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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5, 不逞鮮人 등의 行動報告 및 軍務部 布告 送付에 關한 件』, 독립신문 대한민국 2년(1920) 2월 14일 1쪽 등 군무부포고 제1호 충용한 대한의 남녀여 혈전의 시(時) 광복의 추(秋)가 래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어다.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철과 피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 혼있고 피있는 대한의 남녀여 선조를 위하여 후손을 위하여 무도한 왜적에게 학살을 당하는 너의 부모 형제 자매를 위하여 최후의 희생을 공(供)할 때가 이때가 아닌가. 신성한 민족인 대한의 남녀여 사천여년의 조국을 일조(一朝)에 도이(島夷)의 야심에 충(充)한 이래로 과거 십년간 가장 가혹한 압박을 수(受)하여도 가장 치욕된 고통을 당하여도 오직 혈루(血淚)를 먹음고 구차히 잔명을 륜생(倫生)함은 피차(彼此) 금일을 대(待)함이 아닌가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여 이천만민족의 의용(義勇)을 합하여 이십세기 금일의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인도를 부르며 나아갈 때에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근심할가 네 앞에 독립이요 내 앞에 자유뿐이로다 그런대 우리의 충용과 우리의 피와 우리의 신성과 우리의 권위로셔 나아가 전(戰)하려면 전(戰)하여 승(勝)하려면 무기(武器)를 말하니보다 자금을 론하니보다 제일의 급무(急務)는 전투의 기초인 군인의 양성과 군대의 편성이다. 이것이 과연 우리의 정당한 요구요 필연(必然)한 사실이요 완전한 자각이라 하면 주저말고 고려말고 하루 바삐 나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며 나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여 이천만 남녀는 일인까지 조직적으로 통일적으로 광복군 되기를 서심려행(誓心勵行)할지어다 대한민국 2년 1월 일 (서력 1920년 1월 일) 군무총장 노백린 |
3•1운동이전에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있었으나, 1919년 3•1운동이후에는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한 개 민족의 염원을 담아 1919년 3월경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는 대한국민의회, 서울에는 한성정부, 1919년 4월경 중국 상해 등에 보다 큰 규모의 임시정부들이 수립되었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한 운동이 있었다.
1919년 9월경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하였다.
러시아령 연해주에 활동하던 이동휘는 여러 개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한다는 차원에서 1919년 11월경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기존의 독립운동가들이 하고 있었던 독립군 양성을 조직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독립군의 근거지는 한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와 연해주였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몸소 확인한 조선인들이 3•1운동이후 자주독립국가 수립의 염원이 침략자를 상대로 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에 상해임시정부의 역할은 상당한 것이었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는 독립군의 러시아 영토내로의 이동을 자신들이 주도하였고, 러시아 영토에서의 독립운동이 상당부분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문창범, 원세훈 등 이르쿠츠크파의 공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알량한 공로를 너무 심하게 과장한 것이며,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인 무장세력이었던 한인 보병자유대대는 독립군 사이에서는 “얼마우재” 부대라 불려지며, 일본군의 전투경험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도 현재까지 확인되는 전과는 없다. 따라서 이르쿠츠크파의 기록을 읽을 때는 상대방을 근거없이 학살범, 아편중독자, 무정부주의자, 강간범 등으로 죄를 덮어 씌우고 자신들의 공적은 높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고 읽어야 한다)
국내와 해외에서 모금된 자금과 3•1운동이후 모여든 수천에서 ~ 수만명에 이르는 독립군들을 바탕으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었고 실제 무장독립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간도,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들은 국경을 넘어 국내의 일제 침략군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군사위원회 경고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22쪽) 경고문(警告文) 구주(歐洲, 유럽)대전의 결과로 세계의 추(趨)는 급전직하의 개(槪)로 변환(變幻)하여 온갖 마력을 휘장(揮張)하던 군국주의는 이미 악운이 진(盡)하고 소양(小羊)같은 약국들은 비로소 귀망(鬼網)을 탈하고 양심적 자유, 평등, 박애의 지상천국을 건설하여서 20세기의 광화(光華)가 되고저 하나니 이는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니 구주 각 소약국이 힘을 합하여 군국주의의 본존(本尊)인 독일을 좌절하고 그 여심(餘心)은 전(轉)하여 군국주의의 괴뢰인 일본을 타파코저하는 전운이 점차로 태평양상에 농결(濃結)함을 보아 족히 증거(證據)하리로다. 아. 아. 이는 상(常?)노 대세의 소추(所趨)이오. 천의의 소사(所使)이니, 무삼 권능 무삼 강력이 능히 이를 저지하며 만집(挽執)하리오. 다만 전일의 강국은 과거의 적악(積惡)을 뉘우쳐서, 그 마심(魔心)을 자계(自誡)하고 낭자(曩者)의 약국(弱國)은 과거의 끽고(喫苦)에 감(鑑)하여 양심적 이상국을 건설하여서 세상에 광영이 되기를 노력치 아니치못할 운명에 제회(際會)하였도다. 이때를 당한 우리들은 각각 다할 바 책임을 생각하라. 이천만 동포가 우리모국에 대하여는 성패간 각 그 책임을 단부(但?負)함은 췌언(贅言)할 바 없거니와 특히 중아(中俄) 양령에 교거(僑居)하는 우리 2백여만의 동포는 이 지귀지위(至貴至危)한 빈기(牝?機)에 제하여 과연 여하한 천직을 다하여야 가히써 조선 백대(祖先 百代)의 위령을 위(慰)하며 자손만년의 복지를 계(啓)할까 생각하라. 아. 아. 2백만의 교류(僑留)하는 동포여 이는 지자(智者)의 언(言)을 대(待)치 아니하여도 동양의 대세와 모국의 형편에 감(鑑)하여 명백하니 즉 국(國)을 실(失)하던 그날부터 선각(先覺)의 사(士)들이 중아(中俄, 중국과 러시아) 양령 동포에 대하여 교육과 군사상 계획으로 그 뇌(腦)와 그 심(心)을 다하던 바 양이(兩?以)가 그 아니뇨. 그러나 이시(伊時)에는 군국주의자들의 악운이 오히려 성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거니와 내금(乃今)엔 세계가 공명(共明?)하고 상천(上天)이 조우(助佑)하사 모국 광복의 최후승리를 기하는 의용군을 마음대로 편성할 호기와 지대(地帶)를 득하고 그 희(喜)를 같이하기 위하여 자(玆)에 장래의 실행사항(實?行事項)을 경포(警佈)하오니 광영 가득한 중아(中俄, 중국과 러시아) 교류동포여 노력할지어다. 2천만 동포여 협력할지어다. 1. OOOO 본위원와의 밀약한 사항 갑. 본 OO세력 범위내에서는 한인군대의 편성을 무제한으로 승인하고 무기, 피복, 식량은 본OO의 능력있는 데까지 무제한으로 공급하며 을. OOO세 범위(勢範圍)에서는 한인군사위원회 이외에는 여하한 단체를 물론하고 군권을 허여치 아니함. 2. 본 위원회에서 현방 상시(常?施?)하는 방침 갑. 사관학교를 OO지(地)에 설하고 제1차로 학생 5백명을 모집함 을. 현방(現方) OOOOO세력범위에 있는 한인군대 및 한인으로 편성된 지방대를 우선 정리통할 함. 단(但) 지방대가 없는 곳에는 수의(隨?宜) 증설함 병. 제1회사관학생이 졸업하는 즉일 위시하야 제일 1사단을 편성함. 정. 제2, 제3 이상의 사단은 사관양성의 원수(員數)를 따라 추차 증설함. 무. 사단편성하기 전이라도 필요와 경우(境遇)을 수(隨)하여 소규모의 군대를 불구하고 출전함 대한민국 3년 1월 일 (서력 1921년 1월 일) 한인군사위원회 위원장 : 이용 동위원 : 채영, 한운룡, 장기영, 박원섭, 박영, 주영섭, 박마트베이, 장도정, 김진 |
자유시(아무르주 스바보드니) 사건에 대한 간도지방 11개 독립운동 단체의 규탄과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반박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시베리아 흑룡주(아무르주) 자유시에 있던 대한혁명군과 이르쿠츠크파 동지간에 자유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사할린 부대•간도독립군 부대에서 수백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백여명 이상의 포로가 되고 투옥되었다.
생존 병력은 이르쿠츠크로 이송하게 되자 (간도지방의 국민회 등 11개 단체로 구성된) 대한혁명군 측이 성토문을 발표하여 비밀리에 조직되었던 고려(혁명)군정의회를 규탄하였다.
그러자 고려혁명군정의회에서도 「고려혁명군정의회 선포문」을 발포(發布)하고는 (사죄 없이) 반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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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間島부터 노령으로 옮긴 不逞鮮人團의 末路에 관한 건』, 朝鮮民族運動年鑑 朝鮮獨立運動 第2卷 民族主義運動篇 등
대한혁명군(大韓革命軍)측의 성토문(번역문)
우리들은 이제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고 동포 각위(各位)에 참혹하고도 비분한 사실을 고하지 않으면 안됨을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것은 즉 금년 6월 로령 흑룡주 자유시(『아레기세프스카야(알렉셰프스크)』이며 정거장(停車場) 소재지)에서 발생한 한인군대의 대참극에 관한 일이다.
이 사실은 한국신문지에 보도된 바 있는데 이는 대단히 비상식적이며 오히려 불가사의하게 생각되는 바이나 이같이 침소봉대하게 과장 선전되었고 참으로 그럴 듯한 사실같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 전말(顚末)을 조사하여 이를 천명(闡明)하기 위하여 실지(實地)에 사람을 보내었는데 이는 우리들의 의혹이 그 사실과 부합하느냐 안느냐를 명백히 하기 위한 취지에서 연유(緣由)되는 것이며
실지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 결과 금년 6월 27일 (※실제로는 6월 28일 상오 밤중에 발생) 황망(荒茫)한 이경(異境)자유시의 원두(原頭)에서 참담한 최후를 마친 자는 가련한 우리 동포 6백여명인데 그중
적탄에 쓰러진 자가 72명,
익사자(溺死者)가 37명,
기병(騎兵)의 추격을 받아 산중에서 힘이 다하여 사망한 자 200여명,
행방불명이 된 자 250여명,
기타 포로가 된 자 917명이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전말(顚末)을 밝히면 금년 3월 자유시 대한의용군총사령부(自由市大韓義勇軍總司令部)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한국이 일본에 병합(倂合)된 이래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선비(士)가 일신(一身)을 바쳐 조국복흥(祖國復興)을 위하여 희생이 되려고 조직한 것이며
그들은 동서간도와 로령 연해주 등지를 근거(根據)로 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대를 양성하는데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간난(艱難) 고초(苦楚)를 맛보며 백방 초지관철(初志 貫徹)에 진췌(盡瘁)한 바 있으나 시기가 미숙한 데다 일본군의 출동으로 다년(多年) 수축(修築)한 근거(根據)를 빼앗기게 되었고 결사적 저항을 취(取)하여 적에 다대한 손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한을 삼키고 다시 재거(再擧)를 도모하기 위하여 피로한 몸을 일으켜 후방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원래 낭중(囊中)에 여유(餘裕)가 없고 사고(四顧)에 인연(人煙)이 끊기었는데 험준(險峻)한 산로(山路)는 인적(人跡) 미도(未到)의 지(地)로 연일(連日) 행군에 의갈(醫渴)할 연적(涓滴)의 청수(淸水)를 얻지 못하였고 또한 주림을 견디어 내어도 한조각의 식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초근목실(草根木實)을 먹으면서 주림을 참았고 탁류(濁流)를 떠서 의갈(醫渴)하면서 겨우 로명(露命)을 이어 부활의 지(地)로 나오려 한 것이므로 그들은 태식(太息)하지 않으려 하여도 불가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대지(大志)를 픔은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시적 고간(苦艱)을 맞나도 위축할 배 아니며 도리어 용기를 고무한 것은 물론 육체의 피로는 더욱 정신을 지려항분(砥礪亢奮)시켜 미래의 대성(大成)으로 향하여 용왕매진(勇徃邁進)하여 반다시 현하(現下)의 대동단결을 하지 않으면 불가하다는 것을 통절히 감득(感得)한 그들이었으므로 의사(意思)를 소통(疏通)하고 성의를 피력하여 다같이 단결의 실(實)을 거둔 것이 즉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이다.
이에 참가한 자는 로령에 있어서는 「사하린」군대 청룡군대 이만리대(伊萬里隊), 중국령에 있어서는 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및 혈성대 등의 단체이며 이 대동 단결의 결과 선정된 참모부원은 홍범도, 안무, 서일(徐一), 조욱(曹昱), 이청천, 이용(李鏞), 채영, 최진동, 오하묵 등 15명이고 실재 병원(兵員)은 3천여명이다.
그들이 계획한 바는 점차 순조(順調)로히 행진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당국 제씨(諸氏)의 덕택이나 또한 일반 한국민족이 촉망(囑望)한 바임은 감히 췌언(贅言)을 요(要)치 않는 바이다. 그러나 선악은 양립할 수 없다.
종래 로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를 전대한국민의회(全大韓國民議會)라 개칭하고 외면(外面)으로는 전한국민족(全韓國民族)의 통치적 명령을 몽상(夢想)하고
그 실(實)은 일부 주민에 대해 가혹(苛酷)한 주구(誅求)를 일삼던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의 혐오(慊惡)할 소위(所爲)는 사리로 보아 정(正)히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들의 백반(百般) 간계와 악모중(惡謀中)에서도 문등(文等. 문창범 등)이 이름을 군자금에 빌려 얻은 수만원을 착복한 사실과 활자구입(活字購入)이라 칭하고 부호 김원서(金元瑞)로부터 사취한 금전으로 그의 일파인 원세훈 등을 북경 또는 상해로 파견한 추사(醜事)가 폭로(暴露)되었으므로 의용군과 일반공중(一般公衆)의 격렬한 분노를 산 것이다.
사욕을 위하여 공(公)을 판 그들은 한인군대를 로군(露軍)의 일부로 하여 편입시킨다는 조건으로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장(東洋秘書部長) 「스마츠」 휘하로 들어가 비밀히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그 의원으로 오하묵 김하석(臨時) 최고려 류동열 및 로인(露人) 1명을 임명한 뒤에 그들은 이러한 비행에 대한 일대협위(一大脅威)인 대한의용군을 그 수중에서 농락(籠絡)하려고 가진 수단을 썼으나 조국복흥(祖國復興)의 대지(大志)를 각성한 그들이 어찌 이러한 공(公)을 팔아 사(私)를 영위하는 비리몰의배(非理沒義輩)에 귀복(歸服)할 리가 있었겠는가.
도리어 그 불법을 널리 알리고 또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 그 자체의 존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함원(含怨)하는 바 있어 로국군(露國軍)에 무고(誣告)하여 대한의용군은 민족적 관념에 집착(執着)한 반혁명의 군(群)이라 칭하고 거기다 일본의 밀정(密偵)이라고 말하며 일즉이 의용군이 간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을 때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의 견장시계 등을 휴대하고 있는 것을 그 증좌(證左)라고 무고(誣告)하였다.
즉 인정(人情) 풍속을 달리하고 또 언어가 통하지 않는 등의 불편이 있는 로군(露軍)에 동족이면서도 이러한 참무(讒誣)를 감히 한 것이다.
그러나 로군(露軍)은 어찌 이러한 사실의 진상을 지실(知悉)할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로군(露軍)은 반혁명이라고 말하면 풍성학루(風聲鶴淚)도 빼놓지 않고 신경과민이 되는 것이므로 로군(露軍)은 곧 장갑차 대포 기관총 등을 가지고 1만여(萬餘)의 대부대로 포위한 후 의용군에 대해 3시간 이내에 전부의 무장해제를 명(命)하였다.
이리하여 의용군은 그들의 진의를 해득(解得)하는 데 고심하고 진퇴에 궁(窮)하여 그 처치방법을 주저하고 있을 즈음 강대한 로군(露軍)의 포격을 받아 일대참극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군(露軍)은 당초 단지 위혁적(威嚇的)으로 고의로 상공을 향하여 발포하였으나 오하묵의 군(軍)은 조준을 정하고 사격한 결과 로군(露軍)측에 있어서는 로국 중대장 1명이 살상한데 불과하였다.
이 교전 경과에 대하여는 대략 추측하기 어렵지 않는 바로서 이 같은 비인도적 참극을 연출한 그들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포로가 된 817명에 대하여 1등에서 4등에 이르는 죄로 처단하였는데
1등에 해당되는 자는 총살,
2등은 전세계가 적화(공산화)하기까지 구금,
3등은 15년 이상의 징역,
4등은 구로(歐露)에서 로동(勞動)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유배하는 등의 혹형(酷刑)에 처하였다.
그리고 또 「이르쿠츠크」에 있던 김철훈, 이정(李檉), 서초(徐超), 남만총(南萬聰, 남만춘), 조훈(曹勳), 오진형(吳鎭珩), 장건상(張建相), 안병찬(安秉瓚) 등은 그들의 비행을 덮기 위하여 반혁명의 죄명으로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애, 장기영, 김동한(나중에 일제밀정으로 변절), 김성우, 김규면, 주영섭, 박원섭, 한운용(한운룡), 안태국, 박상춘, 이노겐지 등 30여명을 무고(誣告) 구금(拘禁)하였다.
이들은 산천이 격절(隔絶)하고 풍속을 달리하는 이역 옥중에서 비통의 눈물을 삼키며 신음하고 있는 바이다.
억(噫) 이 참극에 대해 우리 동포는 무엇이라 말하여 좋겠는가.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부모처자를 버리고 최후 목적을 세우려고 그 목적에 쓰러진 그들 신성한 6백여명의 영령은 단지 사리 사욕을 영위하려는 이민족인 로군(露軍)의 총구에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참극은 공전절후(空前絶後)하며 실로 우리 민족의 일대치욕으로 우리 민족의 절대
(絶大)한 역사적 오점이다. 황망한 자유시 원두(原頭)에서 혹은 적탄에 쓰러지고 혹은 강물에 몸을 던저 익사한 감개(感慨) 많은 최후를 마친 6백여명 의사의 심술(心術)은 과연 여하(如何)하였겠는가.
총구를 견양한 로군장교(露國將校)가 도리어 낙루(落淚)하며 사자(死者)에 대해 후장(厚葬)의 예(禮)를 취(取)하였다 하는데 그 현장의 활지옥적(活地獄的) 참극을 추상하면 우리로 하여금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6백 의사의 영령(英靈)이 우리에게 고할 바는 대체(大體) 무엇이며 이역(異域) 옥리(獄裏)에서 신음(呻吟)하는 수백의 우리 동포가 우리에게 가르키는 바는 대체(大體) 무엇일가.
참극 사실은 대개 이와 같다.
우리 민족을 팔아 사리(私利)를 영위(營爲)한 배덕비도(背德非道)의 문창범, 김철훈, 김하석, 오하묵, 원세훈, 이정(李檉,이병휘,李秉徽), 조훈(曹勳), 남만총(南萬聰, 남만춘 추정), 최고려, 오진형(吳鎭珩), 김응섭(金應燮), 류동열, 서초(徐超), 안병찬(安秉瓚), 장건상, 최의수(崔義洙), 김기룡(金琪龍) 등의 죄악은 인류의 도의를 위해 민족의 대의를 위해 절대 가차(假借)할 수 없는 바이며 이를 절규(絶糾)하는 우리들은 어찌 일점(一點)의 사욕(私慾)이 있겠는가.
응당 우리는 그들의 죄를 규탄하고 징계하는데 고조(鼓噪)하여 철저적(徹底的)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기원 4254년 (서력1921년) 9월 일
국민회 대표 구춘선 이봉우
군비단 대표 이희삼 윤덕보
광복단 대표 김성원 황만실
신민단 대표 김성배 유봉득(劉鳳得)
로농회 대표 조응순 권중선
공의단 대표 심영택 엄준(嚴俊)
태극단 대표 임석우 박대성
농무회 대표 김기형 김직묵(金直黙)
의민단 대표 방우룡 김연원
청년독립단 대표 정태선 장민준
야단 대표 오석영 윤좌형
성토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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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등등 : http://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12_0090
이 만주지방 독립군 단체들의 「이르쿠츠크파와 대한국민의회」에 대한 성토문에 사소한 오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의 문서 등과 거의 일치한다. (※오늘날에도 자유시 사건과 관련된 중국 정부의 기록들은 공개되는 것이 거의 없다.)
독립 운동사에 일제 침략군과의 뚜렷한 전과가 없었던 이르쿠츠크파로 불려졌던 ‘대한국민의회’측에서 독립군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사할린 부대와 간도독립군 부대를 ‘반혁명⦁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무고하여 학살한 것은 오늘날 러시아까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 레닌(Ле́нин)은 무정부주의자 등을 냉혹하게 비판하였고, 일부 볼셰비키들은 무정부주의자를 ‘학살범, 강간범, 강도, 아편중독자’와 동일하게 간주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무정부주의자를 ‘정부와 같은 거대 지배조직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만주지방 독립군 단체들은 자유시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유시 등의 현지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 결과,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원세훈, 문창범 등의 지도를 받던 한인 보병자유대대가 독립군 공격에 가담하여 “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였다.”고 규정하였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 군자금과 동포의 금전을 횡령하고, 이르쿠츠크 일대로 도주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결탁하여 독립군부대를 무고하고 공격에 적극 가담하여 600여명을 학살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또 수백여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 징역형과 강제노동형을 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1921년 9월 30일경의 고려군정의회(이르쿠츠크파)의 반박 선포문과 그들의 문서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김낙현의 수기, 리지택의 수기, 최고려의 수기 등은 역사적 사실을 조작한 경우가 많다. 마치 그럴싸하게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말장난 하듯이 진술하였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기록과 대조하면 명백하게 조작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연해주, 만주 등지에서 일제와 백파에 협조한 적이 있고,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였고,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친일 매국노라고 동포들에게 소문이 나자, 한국인이 적게 사는 이르쿠츠크 일대로 도피해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도 오늘날 밝혀진 러시아측 기록을 보면 상당 부분 사실이다. ※오늘날 자유시 사건과 관련된 이르쿠츠크파의 기록들을 일방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독립군 역사를 조작하는 것에 동참하는 일이 될 수 있다. |
이 성토문이 전파되자 오늘날까지 국내외의 인심은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에게 좋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가 러시아 공산당에 무고해 독립군을 학살했다, 독립군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라는 표현이 나돌았다.
이처럼 11개 독립운동단체의 성토문이 발표되어 이르쿠츠크파의 문창범, 김철훈, 김하석, 오하묵, 원세훈, 이정(李檉,이병휘,李秉徽), 조훈(曹勳), 남만춘, 최고려, 오진연, 김응섭, 류동열, 서초, 안병찬, 장건상, 최의수, 김기룡 등이 ‘매국노 반역도당’으로 규탄받게 되자
1921년 9월 30일경에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선포문’형식으로 이를 반박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不逞鮮人團의 알력』, 朝鮮民族運動年鑑 朝鮮獨立運動 第2卷 民族主義運動篇 등 |
군정의회 선포문 자유시 군변에 대하여 지난 6월 28일날(스무여드랫날)에 자유시에서 군대소동이 있었다함은 신문에 보도와 인편의 전함으로써 누구나 다 들은 소식일지로다. 한데 말이란 전하면 느는 것이오. 실정을 목도한 사람이 아니면 분명히 알 수 없는 바임으로 몇 달 되지 않는 동안에 사실밖에 여러 가지 기괴한 소문이 많이 전하였고 딸아 엇지된 심인지 몰르고 이리저리 당치아닌 추측이 성히 생기게 되었도다. 이 비록 지나간 일이오. 우리 피차의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일반의 오해를 풀고 거짓말의 뿌리를 없이하기 위하여 본 군정의회는 이제 그 군변 나든 전후형편과 진압한 경과를 소상히 적어 무릇 독립혁명운동의 단체나 개인에게 향하야 널리 그 진상의 엇더하엿슴을 알니노라. 자유시와 그 근처에 있든 근대졍형 자유시와 그 부군에는 전년부터 우리의 군대가 있었는 바 그 군대들의 이름과 사람수와 대장은 대개 아래와 같었고 ㄱ. 자유대 000명 오하묵 ㄴ. 사할린대 000명 박일랴(박일니야) ㄷ. 다반 이만대 000명 박그레고리 ㄹ. 간도대 0000명 최진동, 홍범도, 허근, 리청천, 안무 ㅁ. 학생대 00명 채영 (자유대는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조직된 것이오, 사할린대는 니꼴라옙스크로서 올라온 것이오. 다반이만대는 다반이만지방에서, 간도대는 간도로서, 들어간 것이오. 학생대는 군관학생으로 된 것) 각 대 사이에 평일에 연락된 관계로 말하면 다반이만대의 일부가 사할린대와 좀 접근하고 그밧게 각 군대는 대게 사할린대와 서의한즁에 특히 자유대와 사할린대의 감정은 좋지 못하였나니, 처음에 대한국민의회가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부근에서 의용병을 모집하여, 자유대를 편성하고 명의상에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19련대 부속하였으나, 실제 관할을 하여 오든 바, 뒤에 사할린대가 니꼴라옙스크로서 올너오매, 역시 자유대의 일례로 국민의회가 관할하는지라. 사할린대의 대장 대장 박일랴는 이에 불평을 가지고 치타(치따) 한인부(치타 한인부는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박이완 등이 주의 선전한다고 로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총국안에 부처 설한 기관)와 샹해 차함사령 리용(이용) 등과 련락하여, 원동공화국에 청원하여, 각 군대를 제2군단에 부속하되 관할은 한인부가 하기로 하고 박일랴는 군정위원장 김이노껜지는 사령관이 되어왔스나, 자유대는 그 관하를 받지 아님으로 한인부는 다시 원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에이헤)에게 교섭하야, 한인의병대를 모두,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서 직속케하고, 박이완을 사령관으로 로국인 그리골예프로 참모장을 정하고,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오하묵을 치따로 불러간 뒤에 사할린대를 크라스노야로에 옴기고, 자유대에 항하여 복종치 아니면 무장을 해제하겠다 함으로 자유대는 복종한다 선언하였고, 간도대는 대국이 귀졍되기 전에는 중립하겠노라하였스나, 저들은 간도대의 량도를 사흘이나 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복종하기로 하고, 사할린대 있는 곳으로 간 사실 등이 그 원인이러라. 군정의회 조직과 권한 군정의회는 금년 5월 이르쿠츠크에 모인 고려 공산당 창집대회에서 자래, 각 방면의 공연한 규각과 부질없는 분쟁을 일제 타파하고 투철한 각오 아래에서 통일 또는 적극적으로 우리 혁명운동을 진행하기 위하여 류동열, 최고, 까란다리시비리, 세 사람으로 위원을 정하여 조직한 바이니, 그 권한은 우리의 군정일체를 총할할 것이오. 딸아 원동공화국에 관할되었던, 한인의병대는 다넘겨 맛게 된 바이다. 군정의회의 로력과 사할린대의 안된 행동 군정의회는 래력과 포부가 그러한 것인즉 무릇 우리 군대에 대하야는 하로밧비 정신을 모으고 힘을 합할 필요가 있음으로, 자유시에 당도한 뒤에 즉시 각 군대를 향하야 군정의회 조직한 리유와 방침을 알리고, 군대를 속히 자유시에 집합하야 대사를 같이 진행하자고 한 바이라. 이를 위하여 장래를 생각하는 이는 대개 뜻이 같음으로 자유대는 물론이오. 홍범도, 리청천, 안무, 최진동, 채영 등 여러 장교는 혹 홋몸으로 혹 부하를 다리고 자유시에 선후도착하였고, 간도대의 임시 대대장 허근 군도 역시 부하 사백여명을 다리고 오려하였더라. 한데, 유독 자래로 말성만키로 소문난 사할린대의 박일랴 등과 전능효 일패는 아무 리유가 없이 군대의 집합을 반대하고, 뿐 아니라 간도대의 자유시로 오렴을 다소의 세력에 의지하야 강제로 금지하는 등 부당한 행동을 계속하더라. 그러나 군정의회는 완화방침을 취하기로 하고 사령관이 사할린대에 가서 설유한 결과로 그 군대를 자유시에서 8리 되는 수라제프카 촌에 이둔식히고, 인차 장교회의를 열어 지나간 죄를 용서하기로 선고한 뒤, 이틀만에 다시 군사회의를 열고, 자유대와 사할린대의 묵은 감정을 서로 낮기로 권하매 두 군대의 군인들은 다-일시에 만세를 불러 화기융융하엿으며, 또 군인대표회의를 사오차 열고, 여러 사람에게 대제 방침을 다 깨닫도록 중복 설명하였으나, 이상한 심리를 가진 박일야 등은 겉으로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론 여전히 반항하여 온갖 당치 아닌 말로 그 부하의 어리석은 군인을 꾀우고 위협하야 아모쪼록 통일을 히살하고 분요를 일으킬 양으로 괴악한 짓을 다하였나니, 그중에는 소위 장교 셋이 단지동맹하야 최고려, 최진동, 안무, 리청천, 김하석, 홍범도, 오하묵 등 일곱 사람을 죽이고야 복종하자는 혈서까지 만든 일이 있었더라. 하지만 군정의회는 6월 수무이렛날에(27일) 다시 제 6차의 군인회의를 열고 그여히 화평한 가운대서 좋이 정돈할까하야, 여러 가지 리유로 개유하고, 또 권고하여 온갖 방법을 다하노라고 무한한 애를 썼으나, 소동내기로 직책을 삼듯하는 피 등은 기탄 없이 우에 말한 일곱 사람을 다 죽여야 하겠노라고 마구 떠듬으로, 사령관은 이에 일곱 사람의 죽일 죄가 없음과 또 그 같은 악한 생각을 고칠 것이라는 등 말을 하매, 피 등은 발을 구르고 소래를 질러 아주 질서를 물란케 할 뿐 아니라, 폭탄을 사령관에게 던진 자까지 잇어 회의는 전혀 여지없이 파열되고 말엇더라. 무장해제와 변란경과 형세가 이미 이에 이르매 피 등에 대한 방법은 오직 무장을 해제할 외에 다른 방침이 없음으로 군정의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심의한 결과 반동하는 부대와 및 그 세력 밑에 있는 군인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기로 하고, 부근 로군 수비대에 밀령하갸 6월 스무여드렛날(28일) 새벽 세시에 수라제프카에 가서 피 등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한 바 미리부터 소동하기로 준비하고 있든 피 등은 무장해제의 영이 나리매, 듯기는 차치하고 일시에 사격을 시작하여, 완전한 적대행위를 가짐으로, 수비대장은 하는 수 없이 본대로 부득이 하야 퇴군함에 이르럿더라. 이때를 당하야 피 등은 더욱이 기세가 살아, 어찌할 도리가 없음으로 군정의회는 긴급결의로 사령관에게 명하야 군대 전부를 충동케하야, 그 부근을 에위싸고 일변으로 속새포, 장갑포차를 가저다가 놋코, 다시 무장해제를 명하였으나, 피 등은 또 여전히 일제 사격을 시작하야, 도저히 순편히 조쳐할 방책이 없음으로, 오후 두시부터 세길 우를 견우고, 맹열한 시위공격을 더하게 되매, 그제야 변군의 괴수 박일야 등은 형세의 불리함을 알고, 먼저 도망하였고, 석양에 이르러 변란은 전혀 진정되었는데, 이일에 당장에 죽은 자 37명이오. 중상하여 병원에 가서 죽은 자 4명이며, 도망한 자 오십명이오. 항복하고 잡힌 자 9백여명이며, 또 리용 등이 사할린대에 대하여, 어대까지든지 군정회의를 반항하여 충동을 일으키라한 비밀문자가 들어 낫더라. 변군의 처치 잡힌 변군, 9백여명은 전부 검심한 결과 공모주동한 자, 75명이요. 축임받아 협동한 자 4백 5십명이며, 그 나머지는 강제에 못이기어 일시 섞이엇든 자로 대부분이 간도대의 군인인 바, 그 공동한 진술에 의지하건대 『간도군인은 처음일이 날 적부터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극력 반대하였으나, 위험한 강박에 엇지할 수 없어, 앞서게 된 것이오. 동무중에는 싸우지 아니랴하야, 총을 걱구로 쥐고 혹 내바리고 군정의회 군대로 넘어오다가 사할린대의 손에 잘못 죽은 사람이 여럿이오. 대대장 허근씨는 저 사위 안하고 방안에서 나오지 아녔나니, 우리는 실상 아무 죄가 없노라』 함으로 본 군정의회는 주모자 75명만 군사재판에 붙이기로 이르쿠츠크에 실어 보내고, 협동한 자 4백 5십명은 자동이 아니고 남에게 속음임으로, 무장해제한 대로 로동군을 만들고, 그 외는 전부 혁명군에 편입하얐노라. 이리하야 이른바 자유시 군대 소동은 아주 결말된 것이라. 누구든지 우에 쓰인 글을 보면, 진정한 사실을 요연하게 아실줄 믿거니와 이를 공포함에 당하야 본 군정의회는 우리의 장래, 특히 일반의 리해와 각오를 구하고 겸하여 우리의 품은 바 주의와 방침을 아울러 선포하노라. 세상에서 흔이 적화니 무엇이니 하야 평론이 있고, 또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하매 염려 많은 이는 아마 모두가 세계적으로 화하야 고국의 독립에 등한치 아닐까? 혹 로시아의 정쟁에 리용되지나 아닐까? 하리다. 그러나 그는 다 아니할 걱정이니, 첫째 독립과 세계화는 반대되는 것이 아니오. 도리여 일치한 것으로 세계화를 하려면 먼저 독립부터 하여 놓아야 될 까닭이며, 둘째 로시아는 맘말고 우리 힘이 자라기만 할진 대 온세계의 불평과 억울을 바로 잡기 위하야 싸울지니, 엇지 남의 리용하기를 기다리리요마는, 실상 말이지, 현재 우리의 힘이 우리의 혁명 사업을 진행하기에도 쟝-부족한 것이었거니, 어느 겨를에 다른 일에 힘을 들이며, 다른데 힘을 논으리요. 이는 우리뿐의 생각이 아니라, 실정을 아는 우리의 좋은 이웃도, 충분히 량해하는 것이니라. 군정의회는 유일한 목적이 우리나라의 혁명에 있으므로 무릇 일본의, 자본주의, 군국주의의, 강도세력을 우리의 땅에서 전혀 모라내함이 품은 바 주의요. 이 주의를 관철하기에 순전히 무력에 의지하렴이 우리의 방침일뿐이로라. 1921년 9월 30일 고려혁명군졍의회 |
1921년 9월 30일자 (이르쿠츠크파인)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반박 선포문은 간도(간도)지방 독립운동 11개 단체 성토문보다 자유시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와 포로의 수를 고의로 축소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작”이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성명서들을 살펴보았을 때, 사실을 조작한 것은 대체로 이르쿠츠크파와 자유시에서 일방적인 공격에 가담한 자들이다. (※오늘날 한쪽의 주장만을 인용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두개의 대립되는 성토문을 보면, 간도계 11개 독립운동단체들은 오하묵, 최고려,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의 대한국민의회를 학살범•매국노로 규탄하였고 대한국민의회를 대변하며 반박한 것은 고려(혁명)군정의회였다.
고려군정의회와 대한국민의회의 배후는 일명 ‘이르쿠츠크파’로 불려지는 독립운동 조직이며,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단한 인물들이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 조직이 1921년경 비밀리에 (러시아 볼셰비키의 핵심기관인)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와 결탁하여 만든 극동(원동)공화국내의 독립군 최고군정기관이 바로 러시아계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군정의회였다.
고려군정정의회의 반박 선포문이 말하듯이, 이르쿠츠크파가 극동공화국 일대의 독립군 군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 및 간부(박윤천)를 사살하기 위해 “로국 수비대장에게 밀명하였고 결국 기습공격” 하였던 것이다.
간도계 11개 단체의 성토문은 1921년 6월 28일경 수라제프카 학살 당시 현장 부근에 있었던 000선생이 주도하여 작성하였고, 사건이 발생했던 자유시 일대를 방문하여 사망자를 확인 후, 간도지방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만주 도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로부터 노획한 성토문을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의 일제식민지 지배 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일제의 만주•시베리아 침략군, 만주의 친일파 장작림, 러시아 백파 등에 쫓겨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 집결하여, 동족이라고 믿고 절대 조준사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르쿠츠크파와 (중립을 지켜주고 도움을 줄 것을 기대했던) 러시아측에게 학살당한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나,
자유시에서의 참변이라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당시의 사면초가의 어려운 사정상 대놓고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레닌(Ле́нин)의) 볼셰비키 정부를 비판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많은 독립군 단체들에게 이르쿠츠크파 등의 규탄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볼셰비키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이러한 규탄문에조차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