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고기 찌개
석야 신웅순
아버지가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오셨다. 일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돼지고기찌개(?)를 끓이셨다. 레시피가 무엇인지 잘 모르나 돼지 고기, 두부가 있었고, 된장 같은 것도 있었던 같다.
어머니는 항상 두 상을 차렸다. 남자들이 겸상하는 밥상, 여자들이 겸상하는 밥상이었다. 남녀유별이었다.
“어, 참 시원하다.”
아버지는 돼지 고기 찌개를 맛있게 잡수였다. 나도 맛있게 먹었다. 뽀글뽀글, 퉁퉁퉁퉁 화덕에서 끓는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다. 그 날 저녁, 뚝배기 돼지 찌개를 평생 잊을 수 없다. 돼지 고기 찌개는 그게 마지막이었던가 싶다. 그 때만해도 우리집은 일꾼도 두고 괜찮게 사는 편이었다.
가계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빚보증이 문제가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나깨나 빚보증에다 송사까지 휘말려 십여년을 시달렸다. 잠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 걱정과 한 숨만 내쉴 뿐이었다. 소득이라곤 농사에서 얻는 알곡 밖에 없었으니 빚감당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거기에다 아이들의 교육비까지 감당해야했다. 한마지기 두마지기 논을 팔기 시작했다. 양계도 해보고 생강, 시금치, 마늘 등을 팔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가마니를 짜 팔기도 했으나 보증빚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리집은 비상이었다. 나오는 데가 농사뿐이었으니 방법은 절약 밖에 없었다.
중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늘 걱정하는 아버지ㆍ어머니의 모습만 내 가슴에 화인처럼 찍혀 있었다. 빚을 갚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첫과제였다. 나는 후딱 교대를 나와 5년 동안 그 빚을 다 갚았다. 갚는 즉시 선생을 그만두었다. 이때부터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주경야독,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보증빚 갚기까지 족히 십오년이 결렸고 결국 대물려 갚게 된 것이다.
그 저녁 돼지 고기 찌개는 우리에겐 행복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나, 우리 가족이 동화처럼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것 같다.
“오늘 저녁 뭣 먹고 싶어?”
“돼지 찌개.”
아내와 나는 이렇게 묻고 대답하곤 한다. 아내가 그리 물을 때마다 그 때 행복했던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나는 것이다. 갈수록 아내는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닮아가고 나는 아버지의 입맛을 닮아갔다.
총각 시절이었다.
교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 있다.
“신 선생, 아내는 전라도 여자 얻어.”
전라도 여자는 남편 공대 잘하고 음식 솜씨가 좋다는 것이다.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나는 전라도 여자와 결혼했다. 지금도 교감 선생님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내의 남편 공대와 음식 솜씨 때문이었던 같다.
이제 그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그 때만해도 여자의 결혼에 세 솜씨를 꼽았다.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 말 솜씨였다. 이 말은 딱 우리 세대까지였다.
“여보, 돼지 찌개는 조금은 털이 달려야 맛이 있어.”
행복의 최후의 만찬이 된, 털이 숭숭 달린 어머니의 돼지 찌개는 이제 내 생애 최고의 음식이 되었다.
-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 2023.3.6.
첫댓글 잠시 머물다 갑니다.
*^^*
감사합니다.
네네
누렇고 질긴 종이에 돼지고기를 둘둘말아 일년에 서너번 들고들어 오셨던 아버지 모습 떠오릅니다.
정말 멋지고 최고의 보물을 찾으시고
인연 맺으심이 보여여 ^^
상시 남편이 하는말 귀에 딱지가 붙을정도 듣던 전라도 여자 최고라 하며 식탁에서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학창시절 돼지고기 찌개가 얼마나 맛이있었는지 동기부여 함에 내일은 돼지고기 찌개로 …
침샘 이 입안에 가득차 공유하고 있습니다. 옛생각 하면서 요~~~~
막있습니다. 지금도 그 향수 때문에 밖에서도 사먹기도 합니다.
어머니에서 아내에게로 이어지는 돼지찌개.그 향수의 맛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