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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비운 모양이네.”
“어떡하지? 어떡해.”
모두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수동이가 창문을 열고 옆집 창문을 밀어 보니 다행히 잠기지 않아서 양쪽 창문을 열고 겁도 없이 넘어 들어가 보니 휴지통에서 영기가 나는데 답배꽁초에서 휴지와 기저귀로 불이 옮겨 붙어서 막 불꽃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복도로 들어내어 물을 부어서 끄고 문을 닫고 나왔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영등포 시장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구로공단 까지 출퇴근을 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다 수동이는 나도 한번 옷을 만들어 팔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겨울이 다가와서 남은 방 하나에 6게이지 횡편기를 사다가 기계를 설치하고 아크릴 36수를 사다가 제품을 만들려고 짜는데 기계가 말썽 이어서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영린을 불러서 손을 보았다. 그라인더로 횡편기 코를 형성할 때 눌러 주는 부분을 갈아서 해결해 두었다.
그렇게 우여 곡절 끝에 생산을 했으나 수동이의 꿈에 지나지 않아서 밤마다 잠을 못 이루며 부성을 하다가 다 팔아 치우고 다시 중부시장에 환편기와 횡편기 부속과 바늘을 파는 삼남상사에 들렸더니 성수동에 환편기를 만드는 아성공업사에서 부설로 아성섬유를 만들었다고 그리로 가보라고 하여서 취직을 해서 다니는데, 거리는 얼마 안 되어도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다여야 했다.
홍파초등학교 앞에서 왕십리까지 시에서 운영하는 121번 시영버스를 타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차장이 문을 못 닫고 매달려서 다음 정거장인 경동시장이 지나야 문을 닫고 갈수가 있었다.
어느 날 내려서 보니 주머니에 넣고 온 차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성동경찰서 앞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에게 부탁해서 지나가는 화물을 빌려 타고 출근을 한 적도 있었다.
아성공업사 송동환 사장은 머리가 좋아 직접 기계 설계를 하고 섬유공장을 지었는데 건축설계도 직접 했다고 했다.
최신기계 들로 삼경물산에서 보았던 외국산 기계처럼 만들었고 거기에 일정하게 실을 당겨서 공급해주는 로러에 바늘이 올라와서 실을 걸고 내려가기 전까지 바늘의 혀가 닫히지 않도록 하는 솔의 역할을 쇠로 만든 사도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위판에 이상이 생기면 위판 전체를 들어내어 야 했지만 위판도 팔 등분을 해서 부분수리가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숭인동에서 쓰던 기계와는 딴판 이였다.
그리고 자카드 32인치에는 48개의 실이 들어가는데, 판도 나물을 담는 접시만 하게 작았다.
그리고 실을 먹는 것을(실이 윗 바늘과 아래 바늘이 교대로 먹어야 코가 빠지지 않는다)일치 시키는 것을 믿판 에 붙어있는 각각의 장치가 좌 우로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숭인동에서는 코가 빠지는 불량률이 높았는데 알고 보면 아래 판이 고정되어 있어서 조정이 불가능 하고 조정은 그라인다로 갈아서 했기에 정확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력(삼상전기)이 들어와 있는데 모터에 세 가닥 의 전선이 들어와 있는데 두선만 바꾸면 모터의 회전 방향이 바뀌었고 세 선중 하나만 퓨즈가 나가도 모터가 돌지를 않는데 그때 모터를 약간만 돌려주기 시작하면 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근무자는 주간에는 기계를 계속 손을 보고 해서 9명에서 모회사인 아성공업사에서 파견 나온 사람까지 합치면 13명 까지 되었다.
식당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검단을 배우는 아가씨 한명과 검단사 두 명이 같이 점심 식사준비를 하는데 김치나 밑반찬은 사장부인이 몇 칠에 한 번씩 가지고 왔다.
일주일이 지나고 야간 근무에 들어가서 보니 야간근무자는 4명 이였는데, 야간에 라면을 끓여서 먹는데 사장 친척인 송명호 라는 아이는 매운 것을 잘 먹지를 못했고 파도 골라내었다.
우리는 작당을 해서 가끔씩 쌀을 퍼 다가 밥을 해서 라면에 말아 먹었고 이튿날 저녁때 출근을 하면 검단사들 한태 한마디 잔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기계제작소의 시험실 같은 곳 이여서, 원단을 짜지만 계속 기계의 성능을 보러 사장이 매일 와서 고처야 할 부분을 개량 되어야 할 부분에 대하여 기사 이은호와 부기사 한 명과 제작소에서 나온 기사 한 명과 토론이 많았고, 가끔 사장부인도 다섯 살 정도의 딸을 데리고 원단을 검사하는 곳에 들르곤 했는데, 어린 딸에게 고전무용을 가르쳐서 춤을 추면서 눈으로 손끝을 보면서 어께를 들썩이며 귀엽게 춤을 추어 참 예쁘게 춤을 춘다고 하니 아저씨 와서 보라고 하면서 불러서 몇 번 다시 보아야 했다.
수동이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빠르지 못했다.
일이 끝날 시간이 되어서 바닥청소를 하면 자기가 보는 주의만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위 까지 청소를 해주고 하니 처음에는 성실한 사람으로 보다가 나중에는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사무실에 송사장의 친구인 김계현 이라는 예비역 소령을 지낸 친구가 용돈이나 얻어 쓰면서 관리과장으로 와 있었고 야간 경비는 장세동이라고 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장세동은 수동이와 다를 조에 속해 있었다.
그날은 장세동이가 주간근무를 하고 저녁에 관리과장과 세동이 아버지 그리고 세동이가 사무실에서 중국집에서 요리를 시켜먹고 있었는데 열시가 넘어서 관리과장이 수동이를 불러서 가보니 세동 아버지는 취했는지 보이지 않고 세동이가 술을 먹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체했는지 사무실 바닥에 토해 놓았는데 그걸 수동이 보고 치우라고 했다.
수동이가 빗자루를 들고 들어가 쓰레받기에 쓸어 담아다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닦아내고 다시 마포 걸레로 사무실 바닥을 훔쳐냈다.
그 일이 있고서 동료 한명이 병신 조합장이라고 놀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관리 과장을 한 달 쯤 있다가 할 일이 없자 스스로 그만두었다.
하긴 아무리 친구라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려니 눈치가 보였고. 그리고 한양대 섬유과를 나온 윤영세 라는 사람이 입사를 했는데 이 사람이 실무를 보면서 패턴 디자인 까지 하니 허수아비에 불과해 그만 둔 것이었다.
세동이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세태가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은 윤정이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윤정이 아버지 부부가 돌아왔는데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아가씨가 연탄가스를 마셨는지 문을 안만 두드려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부엌문으로 들여다보니 연탄아궁이에서는 시퍼런 불이 두꺼비집 사이로 날름거리며 구들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서 더 불안하게 하였다.
할 수 없이 수동이가 다시 창문을 통해 들어가서 문을 열어 주었는데 아가씨는 잠이 깊이 들어서 그 난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71년 11월 27일 날씨가 별안간 추어지고 이튿날 인수봉에서 조난사고 보도되었다.
재덕을 비롯한 하루 벌어 하루를 먹는 사람들에게는 남의 나라이야기처럼 ‘먹고 할 지랄이 없어서 산에 기어 올라갔다가 죽어.’ 하면서 혀를 찾다.
그러가 하면 그해가 저물어 갈 무렵 대연각 호텔화제 사건 12월 25일 10시쯤부터 TV로 생중계 되어서 만화가계에서 서너 시간을 보았다.
그렇게 그해가 가고 봄이 되었다.
정순이가 재덕에게 제안을 해서 수동이는 다락을 깨끗이 치우고 다락에서 자게하고 옆방을 수정이네 에게 십오만 원에 전세를 놓았다.
그리고 보리타작을 다니는 만석이 정순에게 그 돈을 물막골 성기를 빌려주면 보리 터는 기계를 사서 이자로 보리 터는 삯으로 나온 보리쌀을 다섯 가마를 준다고 하면서 돈을 빌려 주자고 하였다.
그리고 올 가을에 원금도 갚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정순이 재덕에게 이야기를 하자 재덕은
“글쎄 괜찮을 까?”
“올 가을에 갚는다고 했어요.”
“그냥 은행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줘 봐요.”
미심적은 생각이 들었지만
“알았어.”
하고 반 동의를 했다.
차라리 그때 전세를 끼고 서민 아파트를 샀으면 나았을 걸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동이는 집안 경제에 아무런 조언도 대화도 없이 그저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방이 한 칸으로 줄어들고 출퇴근 하는 버스비도 아까워 차라리 먹고 자고 하는 곳에서 다니는 것이 낳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아성공업사 부설 아성섬유는 그동안 임직을 해주던 영일상사에 팔렸다.
그리고 수동이는 먹여주고 잠까지 재워준다는 망원동 대일섬유라는 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게 수동이도 편하고 정순도 편했다.
때 되면 밥 차려 주어야지 어디 나가도 눈치를 보아야지 하니 수동이가 직장을 옮기니 제일 좋은 사람은 정순이었다.
거기는 동대문 시장에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면서 공장을 운영하는 최사장이 운영하는 공장이었다.
그곳에는 사장 족하가 둘이 있었는데 큰 조카 재호는 시장에서 점원 일을 작은 조카 재한이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수동이와 세진이가 일주일씩 교대근무를 하고 사장의 작은 조카는 낮에 원단의 입출고 등을 권장하면서 주로 야간 근무 보조를 하고 기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가를 들어서 아이까지 있는 사람인데 주간에 기계 고장부분을 손봐주며 주간근무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감시자가 둘이고 기사라는 사람은 조카 재한이의 비위를 작 맞춰가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동네인 시골에서 올라온 큰 재호의 친구 여동생으로 복순 이라는 여자 아이가 검단사(원단을 불이 켜진 유리도 된 틀에다 비처가면서 하네 나 펑크가 난 것을 때우고 흠이 크면 원단을 잘라내고 바늘이 부러진 것을 모르고 짠 경우 그곳을 타개서 말아서 가공공장(염색)(나염) (세팅)하기 좋게 손보는)기술을 배우기 위해 보조를 하는 일을 하면서 공장 식구들의 식사를 해 주고 있었다.
검단사는 아성에서 검단사 일을 하면서 기사와 염문이 있었던 여자였는데 기사와 살림을 하는지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낮 근무자는 검단사가 퇴근한 검단실에서 자고 야간 근무자는 검단보조 복순이에게 방을 하나 얻어 주었는데 거기서 자고 저녁을 먹고 교대를 했다.
그러니까 복순이 나이는 사장의 큰 조카가 수동이와 동갑이고 그의 친구 동생이니 아마 두세 살 아래로 추정이 되었다.
그리고 기사가 그랬는지 아니면 조카가 그랬는지 매번 복순이가 환편기가 돌아가는 공장으로 밥을 해 날랐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검단실에서 해먹는 게 나은데 50m쯤 떨어진 곳에서 해 가지고 와서는.
“느림보, 느림보.”
하면서 셔터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오빠 하면서 불렀어도 되었으련만 하긴 수동이가 그렇게 불릴 만큼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사장의 작은 조카에게는 오빠라고 하는 걸 보니 아마 나이가 세 살을 어렸나 보다.
밥 쟁반을 받아다 공장 가운데 놓고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세 사람이 식사를 했다.
어떻게 된 게 밥 먹는 시간 까지도 기계를 돌렸다.
그리고 복순이의 친구라며 공장안을 들여다보고 갔는데 돼지고기 찌개가 나와서 오늘은 웬일로 고기가 나왔냐고 하자 그 여자에가 수동이를 소개시켜 다라고 하면서 사주었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세진이가 와 잘해 봐 했지만, 재덕은 연애결혼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들어서. 수동이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 아가씨 성질도 급하지 서서히 접근 했으면 놀라서 도망을 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대놓고 사귀자니 단번에 거절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수동이에게는 징병검사 통지서가 나와서 의정부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보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고. 1을종 을 받았고 이대 독자로 3급을 받아서 보충역으로 방위를 받아도 육 개월만 근무를 하면 된다고 했다.
군에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천주교 성지인 절두산에 한 번 가본 적도 있었다.
그해 여름인 1972년 8월에는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교)가 넘쳐서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해서 구경을 나가보기도 했는데 다리 아래 까지 찰랑찰랑 하게 물이 흘러갔다.
한강수위가 11.24m에 달한 것으로 기록했다.
이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12.26m) 이후 가장 큰 물난리로 이로 인해 중부 지방에서는 1,607명의 인명과 7만 2,900동의 가옥 피해 및 당시 약 178억 원의 재산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면목동 둑 아래 살던 영동이를 비롯한 창진이 옥자의 시집식구들 그리고 돼지를 기르며 가계를 보던 재봉이 집까지 모두 물에 잠겨서 모두 조금 높은 재운의 집으로 피신을 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물이 빠진 다음에 가서 옷가지를 꺼내 말리고 씻어내고 난리를 피웠는데 다행이 시멘불럭으로 지은 집이라 떠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월곡아파트에 앞 도로가 유실 되어 한 동안 버스가 다니지 못했다.
그래도 어김없이 시간은 가고 추석 다음날 정자는 물골안에 갔다 와서 아침을 먹다가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 있잖아 정호를 도림개말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았는데, 꾀죄죄 해가지고 돌아다니는 걸 보았는데 아마 누가 챙겨주는 사람도 없나봐.”
“그래.”
“정말 안 됐더라고.”
“그러기에 집안에는 여자가 있어야 해, 지난번 벌초 가서 만났는데. 차학서가 그놈의 여편네 만나면 죽여 버린다고 이를 갈면서 벼르고 있더라고.”
순간 정순이 뜨끔했지만 그렇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정호는 사춘기에 버림받은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몇 칠 후 정호 엄마는 하얀 소복에 머리에는 흰 리본을 꽂고 정순을 찾아왔다.
“아니 정호 엄마 어쩐 일이예요.”
“글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개가 해간 집 서방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전실 자식들이 잘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영감님이 죽고 나서 갑갑해서 들렸어요.”
그리고 그간 물골안 정호의 소식을 들을까 하여 온 모양이었다.
그간에 이야기를 들은 정호 엄마는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얼마 후 10동에서 복덕방을 하는 신광옥이 정순에게 아파트를 사라고 했다. 오십칠만 원을 달라는데, 오십오만 원으로 깎아 볼 테니 정순에게 사라고 했고 재덕은 빚을 얻어서는 안산다고 했으나, 정순이 가만히 예산을 세워보니 지금 전세금이 삼십만 원이 있으니 그동안 수동이가 은행에 모아 놓은 오만 원 하고 옆방을 십칠만 원에 세를 놓으면, 그럭저럭 삼사만 원만 꾸어서 대면 다섯 달 안에 빚을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오십오만 원에 수동이 이름으로 계약을 했다.
그리고 쉬는 날 집으로 온 수동이에게
“우리 집 사기로 했다.”
면서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이는 다분히 네가 나머지를 갚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수동이는 월급을 받으면 즉시 정순에게 주어서 정순이 관리를 하고 있으니 전혀 개의치 않으니 별 의미는 없으나 내가 너를 진정한 아들로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정순은 급히 물골안 성기에게 돈을 받으러 갔으나 성기의 이야기는 돈은 없고 기계를 헐값이라도 팔려고 내놨는데, 요즈음엔 보리뿐 아니라 벼까지 털며 경운기에 실고 다니며 경운기로 돌리는 새 기계가 나와서 발등기로 돌리는 기계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언제 팔릴지 모른다는 것 이었다.
“닷새 뒤에 다시 올게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막막했다.
‘괜히 했어 괜히 돈을 꾸어주었어. 괜히 앉아서 꾸어주고 서서 받으러 다니게 되었어.’
지난여름 보리쌀 두 가마 받아다 먹은 것이 전부인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을 했지만 다시 가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골안을 몇 번 다시 갔었으나 못 받고 매번 빈손으로 돌아올 수 밖 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재덕과 정순의 말다툼이 잦아졌다.
“그래 성기 그 자식은 언제 돈을 해준데.”
“조그만 기다려 달라고 하네요.”
“벌써 몇 번이나 갔다 온 거야. 이 자식을 가서 그냥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든지. 에이 시.”
그동안 상동이를 잃고 공동의 적인 양묵과 갈등이 끝나고 재덕이 원하던 질곡의 땅을 벗어나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왔는데 다시 다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지 말자고 했잖아. 까짓 보리쌀 조금 얻어다 먹자고 그 짓을 해가지고 길거리에 뿌리는 돈이 더 많겠다.”
정순이 가만이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당신은 안 되면 내 탓이에요. 남들처럼 돈 잘 벌어다 주면 내가 왜 신경을 써요.”
하면서 재덕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놈의 여편네가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짝’ 손이 올라가 정순의 뺨을 때렸다.
“또 시작이지 또 시작이야 그동안 뭘 잘해 준적이 있다고 또 때려.”
이제 정순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면서 대들었다.
“호강 한 번 제대로 못 시켜 중 망정 때리긴 왜 때려, 차라리 죽여라 죽여.”
하면서 얼굴을 들이밀며 덤벼들었다.
“이 년이 미쳤나.”
하면서 재덕이 정순을 밀어버렸는데 밀려서 떨어진 곳이 구석에 있는 쌀통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아이고.”
정순이 엉금엉금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혈이 있었고, 정순이 아랫배에 있는 힘을 다해서 아홉 달이 다된 사내아이를 낳았으나 이미 사산이었다.
땅을 치고 후회를 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였다.
재덕은 떨리는 손으로 죽은 아이와 태반을 비닐에 싸서 라면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물골안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서 상동이를 묻은 자리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정순은 지질이도 아들 복이 없는지, 몸 도 마음도 아파서 일주일 넘게 알아 누어야 했다.
어찌 되었거나 계약된 날짜가 다가오고 말았고 동내 복덕방들은 난리가 났다.
재덕이 이사를 하게 되면서 줄줄이 역이여 이사하는 집이 열세 집이나 되어서 모조리 깨어지게 생기고 크게 싸움이 나게 생기자 복덕방 서너 군데가 난리가 났다.
이 복덕방 저 복덕방 할 것 없이 모두 동분서주 한 끝에 복덕방 광옥이 쌀가게에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삼십칠 만원을 빌려다 집값을 지불하게 해서 이사를 하고 곧바로 독채 삼십오만 원에 전세를 놓기로 계약을 했다.
그렇게 재덕만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월17일 이른바 시월 유신이 시작 되었다.
수동이가 투표장에 나가보니 복덕방 영감 신광옥이 참관인 석에 앉아서 반겨 주었지만 기표소에 들려서 기표를 하고 보이지 않게 돌돌 말아서 투표함에 넣고 나왔다.
면목동 에서는 강제 철거가 시작되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영동이와 재봉이는 삼양동, 재운이는 공릉동, 창진이와 그의 아버지는 면목동으로 각각 세를 얻어서 나갔다.
그리고 양묵의 대상 날이 되어서 재순부부는 아들 영호를 안고 오고 재천 부부를 포함해 재천의 손자 준석이와 아들 인동이는 왔지만 정작 종손인 경동이는 오지 않았다.
영동이와 재운 부부도 와서 방 두 칸에서 간신히 저녁에 대상을 치루고 삼년 동안 두었던 굴건제복 중 짚 부분만 다로 떼어내 소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모두 돌아가고 보증금 이만 원에 월 사천 원씩 주기로 하고 버스 종점 앞에 방 하나를 얻어서 사흘 후 이사를 했다.
그 집 화장실은 하수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집 주인이 하수도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화장실을 지어서 변이 바로 물로 떨어져서 똥냄새는 안 났지만 하수도 냄새는 심했다
그리고 그 때는 하수관이 오수관 우수관이 따로 없어 그대로 정능천으로 나가서 물은 마르지 않고 흘렀으나 지저분하고 하천변에서는 냄새가 심하고 하천에서는 생물체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재덕은 술에 취해
“성기 이자식이 내 돈을 떼먹어 잉 잉잉.”
하면서 머리로 방바닥을 들이받으며 울었다.
수동이는
“아버지 일 년 안에 빗은 다 값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서 위로 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이만 원을 월급을 타서 갚았다.
그사이에 평락이와 민숙이 부부가 찾아왔었는데 재덕도 정순도 예전처럼 반겨 맞이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아서 안고 왔는데 제일 반겨 해야 할 정순은 낙태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지 반겨주질 못하고 그나마 정자가 조금 반겨 주었는데 저녁 무렵 수동이가 돌아 왔을 무렵 서운함을 느꼈는지 급히 떠나고 있었다.
그렇게 일곱 달 동안에 십사만 원을 갚았다.
그러는 동안에 수동이의 초등학교동창들은 하나 둘 군에 갔다.
숭인동 김사장은 다른 사업을 구상하게 되고 공장을 정리하고 기계의 일부를 동생 영린에게 빌려 주어서 영린은 하왕십리 산동네에 전셋집을 얻어서 제품공장을 시작했다.
그렇게 작은 공장을 시작하다 보니 정자도 재봉 보조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필요해진 영린은 수동이가 월곡동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찾습니다.
김수동은 이 벽보를 는 즉시 00-0000으로 연락 바랍니다.
라는 벽보를 써서 전봇대 몇 곳에 써 붙였다.
그리고 수동이가 다니는 망원동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기사가 집안일로 결근을 하게 되자 그만두라고 해서 잘렸다.
그리고 대륙전기라는 아성에 사도 안전기와 실을 일정하게 공급하는 로러를 납품하는 회사에서 구형 양면기계를 실 공급 로러 장치를 달아주는 개조 작업을 하러 왔다가 작업 기한을 못 맞추자 다툼이 벌어져 최사장이 화가 나서 설치하던 기계장치를 다 뜯어가라고 고함을 질렀고 개조 작업을 하던 대륙전기 사장도 맞대응을 하면서 기계장치를 하다말고 쫓겨 가다시피 철수를 했지만 사흘 후 다시 와서 설치를 했다.
대륙전기 사장은 갑을 관계를 잘 모르고 화를 냈다가 사과를 하고 다시 일을 마친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기사가 들어왔는데 드럼 자카드를 손보다 거꾸로 돌렸는지 아니면 잘못 해서 바늘의 답부가 부러진 것을 그냥 클러치를 넣고 돌려서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바늘의 답부가 우수수 불어지면서 가마 살이 다 휘어 버렸다.
그러니 사장 조카의 보고를 받은 사장이 달려 왔을 때에는 기사는 줄행랑은 치고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구관이 명관이라고 전에 쓰던 기사를 다시 불러서 다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수동이가 바늘을 일일이 니퍼로 빼내고 휘어진 가마 살을 쇠톱을 갈아가지고 펴내는 작업을 이틀을 넘게 하다 보니 다리가 아파서 하루만 쉬겠다고 했더니 그만 두라고 했다.
금자가 학교를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고 수동에게 오빠 찾는 벽보가 있어 하여서 마침 망원동에서 그만두고 난 후라 영린을 찾아갔더니 월급은 지금 다니는 곳 하고 똑같이 주고 잘되면 독립도 시켜 주겠다고 해서 귀가 얄은 수동이는 직장을 옮겼으나 제4차 중동전이 일어나서 석유파동이 왔다.
그리고 못 받은 월급을 받으러 망원동에 있는 최사장 집으로 갔다.
“다음에 와.”
“아니 사장님 사장님이 그만 두라고 했으면 월급은 제대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뭔 소리야 재한이가 그러는 데 자내가 제일 불만 불평이 많았다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일을 그만둔 사람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됩니까?”
“누가 안준데 다음에 오라니까?”
“그래도 해고를 시켰으면 월급은 제때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월급 제때 달라고!”
“예.”
최사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부인이 끼어들었다.
“여보 당신 혈압 올라가겠어요. 줘 버립시다. 줘 버려요.”
그렇게 옥신각신 해서 월급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내 입구에서 복덕방 신광옥을 만났다.
“자내 돈 벌었네 아파트 값이 80만원으로 올랐어.”
그런가 하면 유류파동에 숭인동 사장은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동생에게 빌려 주었던 기계를 가지고 가 버렸다.
할수 없이 수동이는 삼신상사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가리봉동에 있는 삼일 섬유라는 곳에 가보라고 했다.
그곳 경비실에 가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왔다고 하니 들여보내 주었다.
들어가 보니 아성섬유에 있던 이은호기사가 편직실 책임자로 있었다.
“월급은 너는 부 기사 보다 삼천 원 적은 이만 이천 원 주라고 할 게 식권을 28장을 주고 잠은 기숙사에서 자면 되.”
환편기는 20여대가 넘었고 삼덕무역이라는 곳에서 하청을 받아서 짜고 있었고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기계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신형모터가 달려 있어서 기계가 처음에 돌아가면서 얼마 동안은 저속으로 돌리다가 기계가 웬만큼 길이 나면 속도를 서서히 올렸다.
봉재실이 따로 있는데 여공들이 삼십 명이 넘었고 남자도 십여 명 그리고 편직실에는 가 조 부기사 황인구 수동이 그리고 여자 편직공이 5명 나 조 부기사 박관우 정용진 그리고 여자 편직공 5명에 검단사가 세 명이나 근무를 하는데 수동이와 용진이 맛 교대를 하는 데 남자라서 그런지 드럼 자카드 두 대와 자카드 한 대를 보라고 했다.
여자 편직공 중에는 이은호 기사의 조카딸과 아성섬유에서 한양대 섬유과를 나와서 패턴 디자인을 하던 윤과장의 여동생도 있었다.
첫날 드럼 기계에 불량바늘을 찾으려고 기계안쪽으로 머리를 넣고 들여다 보다 등이 버튼스위치를 누르는 바람에 팔이 기계에 끼여 기계를 세우고 크러치 부분을 떼어내고 팔을 꺼내고 보니 기어에 물렸던 부분은 심하게 뭉그러져 있었는데 피는 나지 않고 조금 부어있어서 병원엔 가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세 명이 있었는데, 사장 그리고 사장의 사촌형 그리고 그의 부인이 경리 일은 하고 있었다.
구내식당이 있어서 식권을 내고 밥을 먹고 경비실에는 한 사람이 주간에만 근무를 하고 있었다.
연탄을 때는 불럭으로 지은 기숙사가 식당 옆으로 길게 여섯 칸이 있었는데, 남자들이 자는 방이 둘 여자들이 자는 방이 넷 이였는데, 수동이는 들어가는 입구에서 두 번째 방에 배정을 받았다.
다친 팔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보니 살이 뭉그러져 심한 흉터를 남기고 아물어 있었다.
기숙사 방은 연탄을 가는 시간을 놓치면 옆방에서 불을 붙여 와야 하거나 아니면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내야 해서 낮에도 신경을 써 가면서 연탄을 갈아야 넣어야 했다.
그리고 식당에서는 식사 간이 되면 밥을 타먹기 위해서 줄을 서서 먹는데.
딸도 없는 식당주인 장씨를 농 삼아 장인이라고 부르자 굉장히 좋아하면서 밥도 반찬도 신경을 써 주었다.
세상을 그렇게 사는 것이고, 누구나 가까이 하여서 나뿐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게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어느 초겨울 첫째 일요일 집에서 쉬고 월요일 주간 근무를 하면서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보니 예상한 대로 연탄불이 꺼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초겨울 비는 오후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거기다 아궁이에는 가림막이나 챙이 없어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아궁이란 아궁이에는 연탄불이 몽땅 꺼져 있었고 어디서 붙여올 만한 대도 없었다.
근무가 끝나고 수동이는 연탄재 위에 종이를 넣고 불을 붙이고 나무를 쪼개어 넣었으나 나무가 젖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생각 끝에 식당에서 조리용 버너에 쓰는 석유를 깡통으로 하나를 붓고 불을 붙여서 나무가 타기 시작하고 간신히 아홉시가 넘어서 연탄에 불이 붙었다.
방바닥에 냉기가 가시고 웅크리고 잠이 들었던 몸이 죽 펴지고 깊은 잠에 들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깔깔 거리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나 자지 남은 배 아프다고 우는데 깔깔 거리고 웃다니 자다 말고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미친년들 미친 장난질하고 자빠졌네.’하면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모두가 식당에 들려 식사를 했는데도, 옆방에 아가씨들이 나오지를 않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여섯 명 모두 혼수 상태였다.
모두 병원에 옮기고 산소마스크로 호흡을 시켜 여섯 시간 만에 깨어났고, 24시간 후에 퇴원을 했다.
알고 보니 석유를 부은 것이 불안전 연소가 되어 연탄가스와 함께 옆방 갈라진 틈으로 새어 들어가 자다가 토하고 배가 아파서 울었는데, 그 옆방에 아가씨들이 깔깔 거리며 웃은 것 이었다.
하마드라면 아가씨 여섯을 죽일 뻔 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관리직원인 사장 사촌형이 연탄가스를 마신 걸로 해서 조용히 넘어 갔다.
정순은 그동안 수동이가 준 돈을 모아서 빗이 다 청산되자 이사를 하면서 옆방을 보증금 오만원에 오천 원씩 받기로 하고 일수놀이를 하는 자옥이 모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에너지를 절약 한다는 의미에서 TV의 오전 방송을 전면 중지 했다.
그렇게 설이 다가오는데 수동이가 일하는 삼일섬유에 석유파동의 여파인지 서있는 기계의 숫자는 한 대 두 대 늘어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에 그 흔한 떡값도 없이 닷새를 놀라고 했다.
음력 초사흘 날 명자가 집으로 재덕에게 세배를 왔다.
그녀의 나이 스물넷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뒤 서울로 식모살이를 한지가 십여 년이 넘게 하면서 오르지 돈만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만 지난달 주인아줌마가 외출 한 사이에 주인 남자에게 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누가 들을세라 주방 옆 골방에서 흐느끼지도 못 하고 눈물만 주르르 흘려야 했다.
그리고 지지난 주까지 세 번에 걸쳐서 유린을 당하고 쫓겨나 설을 앞두고 고향 꽃재를 찾아갔으나 계모 영란으로 부터의 모정기대 하지도 않았지만 아버지 병묵에게 서 조차 위안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기대 했던 것은 그동안 모은 돈도 솔찮을 테니 이제 식모살이 그만두고 집에서 쉬면서 좋은 혼처 있으면 시집이나 가려무나. 하였는데 아무런 언질도 그저 왔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이복동생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으니 나에게 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지 라고 스스로 위안을 했지만 무언가를 빼앗기고 난 지금의 심정을 위로 받을 자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다만 할머니 순례가 손을 잡고 객지에서 고생 많지? 불상한 것 하는 소리가 유일한 위안 이었다.
그렇다고 순례가 명자의 일에 적극 나서서 무언가를 해줄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병묵 또한 무던한 사람이었다.
식모살이 라는 게 어디 언감생심 명절에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자리인가 그동안 명절에 한 번도 시골에 내려오지 않다가 명절에 내려왔으면 무언가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 차려야 했는데 그저 왔나보다 하고 지나치고 있었다.
그녀가 그 집으로 오게 된 것도 그동안 주인아줌마가 하는 계에 들어서 몇 번을 태워주고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쳐서 주겠다고 해서 빌려 주었는데 그동안 이자를 꼬박꼬박 쳐주어서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 명자를 만나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봄에 먼저 있던 집에서 며느리를 보는 바람에 그만두고 어디 적당한 자리 없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에 와 있으라고 해서 악마가 살고 있는 집인 줄 모르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명자는 초사흗날 다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고 고모 재순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모 재순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상대가 없었다.
몇 년 전 할아버지 양묵이 살아계실 때의 앙금 정도는 지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재순이 요 위에 있는 수동이네 집에 가니 같이 갈래 해서 따라 온 것이었다.
정순이 재순을 위하여 점심으로 끓여 내온 떡국을 먹고 있는데. 수동이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왔다.
“어, 누나 왔네?”
“응.”
하면서 씩 웃었다.
수동이가 지난번 양묵의 장사 때 보고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양묵의 대상 때 도 올 겨를이 없어서 못 온 것이었다.
“누나 이젠 시집이나 가지?”
하며 농 삼아 던지는 수동이의 말에.
“네가 시집 좀 보내 주래?”
하고 받아 넘겼다.
그리고 명자는 저녁을 마치고 시집에 저녁을 차려야 하다며 바삐 나서는 재순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설 연휴 마지막 날 저녁에 하필이면 붙박이 옷장에 올려놓은 라디오가 은자의 이마 위로 떨어져 네 바늘이나 꿰맸다.
다음날 수동이는 기숙사로 돌아와 일을 하면서 일주일 후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숭인동에 있던 혜자가 와 있었다.
“어?”
“어머. 여기 있어요.”
“응 편직실에”
같은 방을 쓰는 재단사가.
“아는 사람이야.”
수동이가 고개를 끄떡였더니.
“내가 사귀어 보라고 할까?”
“에 이.”
하면서 가볍게 낯놀림을 했다.
그리고 편직실에서 양면기계로 짜다가 불량이 난 원단을 친구 용진이가 달라고 해서 재단사 친구를 주었더니 목이 긴 폴로를 세 개나 만들어다 하나씩 입었다.
그리고 쉬는 날 집에 들 린 수동이에 눈에는 못 보던 여자 손목시계가 보여서 정순에게 물었다.
“웬 시계야? 예쁘네요.”
“응 명자 꺼.”
“명자께 왜 여기 있어요.”
“응 명자가 자살을 했단다.”
“그래요. 왜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저께 꽃재 아저씨 하고 화천까지 가서 묻어주고 왔단다.”
“어떻게 화천 까지 갔데요?”
“모르지 왜 화천까지 갔는지.”
“유서에는 그동안 번 돈을 할머니 얼마 동생들 얼마 그리고 고모까지 얼마씩 주라고 써 놓았더란다.”
이야기는 그저께 병묵이 지서에서 경찰이 찾아와서 명자가 자살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장소가 화천 여인숙이라고 해서 재순에게 급히 연락을 해서 재덕이와 같이 가서 화천 야산에 묻어주고 유품 중 시계와 끼고 있던 반지를 병묵이 형님 가져가세요. 해서 가지고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후에 재순이 조그만 일기장을 가지고 왔다.
“수동아 이것 좀 읽어봐라 내 손이 떨리고 가슴이 방망이 쳐서 더는 못 읽겠다.”
하면서 넘겨준 것이 명자가 쓴 일기장 이었다.
첫댓글 70년대 후반 많은 젊은이들이 격을 것을 잘 표현 했네요.
정순의 낙태 그리고 다음이 기대 되는 명자의 이야기는 더 흥미가 가네요.
명자의 슬픈 사연으로 한편을 올리려 합니다
그렇게 피지도 못하고 떨어져간 수많은 꽃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꺽어버린 꽃은 없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