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니 한 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는 이름 이였다.
그의 이름은 “홍맑은샘”
매일매일 반복되는 도장 생활을 하던 중에,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이동에 위치한 바둑도장에 유명인사 홍맑은샘이 왔다.
네 글자의 특이한 이름과, 청바지와 청자켓으로 머릿속에 각인되는 옷차림.
그리고 뇌리에 박히는 막강한 실력.
또래보다 두 뼘 이상 큰 키를 가지고 있었고,
멀리서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도장에서는 1급부터 10급까지 급수가 정해져 있었고,
그 급수에서 A,B,C로 등급을 또 세분화했다.
4급C에서 승률이 65%가 넘으면 4급B 로 올라가는 시스템.
당시 도장에서 1급A~C 레벨은 상위권 프로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샘이형은 오자마자 2급 레벨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바둑도장에서 3~4위권 실력.
그래도 같은 도장이라고, 당시에 5급C 레벨이였던
나와 2점에 20개 정도의 무수한 덤을 받고 몇 판 대국을 했었다.
당시에는 한 살 두 살 터울이면, 하늘 같은 존재라서,
도장 형들의 존재가 무척이나 엄했고, 무서웠다.
당시에 도장내의 체벌과 압박 속에서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도장의 분위기와 형들의 위세에 억눌려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샘이형은 당시 형들과는 달리, 유하고 무척이나 부드러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실력의 격차가 하늘과 땅인지라, 쉽게 친해지지는 못했는데,
당시 점프라는 만화잡지에서, 그림 그리기 공모전을 보고 있는데, 우수상에서
홍맑은비의 이름을 발견했고, 우연치고는 이름이 너무 특이하고 비슷해서
다음날 샘이형에게 이야기했더니, 눈동자가 커지면서 말하더라
자기 동생이라고. ㅎㅎ
도장이 마무리되는 밤 9시에 집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 날도 종종 있었다.
둘이 바둑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줄기차게 게임과 만화 이야기만 했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
당시 초등학생 버스비가 120원 이였는데, 부모님이 간식비 포함해서 매일 1000원 정도를 주셨다.
나는 도장에 가기 전에, 항상 오락실부터 들리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판 두 판 게임을 하다가,
조금 더 게임을 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버스비까지 쓰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마음 한구석에 믿는 구석은, 바로 샘이형이였다.
왕복으로 240원의 버스비가 필요하지만, 120원으로 일단 도장으로 가고 집으로 귀가할 때
샘이형에게 버스비를 빌리는 방법...
너무나 착한 형 이여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그에게, 5~6번 정도 버스비를 빌렸는데,
참 염치도 없지. 아직도 그 귀하디 귀한 돈을 갚지도 않았다.
어느 날인가 본인이 알고 있는 좋은 기원이 있다면서,
주말에 한 번 같이 가자고 해서, 정릉에 위치한 기원을 찾아갔다.
2층인가 3층인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약 80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있었고,
바둑잡지에서 보던 유명한 아마기사들이 많이 보여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구름 같은 인파가 몰리는 바둑은, 샘이형 대국 이였다.
당시에는 정상급 아마기사의 실력이, 연구생 상위조 보다 더 강한 실력 이였고,
샘이형은 기원의 무수한 기객들을 통해서, 기력을 연마한 게 아닌가 싶다.
기원에서 대국을 끝나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샘이형을 차에 태우고, 그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한사코 걸어가겠다는 것을 우리 아빠가 시간이 늦었다면서 그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가는데,
자동차로 올라가기 힘든 좁은 골목이 무수히 많았고, 꽤나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그의 집의 풍경은 어린 나였지만, 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도장에 홀연히 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었다.
당시 도장 수석사범님은 호랑이같이 무서운 분이셨는데, 그날도 평소처럼 각자 개인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범님이 홍맑은샘의 이름을 불렀다.
무엇가를 이야기하더니 언성이 높아졌고, 둘의 대화가 2~3분 정도 이어졌을까?
“그럼 그만두겠습니다” 조용한 도장에서 홍맑은샘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샘이형은 수석 사범님에게 목례를 하고, 도장을 그만두었다.
왜 그가 도장을 그만두었는지,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아픈 기억이기 때문에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그는 신기루처럼 도장에서 사라졌다.
샘이형은 도장을 그만두었지만, 그의 소식은 유명 연예인처럼 하나하나 접하게 되었다.
월간바둑에서 그의 우승 소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실려있었고, 아마10강전과 우승 인터뷰 등 당시에는
월간바둑을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정독하고 있던 나에게 그의 소식은, 친근함 그 이상으로 반가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바둑도장에 계속 다녔지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나이가 차서 연구생을 졸업했다. 당시에는 비좁은 입단 관문 때문에 프로가되지 못하는 이무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의 많아지고, 결속력과 실행력의 키우기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홍맑은샘이 있었고, 그게 바로 청아모의 시작이 되었다.
사설이지만 청아모는 “청년 아마바둑 모임” 의 약자인데 현재 유럽에서 활동 중인
황모씨의 의견에 따라서 발기회 “점점 커지는 모임” 으로 이름을 지을뻔한 큰 위기도 있었다.
다행히도 샘이형의 중재로 겨우 “청아모” 라는 건전한 이름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나이와 바둑실력 그리고 인품으로, 청아모 초대회장으로 홍맑은샘이 지명되었고,
그는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회장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성실히 완수했다고 생각한다.
종묘공원에서 40명이상의 아마추어 기사가 모여서, 대중들에게 길거리 다면기 행사도 하고,
타이젬에서도 각자의 아이디와 명예를 걸고 대국을 하고, 스폰서가 붙는 등
대외적으로 청아모가 가장 활발한 시절이라고 생각된다.
어느날인가 샘이형 아버지를 처음 봤는데, 샘이형과 똑같은 “청청” 패션인지라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흡사 종이에 물감을 반으로 접은, 데칼코마니의 그것과 똑같았다.
비가 조금 오는 날이였는데, 창고에서 바둑돌과 바둑판 그리고 여러 가지 비품들을
용달차 트럭에 같이 실어주면서 이유를 물어보니, 바둑행사를 나가는 날이라고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2003년 2~3월경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A7 초창기 시절이 아닌가 싶다.
샘이형과는 아마대회에서, 몇 번 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
바둑도장에서는 내가 까마득한 하수였지만, 바둑도장과 연구생 짬밥으로
미약하게나마 실력을 쌓았기에,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대국에 임했다.
일단 샘이형이랑 두면 무조건 흑을 잡아야, 양 외목을 당하지 않는다는 패배자들의
절규를 익히 들은적이 있어서, 돌 가릴 때도 많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돌가리기 통해서 내가 백을 잡았고, 말로만 듣던
양 외목을 눈 앞에서 당하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압박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외목은 철저히 비주류의 수법이고,
자신보다 몇 점 하수에게 한바탕 이득을 보기 위해서 두는, 함정수에 가까웠다.
샘이형은 그 다음 수법으로, 날일자로 굳히지도 않고 모양을 키우면서 두는데,
내가 10급의 하수처럼 외목에 걸치는 게 두려워서, 망설이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더 이상 체면이 깎일 수 가 없어서 망설이다가 날일자로 결국 들어갔고,
그 바둑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 이후에는 나도 샘이형에게 몇 번의 승리를 했고, 몇 번의 패배를 했다.
샘이형과의 마지막 대국은, 아마도 나의 기억에 평생 남을 것이다.
나는 삼성화재배 예선을 통과해서 뽑히고, 나름 성적을 조금 내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우리겨례 바둑대회가 생겼는데, 각 조 우승자는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바둑대회에서, 북한사람과 시합을 갖는 엄청난 기회였다.
일단 북한에 간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기에,
나는 열과 성을 다해서 대국에 임했고, 약간의 행운까지 따라서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다름아닌 “홍맑은샘”
그래도 대회에서 몇 번 승리한적이 있어서,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바둑은 시종 미세한 형세로 흘러갔고, 난전에 난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내가 반집을 졌다.
샘이형은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나는 반집으로
평양행 티켓을 놓친 것에,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었는데,
풀이 죽어있는 나를 샘이형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나는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못가니깐 니가 갔다와라”
샘이형의 말을 듣고도 이게 맞는 이야기인가 싶었다.
어차피 자기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면서, “미리 이야기 하면 대국에 지장이 있어서, 얘기를 못했다” 고 이야기했다.
주최측도 샘이형이 의견을 받아드려서, 준우승자인 내가 평양행 티켓을 양도받았다.
참으로 미안하고,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평양 바둑대회는, 조훈현9단 등 각개각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었다.
통일 연수원에서 약 일주일간 북한에서 행동을 교육받았고, 평양에 가기위한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북한에서 룡천역사고가 터지고 남한과 북한의
교류에 문제가 생기더니, 결국 대회는 유야무야 취소되고 말았다.
결국 샘이형은 이 대회를 통해서, 본인의 실력과 미덕 인격 등등 많은 것을 보여준
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중요한 일정” 이였던 일본으로 향했고, 그는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홍도장이 되었다.
첫댓글 그의 제자 이치리키료는 응씨배 우승을 했고, 축하연에서 첫번째로 축사를 담당한 이가 바로 홍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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