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옷 25년, 수백만땀 기운 '사랑과 운명''데뷔 50년' 문광자의 무명 사랑 "평양의전에 붙어서 유학을 가게 됐어. 네 어머니와 결혼한 직후였으니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된 게지. 네 어머니가 손바느질해 준 흰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기차에 올랐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그땐 기차가 달릴 때마다 석탄 가루가 눈발처럼 흩날리곤 했어. 그 속에서 실컷 울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보니 새하얗던 옷이 어느새 꾀죄죄해져 있는 거야…." 패션 디자이너 문광자(71)는 어릴 적 전남 보성에서 의사를 지냈던 아버지가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들려줬던 이 얘기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성품이 평생 한결같고 담백했던 아버지였다. 어린 문광자는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했다. '잿빛 눈물 묻은 두루마기라니…. 참말 아름답다!' 어쩌면 그건 운명이었을 것이다. 반평생을 무명옷에 천착해 온 문광자가 지난달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조선대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국제복장에서 수학한 후 고향 광주에 돌아와 '드맹(Demain·내일이라는 뜻)'을 열었던 것이 1967년 9월이다. 문씨는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처음 들여온 문익점의 23대손이기도 하다. 무명은 목화에서 나온다. 지난달 말 광주 한옥호텔 오가헌에서 문씨는 지난 50주년을 집대성하는 쇼를 열었다. 모델들이 무명천으로 지은 여성용 양복 수트, 코트와 재킷, 드레스를 입고 한옥 돌담 옆을 스치듯 걸을 때, 200여명의 관객은 숨을 죽였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명 옷을 본격적으로 지은 건 1992년부터다. 무명천이 손에 닿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거친 듯 묵직했고, 수수한 듯 도도했다. 제대로 짜낸 무명필은 물에 빨수록 빛이 났고 오래 묵어도 짱짱했다.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람,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맨 그 무엇을 만난 기분이었다." 문광자의 무명옷은 완벽한 맞춤옷(haute couture)이다. 때론 드레스를 때론 양복 수트를 한땀 한땀 손으로 깁는다. 한 벌에 몇백만원씩 한다. 당대 멋쟁이들은 그럼에도 문광자 집으로 몰려들었다. 무명옷을 지을수록 욕심이 났다. 흰 무명 외에도 다양한 빛깔이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벌교에 사는 염색 장인 한광석을 만났다. 진달래 가지를 태운 잿물로 물들인 옷감, 퉁대바구니가 넘치도록 가득 따낸 홍화(紅花) 꽃잎 짓이겨 색을 낸 옷감 등을 그렇게 만났다. 2004·2014년에는 '무명'이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우리나라에 무명천을 짜내는 명인이 이제 없다는 건 큰 문제다. 문광자는 "시집 올 때 친정어머니가 짜준 무명필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은 다 만나봤다. 그렇게 집집마다 옷장 속에 묵혀 있던 무명 1000여필을 겨우 구했다. 이것마저 다 쓰고 나면 그때 이후가 참말로 걱정이다"고 했다. 드맹 대표이자 문광자의 딸 이에스더(46)는 "요즘도 무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산다. 보통 70~80년 된 옷감이고 때론 100년씩 됐다는 옷감도 있는데, 우리 무명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삭지 않는다. 빨면 다시 새것이 된다. 나라 차원에서 이 좋은 우리 전통 옷감을 다시 지어낼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쇼 직전 문광자는 관객에게 책자를 하나씩 나눠줬다. 지난 50년 동안 드맹 옷을 옷장 가장 좋은 곳에 모셔놓고 아껴 입어온 '열혈 팬' 65명을 인터뷰하고 이들을 공들여 사진 찍었다. 박계 조선대 음대 교수는 "드맹 옷을 입고 결혼했고 그 이후 공연에서도 드맹 옷만 입었다"고 했고 주부 배정금씨는 "몸이 아프고 힘들 때마다 드맹 옷을 걸어놓고 보기만 해도 기운이 났다"고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은혜씨는 "스무 살이 넘자 어머니가 손을 끌고 가서 제일 처음 맞춰준 옷이 드맹
것이었다"고 했다. [브라보 멋진인생84-3] 디자이너 문광자 (문화를 여는 사람)
게시일: 2015. 10. 13. * 명로진이 만난 사람 "문화를 여는 디자이너 문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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