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를 거치며 우리 민족은 숱한 설움을 견디며 굴욕을 당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또한 치욕스런 대우를 받아야했습니다. 현재 일본에 불법 반출되어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만 비공식적으로 1만점이 넘는다고 하죠. 게다가 남아있는 문화재라곤 모두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만약 일본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그 찬란하던 조선의 5대 궁궐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유럽 못지 않은 그야말로 박물관 같은 도시를 자랑했을 겁니다.
전 MB 발언 중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 경복궁과 자금성의 규모를 비교하며 경복궁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자금성... 규모가 엄청나고, 전세계적으로 정말 유명한 궁궐중 하나일 겁니다.그만큼 관광객들도 끊임없고요.
가끔 중국인들이 경복궁을 자금성의 화장실 크기라고 조롱하기도 하는데.. 한때 우리 경복궁은 자금성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했다는 걸 아시는지요. 또한 알다시피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을 비롯해 총 5개였습니다. 이 5개의 규모를 합치면..... 자금성은 비교도 안됩니다.
또한 자금성은 건축단계부터 그 규모로부터 뜨악할만한 '위압감'을 주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금성에 가면 나무 한그루 구경하기 힘들고, 담 또한 굉장할만큼 높은 걸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건축한 궁궐로 건물과 자연의 어울림은 말할 것이 없고 화려한 정원도 장관이죠.. 일제에 의해 훼손된게 이정도인데... 당시엔 어땠을런지요.그래서 대부분 자금성을 남성적인 궁궐로 경복궁을 여성적인 궁궐로 표현합니다. 곧 자금성과 경복궁은 그 성격 자체부터 매우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하다는 것.. 하지만 굳이 규모면으로 자금성과 경복궁을 비교하자면 어떨까요. 일제시대 이전 경복궁의 규모는... 경복궁 그 하나 만으로도 자금성의 규모 75%입니다.
원래 경복궁은 7481칸으로 330동의 건물이 있던 광활한 궁궐이였습니다.
(자금성은 9999칸, 현재는 8천칸이라고 합니다. 9999칸도 뻥튀기란 말이 있지요;; 경복궁 하나 만으로도 자금성 규모의 75%입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조선의 궁궐은 5개였습니다. 이 5개를 합치면 어떻게 될까요? 현재는 일본에 의해 거의다 사라졌지만... 당시로치자면 자금성은 갖다 댈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단 36동의 건물만이 남았고 10분의 1로 궁궐이
극심하게 훼손,원래 크기의 10%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 구한말 경복궁사진으로 높은 담장안으로 수많은 전각들이 꽉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 1918년에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침전이 모두 불타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이 헐리고 창덕궁으로 옮겨감.
경복궁과 창덕궁의 훼손을 위한 일본의 고의적인 화재로 추정됨.
- 1929년 5월에 신무문 북쪽의 융무당과 융문당을 헐어 한강변의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함.
- 1932년 10월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을 일본인들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아넘겨 창고로 사용함.
- 192번지 남산장 별장을 만드는데에 경복궁 건춘문내에 있었던 비현각을 사용.
- 경복궁 동궁 자선당은 오쿠라라는 사람이 구입해서 바로 건물을 해체하고
일본의 자기집으로 가져가 <조선관>이라는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함.
그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자선당은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그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서게됨.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오쿠라호텔의 정원을 꾸미는 돌로 사용함.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호텔 구내 정원 벚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에서
버려져 있는 자선당 주춧돌을 발견함.
결국 우리나라의 요구로 95년 12월 한국으로 반환되지만
이미 상태는 최악이였고 쓸모가 없기에 돌려준 것임.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일본인들에게 판매가 되어 일본인들의 개인저택 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혹시 경복궁에서 절에나 있을 법한 탑과 조각상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교를 섬기는 조선의, 철저히 유교양식으로 지어진 경복궁에 탑과 불교
조각상이 있을리가 없어요.
일제가 전각을 다 허물어버리고 궁궐과 유교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국 각지에 있던 불교문화재들을 경복궁에 옮겨놓아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 유물들로 채워놓은 것입니다.
- 일제는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물산공진회를 치루며 경회루 영역에
휴게실과 미술관을 지었다.
- 자경전 영역에는 수족관과 놀이터를 만들었다.
- 궁궐에는 깔지 않는 무덤에나 깔던 잔디를 경복궁 전체에 깔고,
온돌을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전각들이 거의 헐려 휑한 궁궐과 그 곳을 메운 잔디들, 근정전을 가린 조선총독부건물이 위압적이다
경복궁자리가 명당자리이고 풍수적으로 굉장히 좋은 자리이기에
김영삼 정부에서 총독부를 파괴하기 전에
총독부 밑에 경복궁과 조선의 정기를 막는 말뚝이 박혀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실제 총독부 폭파후 총독부 밑에는 커다란 말뚝들이 박혀있었다
-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1914년에는 이듬해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각들이 무참히 헐려버린다.
- 경복궁 전체를 야외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사정전 뒤쪽으로는 일제가 정원과
공원으로 변모시켰다.
-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장을 만들었으며,
한 나라의 최고 궁궐인 경복궁을 일반인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 일제는 경복궁에서 박람회와 진흥회를 열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조선을 근대화하였다'라는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 경회루 뒤쪽에는 골프장을 만들고 야외극장, 식당, 맥주회사, 은행, 유흥점
따위를 세우려 한 기록이 발견됨.
또한 곳곳에 육교와 지하터널을 만들려는 설계도 역시 발견됨.
경복궁 복원도.
원래의 경복궁의 모습으로 지금의 빈 터나 잔디는 찾아볼수 없고 아름답고 거대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때의 경복궁 내의 남아 있던 건물들이다.
그냥 거의 다 파괴되었다고 보면 된다
현재의 경복궁의 모습이다. 원래의 30%정도 복원 된 상태이다.
★ 구글어스로 봐볼까. 표피적으로 확 다가온다. 얼마나 훼손됐나.
경복궁 복궐도
현재의 경복궁..... 그냥 공터같다 그야말로.ㅠㅠ
경복궁은 2009년까지 전체의 40%를 복원하는 단기복원이 현재 진행 중이다.
유교양식의 궁궐에 보이는 불교양식의 국립민속박물관(20)이 참으로
언발란스하고 흉물스럽다.
궁궐내에 현대건물이 들어서 있고 심지어 주차장도 존재한다.
하루 빨리 정신차리고 복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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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초기의 조선영토와 말기 이조의 황도를 얘기한 것이고요...한반도의 그 유적이 말기 이조(대한제국)의 그 황도와 다르다해서...그게 어찌 만주와 한반도가 쌩뚱맞게도...왜노들의 전통강역이 되는 증거가 되냔 겁니다...어떤 의도적 결론을 이끌기 위해 무리한 대입을 하시는 노력들이 보이신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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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생님께서 대륙조선이라 한 그 나라들이 말기 이조의 강역이라 확정지으시는 자체가 역사 왜곡의 기본이 됩니다...청도 조선의 조대명이다..아묵리카(아메리카)도 조선이라 하시면서...유독 만주와 한반도 한반도는 왜노들 고유 성지라 하시니...
말기 이조(대한제국)를 대조선이라 확정지을려면...그 100만대군이 고종의 100만대군였다면...삽자루 하나씩만 들었어도 왜노들은 막았을 수 있겠습니다...어떤 결론을 미리 만들어놓고...연구를 하시니...다 좋다가 결론에선 무조건 한반도와 만주는 왜여~~왜...란 근거가 너무 희박한 가설만 결론같이 대입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봅니다.
어제 링크거신 글 글엔 틈림없이 그런 정황으로 전개하셨습니다...제 독해력을 유치원생 취급하시니 실망스럽습니다...항 상 이런 식으로 툭 건드려 보고 빠지는 행태들이 당 연구회의 정체를 일반 국민들에게 의심받게하는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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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삼태극이란 카페도...역시나 지선생님같이 뭐 좀 알것같다 허니...자신들이 아예 성급한 결론들을 확정하고...연구 교류하는게 아닌...그냥 이게 진실이니 믿어다란 식의 설익은 모습...일종의 종교단체같은 모습을 보여...탈퇴한지 몇주가 되어 갑니다.
거긴...이조를 너무 폄하하려다 보니...대륙이조를 무조건 없었단 결론 내리고 출발함이 문제고...지선생님과 당 연구회 몇몇 선생님들은...무조선 구한말까지도 이조가 대륙전체를 다 경영한 세계의 천자였고...청도 이조의 조대명이거나...이조의 속국였다 하는 억지가 역사연구를 방해한다 봅니다.
이조가 대륙전체 아메리카까지를 구한말까지 경영했다며..그러면서도 한결같이...고 바로 옆인 만주와 한반도엔 이조의 황도같은 황성이 없으니...만주와 한반도는 왜노들의 고유강역일 것이란 너무도 빈약하고 어설픈 확정은...연구의 목적들이 뭐이셨는지를 의심케하는 모순이라 하겠습니다.
초기 이조...혹은,대조선의 강역은 중원대륙 전체니...당연히 한반도에 황도의 형식인 해자와 정방형 성곽이 없는 것이고...고로 한반도는 그 조선의 영역중 동쪽(동국)영역의 왕성였다 보면 그만인 것을...어찌 한반도가 황도가 아니니...왜노들의 강역였단 결론의 조건이 된답니까...?
그럼...북경의 자금성(경성)은...역력한 해자가 있고 정방형인데...그건 또 왜 왜노들이 만든 셋트장이니...그도역시 왜노들의 고유강역였고...만주까지 모두다 왜노들의 고유강역였었단 엉성한 결론의 조건이 되는 이친지...너무도 실망스럽다 하겠습니다.
어제 글에선...분명히 그리 적으시곤...이건 또 무슨 말씀 이신지 어리둥절 합니다....?
이러니 자꾸 대륙조선사연구회가...왜노들의 대변자들 카페같은 낸세가 난단 의심을 사게되는 이유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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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없으면 왜노가 없었는진 몰라도...천민 해양 잡족들인 왜노들이 없었어도...조선은 건재할 수 밖엔 없었다 보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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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라도 당 연구회분들이 한반도만이 조선의 전체요...울이 조선의 황도라 했던가요...?...대체적인 주장이 조선의 동쪽 도시일 거라 했지 않았나여,,,?
네.저도 한반도 해안엔 왜노들이 살았었다 봅니다...그 흔적이 한반도 여타 유적관 좀 다른 왜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온 대륙 해안가에서 기생하던 천민집단이기에...당연히 한반도 해안에도 있었던 천민들인것을...그걸 한반도와 만주...더 나가 청나라 자체가 왜노들의 왕국였다 대입하는 것은...엄청난 비약이요...결과적으론 역사왜곡이란 점을 짚어 드리는 겁니다.
한반도는 조선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다고 여겨지며 고려말기 이씨조선 변천기에 조선을 거부 내지는 감지 못한 고려인들이 지속적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고 생각되는데 조선중앙조정(명과 청)에서는 그 사실을 적정선에서 허용하며 관리했으리라 봅니다. 제 좁은 소견입니다.홍선생님 수고가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