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다. 어느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라며 경솔하게 행동했다.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십자가를 잘라 주셨는데, 그녀는 꿈속에서 세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강에 걸치고 그것을 다리 삼아 건너가는 것이었다. 자매도 자기의 십자가를 걸치려 했지만 길이가 너무 짧아 걸칠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자매는 꿈에서 깨어나 무거운 십자가를 불평없이 지고 가신 주님을 생각했다.
같은 일이라도 경솔한 사람은 표면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만 신중한 사람은 그 내면에 더 큰 관심을 둔다. 경솔한 사람은 쉽게 결단하지만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짙고, 신중한 사람은 어렵게 결단했다가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른다. 경솔한 사람은 화를 잘내지만 신중한 사람은 뒤늦게 가서야 화를 낸다. 경솔은 늘 우리들 주변에 흩어져 있지만, 신중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이 든다. 경솔이 죽이라면 신중은 밥이며, 경솔이 나무 젓가락이라면 신중은 쇠젓가락이며, 경솔이 알콜이라면 신중은 석유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경솔은 쉬운 것, 빠른 것, 짧은 것, 흔적이 없는 것이지만, 신중은 보다 어렵고, 보다 느리고, 보다 영구하며, 보다 흔적이 남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경솔은 행동적이며 신중은 사고적이다. 골방의 기도가 신중이라면 중언부언은 경솔이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가 신중이라면 나팔을 불며 하는 구제가 경솔이다. 범죄가 경솔의 결과라면 영광은 신중의 결과이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경솔한 사람이 신중한 사람보다 나을 수 있는 우연이 있듯이 너무 신중한 사람이 기회를 놓칠 확률도 높다.
당신에게는 신앙의 경솔함과 신중함 중 어느쪽에 가깝게 서 있으십니까?
신 1:41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성경 : 삼상 16:6, 7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키가 크고 인물이 잘났던 사울 왕이 교만하고 고집이 세서 범죄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이 버리시고 후계자가 될 왕을 골라서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받고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장자 엘리압이 나오자 장자 엘이압이 나오자 장자인데다가 인물이좋고 키가 커서 사무엘이 마음에 들어하며 기름을 부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둘째 아비나답을 지나게 해도 아니하고 하고, 셋째 삼마를 지나게 해도 아니라고 하고, 일곱이 다 지나가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외에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묻자 이새는 신통지 않게 생각하면서 '막내가 하나 남았는데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당장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들에서 양을 치던 막내 아들 다윗을 보였더니 그를 보고 당장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택함을 받게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다윗은 후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중심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 중심이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이 깔보고 부모님까지도 알아주지 않던 목동 다윗이었지만 역대 열왕 중에 가장 훌륭한 왕이 되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겉모양 보다 속마음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 마음을 더 귀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육신의 겉 모양을 보고 그 외모에 의해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은 겉 모양보다 속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첫 인상이 좋고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은 많은 덕을 봅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때도,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낼 때도, 취직을 할 때도 첫 인상과 외모의 작용이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하나님께서는 외모나 겉 모양은 흉하게 못생겼어도 속 마음이 아름다우면 하나님께서는 귀히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모보다 마음의 상태, 심령의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신다는 것은 또한 형식보다 내용을 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는 모습을 보니까 굉장한 까운에다 찬란한 후드를 한 것까지는 좋은데 교활들처럼 가슴에는 커다란 금십자가를 달교 설교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외모를 잘 꾸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 상태로 어떤 내용의 메시지 ㄹ 전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고(요 4:24) 하셨습니다.
요엘 선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하고 타락하여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겉으로만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체하고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는고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화와께로 돌아오라"(요엘 1:23)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겉 모양만 거룩하고 깨끗하게 꾸미고 손에는 썩은 송장같이 죄악이 가득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보고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 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제일 가중히 여기시고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겉 모양보다 속 마음을 보시고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히 보십니다.
2. 결과보다 동기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동기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인정해 줍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행위의 결과보다는 그 동기를 더 살펴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많은 양의 헌금을 드리는 부자보다 그 날이 생활비 전부를 털어 바친 과부의 엽전 두푼을 더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바치는 동기와 정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할 때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서 영광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사람 앞에 나팔을 불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금식을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머리도 빗지 않기 때문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모든 선행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같은 액수의 헌금을 해도 마땅히 바쳐야 할 때 순수하게 바치지 않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 데만 쓴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3. 진실함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즉 마음의 진실함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마음이 진실한가를 보십니다. 겉과 속이 같고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심이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학 박사라도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요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사람은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의 소유자는 거짓말 같은 진리의 말씀이 확실히 믿어지고 위선자나 거짓된 사람은 진리의 성경 말슴이 거짓말처럼 안믿어집니다. 대체로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케 하는 영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늘 진실해야 하고 예리한 양심으로 늘 반성해야 됩니다. 설교도 진실한 심령에서 하면 말 재주가 없어도 사람들의 심령을 움직이지만 진실치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 재주가 좋고 웅변술이 좋아도 사람들의 심령에 와 닿는 것이 없고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그 중심이 진실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 마음 먹은대로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사사 입다는 승전하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먼저 만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한대로 외동딸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원한 것은 헤로울지라도 갚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중심이 진실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신 23:21-23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허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뮈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지니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기로 서원한 것, 즉 약속한 것이나, 마음에 제어하기로 약속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중심에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 충성심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충성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忠자는 가운데 中, 마음 心자요. 誠자는 말씀 言, 이룰 成자 즉 말한대로 이루어 나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충성이란 조석으로 그 사람 감정과 기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변하지 않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계 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엡 6:24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라고 사도 바울은 축원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충성심을 귀중히 보십니다. 때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도 있고 중상모략을 받을 때도 있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면 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게 해 주시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헌금도 중심을 기울여 할 때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기울여 생활함으로써 축복된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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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25:20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아멘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사역의 도구로 쓰임받고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성경의 도구로 쓰임받고 제자양육의 도구로 쓰임받고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깊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