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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바룩서의 말씀 1,15ㄴ-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지옥에 가는 이유: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말해 전 세계에서 유명하게 회자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한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가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나이의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도 백작의 딸인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 명의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평생 여기저기를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의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의 삶>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루카 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것이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1코린 4,5)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 18,30.로마 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 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호 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욥기 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주셨다.”
(2열왕 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회개의 삶을 살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회개할 때 자루를 뒤집어쓰고, 재 위에 앉거나 머리에 재를 뿌린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낸 행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이나 비난까지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진심이 담겼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진정한 회개의 삶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행은 죄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를 무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데레사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大路)로 안내하셨습니다>
산 너머 갯바위로 소풍을 갔다가 예쁜 구절초 무리들을 만났습니다.
구절초는 모두 다 똑같은 줄 알았더니 색상도 조금씩 다르더군요.
흰색, 연보라색, 진보라색...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아슬아슬한 절벽 작은 틈 그 사이에도 보란 듯이 자리 잡고 피어난 녀석들의 모습이 눈물겨울 정도로 예뻤습니다.
그 자태가 너무 어여뻐서 연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쁘고 어여쁜 이유 중에 하나가 작음이었습니다.
작은 꽃잎이지만 그 안에 갖출 것 다 갖추었더군요.
피정 센터 산책길에도 번식을 좀 시켜보려고 몇 뿌리 캐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이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작으니 사랑받는구나!’
아마도 이런 공식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분 품에 푹 잠기고 싶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작은 야생화처럼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요?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좁은 길의 성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입니다.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속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해서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聖人)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셨다가 1897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그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짧디짧은 수도생활의 연륜, 그것도 봉쇄수녀원 안에서, 그마저도 지병으로 골골하면서...
도무지 대단한 뭔가를 해낼 조건이 아닌 그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웬걸, 데레사는 자신의 탁월한 봉헌생활을 통해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그 어떤 성인보다 크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빛나는 성덕은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회 수도자였던 그녀를 전 세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겸손, 복음적 단순함,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는 결국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戀人)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하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서(戀書)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작은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그녀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디작은 그녀를 당신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인이 되십시오 -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생활화>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성월에 이어 10월 묵주기도성월, 11월 위령성월 후 주님을 맞이하는 대림시기에 돌입합니다.
그러고 보니 전례력으로 벌써 한 해도 얼마 안 남은 느낌입니다.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끝은 시작이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 80세 고령의 피정중인 수녀님이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본당 신부님이 마지막 주셨다는 조언도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루만 살아라!”
어제와 내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 하루처럼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9월 마지막 날은 성 예로니모의 사제 학자 기념일이었고, 오늘 10월 묵주기도성월 첫날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2017년까지 대축일로 지내다가 2018년부터는 로마 보편 전례력에 따라 기념일로 지냅니다.
교회는 두 분 모두를 학자라 칭합니다.
두 분 성인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성 예로니모가 사막의 선인장 꽃같다면 성년 데레사는 한떨기 장미꽃 같습니다.
성 예로니모가 80년 생애를 사신반면, 성녀 데레사는 고작 24년 생애를 사셨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얼마나’의 햇수가 아니라, ‘어떻게’의 삶의 질인 사랑에 달렸음을 봅니다.
10월 묵주기도성월 첫날에 맞이하는 성녀의 축일은 늘 새로운 감동입니다.
코로나로 성가를 못 부르지만 그 전에 힘차게 불렀던 이문근 신부님 작곡하신 ‘성녀 소화 데레사’ 성가 292장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5절까지 감동적인 가사의 곡이지만 첫절만 소개합니다.
“위대한 사랑의 순교자 데레사여,
사랑의 길 찾아내신 소화여
첫째 기초 열렬한 사랑, 순결한 사랑
많이많이 구하소서, 우리 마음에
주 사랑의 절정에 달하신 데레사여
네 작은 길로 우리들을 이끄소서.”
시간 내어 오늘 꼭 성가 292장 소리 내어 5절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성녀의 1987년 9월30일 마지막날 임종어도 감동입니다.
과연 내 마지막날 내 임종어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한결같이 겸손하고 온유하였으며 꿋꿋하고 위대한 영혼의 성녀였습니다.
성녀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오롯이 바쳤고, 온통 자신을 휘감았던 어둠 가운데서도 순종의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하였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작은길, 작은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룩함의 탐구에서, 성녀는 거룩함에 도달에, 사랑의 표현에 영웅적 행위들이나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는 것이 불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성녀의 고백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행위들로 증명한다.
나는 어떻게 사랑을 보이는가?
위대한 업적들은 나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꽃잎들을 흩어버리는 것들에 의해서다.
이들 꽃잎들은 모든 작은 희생, 작은 눈길과 말들, 그리고 사랑을 위한 가장 작은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자 참 보물은 교회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같은 성인성녀들입니다.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되는, 하느님 계시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성인성녀들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결정적 답이 되는 성인성녀들의 존재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인 보유에 있어 세계 4위에 속합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 안에는 순교영성의, 또 성인의 영적 유전인자인 디엔에이(DNA)가 있음을 믿습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 축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격려하는 성인 축일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저한테 묻는다면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단 하나의 대답일 것입니다.
사실 진실한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의 참 소망은 성인이, 성녀가 되고 싶은 소망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고 하느님도 기뻐하시기에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제 주변에서도 성인처럼, 성녀처럼 사는 분들을 무수히 만나고 만날 때 마다 “성인이 되십시오”, “성녀가 되십시오” 지체없이 말씀드리곤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흡족한 표정을 짓습니다.
어제도 어느 자매가 고백성사 시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 빛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 고백하기에 지체없이 “성녀가 되십시오. 바로 인생의 궁극 목표입니다.”라 격려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을 닮은 꽃처럼 참나의 모양과 크기, 색깔과 향기를 지닌 고유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인이 될 때 참행복, 참부자, 참자유인이요, 누구나의 의무이자 책임이자 권리인 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답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뿐입니다.
기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강론을 쓰는 시간은 저에겐 기도의 시간, 회개의 시간이 되고 주님 사랑을 공부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러니 매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주님을 공부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와 회개가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기도와 회개에 따른 겸손과 온유, 진실과 순수, 자비와 지혜의 선물입니다.
결국 사랑 하나로 요약되는 선물입니다.
더불어 주님이 삶의 목표와 방향이, 삶의 중심과 의미로 더욱 굳건히 자리 잡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성인이 되어 살게 하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사랑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불행하여라!” 라는 불행선언의 대상인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회개의 표징인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는 무지의 병이 깊은. 무디어진 이 세 마을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기도와 회개를 촉구하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아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복음의 세 마을보다 죄 없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들!”
“행복하여라, 끊임없이 회개하는 이들!”
바로 답은 이 둘뿐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알게 모르게 회개의 표징들이 됩니다.
비단 복음의 제자들만 아니라 주변에서 만나는 하나하나를 통해 주님을 만나 회개하게 됩니다.
“너희 말은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형제들의 말을 듣는 회개의 순종이 바로 주님께,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이 없을 때 필연코 죄의 유혹에 끌리게 됩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이웃에 활짝 열린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성인이 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바룩서의 바빌론 유배시 이스라엘을 대표한 바룩의 참회기도는 얼마나 깊고 진실하고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우리의 회개의 기도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참 철저한 참회기도입니다.
무지에서 파생하는 온갖 병과 악과 죄입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은 나의 무지의 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치유되는 무지의 병이자 참나의 실현인 성인이요, 이는 우리의 평생과제요 공부가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시어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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