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즉위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이자 영류왕의 아우인 대양(혹은 태양이라고도 한다.)의 맏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642년 음력 10월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큰아버지 영류왕을 시해하고 그를 새 왕으로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구하여 처음으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보장왕이 즉위하자 나라의 모든 권력은 오직 연개소문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보장왕은 이름만 왕일 뿐 일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훗날 고구려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대외 관계
한편, 신라에서는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갔다. 이에 따라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이러한 신라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해 권력을 장악한 일을 빌미로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기뻐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려고 신라와 손을 잡는다.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백제와 손을 잡게 된다. 또한 연개소문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당나라의 침략에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혹 당나라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요동과 서해안 일대의 수군 경비를 강화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를 협공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자기 주인을 죽이고 이웃 나라에 대해 전쟁을 일삼는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라는 명분 아래 출전 준비를 하였다.
당 전쟁
645년 음력 3월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총 30만 병력을 동원하였다. 장량(張亮)이 이끄는 4만 명의 수군은 전함 500척에 타고 비사성으로 향했으며, 나머지 6만 명은 당 태종이 직접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 육로로 진군하였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도 동원되었다.
당 태종의 30만 군대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 고구려의 크고 작은성 10여 개를 함락시키자, 국내성에서도 요동일대를 지원하기 위해 4만의 군대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요동 방어에는 실패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고구려군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에게 고구려와 말갈의 병사 15만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은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다만 군신관계를 맺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서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회유했다. 그러자 고연수는 당 태종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당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 6천 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다. 고구려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군의 급습을 받자 큰 혼란에 빠졌으며,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 명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시성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는 반면 당나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도 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이 토산 작전으로 당나라군은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고 말았다.
당나라군의 패배가 거듭되는 가운데 어느덧 겨울이 다가와 병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해 음력 10월에 퇴각을 서둘렀다. 당나라군은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몰살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당 태종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싸우는 족족 퇴각하였다. 결국 당 태종은 649년 음력 4월에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당나라는 일시적인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마침내 영주 도독 정명진 자위중랑장 소정방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 때문에 당 고종은 659년에 다시금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이 또한 패하고 퇴각하였다.
패망
그 후 당나라는 659년 음력 11월에 설인귀를 앞세워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듬해 음력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하였다. 이 같은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호응하기 위해 당 고종은 4만 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그 해 음력 4월에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나라군이 패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당나라군이 물러가자 연개소문은 뇌음신에게 군사를 내주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하지만 연일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그해 음력 8월에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소정방의 10만 대군을 태운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방효태가 이끈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다.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포위를 풀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십 년간의 전투로 말미암아 국력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또한 당시 고구려의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동생인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다. 이에 연남생은 당나라로 탈출하여 투항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이적, 설필하력, 학처준, 백안륙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7년부터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668년에는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당나라로 끌려갔다. 보장왕이 항복했음에도 남아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죽음
당나라로 압송된 보장왕은 전쟁에 대한 직접 책임이 없다 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무르다가 677년에 “요동도독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82년에 사망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보장왕의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 돌궐의 힐리 가한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