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수냐/ 이선자
지난 11월 9일이 베를린의 장벽(Berliner Mauer)이 무너진 지 30주년이었다.
요 몇일간 다큐멘터리 영화는 물론, 신문, 라디오, TV 등 온통 베를린 장벽의
붕괴 사건 이야기 뿐이었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는 45년 간의 분단 현실을 가슴앓이 해 왔던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벽을 넘고, 땅굴을 파는 등,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하다 동독 경계 병들의
총탄에 많은 목숨 들이 스러져 갔다.
필자는 1970년 도에 서(西)베를린(Berlin)의 그리징거슈트라세(Griesingerstrassse)에
있는 국립정신과 병원에서 3년 3개월을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지역적으로 보면 Griesingerstrasse는 ‘동베를린’ 보다 ’동독’에 더 가까운 지역이었다.
처음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낯선 이국 땅의 정서와 문화를 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꽃다운 스물두살이었다.
처음 3개월은 독일어 학원에서 독일어를 배웠고, 정식 병동근무는 1월에 시작했다.
그 다음해 봄, 친구들 십여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고사리를 뜯으려 숲으로 갔다.
숲길을 지나 신나게 들판을 달리는 데, 말로만 듣던 ‘동독'의 경계선의 철조망옆을
지나게 되었다. 불과 이십여 미터의 거리인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우리를 샅샅이
주시하는 동독의 군인들을 보곤 덜컥 겁이 나서 등골에서 땀이 났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는데도, 뒤에서 누가 내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아서 얼마나 혼이 났던지 모른다.
그제야 길가에 있는 십자가가 세워진 작은 무덤들이 자유를 찾아 서(西)베를린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총살된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걸 알았다.
그 후론 한 밤중에도 개짖는 소리, 총소리가 나면, 아 또 누군가가 철조망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고 잠을 설치는 일도 있었다.
자유진영 측의 西베를린과 공산진영 측의 東베를린을 가르는 거대한 장벽이 처음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의 일이라고 한다.
장벽건설 이전엔 동서 베를린 간 왕래가 자유롭게 행해졌는데,
1949년 이후, 장벽이 세워지기 까지 탈출한 동독 시민의 숫자가 300만명을 넘는다고
했다. 우리의 이웃이며 또 친하게 지내는 전기공인 미카엘의 부모님도 동독에서 40여 년 전에
이곳 서독으로 넘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주 동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미샤엘의 아버지는 올 해 93세 이시다.
1990 년 4월, 부활절방학을 맞아 베를린에 살고있는 (현재도 살고있는) 친구 숙의
초대를 받아 아이 둘(14살,10살)을 데리고 서베를린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1973년 12월에 서베를린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베를린 땅을 다시 밟았다.
무엇보다 서독에서 기차를 타고 동독을 지날 때는 이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기차안에서 웃지 못할 일화가 있었으니….
장벽은 무너졌지만 아직은 통일이 안된 동서국가였다.
서독의 검문소 지역에선 신분증을 보자는 사람이 없었다. 만사 오우케이였다.
그런데 기차가 동독의 검문소에 들어서니, 경찰이 기내로 들어와선 한사람 한사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이걸 어쩌나! 아침 일찍 집을 떠날 때 다른 핸드백을 들고오는 바람에 나와 내아이 둘은
신분증이 없었다.
우리 셋의 여권을 다른 핸드백에다 두고 깜박했노라고 사실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여권을 지참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았나요?“ 하고 경찰이 물었다.
“우리가 쾰른에서 베를린 가는 기차를 갈아탄 후였어요.
그런데 기차는 앞으로 가지, 뒤로 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럼 베를린은 얼마나 있을 계획이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어쩔 건가요?“
“아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린 일주일 가량 서베를린에 머물것이고,
도착하는 대로 서독의 남편에게 전화해서 여권을 등기로 부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당신의 아이들이란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이 아이들하고 내가 닮은 것 같지 않나요? 설마 내가 유괴범으로 보이지는 않겠지요?“
라며 너스레를 떨어서 기차 안 사람들이 모두 웃기도 했다.
“그래도 핸드백에 한번 더 찾아보세요. 무슨 증명할 만한 것이 있을지?“
“아, 여기 Volkshochschule(직역 하자면 국민대학)에 영어코스와 수영코스에
등록한 영수증이 있네요. 그리고 우리집 주소도 있고요.“
작은 종이 조각이 그때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줄줄이야 상상이나 했을 까만,
무엇 보담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동독의 까다로운 공산체제가 관대해 졌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내가 내민 종이 조각 하나로 오케이 하며 물러간 후,
같은 칸에 탔던 독일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옛날 같으면 절대로 통과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벌금을 많이 물거나 아님 비자신청한다고, 시간이 많이 소비되어 다른 기차를
타야했을 것이라고.
그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30 주년이라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대한민국,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온 이북의 실향민들이 모여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던 아바이 마을.
아래의 영상들은 고국방문시 6월 초, 속초에 3박 4일 머물며
아바이 마을을 관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래의 나룻배를 타고,
쇠사슬로 된 줄을 사공이 아닌 손님(남자분들)들이 당기며
건너편의 아바이마을로 가는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었네요.
아바이 마을의 전통적인 음식인 오징어 순대는 맛이 있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실향민 문화축제가 속초의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첫댓글 슈냐님은 반세기를 넘게 서독에서 통일독일에서 살아오면서 많은경험과 이념이 다른국가의 분단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느낀 바를 생생하게 들려줘서 잘 읽었습니다.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며.. .
분단의 비극으로 인한 동서독의 이야기와
아바이마을의 실향민을 잘 대조적으로 표현하였군요.
속초여행도 먼 기억의 추억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냐님 글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우리가 베르린에 도착했을때가 1970년 이었으니 내년이면 50주년이 되네요 그때는 꿈 많던 20대 였는데 어느덧 70대 할머니가 되었네요~~ 그시절 철조망 장벽길을 우리 자전거부대 아가씨들이 신나게 달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었는지 아니면 용감했는지 아찔한 생각이던다 얼마전 책자를 보니 베르린이 많이 변했다고하데 그리고 세계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라고 하던데 아무튼 그 곳 에서 3년동안 살았다는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네 우리나라도 통일이되어 남 북이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 추운 낧씨 감기 조심하고 헤르 바이난드 님께도 안부를 전한다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