통성에 대한 언급입니다. 2절에서는 그 메시아에게 “주님(야훼)의 영”이 머무른다고 말하면서, 그 영의 속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 속성은 모두 6가지인데, 지혜(sapientia),슬기(intellectus), 경륜(consilium), 용맹(fortitudo), 지식(scientia) 그리고 경외(timor)입니다. 여기에 효경(pietas)이 더해지면 성령칠은이 됩니다.
3절에서는 2절의 마지막인 “경외”에 대해 반복하여 언급하면서, 메시아는 하느님을 경외하기에 자기의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대로, 즉 자신의 편의대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3절이 무슨 의미인지를 4-5절은 부연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장차 메시아가 강한 자들과 타협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무뢰배를 내리치고” 악인을 처벌하는 정의로운 심판자가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6절부터 등장하는 대목은 진정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와 함께 “늑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며,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는… 그런 정의로움이 그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자는 선언합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가 단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장됨을 의미하며, 하느님의 정의로움이 단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서도 역시 실현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9절에서 그 경이로운 정의로움의 출발점은 바로 “주님을 앎”이라고 예언자는 밝힙니다. 여기서 이사야 11장이 전하는 메시아의 본질적 정체가 드러납니다. 메시아는 바로 “하느님은 과연 누구인가?”라고 묻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공의로움을 선포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포된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겨레와 온 우주가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일종의 영광송과 함께 오늘의 독서는 마무리됩니다.
오늘의 독서를 거꾸로 읽으며 요약해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명제를 만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로움에 기초하며, 참다운 정의는 공의로운 하느님에 대한 앎에서 출발하고,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은 주님의 영을 통해서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메시아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공동체는 2000년이 넘는 시간을 세상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지도 또 정의롭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2010년 대한민국의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인문서의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대변합니다.
그것이 오늘 대림 2주를 맞으며 우리 온 교회공동체가 우리와 함께 계셨던 메시아를 그리워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까닭이겠습니다. 마라나타(주님 어서 오소서)!
[안동]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이준건 신부
대림 둘째 주일 대림환에는 두 개의 불이 밝혀졌습니다. |
[수원] 도대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뭐야?/조원기 신부
어린 시절, 이상하게 생각한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습니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가 자신을 스스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아니, ‘광야에서 외치는 이’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이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뭔가?
그러다가 레오 교황님의 너무나도 멋진 해설을 보게 됐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소리이고 소리는 말씀을 전하고 사라지는데, 말씀은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인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말은 우리의 목소리를 타고 상대방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소리는 남아있지 않고 사라지며 상대방에게 남는 것은 전하고자 했던 의미 곧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랑해’라고 말하면 소리는 얼마 뒤에 사라지지만 이 ‘소리’를 들은 사람에게는 ‘아,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하는 ‘말’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라지는 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특히 광야는 성경의 전통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이끄시는 장소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정체는 분명해집니다. 광야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겸손하게 ‘소리’로 칭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럼 이 ‘소리’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소리’ 그 자체로는 ‘사라지고 말 것’에 불과하지만 ‘소리’의 진정한 가치는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남게 되는 것, 그 ‘소리’가 전한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이 ‘소리’의 가치는 ‘사랑’이 됩니다. 반대로 ‘개똥’이라고 한다면 이 ‘소리’의 가치는 ‘개똥’이 됩니다. 이처럼 어떤 ‘말씀’를 담고 어떤 ‘말씀’을 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소리’에 미움을 담는다면 우리의 가치는 미움이 됩니다. 다툼과 시기를 담는다면 갈등만을 남길 것입니다. 무의미한 자극만을 찾는다면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반대로 옳은 일을 찾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가치는 정의가 됩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며 기쁨을 나누면 우리는 기쁨을 전하는 ‘소리’가 됩니다. 사랑하면 세상에 사랑을 남깁니다.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리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실어주시는 ‘말씀’을 전하면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남기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에게도 기쁨과 생명이 됩니다. 우리 삶의 가치가 그리스도가 되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보내며 매순간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 삶에 길이 열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안동]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이준건 신부
대림 둘째 주일 대림환에는 두 개의 불이 밝혀졌습니다.
선구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우리에게 목소리 높여 애절하게 외칩니다.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자주 많이 보고 듣느냐(그것이 말이든 이야기든)에 따라 스스로의 됨됨이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맹모삼천지교를 봐서도 그렇고,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인 부모에게서 자라면 그 부모를 따라 외국말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집과 짜증과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집, 글 읽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겠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주님의 자녀로 성장합니다.
요즘 무슨 소리를 많이 듣고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소음에 젖어 버려서 혹시 난청현상을 보이고는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선택적 난청이지는 않습니까? 고요함이 낯설어 항상 어떤 소리를 옆에 두고 있어야 안심이 되지는 않습니까? 성당에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에도 세상과 연결하는 손 전화가 울리면 들고 받으러 밖으로 나가니 말입니다. 한 광고 문구가 생각납니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 두셔도 좋습니다."
그 옆에 둬야 할 소리가 자신을 일깨우는 소리라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이들이 문명의 이기인 이어폰을 활용하여 장소 불문하고 기계를 통해 들여오는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너무나 자주 그리고 높은 소리로 듣는 것 때문에 외부의 어지간한 소리는 들리지도 않거니와 들어도 들은 척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까?
꽃이 피고, 식물이 자라며, 과일이 익고, 해가 뜨고 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은 적은 언제 적 이야기이고, 양심의 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입니까?
너무나 바쁘게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 들리는 조언과 충고를 들을 여지도 별로 없고, 때때로 유익한 것이지만 잔소리로 여겨 귓전으로 들어 넘깁니다. 자기 사정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제 말하기에도 부족하여 다른 소리를 아예 듣지 않으려합니다. 심지어 강론도, 주님의 말씀인 성경도,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 할 말만 하면 자리를 털고 일어섭니다.
자기 자신의 소리가 너무 크면 주변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귀를 세우고 "쉿! 조용히!" …, 해야 비로소 주변의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주위에는 주위를 기울이기만 하면, 자신을 일깨우는 많은 도구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자명종이 있고,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가 있으며, 삼강오륜의 정신을 일깨우는 효제도병풍이 있고, 새벽을 알리는 닭이 있습니다. 유치원 꼬마들의 순진한 대답에도 깨우침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지요?' "물이요." "봄이 와요." 마음을 열고 시선을 들면 온갖 것들이 자신의 오래되고 닫힌 곳을 환하게 밝혀 오는 깨우침이 있습니다. 하늘의 천상 소리가 들립니다. 미사와 기도때마다 주님은 내 문을 두드리시고 그 문을 열기만 하면 함께 하시려 하십니다.(참조 묵시 3,20)
대림 둘째 주일을 맞는 오늘의 전례를 통하여 성경 말씀 안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자기 세상에서 나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말씀으로 양육되어 물로 씻기는 회개의 세례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 생명인 성령의 세례로 근본적이 변화 즉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 머물면 …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곱 3,22-25)
[의정부] 광야, 낙타 털옷에 가죽띠, 메뚜기와 들꿀/김규봉 신부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머물며 낙타 털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 정도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요한의 살림살이는 보잘 것 없었습니다. 낙타 털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끼니 정도를 해결하며, 광야를 집 삼아 살았습니다. 단출한 살림살이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외침은 세상에 ‘사자후(獅子吼)’였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부근의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와 세례를 받고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요한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질문해 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사라져 버릴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구하며 살았으니, 그의 말과 행동이 힘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창세기처럼,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을 지어내셨고, 특히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상(模像)으로 지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본떠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안에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고결하심, 선하심과 귀하심이 담겨져 있고,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진실은 ‘존재하는 것 모두가 하느님의 작품이기에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면서 인권주일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인권의 소중함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권리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하느님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그 길에 대해 모색해 보는 한 주간 되시면 좋겠습니다.
[인천] 말씀을 담는 '소리'/박제성 신부
개인적으로 조금 창피한 고백이기도 하지만 나는 음악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이다. 박자 감각과 음감이 없어 어릴 때도 지금도 노래를 잘 못하는 편이다. 사실 부활 때 찾아오는 긴 부활찬송 노래는 나에게 적지 않은 곤혹을 준다(그렇게 긴데도 전례서에는 ‘짧은’부활찬송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더 민망스럽다). 음악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지도 않고, 잘 듣지도 않기에 오디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어떤 오디오가 좋은 오디오인지 어떤 스피커가 좋은 음을 내는 스피커인지 구별하지를 못한다. 그러나 음악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그 소리들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음악 원곡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소리가 왜곡된 소리이고, 어떤 소리가 잡음이고, 어떤 소리가 정확한 음인지를 알 수 있다.
같은 음악을 듣고도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마 그것은 그 음악 안에 들어 있는 많은 내용 즉 정보를 잘 받아들였는가와 그렇지 아니한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소리는 매질을 통한 공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 안에 어떤 정보가 담겨져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소리 이상의 것이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 칭한다. 그러나 요한이 칭한 그 ‘소리’는 단순한 음파의 진동이 아니다. 예수님이라는 ‘말씀’을 담을 그릇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어떠한 위치이고 하느님께 어떤 소명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요한은 모든 유대인들의 존경과 관심을 한꺼번에 받는 그 당시의 소위 슈퍼스타였고 모든 사람이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였지만 그는 겸손하게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말하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를 원하셨다.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의 그 소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온다고 준비하라는 경보로서의 소리였다. 우리는 집 현관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밖을 살펴본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그 소리가 도둑을 알리는 경보음인지 반가운 손님의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오지만 그 소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그 소리의 내용인 말씀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리 안에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잡음이 될 수도 있고, 감동을 주는 음악도 될 수 있으며, 타인을 비방하고 죽이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창조한 그리스도 자체인 말씀(요한 1,1-4 참조)이 담기는 거룩한 소리도 될 수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자신을 봉헌한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말씀을 담는 ‘소리’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하심을 이루는 ‘도구’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하며 다가올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목말라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살아가야 하겠다.
[부산] 마태 3, 1-12./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분의 설교 및 예수님에 대한 예고 말씀 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복음서(11, 7-14)가 전하는 바를 보면, 예수님은 요한을 극찬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도 훌륭한 사람’,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할 여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것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이사야서(40, 3)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자리매김합니다. 오늘 복음에 요한이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은 초기 신앙인들의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요한의 입을 빌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선언하는 것도 같은 의도를 반영하는 언급입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밀씀입니다.
요한은 그 시대 팔레스티나의 세례운동가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다양한 세례운동들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세례운동은 물에 몸을 잠그거나 씻으면서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신심운동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층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율사들은 오로지 율법준수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고집하였습니다.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 의례의 준수만이 오로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그 시대 세례운동가들은 유대교의 기득권층, 율사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요한이 그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말로 시작하여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또 그들에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 앞에 어떤 특권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起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출신지방, 출신가문, 출신학교, 취득한 자격증 등을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모두 기원을 중요하게 보는 우리 마음의 애착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랑하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요한은 그런 기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고 실천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의 삶을 바꾸고 새로운 실천을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삶을 바꾸는 회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다소 위협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하느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 5,45).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호세 2, 16 참조)입니다. 요한의 복장은 구약성서가 전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것입니다(2열왕 1, 8 참조). 요한은 음식도 많이 절제하였습니다. “요한이 와서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사람들이 말한다.”(마태 11, 18)고 복음서는 언급합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살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그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을 아끼는 것이었지만, 그분의 삶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 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살지도 않았고, 특수 복장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시대 유대교가 요구하던 단식에도 충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식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유대인들로부터 지적 받기도 하셨습니다(마르 2, 18 참조).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지도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만 지켜보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벗어나서 성지순례, 혹은 철야기도를 할 때만 우리와 함께 계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자비롭고 그들을 용서할 때, 우리 안에 그 자비와 용서의 원천(源泉)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고, 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지금은 대림절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고행을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자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말합니다. 회개는 새로운 실천을 낳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외면하거나 버렸던 이웃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는 분하거나 억울할 때, 자유를 쉽게 잃어버립니다.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 숨결 따라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실천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일입니다. ◆
[춘천] 생명의 길/오대석 신부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날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그분께서는 몸소 사람이 되셨고, 구원의 길 즉 영원한 생명의 길이 어떤 길인지 당신께서 직접 걸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율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율법이 있는 것이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며, 아무리 큰 죄인도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당신 오른쪽에서 처형당하던 강도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심지어 신이 사람이 되시기까지 하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신학생 시절, 어느 교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기념일이 많은데, 난 개인적으로 그런 날들이 점차적으로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런 날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그런 날들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며 산다는 반증이 될 수 있거든.”제 생각도 그 신부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 현재 그런 모습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은 잘하지만 정작 제 자신부터 바뀌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습니다. 세상이 생명보다는 죽음을 택하고 있으며, 인권은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제 자신은 제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도움 주기를 소홀히 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상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 자비와 사랑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저는 비구원의 상태, 죄에 물들어 있는 신자들의 현실, 영원한 벌에 너무 편중하여 설교한 것은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셨는데, 저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달하는 것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는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셨는데 저는 너무 가르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라는 2독서의 말씀은 당신 먼저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따라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남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것이 곧 복음에서 요한이 말하는 회개이고 생명의 길이 아닐까요?
[군종] 스스로를 낮추는 뉘우침의 세례/유한빈 신부
오늘 제1독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바뀌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가 오면, 늑대와 새끼양이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닌다고 합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이 세상의 질서를 뒤바뀌게 만들고 늑대와 새끼양이 어울리는 이상적인 곳,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양육강식의 이 세상에 모든 이가 공평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이러한 희망은 우리 삶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오실 분을 말했던 그 광야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요한이 자리했던 그 광야에 예수님이 40일간 머무르셨습니다. 우리의 메마르고 건조한 광야 같은 삶에 예수님이 자리하시면 우리 생각과 마음의 질서가 다시금 세워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메마른 유다광야가 메시아의 오심으로 평화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되듯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운 희망으로 넘쳐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세주를 맞이하게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일, 복음은 그것을 죄를 뉘우치는 회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요한이 세례를 베풉니다. 그 세례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례 받은 사람들이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중에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만 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써 이루어진 세례이므로 죄를 용서해주는 세례는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죄의 용서이기보다 마음의 준비를 위한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 그것이 요한이 준 세례이며, 그 세례는 죄의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 자신의 비참하고 부족한 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낮아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의 자세를 취함으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메시아는 값나가는 왕관을 쓰고 오지 않고 겸손하게 작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므로, 그러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려면 스스로 낮아지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가 뭔가 준비해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숙제처럼 오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삶에 기쁨과 희망을 되찾아 주기 위해 건조하고 황량한 광야 같은 삶을 하늘나라로 바꾸어 주기 위해, 상처받은 우리 마음을 따뜻이 위로해 주기 위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시어 우리의 삶으로 몸을 낮추어 오시는 예수님께 스스로를 낮추는 뉘우침의 세례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해야 합니다.
[대구] 세례자 요한이 전하는 인간의 권리/이상해 신부
대림 두 번째 주일이자 인권주일인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 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인권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말합니다. 이 권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것으로, 세상이 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 안에 하느님의 고귀한 생명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의 능력에 속하는 것으로서 우리 마음대로 이 권리를 남에게서 빼앗거나 남에게 넘겨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인권을 무시하는 세상적인 힘과 권력자들로 말미암아 인간이 지닌 권리가 도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학, 자살, 낙태, 살인,약탈, 감금, 억압, 고문, 차별 등의 형태로 인권이 유린당하며,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힘없는 사람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도리어 인권을 억압하는데 급급한 세상입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세속적인 경제논리로 인권을 파괴하는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인권을 억압하고 권력만 탐하는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비수와 같습니다.
자신의 무식함을 무기로 타인의 정당한 행동을 짓밟는 행위들 앞에서, 세상적인 부를 위해 피부가 다르고 말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행동들 앞에서, 외적인 과시를 위해 다른 사람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행동들 앞에서,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 평범한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행위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양심까지 속이려는 행위들 앞에서, 하늘의 심판보다는 세상적인 심판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려는 행동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을 욕되게 만드는 그러한 행위들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목이 터지게 외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고 짓밟으며 하느님의 것을 파괴하는 현장에서 침묵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은 하늘나라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부산] 광야에서 외치다/정승환 신부
대림환에 초가 하나 더 밝혀졌습니다. 초 하나의 밝기만큼 세상도 더 환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오셨고 세말에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은 언제나 설레입니다. 그 설레임은 네 자루의 초가 다 켜졌을 때 온전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벌써 대림 두 번째 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교회는 회개하라고 외치는 예언자를 만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 한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 광야는 유혹의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의 장소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온갖 외적인 허례허식과 소음과 번잡함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광야에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습니다. 주님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기 위한 예언자의 결연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을 먹는 모습에서는 물질의 결핍을 통해 하느님으로 충만해지는 그의 내공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는 그의 겸손은 한 해 동안 세상 일에만 마음을 두었던 우리 자신을 부끄리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회개와 개심을 재촉하는 요한의 외침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메시아께서 당신 말씀의 씨를 뿌릴 수 있도록, 땅을 일구고 흙덩이를 깨는 요한의 사명은 회개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나의 삶을 근원적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전인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회개(**noia)란 본질적으로 궤도를 수정하여 나의 꼴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영혼의 거울을 마주보며 변화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하고 삶의 구체적인 증거가 회개의 열매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로 세례를 받고 진노를 피하려고만 하는 사두가이나 바리사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기에 우리의 근본적인 회개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신비에 초대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전례의 본기도에서도 "세상 일에 얽매이지 말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 지혜를 받아 성자와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세상 일이 아니라 천상의 지혜를 청하는 은혜로운 대림시기를 보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함께 광야로 나아갑시다. 촛불이 네 개 다 켜지기 전에...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도록 저희의 마음과 삶을 새롭게 하소서.
독서
신촌에 살던 쌍둥이 언니가, 갈현동 친정집에 간다는 제 말에 신촌에서 갈현동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집에까지 같이 들어갔다가 혼자 신촌으로 돌아가는 언니를 제가 또 버스 종점까지 두 정거장을 바래다주었습니다. 이런 저희를 보고 누군가는 “너희들 연애하니 ?” 라고 말했습니다. 연애를 하면 그렇게들 하는 모양이지요 ? 길을 함께 나서는 것, 혼자 나에게 다가오도록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같이 가려고 내 편에서 움직이는 것 말입니다.
마태오복음 앞부분은 그런 모습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연애’ 로 보여줍니다. 1 – 2장에서는 먼저 하느님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예수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대를 이은 한 집안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우리의 골목길을 걸어오시어 우리 집 앞까지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서두에서부터, 우리에게 오시는 그 주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고 알려줍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3장에서는 다른 방향의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자신이 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나 길을 나서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부터 언제나 유혹의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의 장소인 광야에 나가 주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맞아 그분을 향해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인간의 대표적 응답입니다. 아니, 요한은 예수님께서 바로 가까이 와 계심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기에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것이라면, 태중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던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마침표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려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 (7절)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그들은 다가올 진노를 피하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직 자신의 안전이었고, 그것을 위해 요한의 세례에 피신하려 합니다. 마치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두고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양심의 편안함을 보장받으려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거짓된 태도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께서 오시면 그들이 과연 회개를 했는지, 곧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것인지를 드러내시리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요구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용서의 복음과 대조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요한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요한한테서는 아직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한보다 훨씬 강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때는 그들의 감추어진 본래 모습이 드러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별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의 한 부분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한테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시는” (12절) 모습을 덮어버리고 보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편한 신앙생활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물로 세례는 받고 진노는 피하려 하면서도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 사두가이나 바리사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찰
신앙은 장신구가 아닙니다. 율법과 규율, 행동과 실천이 신앙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신앙에는 분명 그에 수반되는 요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도 아니고 출발점도 아닙니다. 출발점은 다른 곳에, 인간을 향해 먼저 길을 떠나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연애’ 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응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외형적인 세례나 명목상의 신자 생활이 아닌, 삶의 증거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길을 떠날 것을,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기도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시편 51, 12. 14)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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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개는 새로운 실천을 낳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