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시조 권태사 행 신도비(權太師幸神道碑) 권시(權諰)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慶尙北道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산 11번지에 있는 권태사행신도비(權太師幸神道碑)이다. 1661년(현종 2년)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을 얹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신도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비문은 권행의 24대손인 탄옹 권시(權諰)가 짓고, 이경휘(李慶徽)가 글씨를 썼으며, 허목(許穆)이 전액(篆額)을 쓴 것으로, 원문은 권시의 문집인 『탄옹집(炭翁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안동 권씨(權氏)의 시조 권행의 원래 성은 김씨(金氏)였는데, 930년(고려태조 13년) 왕건(王建)이 고창군(古昌郡:경북 안동)에서 견훤(甄萱)을 맞아 싸울 때, 호족이었던 그가 왕건을 도와 크게 승리한 공으로, 왕건이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는 권(權)을 사성(賜姓)하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에 봉하였다. 신도비에는 권행이 공신으로 책봉된 배경과 비의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는 현재 중요 민속자료 183호로 지정되어 있는 능동재사(陵洞齋舍) 왼편에 있으며, 1971년부터 비각(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권태사신도비(權太師神道碑) 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權公神道碑銘 幷序
공의 이름은 행(幸)인데 본래는 김(金)씨이니 신라왕과 동성(同姓)이었다. 신라 말엽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들어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킬 때 고려(高麗) 태조가 구원에 나서 군 북쪽 병산(甁山)에 주둔하여 견훤군과 전투를 할 때 공께서 김·장 양공과 함께 꾀하기를, “우리들은 의리상 견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왕공에게 힘을 보태어 이 역적을 함께 섬멸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하여 드디어 고을 사람들과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얻게 되어 의로운 소리를 크게 떨쳤다.
이에 고려 태조는 기뻐하여 “김행이 미기(微幾)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권도에 능한 사람이라 하겠다.”하며 이어서 권(權)으로 성(姓)을 하사하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봉하고 품계는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 하였다. 돌아가심에 안동부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남향(南向)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인행(仁幸)이니 낭중(郎中)이고, 아들 책(冊)을 낳았다. 책(冊)은 본부의 향리가 되어 몇 세대동안 동안 호장이나 장교가 되었다. 처음에 호걸들이 각 고을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그들을 모두 통합하고 그 땅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 장민자(長民者 백성의 웃어른)를 호장이라 칭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이를 장교(將校)라 하였으며, 중앙의 관원을 보내 감독하였으니 이것이 외리(外吏 외관직)의 효시였다. 그 뒤에 자손이 더욱 번창해져 높은 벼슬아치가 나오고 세상의 흠모가 대대로 이어졌으니 부(府)에 사당을 지어 공을 향사할 때 김공과 장공도 함께 모시되 권씨 후손들이 제사(祭祀) 일을 주관했다.
묘(廟)에는 옥퉁소 · 옥관자 · 조복 · 금대 · 상아홀 · 은 밥그릇 · 시저 · 칠한 잔 · 받침대 등이 있으니 모두 우리 태사공이 사용하시던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700여년을 대대로 전해온 손때가 아직도 완연하다.
성화(成化) 연간에 18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 찾다가 묘 곁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봉문을 가토(加土)하고 표송(標松)을 심었다. 유언에 따라 같은 언덕에 부장하였고 옹의 아들 유(裕) · 작(綽) 등이 비를 세워 표지하였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년)에 22세손 판서 극지(剋智)가 경상감사로 와서 종인들과 모여 제사를 올리고 묘비가 망가진 것을 새 돌로 다시 세웠다.
가정(嘉靖) 임인년(1542년)에 외손 김광철(金光轍)이 부사가 되어 사당터를 넓혀 새로 지었고, 21세손 영의정 철(轍)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제전(祭田)과 묘직(墓直)을 두었다. 병진년(1556년)에 부사(府使) 소(紹)가 제전을 더 사고 곡식 100석을 공급하여 권씨 성을 가진 이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관장케 하여 제수(祭需)에 보태도록 하며 또 묘역을 수축하여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게 했다. 계해년(1563년) 부사 응정(應挺)이 묘정(廟庭)에 비를 세웠으며, 만력(萬曆) 계축년(1623년)에 24세손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관찰사가 되어 사당을 중수하고 춘 · 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최근의 계사년(1653년)에 관찰사 우(堣)가 묘소 아래다 재사(齋舍)를 처음으로 건립하고 몇 집이서 수호케 했다. 기해년(1659년)에 영천(榮川)군수 성원(聖源)이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한 뒤 개연히 말하기를, “자손이 비록 많지만 전에 평창공이 아니시면 뉘라서 태사공의 묘소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겠는가. 당연히 신도비를 세워야 할텐데 비명을 짓고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태사공으로서 비석이 아직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성취하자”고 하니 모두들 쾌히 동조했다.
무릇 후손이 원근(遠近)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이 모두 와서 돌을 다듬을 때에 부사 이연은 곧 나의 외손이라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성원 및 종인(宗人)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하라 위촉했다.
아! 우리 시조가 신라 말 고려 초를 당하여 대의가 드러나고 공열이 탁월함은 사람들이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빛나서 전후로 방백 수령이 성손이 아니면 외손들이라 모두 묘사(廟祀)와 묘소 일에 진력해서 창설하고 보수하며 여기에 사는 후손들이 전곡(錢穀)을 맡아서 제사를 끊임없이 받들며 이제 또 산소 앞에 비석을 세워서 천만년 뒤라도 모두가 태사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또한 가히 적덕(積德)의 갸륵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의 무덤은 제일 위가 태사공이고, 두 번째가 평창공이며, 세 번째는 평창공의 부인 무덤이라 하며, 그 아래에 서애(西厓) 정승 류성룡(柳成龍)의 부친 묘소가 있으니 또한 외손이 된다.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기를,
힘을 자랑하고 절의에 통달하고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었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건졌으니 경사로움이 후인에게 미쳤도다
고려 태조가 성을 하사하고 군을 승격하고 봉하여 내려주셨다네
공덕이 매우 높으시니 어찌 덕을 갚지 않으리까
날아갈듯한 사당이 있어서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나이다
손때가 묻은 유물로 금대와 옥피리가 있도다
누가 제사를 주장하는가 부중에 사는 후손들이라네
교체하여 관장을 삼가 대마다 전해 감을 게을리 말지어다
토지가 있고 곡물이 있으며, 재실이 있고 비석이 있으며
여러분들이 계승하여 창설하고 중수함에 결함이 없어
공덕 새긴 비석을 세우니 또한 더불어 영광되도다
영세토록 상고됨이 있을테니 내가 잡된 말을 한 것이 아니로세.”
24세손 한성부우윤 권시(權諰) 찬
외예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 서
외예 사헌부장령 허목(許穆) 전
숭정(崇禎) 신축년(1661년) 9월 세우다.
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權公神道碑銘 幷序
公諱幸。本金氏。與新羅同姓。羅季與金宣平,張貞弼。守古昌郡。甄萱入羅。君弑國覆。高麗太祖赴救之。屯郡北甁山栅。與萱相持。公與金,張二人謀曰。吾輩義不與萱共戴天。顧力不能報。盍投王公。共滅此賊。遂以郡佐麗祖。有甁山之捷。義聲大振。麗祖喜曰。金幸炳幾達權。可謂能權矣。乃賜姓權。拜大相。陞郡爲安東府。封食邑。位至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卒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坎坐之原。子仁幸。官郞中。生子冊。冊求爲本府吏。數世爲戶長將校。初豪傑割據郡縣。麗祖旣統合。使仍守其地。長民者稱戶長。統兵者稱將校。遣王官監之。此外吏之始也。其後子孫益大以蕃。珪組蟬聯。奕世相望。廟于府以祀公。金公張公。亦與焉。權氏世主祀事。廟有玉笙,玉貫子,朝衣服,金帶,象笏,銀鉢,匙箸,漆杯盂。皆我太師公所服用之物。今七百餘年。世傳之手澤猶宛然。成化間。十八世孫平昌郡守雍。盡誠求之。得誌石於墓傍。爲加封樹。其遺命祔葬同原。雍之子裕,綽等。立碣以表之。萬曆戊子。二十二世判書克智。觀察嶺南。合宗人祭之。墓碣之仆者。買石新之。嘉靖壬寅。外裔金光轍爲府使。卽其廟。闢而新之。二十一世領議政轍爲觀察使。寘祭田守戶。丙辰。府使紹增其田。給穀百石。俾首吏姓權者掌之。以供粢盛。又治兆域而歲一祭之。癸亥。府使應挺。碑于廟。萬曆癸丑。二十四世吉川君盼觀察。重修廟宇。祭春秋以中丁。今癸巳。觀察使堣創齋舍墓下。僦人戶守之。己亥。榮川郡守聖源。禮祠展墓。慨然曰。子孫雖多。向非昌平公。孰知太師墓之在斯。神道早有銘者。何挈蕝之艱。以吾太師公而尙闕顯刻。茲非吾宗人之責乎。盍圖之。僉曰。諾。凡後裔之遠近貴賤咸響臻。卽斲石。府使李侯卽外裔。幹其事。聖源及宗人屬諰記其事。噫。我始祖當羅,麗之際。大義較著。功烈卓然。赫赫在人耳目。名與天壤相敞。而前後爲方伯太守。非姓孫則外裔也。皆盡力于廟祀。若丘墓刱之修之。苗裔之在茲土者。典錢穀奉俎豆不絶。今又立石墓隧。使千萬世後。皆知爲太師公之墓。亦可見積德之盛也。原上之墓第一太師。第二平昌。第三則或稱平昌夫人之葬云。其下西崖柳相公成龍先墓在焉。亦外裔也。遂爲之銘曰。
量力達節。讎報恥雪。仁拯斯民。慶衍後人。麗祖賜姓。陞封錫號。丕視功載。靡德不報。有翼其廟。祀事孔明。手澤傳寶。金帶玉笙。誰其尸之。府中後裔。謹守迭掌。罔墜厥緖。有田有穀。有齋有碣。諸公相繼。刱修罔缺。載樹顯刻。亦與有光。其永有考。余言匪哤。 序文中玉貫子,朝衣服,象笏,銀鉢匙箸。永嘉志云。恭愍王駐本府時所賜。因草記有此誤錄。
二十四世孫 漢城府右尹 權諰 撰
外裔 吏曹參議 李慶徽 書
外裔 司憲府掌令 許穆 篆
崇禎 辛丑 九月 日 立
출처 장달수 한국학 카페
[출처] 안동권씨 시조 권태사 행 신도비(權太師幸神道碑) 권시(權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