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누가복음(16장~18장) 묵상
※.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장)
이 성경은 난해한 구절이다.
언뜻 보면 누가 봐도
도덕적으로 분명히 악한 행위를 했는데
지혜롭다고 칭찬하고 또 신자들도 그
런 점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대개 1-8절과 9-13절을 둘로 나누는데
특별히 8절 한절은 중간에서 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으로 비유는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는 구절은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비유의 내용을 한 마디로
결론 내린 말씀으로 봐야 한다.
비유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단지 설명의 방편으로만 사용한다.
비유를 통해선 무엇보다 화자가 강조하려는 초점을 건져내야하지
비유 자체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해선 안 된다.
단순하고 친밀하며 구체적인 비유임에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는 제자들처럼
듣고 깨닫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는 알아들었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궁극적으로는
천국 비밀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감화로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열린 자는 순수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자들은 완악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당시의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재산을 도맡아서 실제로 투자 운영하는 일까지 맡았다.
주인의 도장도 지니고 있으면서 모든 계약을 주인의 이름으로 맺을 정도였다.
지혜롭고 성실하며 충성된 종을 둔 주인은 오히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며
자식 이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 그런 직분을 맡겼다고 한다.
물론 맡은 권한이 많은 만큼 조금만 마음을 잘못 먹으면
부정을 저지를 소지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도 재산을 도맡아 관리 운용하는
그런 청지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1절)고 한다.
주인이 시킨 대로 한다면 허비를 해도
주인의 잘못이기에 그를 해고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단순히 재산을 운영하여 증식함에 있어서
정세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면
주인에게 이실직고를 했을 것이다.
또 사전에 위험 부담이 있는 계획이었다면
주인과 상의 내지 통보는 했을 것이다. 그
러나 주인이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말이 어찜이뇨”라고 따진 것을 보면
이미 청지기가 자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유용, 횡령, 착복한다는 사실을 주위에선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는 뜻이다.
당연히 주인은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명했다.
관리하던 재산을 전부 공정하게 계산해서 되돌려주고
청지기 직분을 그만두라는 해고 명령이었다.
청지기란 자식보다 더 믿는 자라야 맡기는데 해고할 정도라면
그가 상당한 부정을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
졸지에 해고를 당한 청지기는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육체노동을 할 처지가 안 되고 특별한 기술도 없으며
거지 노릇은 더더욱 할 수 없어서 자기 살길을 궁리했다.
채무자를 일일이 불러서 소지하고 있던 채권증서에서
채권금액을 까주기로 했다.
그럼 신세를 진 채무자들이 자신이 퇴직한 후에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거나, 혹은 그 할인금액을
서로 나눠 먹었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재산과 장부 일체를 되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동안 자기가 허비한, 사실은 착복한 만큼을 감해서
장부상으로도 부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금액을 끼워 맞추는 작업을 했다.
횡령에 대한 물적 증거를 없앤 것이다.
채권증서를 자기가 변조 수정하지 않고
채무자더러 자필로 다시 쓰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주인의 인감도 맡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재산과 장부를 되돌려 받은 주인으로선
시중에 떠도는 루머와 자기 짐작에 따른
심증은 분명 있지만 물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청지기가 지혜 있게 일을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선행이나 업적을 높여주는 칭찬이 아니었다.
분명히 성경도 “이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악한 청지기이지만 자기 앞날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영악하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비유란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명료하게 이해시키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쉽게 말해 신자더러 그런 행동까지
본받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후반부에서 정작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을
이 비유에 비추어서 진지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관점은
오히려 청지기의 잘못을 세밀히 잘 파악하여서
절대 그대로 따르지 말라는 데에 두어야 한다.
주인이 분명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했지 않은가?
예수님이 설마 이런 청지기를 닮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단연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신 뜻이 애매하다.
우선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되는 것 같다.
또 친구를 사귀라고 했으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번 돈이라도 장래를 대비해
주변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이어지는 말씀에 나중에 그 보상으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라고 하니까 더욱 모호해진다.
바로 앞 문장
즉,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으로 내린 말씀부터 다시 보자.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은
불신자와 신자를 대비하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수식어로서
더 지혜로운 요소가 작동되는 영역에 어떤 제한을 두었다.
그럼 어떤 뜻이 되는가?
불신자들이 이 땅에서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법에선
신자들보다 아주 영악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수로 지칭했다.
청지기뿐만 아니라 그의 부정에 기꺼이 동참한
채무자들도 함께 포함시킨 표현이다.
오직 자신들의 안일과 풍요만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살려는 신자들은 청지기와 그 공범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물이란 하나님이 주님의 뜻대로 쓰라고
일시적으로 맡겨주신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번 돈이라고 해도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여건 전부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다.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 땅을 전부로 보는 사상이다.
자기 안일과 풍요만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사랑하여 모으고 자랑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인식이 전혀 없기에
자기 능력이 뛰어나 번 것으로 착각한다.
자기를 위해 이 땅에만 쌓아 놓은 재물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도적과 벌레가 번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 자신의 생명마저 앗아갈지 모른다.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시대가 아닌
하나님의 시대에서” 사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오히려 그곳을 더 목표로 삼아야 한다.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성실하게 모으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한다.
또 재물은 어제 있다가도 내일 없어질 것이며
영원한 것이 절대 되지 못한다.
마땅히 자기 안일과 풍요가 아닌
하나님이 쓰시라고 하는 곳에만 사용해야 한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
이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쓰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불의한 재물이 될 수 있다.
자기 시대만 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의 재물은 불의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시대를 사는 빛의 아들들은
그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여
의로운 재물로 바꿀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비유의 청지기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이해타산에 맞는 상거래를 한 것뿐이다.
서로 진심을 주고받으며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재물을 사용하면 의의 재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청지기인 빛의 아들들에 돈을 맡기신 뜻이다.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자들을
자기 가진 소유를 사용해 성심껏 도우라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는가?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는 당연히 천국이다.
없어질 때라는 표현에는 무엇이 없어지는지 그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재물(의 효능과 의미가)이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생명이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간에 어쨌든 신자가 죽어 천국 갈 때인데
이어지는 말씀과도 뜻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사귄 친구들이 신자를
천국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표현도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선행이 조건이 되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빛의 아들들 즉,
구원 받은 자들이 재물을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에 관해서 가르치는 중이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후로 지녀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신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물론,
정말 당신의 은혜를 아는 참 신자라면
자연히 그런 물질관(物質觀)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물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빛의 아들들에게 정작 가르치고 싶은 내용은 지금부터이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사실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문장이 스스로 나타내는 의미만 살펴도
그런 뜻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16:10).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고 하신다.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다. 참된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2).
지금 예수님이 처음 비유를 들 때부터
지금까지 또 마지막 결론격인 13절에 이르도록 의도적으로
두 가지 사물을 일관되게 대조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한쪽은 남의 것에 충성하는 일인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과 동일하다.
또 그것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의미이다.
청지기는 부정하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외면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를
지혜롭게 사는 방안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하지 못한 실패를 범했던 것이다.
빛의 아들들은 영원한 시대를 살기에
남이 맡긴 지극히 작은 재물에도 당연히 충성해야 한다.
그러면 더 크고 참된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
재물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진
짜 충성해야 할 우리의 것은 따로 있다.
마지막 결론을 보라. 집 하인이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진짜 너희의 것이자, 크고 참된 것이자,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자, 없어지지 않을 것이자,
영원한 처소의 주인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그런 주인으로 확고히 모시고 있는 자에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닌 맡긴 것이며,
그것으로 이웃을 섬겨야 할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재물이 커져 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거나,
하나님을 재물을 얻는데 도움 얻는 종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말하자면 신자는 비유에 나타난 청지기와는
재물에 대한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서 정반대의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이 뜻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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