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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제 사례 분석
두번째 글입니다. 첫번째 글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공화제적 측면을 이론적으로 검토해보고 인민주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전제군주제라는 단일한 설명보다는 공화제적 군주정과 또 다른 맥락의 관료제적 특징이라는 두 가지 설명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낫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의 부분에서는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되, 특히 인민이 주권을 이양하는 사례, 논의기구 다양성과 여론을 수렴하는 사례, 시민들이 기존 정부를 거부하고 주권을 회수하는 시민불복종 사례의 세 가지 사항을 가지고 글을 지속해보겠습니다.
갈선(Acclamation) 전통
전근대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분야에서는 구술적 전통(Oral tradition)이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실제 의사소통 영역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당대의 교회를 예로 든다면, 성직자들이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로마 신화를 적극 응용한 복잡한 설교를 매주일마다 하곤 했지만 잘 쳐봐야 남성의 50%, 여성의 25% 정도만이 실제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과거 서양에서도 구술의 전통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수의 의사소통은 이를 통해서 충분히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하게 문해율의 문제만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다 우리는 또한 수사학(Rhetoric)이라는 고대 서구가 가진 고유한 전통이 갖는 특질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공공장소인 광장(Agora)에서 대중을 상대로 진행하는 연설을 통해 여론을 설득하고 이로서 정책변동을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적 전통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뒤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사회의 모든 공적인 일들은 대광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민들의 정치체 참여를 통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장과 법정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연설기법으로서의 수사학 역시 오랜 역사를 함께 해왔습니다. 이렇듯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가 단순한 성문법을 넘어서 하나의 전통으로서 지켜오는 구술의 전통은 황제 인준이라는 아주 독특한 전통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대 로마 이래로 대경기장에서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황제로 취임하는 모습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사는 사실 요식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당시 광장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모이는 행위 그 자체가 강력한 정치행위로 받아들여지고, 그들로부터 형식적이든 실제적이든 권력을 위임받아 황제가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심성적 배경을 이해해본다면 이 문제를 그렇게 편의대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황제들은 장소와 구체적인 예법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즉위시마다 반드시 시민들이 집결한 장소에서 갈채를 통해 인준을 받는 방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즉위 이후에는 일년에 수백여 차례에 걸치는 축제일마다 시민들과 함께 가두행진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정책 전반에 대한 여론을 확인하였으며, 시민들이 황궁으로 찾아와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탄원을 제기하면 만나주어야 했습니다. 여기에 전반적으로 국가의 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거나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경우, 시민들은 대관식에서 넘겨주었던 권력을 회수하기 위해 정권과 법률의 시행을 중단시키고 대규모 봉기에 들어가곤 합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그렇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의 인민주권이 실재하던 개념임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는 Acclamation 전통이 어떠한 방식에서 인민의 주권 이양 측면을 갖는지를 사례 몇 가지를 중심으로 판단해보겠습니다.
1. 491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 즉위.
제노 황제(474-491)가 숨을 거둔 491년 4월 9일 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황제의 부고가 전해지자마자 거리로 쏟아져나오더니 대경기장으로 집결합니다. 대경기장 옆 황궁에서 황후 아리아드네를 비롯하여 원로원, 총대주교, 관료들이 모여 사후 수습책을 논의합니다. 이후 황후는 대경기장으로 나아가 시민들의 의견을 청견한 뒤, 그 여론에 기초하여 원로원과 공무원들에게 황제 후보를 선출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 때 시민들의 요구로 콘스탄티노플 시장도 교체됩니다) 마침내 이에 따라 아나스타시오스가 선임되었으며 이틀 뒤,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공무원과 원로원 의원들은 먼저 아나스타시오스에게,
황제가 되기에 앞서 그 누구에게도 비통을 주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국가를 다스리겠다는 맹세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라고 제언을 하였습니다. 대경기장에서 곧바로 열린 인준 의식(Acclamation)에서 시민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연호하면서 환영하였고 동시에 그에게 요청합니다.
통치하기 위해 오직 순수한 관료들만을 임명하십시오!
아나스타시오스는 이에 이렇게 답을 꺼냈습니다.
"솔직히, 이 지위를 수락하기까지 망설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민 전체의 동의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모두의 공통된 안전을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이 막중한 책임이 얼마나 큰 지 미처 헤아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여러분들이 나를 지금 보편적인 방법으로 선출하면서 원하시는대로, 내가 최선을 다해 행정을 처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기를 전능하신 신께 간구할 뿐입니다."
그의 말이 끝을 맺자 황제석 양쪽으로 위치한 객석에서 찬사가 쏟아져나왔습니다.
"로마인은 이제 번영하리로다!"
찬사를 기쁘게 들으며 아나스타시오스는 재위 27년의 첫 걸음을 옮겨 황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자, 이 사례뿐 아니라 여러 사례에서 황제로 옹립되는 경우, 후보자들이 적지 않게 그것을 꺼려하는 모습이 연대기들 곳곳에서 확인이 됩니다. 대개 군인출신들이나 계승자가 아닌 이들이 그런데, 아나스타시오스 1세(491-518)가 그렇고 포카스(602-610), 테오도시오스 3세(715-717), 콘스탄티노스 10세(1059-1067), 이사키오스 2세(1185-1194)와 같이 처음에 거절하거나 꺼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황제위가 갖는 권위와 명예를 넘어서 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부조차 시민이 요구한다면 응당 따라야만 했습니다. 이사키오스 2세의 예가 그러합니다.
2. 대중의 지명이 갖는 절대성
이사키오스 2세는 일찍이 1184년부터 당시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1세(1183-1185)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정도로 맞설 수 있는 주요한 정계 인사로서 떠올랐는데, 특히 안드로니코스의 쿠데타와 무단독재에 반항하는 비티니아 대반란(1184)에서 니케아에 망명을 하여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기까지 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우유부단한 인물로서 자신의 정권을 세운다던가 하는 야욕이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 포위전 당시에 타협을 주장해서 니케아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결국 안드로니코스에게 투항합니다.
이후 1185년 9월에 점성술에서 자신이 안드로니코스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해석으로 인해 체포되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황급히 성 소피아 교회로 달려가 시민들의 보호를 요청했고 이는 그대로 시민봉기로 이어져 안드로니코스 정권 몰락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사키오스 자신은 아무런 기여가 없었고 자기 목숨 지키는데 급급한 따름이었으나, 시민들은 그가 당시 시점에서 충분히 황제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여 자체적으로 그에게 관을 씌워줍니다. 그리고 시민군이 황궁을 점령하자 이번엔 총대주교를 반강제로 끌고 와 다시 한 번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게 하고 만세를 연호한 뒤 해산합니다. 요는 시민의 의지가 황제를 실제로 임명하는 한 예라는 것입니다.
자, 이하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여러 사례를 검토해보죠.
사례 1. 궁정쿠데타 vs 시민군중
콘스탄티노스 7세(911-959, 이하 '적장자 황태자')의 사례를 가져왔습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레온 6세(886-912)의 적장자이며 동시에 바실레이오스 1세(867-886)의 손자였습니다. 즉, 이미 2대 50년에 걸쳐 훌륭한 정치력과 행정력을 선보였던 이들의 후손이었습니다. 레온 6세의 4혼 문제 때문에 사생아 시비가 있었지만 기실 그것은 콘스탄티노스 7세가 승계를 해야되는 시점에서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논쟁이었습니다. 문제는 콘스탄티노스 7세가 즉위 당시 고작 8살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황태후-총대주교-원로원으로 구성된 섭정단이 임시로 제국을 통치하였습니다만 당시 총대주교인 니콜라오스가 전권을 차지하고 싶어하였던 까닭에 섭정단 내부에서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해군 총사령관 로마노스 라카페노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와 황태후를 내쫓고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섭정 겸 장인이자 공동황제로 나서게 됩니다. (920년)
그로부터 약 24년동안 로마노스 1세는 찬탈을 할 기세로 콘스탄티노스 7세를 압박했으며 심지어는 자신과 아들 셋을 황제서열 1, 2, 3위로 삼아 자신의 가문을 정치 전면으로 내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로마노스는 정작 사위를 찬탈하는 일 자체는 끝내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으로 서술을 넘어가는데, 944년 초에 벌어진 일련의 정변들이 어째서 그런 완벽한 찬탈 조건에서 찬탈이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944년 말, 로마노스 1세는 870년경 출생하였으므로 이미 이 무렵엔 70대 중반을 향해가는 노인이었습니다. 그가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고 신학에 빠져드는 사이 점차 대중 가운데서도 딱히 황제위를 차지하고 있는 값어치를 못하는 그와 그의 모자란 아들들에 대한 회의가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제 40여세가 된 콘스탄티노스 7세는 아내 엘레나의 도움을 받아 로마노스 1세의 아들인 스테파노스를 충동질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12월 16일,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 로마노스 1세를 유폐하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수도에 퍼지면서 '적장자 황태자'의 안위도 불투명한 것을 인해 바실레이오스 1세와 레온 6세의 치세를 기억하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곧바로 운집하여 황궁을 향해 행진을 시작합니다. 황궁 앞에 모인 인파가 콘스탄티노스 7세를 보이라며 항의시위를 벌이자 그것으로 궁정쿠데타는 뒤집어져버렸습니다. 여기에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이 사건을 묘사하면서 아말피, 가에타, 로마, 프로방스의 외교대사들이 콘스탄티노스 7세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대세가 기울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흥분한 군중의 앞에 머리가 헝클어진 상태이긴 했지만 콘스탄티노스가 얼굴을 보이자 만족한 시민들이 그때서야 물러갔다고 기록에 전합니다.
결국 승세를 거머쥔 '적장자 황태자' 콘스탄티노스는 948년 1월 27일,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를 로마노스 1세의 유배지인 프로티섬으로 유배함으로서 통치권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시민군중의 힘이 통치권자가 누구가 될 것인지 그 향배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동력원임을 알려줍니다.
사례 2. 선거왕정
13세기에 들어서 표방된 또 하나의 독특한 사례는 선거왕정이라는 관념과 사상의 출현입니다. 이는 니케아 제국 시대에 들어서 시작된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주요 정책과 시책을 논하는 경우에 표결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황제의 즉위를 인준하는 표결은 있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케아 시대에 들어서면 이전과 같이 시민의 일반의지에 의해서 즉위를 인준하는 장소인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그 안의 상징적인 성 소피아 대교회와 대경기장, 황궁 등을 상실하였던 까닭으로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범주의 시민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입니다.
비잔티움에서 선거왕정이 처음으로 발견되는 사례는 1221년, 쎄오도로스 1세(1205-1221)가 숨을 거두기에 앞서 후계자를 확정하려던 때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쎄오도로스 1세에게는 아들은 없었지만 사위로 요안니스 두카스가 있었고 그 외에 계승이 가능한 남동생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동생들의 능력을 불신한 쎄오도로스는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1221년, 군대, 관료 및 각 지역의 시민대표를 소집하여 '자유의지'(Free Volition)에 따라 요안니스를 황제로 지지하는지를 표결해달라고 했습니다. 남동생들은 적극 반발하였으나 결국 사위 요안니스가 요안니스 3세(1221-1254)가 되어 라스카리스 계보를 이어나갔습니다. (비잔티움에서는 여계, 남계 상속이 모두 가능합니다) 그리고 1254년이 되었습니다. 요안니스 3세 역시 적장자인 쎄오도로스에게 제위를 물려주기에 앞서 1221년과 동일한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시켰습니다.
13세기에 새롭게 도입된 표결에 의한 정당성 확보는 갑작스럽게 비잔티움사 말기에 튀어나온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주가 승인을 받는 방식이 상황의 반전에 따라 필수불가결하게 전환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카리스와 팔레올로고스 두 황실은 이제 표결에 의하여 정당성을 확보하였다는 이념을 13세기와 14세기 초 사이에 걸쳐서 제시합니다. 이는 자연스레 비잔티움 사회 내부에서도 자리잡았고, 그 결과적으로 3편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만 표결에 의하여 군주가 선임되어야 하며 그래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가 말기 비잔티움 정치사상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분명히 이것은 어느날 갑작스레 생긴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1261년 수복 이후에는 그 전통이 사라졌다는 점을 생각해보건대 전통적인 비잔티움 체제 내에서 충분히 인민주권의 이양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민주권의 이양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주권 위임의 대상이 옮겨지고 정당성이 부여되었는지를 궁정쿠데타와 선거왕정이라는 특수한 반례를 들어 살펴봤습니다. 그럼 이번엔 국가정책과 시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모든 일이 황제의 직접적인 개입을 요구했는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권한이 살아있는 기구들을 통해 결재하고, 첫번째 글에서 살펴봤듯이 황제가 서류결재를 담당하는 역할을 주로 행사하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논의기구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올릴만한 기구가 원로원(Senate)입니다. 본디 비잔티움사 연구에서는 원로원을 다소 과소평가하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었는데요. 이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레온 6세때 신법령 47호와 78호로 인해 원로원의 힘이 약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서술에서 오랫동안 원로원이 부차적인 기구로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오랫동안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하나씩 여기서 분석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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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령 47호
원로원의 집정관 임명 권한과 참사회의 총독 임명 권한을 보장하는 법령의 폐기
- 레온 6세가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에게
국가의 상황이 일찍이 달랐던 까닭에, 마찬가지로 사물의 질서에서 차이점이 존재하였다. 모든 사안이 황제의 의중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원로원이 고려하고 처리해야할 문제가 일부 있었으며 또한 언제나 원로원이 그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집정관은 행정을 위하여 로마시에서 임명하였으며 그들의 행동은 법에 의하여 인준을 받았다. 이러한 전례는 로마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른 도시에서 참사회 역시 특정 총독직을 선출하도록 허용되었다. 다만 이 총독은 오늘날의 총독직을 점하는 이가 아니라 더 높은 관품을 가지고 추가적인 의무에서 면제되는 자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안은 신의 도우심과 황제 자신의 지혜로 말미암아 황제의 감독 아래 놓였다. 황제는 자신의 관심을 끄는 문제를 처리할 수 있으며 이 법령은 더 이상 그에게 이롭지 않다. 짐이 생각하건대 다른 것들이 이미 그래왔듯이 이것 역시 폐기되어야한다고 본다. 필요가 법령의 제정을 요구하듯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 법은 폐기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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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령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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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47호에서 제시하는 바를 독해해본다면 글쎄, 본인의 입장에선 원로원 지위 약화와 황권 강화의 측면이라기보다는 법령의 아나카타르시스(anakatharsis, 정화)로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로원의 집정관 선출권한은 분명히 공화정 시대에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권력과 연결되는 것이었겠지만 제정으로 이행한 이래로 집정관 자체가 허직이 되어갔기 때문에 명예를 제외하고 다른 의미가 달리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집정관직 자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의 관제개혁 때 혁파되었기 때문에 해당 권한 자체가 공중분해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미 없어진 명예직을 선출하는 것이 원로원의 진정한 권한이라면, 원로원은 유스티니아누스 이래 이미 300년을, 살았으나 산 것 같지 않은 조직이었을까요? 꼬박꼬박 회기 또는 소집 때마다 모이면서?
한편 78호의 경우는 어떨까요? 78호라면 그래도 원로원의 권력 약화로 해석할 만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원로원의 포고(decree)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상에서도 입법의 한 수단으로 인정될 만큼 유서깊은 원로원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온 6세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입법의 권한 역시 오직 하나의 원천(Source)을 두어야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죠. 그러면 이제 곧장 결론의 지점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달려가면 되는 걸까요? 무언가 빠뜨린 것은 없을까요? 만약 손쉽게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면 아주 불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원로원 등의 기구가 실제로 국가의 주요한 정치행위를 관리하는 모습을 통해 입증해보죠.
사례 3. 원로원과 법관회의, 종교회의의 존재
저는 여기서 앞의 사례와 시간적 간극은 200년에 달해서 상당히 크긴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1183-1185)의 매우 비상한 방법으로 의회기구와 협의회를 장악해 국정을 장악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만약 당시 원로원과 의회기구가 당연한 것이었고, 연대기 저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특별한 사적'을 주로 기록하는 연대기에서 대거 생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우회하는 사건이 기록되었다면, 이는 분명히 그것이 '그렇기에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1182년 8월 쿠데타 성공 이후, 권력장악 과정에서 자신의 적대자를 제거하기 위한 금인칙서(Prostagma)를 작성하기 위해 원로원의 회기에 해당 문제를 제안하였으며 원로원 내부의 여론을 움직여 실제 금인칙서를 작성하기에 이릅니다. 이 당시 원로원 구성원의 상당수는 법무직 관료들이었다고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가)
자신의 지지자들과 돈으로 매수하곤 했던 법관들을 회의로 소집한 뒤,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도시와 지방을 다수 점령한 것을 성토하였으며 이 원인을 결과적으로 자신의 반대파와 그 친인척들이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내심에 담아두었던 최종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그리고 마침내 회의는 그러한 의중을 잘 헤아려 알아서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중략...) 그의 압력과 회유에 힘입어 의회는 다음과 같은 선언서에 동의하였다.
더군다나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독재자로 정죄되는 안드로니코스가 교회법을 어기는 결혼을 시행할 것을 강행하려던 상황에서 일어난 일화와 황태후를 제거하기 위한 재판 강행 상황에서 일어난 일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나)
이러한 소리는 마침내 그동안 가만히 잠자코 사태를 관망하던 총대주교의 격노를 불러왔다. 총대주교의 분개가 알려지자 여전히 이 일에 반대하고 있던 소수의 성직자들과 명망있는 원로원 의원들은 법률을 근거로 하여 이 모든 정당화 작업에 딴지를 걸고 불법행동에 대한 승인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다)
마침내 그는 황태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하여 최고대법관 중 아직 그에게 공식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디미트리오스 토르니키스와 레온 모나스테리오티스에게 황태후를 재판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대법관들은 최고법정의 절차를 준수하라며 이 법정의 소집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이 법정이 황제의 의사에 근거하여 소집된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싶소이다.
그나마 안드로니코스는 강제력으로 대법관들을 쫓아내긴 했으되 자신이 원했던 재판을, 심지어 대중을 동원했음에도 강행하지 못했고 황태후 처리 문제로 시간을 지연하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마누일마저도 (가)에서 작성된 법령의 서문(序文, Preamble)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그 반대의 근거를 더 상위의 기본법인 로마법, 곧 법관들과 변호사들이 수백년간 완성한 법전으로부터 끌어오고 있습니다.
제국의 법률로서 반포되지 않은 행동은 전문(前文)에서 발행자들이 언급했다고 해도,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략...)
설상가상으로 독재자인 안드로니코스조차 황태후의 재판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관회의를 열어 공식적으로 질의를 했어야 했을 정도로 입법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황제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자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Marie Theres Fogen 선생이 말하는 법관과 변호사, 공무원 관료에 의한 평시의 국가운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까지 포함해서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바로 그러한 국가운영의 권력이 단일한 원천에서 나온다는 점을 보장하는 강력한 원심력이 되는 지위였으며 가장 높은 대표자이자 정치 담당자였던 것이지요.
단적으로 결론을 표현하자면 원로원이 그 권한을 박탈당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연대기 저자들의 관심을 못 받는 양상으로만 보자면 제정 성립 이후의 원로원은 대개 비슷한 상황이었으며, 결코 실제적인 활동과 그 힘에 있어서 통제를 받거나 제한을 받을지언정 권한을 상실하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이후에도 '집회', '협의회' 등의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직을 가진 사람들 다수, 특히 원로원 의원들이 모여서 중요한 국무를 논의하는 등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원로원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단순히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정치기구, 입법토의기구, 의사결정기구로서의 기능이 생생히 살아있는, 국가의 당연한 구조로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역사가들의 역사서술을 대하는 태도 역시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입니다. 9~11세기의 연대기를 다룬 작가, 특히 스킬리치스의 경우 그 자신은 황궁수비대의 대장이자 이미 존재하던 사서 내지 사료를 집약한 정도의 서술만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술에서 원로원은 매우 부차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중요한 활동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연대기 서술자가 아니라 뚜렷한 정치사상을 지니고 그것을 명료하게 드러낸 12세기의 서술자들, 특히 니키타스 코니아티스의 기록에 이르러서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어떤 식으로 권력을 장악해나가는지를 제도적 기구인 원로원, 종교회의, 법관회의 등을 살펴보며 진단하고 또한 시민 집단체의 활동과 그에 대한 동경, 두려움을 동시에 풀어내기도 합니다. 그조차도 안드로니코스 1세의 비정상적 행보가 아니었더라면 부재증명(alibi)조차도 힘들었을 터인데 말이죠.
이는 분명히 당시 비잔티움 사료를 접근할 때에도 이전처럼 까닭없는 '닥치고 불신'이 아니라 그들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부분에 대한 의문을 끝없이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찾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외에 논의기구 자체는 비잔티움 역사에서 더 많이 존재하였습니다. 11세기에 이르게 되면 중앙정부는 이미 지속적으로 중앙통제를 강화하였음에도 지방의 모든 사안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방의 불만이 고조되면 이를 처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비잔티움 정부에서는 민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에 일종의 자결권을 허용하고, 지방관들 역시 일정 정도는 지역민들의 대표자로서 자처할 수 있도록 허용해줍니다. 중앙정부에서는 매번 꺼려했지만 그런 덕분에 각 지역에서는 유력자와 성직자, 관료, 지역민들이 모여서 지역의 사안을 논의하는 '민회'가 열리곤 하였습니다.
이 민회가 각 지역의 자체적인 의사소통과 자율권을 상징한다면, 교구제의 운용은 지방이 중앙으로부터 이탈해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행사하였습니다. 11~12세기에 들어서 주교들은 보통 자신의 임지에 한번 부임하면 좀처럼 옮기지 않게 되었고 각 지역에서 자신들의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강화되어가는 것을 장려하였습니다. 이런 점만 보면 교구제가 지역의 정체성 강화에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지방의 교구들은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긴밀하게 중앙과 의사소통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의례와 교리의 측면에서 제국의 중심부와 동일하다는 인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교구제는 중앙이 지방과 연결을 잃지 않는 한 제도적 기능이 되었습니다.
사례 4. 교구제의 중재기능
그 대표적인 사례로 볼 만한 것이 1184년 비티니아 대반란 당시의 니케아 대교구입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찬탈과 폭정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비티니아 지방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안드로니코스 1세가 정규군을 모아 진압에 나서면서 문제가 심각해진 상태였습니다. 당시 니케아 시는 엄중하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들의 사기가 저하되자 니케아 대주교인 니콜라스는 교회당으로 시민들을 불러모아 설득하고 자신이 직접 시민들을 이끌고 나아가 황제와의 사이에서 중재를 해주었습니다. 반면 또 다른 반란 도시였던 로파디온은 군대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는 시민들을 만류하거나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로파디온 주교의 한쪽 눈을 빼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사례는 1200년 무렵, 사실상 지방행정이 무력화된 아테네에서의 일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지방행정이 사실상 무너지고 심지어 근처에서는 반독립 군벌인 레온 스구로스의 군대가 횡행하고 있었는데 도시의 행정과 방위 전반이 1204년, 스구로스가 아테네를 공격해 외성을 무너뜨리기까지 아테네 대주교 미하일 코니아티스가 다스렸고 세금도 중앙정부를 대신해 징수하였음이 확인됩니다. 심지어 1204년에 더 이상 방위가 불가능해지자, 미하일 대주교는 라틴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기로 결정하고 내어주기에 이릅니다.
즉 상기 세 가지 사례로 미루어보건대 당시의 교구제는 단순히 종교적인 기능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회적인 기능을 겸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중앙, 지방 양자를 이어주는 또 다른 가두교의 역할을 행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민주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황제가 그 위임받은 인민주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했는지를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그 답은 'no'로 귀결이 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보다 확실하게 결론을 내어놓기 위해서 한 가지 추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시민불복종입니다. 인민주권이 위임되었다고 설사 얘기를 한다손 쳐도, 정작 시민이 그 주권을 원하는 때에 이르러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인민주권이라기보다는 인민주권의 형식을 빌어왔을 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공화제적 모델을 재검토하기 위해서는 역시 이 부분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어야겠지요. 그런고로 비잔티움의 시민들이 주권을 돌려받기 위해 행동으로 나선 적이 있는지를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례 5. 시민불복종의 諸사례.
시민불복종의 사례 자체는 경우도 많으며, 그 원인과 경과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여기서 제시할 것은 칼델리스 선생의 의견을 따라, 시민이 직접 원인이 되어 주동함으로써 극대화된 시민불복종 사례들입니다. 간단한 형태로 적어두고자 합니다.
첫댓글 흥미롭게 잘 읽고 있습니다.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찬탈이 공화제적 전통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uteis 근데 혹시 물의 백작님이신가요? 왜 기존 아이디 냅두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