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 강일순이 잠든 오리알터에서 화엄의 세상을 그리워 하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오리알 터에 증산 강일순의 무덤이 있다. 그의 딸 강순임이 콘크리트 무덤을 만들어서 증산 강일순을 따르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지만, 어쩌다 찾아가 그 묘소를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가 않다. 증산을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그의 시신을 가져가고자 송사가 끊이지 않아 콘크리트로 무덤을 만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조선의 민중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남조선 뱃노래를 부르며 이 나라 이 땅으로 올 것을 예언했던 종교 사상가인 강일순은 살아있을 당시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는 해원시대라 몇 천년동안 남자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여자의 원을 풀고 이 뒤로는 새로운 법을 다시 만들어 여자의 말을 듣지 않고는 함부로 남자의 권리를 행하지 못할 것이다”(대순전경 5장)
오늘날의 표현을 빌린다면 여성해방선언을 했던 강일순은 “부인이 천하의 사업을 하려고 염주를 딱딱거리는 소리가 구천에 사무쳤으니 장차 여자들의 세상을 만들고 동시에 남녀동권의 시대가 되게 하리라”(대순전경 3장)고 예언했다. 이것은 온갖 구박받고 천대받고 고통 중에 있던 사람들이 후천개벽의 주체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천先天에서는 하늘만 높이고 땅은 높이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지덕地德이 큰 것을 모름이라. 이 뒤로는 하늘과 땅을 일체로 받들어야 하느니라.”라고 말한 강일순이 자기 자신을 옥황상제玉皇上帝라고 말한 것은 그와 같은 처지의 밑바닥 민중 모두가 다 옥황상제요 후천개벽과 천지공사 즉 우주 대개편 대개조의 집행자요 주체란 말이었다.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인 촌산지순村山智順 이 차경석을 만나 주고받은 문답기問答記에서 촌산이 물었다. 옥황상제玉皇上帝와 강증산과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입니까? 이 물음에 차경석은 “교조가 곧 옥황상제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촌산이 “증산 선생이 인간으로 태어나심이 곧 옥황상제가 화현化現하신 것입니까?” 차경석은 그 물음에 “그렇습니다. 교조께서 생존시에 내가 옥황상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촌산은 다시 “교도敎徒가 독실하게 교를 믿으면 상제上帝와 동양同樣으로 됩니까 안 됩니까?” 이때 차경석은 “태을주太乙呪를 송독誦讀하여 개안開眼이 되면 옥황상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육체는 이 세상에 있어도 신神은 옥경玉京에 가서 문답問答하는 법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인간 자신이 세계의 주인인 옥황상제라고 스스로 깨닫기만 한다면 하늘에서 이미 끝나가고 있는 천지공사가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때 후천개벽의 주체는 밑바닥 민중이고 그 개벽의 주체가 역시 옥황상제 미륵, 한울님, 부처님을 비롯 농투산이, 걸군굿, 초라니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 등 천대받는 민중들이라는 것이 증산사상의 핵심이었다.
천대받는 민중이 한울님
“부귀한 자는 빈천함을 알지 못하며 강한자는 병약함을 알지 못하고 유식한 자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빈천하고 병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겠노라. 그들이 곧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강일순은 1909년 죽음을 앞두고 한달 동안을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가끔 한두 모금 소주를 마셔 목을 적시며 온갖 병을 다 앓은 채 쓰러져 갔다.
그는 “현실 속에서 후천개벽의 날은 아직도 멀어서 다가오지 않았으니 중생은 고통이 심하다. 내 스스로 민중의 밥이 되어 민중의 모든 고름 모든 창병, 모든 성병, 모든 옴, 풍, 부스럼, 연주창, 두통, 복통, 학질, 천식 등 온갖 고통을 다 한 몸에 스스로 짊어지고 가노라”고 말하였다. 1909년 6월 24일 강일순은 구릿골에서 파란 많았던 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 때의 상황이 대순전경 9장 30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9년 6월 24일에 대성께서 형렬亨烈에게 천대받는 민중들이 한울님 명하사 밀수蜜水한 그릇을 가져오라 한 후 그 물을 마시시고 사시巳時에 모든 종도들이 문 밖으로 물러간 후에 화천하시니 수壽는 39세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실망한 채 그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버렸으며, 몇 사람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에서는 강일순이 평소 말했던 것처럼 재림할 것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유해는 제비산 건너편 장탯날 기슭에 초분으로 모셔졌으며, 그의 관에는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느니라”라는 말만이 쓰여져 있었다. 그 뒤 강일순의 유해는 신도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법정싸움까지 벌리던 와중에서 팔이 하나가 없어진 채로 그의 딸이었던 강순임이 세운 증산 법종교의 콘크리트 무덤 속에 안치되어있다. 그의 죽음 뒤에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7~80개에 이르는 교파를 만들었다.
그가 잠들고 있는 오리알터에서 금평저수지 너머 구릿골에는 그가 9년 간에 걸쳐 천지공사를 행했던 집이 허물고 새로 지어지는 와중에 어수선하기만 한데, 언제쯤 모든 사람들이 화평해지는 화엄의 세상이 오기는 올 것인가?
2023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