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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1,5―2,2)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빵의 기적.
말씀의 초대
사도들은 매질을 당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의회에서 물러 나왔지만,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라고 날마다 선포한다(제1독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고,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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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사도들을 내버려 두자며, 그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없애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최고 의회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놓아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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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은 최고 의회에서, 사도들의 계획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이라며 내버려 두자는 의견을 낸다. 사도들은 매질을 당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의회에서 물러 나왔지만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날마다 선포한다(제1독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고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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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의회에서 대사제가 사도들을 신문하자 사도들은 자신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한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 말에 격분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곧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므로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께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파스카 신비를 어떻게 삶에서 실천할지 묵상해 봅니다. 제1독서는 율법 교사이며 바리사이였던 가말리엘이 최고 의회에서 발언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타르수스의 사울, 곧 바오로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뒤 사도들의 활동이 본격화되자, 유다교 지도자들은 술렁거리며 흔들립니다. 이런 배경에서 가말리엘이 연설을 합니다. 만일 사도들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없앨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기존 종교 형식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가능성을 열어 놓고 유연성을 갖춘 합리적이며 겸손한 태도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들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는데, 주님의 갈릴래아 공생활의 정점이자 종결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부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라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제국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럽게 되실 하느님의 종이시기에 군중의 기대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일상에서 위기와 어려움에 부딪히며 살다 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모습에 사로잡혀, 자칫 모든 불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듯이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에서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어쩌면 멀리 돌아가는 길, 곧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영광의 길일지도 모릅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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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의 도시 벳사이다로 가십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던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요한 5,9 참조) 목격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욕망을 채우는 길이 아니라, 당신을 내어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시험하시며 당신의 길을 뚜렷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필립보는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으며, 그 돈을 누가 내어놓을 것이며, 그렇게 한들 턱없이 모자랄 것이라고 계산하는 세상의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가진 보잘것없이 적은 것으로,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논리를 보여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특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혼자 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시는데, 부자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시간, 재능, 그리고 재물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이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어놓은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내어놓음, 감사의 기도, 그리고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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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최고 의회 의원들은 분노합니다. 첫 번째 심문에서 위협하는 정도로 그쳤던 의원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순교의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지혜로운 말로 광포한 의원들을 달래면서 사도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기원 전후 무렵 자유주의적인 견해와 관용적 태도로 유명하였던 율법 학자 힐렐의 손자로서,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가말리엘은(사도 22,3 참조),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을 내버려 두자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움직임이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겠지만,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다면 의회가 결코 없앨 수 없으며, 어쩌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께 맞서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고 의회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예루살렘의 첫 교회 공동체를 막았지만,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하였음이 틀림없으나, 더욱 분명한 힘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입니다.
복음 속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살펴봅니다. 물론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사도들의 남다른 활동도 기적의 재료와 도움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바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자, 사도들은 스승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더욱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을 막으려는 온갖 악에 맞설 수 있도록 담대함과 열정을 허락하시는 성령께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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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산술적인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실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런 기적 이야기라면 굳이 요한 복음이 이 사실을 장황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필립보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먹일 빵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예상대로 필립보는 세상의 셈법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안드레아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가져온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 저자의 의도는 다릅니다. 진정한 기적은 빵을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입니다. 빵은 한순간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지만,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먹을 빵만 챙기고 남에게 관심도 없던 이기적인 사람을 변화시키면, 그가 일생 동안 수많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은 유다의 지도층을 혼란스럽게 만든 제자들을 붙잡아 처벌하는 어리석음보다는, 하느님의 선택을 지켜보고 결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옳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한 사도들은, 이런 확신을 실천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시편 저자의 노래가 더 감미롭게 들리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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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웠을 때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빵의 기적으로 최후 만찬을 통해 이루어질 성체성사를 미리 보여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든지 시간이 없어 하느님께 기도할 여유가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외진 곳까지 찾아간 군중은 자기가 처한 어려움에도 용기 있게 하느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께서 쓰시도록 맡기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은총을 받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성만 있으면 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먹이고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굶주리지 않게 먹이실 뿐 아니라 차고 넘치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군중이 먹고 남긴 열두 광주리의 빵 조각은 풍요로운 은총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적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은 결코 굶주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슴 벅찬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풀밭에 자리 잡은 군중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 풀밭에 우리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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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태도이지요.
그렇지만 안드레아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소년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소년이 가진 보리 빵은 당시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만일 그 소년이 자신의 것이 보잘것없다고 예수님께 드리기를 부끄러워하며 숨겼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였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던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일단 예수님의 손에 쥐어지자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받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유용하게 쓰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각자의 능력이나 재능은 따지고 보면 보잘것없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작은 정성과 희생이라도 이를 주님께 바치면, 엄청난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주님께 드리려 하지 않기에, 우리 주위에 이런 나눔의 기적이 연달아 일어나지 않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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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자 유다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마음먹습니다. 이처럼 부활에 대한 증언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는 부활을 믿고 증언하는 것이 목숨을 바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부활을 참되게 증언하는 것은 여전히 모험에 속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은 자주 비웃음과 무시, 조롱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또한 부활을 더욱 생생하게 증언하려는 사람은, 언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태도로 그 증언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눈길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 왜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모험일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습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복음은 주님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이시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그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증'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온 말씀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이 확증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위에서 온 말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을 선포하는 것은 언제나 증언이 됩니다. 증언은 듣는 이에게 마지막 선택을 맡긴다는 점에서 불확실과 모험을 감수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증언이 놀랍게도 세상의 진리만을 좇던 사람들의 마음을 연다는 것을 자주 체험하곤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은 늘 모험이지만 그 모험 안에서 우리는 말씀의 참됨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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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기적의 음식은 어린이의 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아이의 저금통만 달랑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희망할 수 있는 여건에서는 아무라도 희망합니다. 하지만 어딜 봐도 ‘불가능한 상황’이면 쉽게 기대를 갖지 못합니다. 누가 봐도 끝난 처지에서는 신앙심이 아니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은총입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의 반전’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역시 ‘부활 사건’입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에 ‘축복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주님을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기도’와 ‘매일의 선행’입니다. 자주 성체를 모시는 성사 생활입니다. 좌절은 언제라도 유혹입니다. 가능성이 사라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오늘 복음 말씀을 읽어 봐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숨어 있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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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을 먹이시려고 하자,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아이’가 가진 음식이 안드레아의 눈에 뜨였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를 가진 사람이 어디 아이 하나뿐이었을까요? 더구나 아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호수 건너편까지 오면서 먹을 것을 그만큼 챙겼다면, 어른들은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어른들은 예수님께 자기의 것을 봉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는 도저히 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도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이의 것만이 예수님께 봉헌되었습니다. 계산도 빠르고 앞가림도 잘하는 어른들이 자기의 것을 숨겨 두고 있을 때, 아이의 것은 예수님께 봉헌되어 가치 있게 쓰였습니다. 아이는 계산도 하지 않은 채 예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것을 바쳤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보잘것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분의 힘을 믿고 기쁘게 봉헌한다면 참으로 가치 있게 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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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말씀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사 먹을 곳도 마땅찮았습니다. 더구나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몰려간다면 아수라장이 될 일입니다. 그들은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러기에 기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언제라도 기적은 가능해집니다.
그들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먹었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갖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이 ‘줄어들지 않고’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보리 빵과 물고기가 계속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놀라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모시어 임금으로 섬기려 했습니다. ‘하늘의 권능’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원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곳에 그분께서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언제든지 기적도 함께합니다. 복음의 교훈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겠습니까? ‘매일의 기도’와 ‘매일의 선행’과 ‘자주 성체를 모시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희망이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언제라도 달려가면 뵈올 수 있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먼저 찾아내십시오. 그분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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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배불리 먹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한 어린이가 들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보리 빵이라 해서 오늘날의 빵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양새도 맛도 요즘과는 다릅니다. 개떡에 가까웠을 겁니다. 그런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오천 명 이상이 먹은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손을 거치자 기적의 음식으로 바뀐 것이지요. 주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별 볼일 없는 이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받았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만 믿으면 교만으로 흐릅니다. 예수님의 힘을 지녀야 하늘의 기운이 감쌉니다. 한 사람의 입교로 집안 전체가 믿음의 길로 들어선 예를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이라는 힘, 세력이라는 힘, 신분이라는 힘만 지니면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돈도 희망도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안에 있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먼저 찾아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엄청난 힘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사회 심리학자 패터슨은 정상적인 사람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의 수가 20~30명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경우는 10~12명 정도, 더 나아가 정신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은 경우에는 4명 이하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의 숫자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다른 이와의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관계 안에서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고, 자기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인생에 왜 연관을 짓느냐는 것입니다.
가장 힘이 없던 인간이 만유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함께하는 관계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의미 있는 관계의 수를 늘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기적 모습이 아닌 이타적인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즉, 사랑의 삶만이 자신을 정상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잘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의미 있게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표징을 통해서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가 모두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는 사람들이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나눔과 희생이 동반되는 관계를 통해서 만든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가 주님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아이가 보여준 나눔과 희생이 주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었음에도 남긴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어놓을 수 있는 나눔과 희생, 이것이 주님의 차고 넘치는 사랑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해야 이 세상 안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의미 있는 관계가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한다(공자).
공부할 자유
공부를 싫어한다면서 전혀 공부하지 않는 학생을 보면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소리 한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공부를 어떻게든 시켰습니다. 공부해야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른들은 공부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당사자인 학생은 자신의 의지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서 힘들게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도 세계 안에는 ‘공부할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청소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서는 신발도 사치품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부분 맨발로 다닌다고 합니다. 이 절대적 가난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공부의 기회가 주어지기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 자유가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 밖에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인데, 그 조건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것…. 행복해질 자유가 있다는 것…. 모두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하늘 아버지!” 이 단 한마디의 기도로 저는 치유받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펼쳐진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예표하는 은총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받았던 감동과 경이로움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래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몰려들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기적의 현장에 함께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람들은 잠깐동안이었지만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실체를 목격했고 만끽했습니다. 그들이 확인한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풍요로움이었습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모든 것이 다 충만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쳤습니다. 가련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환대와 자상함이 흘러넘쳤습니다. 근본적 결핍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간을 향한 육적인 양식인 빵과 물고기가 원도 없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천상 대축제에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았습니다. 빵과 물고기는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풍성히 나누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공평하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목격하게될 하느님 나라의 풍경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벅찬 감동을 넘어 황홀함에 휩싸인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시도했지만, 예수님께서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홀연히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고 보잘것 없는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으실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천상천하의 크신 왕, 만왕의 왕, 세세대대로 다스리실 영원한 왕이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군중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뒤로하고 산으로 오르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나만의 예수님, 우리 공동체만 사랑하시는 예수님, 우리 민족만의 승승장구를 도우시는 예수님으로 여긴다면, 예수님의 본래 위치를 격하시키는 웃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셨을 때의 일 기억하십니까? 주님이심을 알아차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털썩 엎드려 그분 두발을 꼭 끌어앉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 꼭 끌어앉았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을 붙잡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대신 속히 갈릴래아로 가서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바람같은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적 노력이나 지성으로 잡거나 포착할 수 없는 크고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베푸시는 기적 앞에 깊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업적이 찬미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 앞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밤 허무함이 극에 달하여 말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불현듯 제 영혼 깊은 곳에 기도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외치는 소리 같은 원초적인 기도로, 어쩌면 그때가 태어나 처음 절실하게 기도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나면서 소리를 지르는 듯한 매우 자연스럽고 순간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때의 기도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 아버지!> 이 단 한마디의 기도로 저는 치유받았습니다.”(하레사쿠 마시히데 신부,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77가지 기도’, 생활성서)
과감히 기적에 도전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요한복음의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도 믿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필립보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당신께서 먹여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에게 하라고 하는 것 같아서 절대 못 한다는 의미로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조금 믿음이 있었던 사도는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본 것으로 보아 불가능하다고만 하는 필립보보다는 믿음이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적을 한 번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은 누구의 믿음으로 이뤄진 것일까요?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오늘 복음으로 말하자면, “저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고 있습니다. 당신이 좀 먹여주시지요.”라고 당신이 먼저 청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일까요? 가장 완전한 믿음입니다.
그 어떤 기적도 본인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해주십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그 믿음이 성모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었기에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많은 이들을 먹일 양식을 얻어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수준의 믿음이 내가 곧 그리스도이기에 불가능이 없다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 관한 사례를 찾다가 한 개신교 선교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짧은 설교 내용 동안 어떻게 이렇게 맞는 말만 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옮겨봅니다. 오늘 기적을 행하라고 했을 때 제자들의 심정을 이입시켜보며 읽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 기적의 대상은 5천 명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이었습니다.
“호주에 가서 말씀을 전할 일이 있었어요. 몇몇 교회를 다니는 가운데 많은 교회에서 부활에 대해서도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도 믿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보통은 제가 그렇게 안 하는데 가야 할 교회 목사님하고 아침 식사를 할 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분들에게 정말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몸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 좀 치유 기도를 할까요?’ 했더니 목사님께서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저녁에 몸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오늘 하느님께서 일해주시겠다는 그런 어떤 기대감이나 감동이 생기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기도는 없는 거로 하고 조용히 들어가자.’ 집회 때 나와서 말씀을 전하고 나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앞자리에 앉아계신 담임 목사님이 ‘아픈 사람들 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 빨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큰 소리로 무조건 기도하세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오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일깨워줄까?’ 했던 사람이었는데 보니까 제가요, 믿음이 없더라고요. 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관심이 나의 믿음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솔직히 저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지 고백할 수 있는 게 있는데, 하느님은 이 믿음 없는 저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렸어요. 그날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셔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제가 믿음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장벽. 이것이 없어지고 무너지고 길이 평탄케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도 믿음의 역사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역사가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요, 여러분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자기에 대한 관심, 내가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 어떻게든 나를 지켜야 한다는 집착’, 그것이 뿌리째 뽑혀서 바다로 던져지는 것. 그게 진짜 믿음의 기적이에요. 왜냐하면요, 나에 대해서 갇혀 있고, 나에 대한 관심이 나를 이끌어가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 믿음의 역사를 향해서 한발을 떼지 못하게 돼요. 내가 어떻게 내일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내 앞길을 챙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게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이에요.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출처: ‘믿음에 대하여’,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CGNTV SOON, 3분 메시지’]
과감히 기적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기적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자아를 죽이는 참 기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 게 가장 완전한 기적입니다. 지금 은총의 통로로 쓰이는 내가 때가 묻어 막혀있는 것처럼 보여도 물이 많이, 그리고 오래 지나가면 그 더러운 오물은 물에 씻겨 깨끗하게 됩니다. 내가 이웃들에게 좋은 기적의 선물을 주려는 마음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나에게 더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왜 5천 명을 먹이실 때 먼저 제자들을 시험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누군가 치유의 기도나 병자 성사를 달라고 하면 저도 겁이 납니다. 치유가 되지 않으면 저의 믿음이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합니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겸손해져서 좋고 하느님과 청한 사람은 안 좋습니다. 하느님은 그러니 당신과 청하는 이를 위해서라도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그렇게 치유의 기도는 결국 나를 깨끗하게 하고 치유합니다. 그러니 되든 되지 않든, 기적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이 용기가 나의 믿음을 완성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경로의존과 경로독점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경로의존이란 기존의 관습과 질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차를 모는 시대에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채찍을 오른손으로 들고 마차를 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과 질서 때문에 몇몇 나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을 오른쪽에 마련하였습니다. 자동차는 더 이상 채찍으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관습과 질서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이 왼쪽에 있습니다. 그것이 편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경로에 의존하는 나라는 새로운 도전과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인터넷 시대에 도장은 더 이상 개인의 정보를 대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도장에 의존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역시 경로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경로에 의존해서는 쉽게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선진국들도 코로나19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코로나19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로에 의존하기 보다는 혁신을 도모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 혁신이고, 발상의 전환입니다.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성전을 새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창녀, 나병환자, 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기존의 질서에서는 죄인으로 취급받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경론에 의존하기보다는 경로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경로를 독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경로를 독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경로의 독점은 정치에서도 드러납니다. 많은 독재국가들은 경로의 독점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 결과 자유를 억압하고, 저항하는 사람을 탄압합니다. 미얀마의 군사독재도 경로의 독점에서 생겼습니다. 군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경로의 독점은 많은 경우에 부정과 부패에 이르게 됩니다. 작년에 미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Black Lives Matter'는 경로의 독점에 대한 저항입니다. 미국은 백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은 미국 국민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사회에는 경로를 독점하려는 흐름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이유는 경로를 독점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경로를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는 경로의 독점이 아닙니다. 나눔과 섬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과 폭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나눔과 사랑으로는 충분히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 땅을 녹이고, 파란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봄 햇살이면 충분합니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말 예수님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구원의 메시아이시고 임금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은 정말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의 임금이 되셔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억지로라도 그분을 임금으로 모실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에 공성신퇴(攻成身退)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곧 최고의 자리에서 미련 없이 떠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셨을 때 과감히 산으로 물러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어쩌면 박수칠 때 떠나는 모습과도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살 수 있었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엄청난 기적을 통해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군중은 그 하느님 사랑에 대해 감사드리기 보다는 자신들의 인간적인 복락을 꿈꾸며 예수님을 세속의 임금으로 만들려고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욕심을 아시고 예수님은 그 자리를 과감히 떠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늘 언제나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만약 인간적인 욕심이 나를 유혹하고 붙잡으려 할 때 우리는 주님의 모습처럼 과감히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천 명을 먹이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2021. 4. 16. 금)(요한 6,1-15)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1-6).”
여기서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병을 고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만일에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고, ‘영혼 구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그래도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몰려든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파스카’를 언급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은 사람들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새로운 ‘파스카의 빵’이며, 새로운 ‘만나’”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은, 빵을 판매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저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야 합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필립보 사도에게 물으셨는지, 또 왜 그를 시험해 보려고 하셨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여기서 ‘시험해 보다.’ 라는 말은, ‘믿음을 끌어올리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 물으신 것은, 뒤의 14장에 나오는 필립보 사도의 요청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9)”
(어쩌면 필립보 사도는 평소에 늘 ‘아버지’를 직접 뵙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 하신 질문은 사실상 모든 제자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제자들의 믿음이 더욱 발전하고 성숙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계획하셨던 일이라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신 일입니다. 그 계시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7-9)”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과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 “저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신 일, 즉 ‘하느님의 권능’으로 일으키신 기적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느님의 힘’으로 해내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의 재료가 되긴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아이의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아이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응답한 일, 또는 일으키려고 하시는 기적에 동참한 일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 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조를 재건할 왕, 바로 그런 인물이 당시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입니다(요한 18,36).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지만(루카 17,21) 세속의 나라들과는 다른 나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직접 뵙고 섬기면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묵시 22,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육신의 배부름’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6,27).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은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상의 인생은 영원한 나라로 가는 짧은 과정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만 희망하면서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 - “건들이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것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잘 있는 것도 말하지 않아도 좋을 때 말하지 않는 것도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때에 맞는 적절한 인사나 말도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특히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어제 수녀원 피정 지도를 끝내고 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떠나기전 아침식사전 감사인사와 더불어 축하노래, 감사카드도 선물 받고 잠시 행복했습니다. 이 또한 저를 위한 수녀님들의 분별력의 지혜이겠습니다.
“존경하올 이수철 요셉 신부님,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영적 감수성을 잃지 않으시고, 맑은 마음과 눈으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시는 신부님을 뵈올 때 마다, 창설자 신부님을 뵙는 듯 행복했습니다. 주님의 성찬으로 주님과 일치하는 천상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1.4,15 –금, 은경축 피정자 일동 드림-”
저에게 최고의 선물인 감사카드였습니다. 제 프란치스코 수도명을 요셉으로 착각했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셉, 베네딕도, 프란치스코 모두가 제 사랑하는 성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무아無我 방유룡 창설자 신부님에 관한 두 권의 책을 가져오며 저를 돌봤던 수녀님께 감사와 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이겠습니다.
“수녀님, 그동안 환대와 배려, 보살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 편안했고 행복했습니다. 접견실에 좋은 책 많이 있어 2권 가져 갑니다. 이렇게 말씀드려 미안합니다. 잘 보고 수녀원 위해 많이 기도해 드릴께요!”
디테일에 강하다는 것,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분별력의 지혜를 다하는 것이겠습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력이요 분도규칙의 특징입니다. 분별력의 대가 성 베네딕도입니다. ‘그분은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로 저술하셨다.’라고 ‘베네딕도 전기’에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언급입니다. 규칙서중 ‘64장 아빠스를 세움에 대하여’ 라는 내용중 분별력에 관한 부분을 나눕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얼마나 자상한 성 베네딕도의 분별력의 지혜이자 사랑인지요! 모든 영성대가들의 특징은 탁월한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율법교사 가말리엘 역시 분별력의 대가들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군중들의 유혹에서 예수님은 사막에서 악마의 유혹(마태4,8-9)을 연상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무욕의 지혜, 이탈의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참으로 초연히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느님 안 제자리로 피신하는 분별력의 대가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사도들에 대한 가말리엘의 분별력의 지혜 또한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님 부활을 증언하며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듯한 사도들이 정말 고치덩어리였을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선동자 이자 반란자인 테우다스와 유다의 두 사건을 예로 들면서 사도들에 대해 명쾌하게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분별력의 대가,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의 은총 선물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께 맡기고 건들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때가 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며 잘 바라보는 것, 바로 이것이 일상에서 꼭 참고해야할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성급히 결행했다가 후회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 합니다. 위정자들의 경우 잘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 잘 못 썼다가 낭패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일이든 사람이든 일상의 삶에서 분별력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하지 않습니까? 분별력의 지혜의 결핍으로 초래하는 혼란과 손실은 너무 막심합니다.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탐욕이, 교만이, 분노가, 어리석음이 사라질수록 빛을 발하는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가르침이 아니라 표징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 그러한 가르침을 받는 은혜를 입고서도 그들은 가르침보다 기적에 마음이 더 끌렸습니다. 믿음의 수준이 낮았음을 알려 주는 표시지요. 기적은 믿는 이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군중의 태도는 이와 달랐습니다.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8-29)라고 쓰여 있으니까요.
인간 수학에 머물지 마십시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무에서 유를 창조합니다. 모든 것 하느님께 맡기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놀체인 양업’을 19년 10월 시작했습니다. 지금 1년 6개월을 살고 있습니다.
어려운 코로나 상황, 함께 일할 분들의 만남, 재정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갈까? 모두가 걱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살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났고 상상 외로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믿었습니다. 잘 이루어 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나에게 그런 어려움의 시간들을 극복한 좋은 선경험이 숱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우연이라기 보다 필연이 늘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것, 미미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하나 둘 모아져 갔습니다.
‘빵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 한 입 거리 밖에 되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놓고 인간 수학을 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장정 5천명을 풀밭에 앉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앉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하지? 고개를 갸우뚱 하며 그냥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빵 다섯개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손수 나누어 주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십니다. 군중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았습니다”(요한6,1-15참조). 이는 인간 수학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그 힘을 기적이라 말합니다. 나는 매일 인간의 생각을 넘는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앞에서 일어난 ‘빵의 기적’을 보고 있지만 여전히 풀밭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아등바등 일을 놓고 걱정합니다. 땅만을 보고 인간 수학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놀체인 양업’에서 놀랍게 채워감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봅니다. 하루를 마치고 날마다 충만히 이루어 주시는 살아계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를 파란 풀밭에 앉혀 주시고 평화롭게 우리의 바람을 채워주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4월21, 저녁 7시 이전 개소식 감사미사를 이정골에서 봉헌합니다.
세상 이겨내려는 신앙인들 참 위대하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보리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지만 혼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입고 먹고사는 것이 주 관심사이고 하늘 표징엔 무심 했었죠.
오늘도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변하지 않고 하늘 뜻에는 관심 없습니다.
더 비싸고 좋은 옷 입고 잘 먹고 좋은 차 좋은 집에만 관심 두고 살죠.
인품 품성 인격 같은 사람의 주체인 심성엔 등한시하니 한심한 일이죠.
사람 됨됨이를 위해 진리인 하늘의 뜻 어디서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요.
도덕성 잃고 양심 눈감고 사는 세상 이겨 내려는 신앙인들 위대합니다.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렸더라면 구원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무덤을 경비병들이 철저히 지킨 사실과 예수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긍정적인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들도 구원의 선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하는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사도들을 미워하고 일방적으로 박해하는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말리엘 교사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서 선동을 일으킨 테우다스와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선동하는 그 사람은 처형하자 그 추종자들이 다 흩어지고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선동하는 예수를 처형했으니 그 추종자들도 흩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5,38-39)
유대인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끝까지 따르지는 않고 박해의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지적했듯 예수님과 사도들을 처형하면 흩어지고 없어질 줄 알았는데, 점점 그 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늘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에 두려움과 유대교를 떠나는 이들을 단속할 필요가 있어서 점점 박해의 수위를 높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평가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유대교를 능가하고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열려있으면서 세기와 세기로 이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가말리엘을 일시적으로 수긍해서 사도들을 매질한 다음 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기가 꺾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있게 성전이나 이집 저집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은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현실의 배고픔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에서 많은 군중을 가르치셨는데 지치고 배고픈 군중을 보시고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것들을 나누어 주십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전해 주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이야기의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이름 없는 아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가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는 데에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들을 드시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서나 시편저자들이 전하는 종말론적 천상잔치의 시작이며 완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는 먹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하듯 풍족하고 넘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친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인자한 목자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저자는 빵의 기적의 이야기의 마무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면 초심의 마음이 남아나기가 힘듭니다. 대개는 망가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세상 돌아가는 데에서 봅니다. 특히 정치판이 그렇지요.
하느님과 대적하지 않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저는 이곳 오류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수도자 그것도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을 사는 프란치스칸 수도자이기에 수없이 이사를 다녔고 그렇기에 이사한 것을 가지고 뭐 특별히 생각할 것 있을까 생각도 되지만 이번 이사는 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고 또 오늘 사도행전과 연관이 있을 것도 같기에 여러분과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수도원의 소임 이동에 따른 이사였고 인사이동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많이 이사를 다녔어도 이사의 설움을 몰랐는데 이번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그 이사의 설움을 저희도 좀 겪었고, 덕분에 집 없는 사람들의 설움을 조금이나마 같이 느끼며 동병상련할 수 있었습니다.
집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말을 들었을 때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분노의 감정이 며칠 제 마음에도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수도원의 인사 명령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왜 집주인의 퇴거 명령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지 반성이 되었고, 이어서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들이 리보또르또에서 쫓겨난 얘기가 생각나 이번 이사를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의 첫 공동체 장소가 보통 포르치운꿀라라고 하고, 그래서 우리가 포르치운꿀라 행진도 하곤 합니다만 엄밀히 얘기해서 첫 번째 공동체 장소는 리보또르또였지요.
프란치스코와 첫 동료들이 처음으로 리보또르또의 헛간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 농부가 소를 몰고 와서는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을 쫓아냈고. 그래서 쫓겨간 곳이 포르치운꿀라였던 것이고 그래서 이곳이 프란치스칸의 영원한 고향이자 못 자리가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의 많은 일이 순전히 인간이 한 짓 같지만 길게 보고 크게 보면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현재적으로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그것을 다행히도 며칠 만에 깨달을 수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인을 통해 이곳으로 이사케 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하느님이 왜 이곳으로 보내셨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를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게 보고 크게 보면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힘이 있을 때는 그것이 그의 뜻대로 다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뭐든 다 대통령 뜻대로 될 것 같고 그래서 독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오래 갈 것 같은 권력도 풀잎 끝의 이슬입니다.
우리나라 군부 독재가 그랬고 미얀마의 군부 독재도 그리될 것이며, 백팔십 석을 차지하며 오래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현 정권도 국민의 뜻,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지금이라도 겸허히 받들지 않으면 이번 선거에서 볼 수 있었듯이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지 사람은 영원하지 않으며 사랑이 영원하지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 지도자들뿐 아니라 가정이든 직장이든 단체든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힘으로 뭣을 하려는 사람은 사랑과 대적하기에 하느님과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겠습니다.
비움과 채움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이죠. 그만큼 예수님은 매력적인 분이셨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매력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철저한 비움과 완벽한 채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셨던 거죠.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많은 군중을 보고 어떻게 저 많은 사람을 다 먹일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그리고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여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고작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밖에 없었지만,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을 내려놓자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가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고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원래 내 것은 하나도 없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감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비움을 통해 세상에서는 가난하지만 은총으로 가득 차 하늘나라의 부자가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으로 배부른 하루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의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십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3)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빵의 표징이 "파스카가 가까운 때"에 일어났다고 시간적 배경을 특정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마지막 만찬 때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사건과 연관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군중은 그 수가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무리이고, 장소는 장터나 민가가 아닌 "산"입니다. 그 많은 군중을 먹이기 위해서 빵은 물론이고 돈도 있어야 하는 상황이지요. 예수님은 "어디"를 물으셨는데, 필립보는 빵값을 헤아리고 안드레아는 가진 소량의 것과 군중 수를 대비하며 회의적으로 답하지요. 그걸 보면, 어느 조건도 만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불가능을 먼저 떠올리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장소가 어디건, 입이 몇이건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시려고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신 피조물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현실적인 제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대한 현실 앞에서 주저하고 회의하는 인간의 조바심과 한계의식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 계획을 막지 못합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요한 6,10)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리 잡고 앉게 하신 곳에는 풀이 많았다고 합니다. 복음사가가 굳이 공간적 배경까지 기술한 이유는 이 말씀이 우리를 시편의 어느 아름다운 구절로 데려가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시편 23,1-2)빵의 표징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푸르른 목초지로 이끌어 쉬게 하시고 배불려 주시는 참 목자이심을 부각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유다인들에게 주님께서 한 현자의 입을 통해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8-39)가말리엘의 이 말은 그가 감정적으로 사도들을 시기하거나 경계함 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말리엘은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오로의 옛 사울 시절 스승이었지요(사도 22,3 참조).
유다인들이 아무리 금지하고 위협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해도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의지가 이루어지는 순리이고 섭리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주님께서 무언가 하시려고 할 때 많은 장애물이 드러남을 체험합니다. 금전적으로, 시간과 공간적으로 현실적 한계가 크게 보이면 아무리 좋은 일이고 주님의 뜻으로 여겨져도 주저하고 회의에 빠져 서로 발목을 잡기도 하지요.
그럴 땐 한 걸음 물러나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고 그저 바라보는 것도 지혜이고 겸손일 겁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막으려 해도 어림없을 것이고, 그분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까요.
장정만도 오천 명에 다섯 개 빵과 두 마리 물고기는 분명 터무니없는 불균형이지만, 그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께 감사로 바쳐질 때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세대를 거듭해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는 양식이 되고, 그분과 우리를 일치시켜 주는 것처럼 말이지요.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빵의 표징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의 방식과 하느님 방식의 차이를 마치 쐐기를 박듯 명백히 대조시켜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기들 욕망과 의도에 따라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 할 때가 종종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하지 않으면서요. 때로는 자신의 업적과 성취가 하느님 의지를 우선하는 것처럼 일단 밀어붙입니다. 주님께는 참 불편한 모습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이 말씀에 머물러 하느님의 뜻을 관상하며 섭리에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일이라도 사심없이 기도하고 격려하며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바를 함께 기뻐하면 더욱 좋겠지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결국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시고,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요한 10,10) 해 주시려는 것이 그분 마음이니까요. 이것이야말로 참 목자의 양들인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그분이 하시려는 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먼 길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찾아와준 고운 벗들
끝까지 정성껏 보듬는 것
고달픈 세상살이에 잠시 잊힌
서로를 향한 마음을 새로 일깨워
서로를 품도록 너르게 하는 것
큰 것에 길들여진
헛된 바람을 스르르 허물어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에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루게 하는
감사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
함께 배고픔의 아픔도
함께 배부름의 기쁨도
모든 이가 같이 누리는 것
오직 나를 향하여
굳게 닫혀있던 눈길을
기꺼이 너를 향하여 활짝 여는 것
홀로 걷는 쉬운 길보다
함께 걷는 어려운 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을 심고 거두는 것
나에게 벗들을 보내주시고
벗들에게 나를 보내시는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이루는 것
높음도 낮음도 없고
가짐도 없음도 없이
모두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것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물이 반 정도 채워져 있는 컵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같은 물컵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다.’라고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따라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주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기 때문에 병자들을 비롯한 삶의 진리에 목마른 많은 이들이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식사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라고 떠보십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고 그들을 먹이려면 얼마가 들까 하는 연구를 하고서는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차다는 눈치로 예수님께 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그때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곁에서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라고 보고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라고 이르시고는, 풀밭에 앉은 오천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11절) 십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찹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려움에 닥쳤을 때, 필립보처럼 ‘이 일은 우리가 하기에 불가능하다.’라는 선택으로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안드레아처럼 ‘우리가 가진 것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니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십시오.’라고 청할지 식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빵을 배불리 먹은 이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15절) 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몸소 세상을 구하시고자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믿고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면서 우리를 주님께 내어 맡기며, 부활의 새 생명의 길을 걸어 나갑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요한 6/1-15>4/1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받지 못하면 삶의 본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숨쉬고 힘을 받고 모두가 나와 것에서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데 주위 사람에게 긍정적 평가와 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없습니다. 또한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줄 수없습니다. 주고 받는 것은 상호관계에서정상적 관계라 성립되고 잘라납니다. 주님은 주는 것에 능한 분이였습니다. 물이 술이되게 하여 주고 없는 가운데 먹거리을 만들어 주고 이는 창조의 신비입니다. 내존재는 한점도 받지 못하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사랑도 사랑받고 사랑을 전해 줍니다.
오늘 빵의 기적은 “ 빵을 손에 들고 갑사기도 하신 다음 자리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십니다. 빵을 공짜로 얻어먹은 사람들은 감사와 찬미를 들이고 자기도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수련자 한 사람과 예비 수도자 한사람을 일주일에 하번 시편강의를 합니다. 그 첫날 강의가 끝나고 강사료로 도로 내가 산보 갈 때 아이스그림 사먹으라고 돈을 주고 요사이는 젊은 사람들 휴계 때 약간의 간식을 준비하여 마련해주고 기쁜 휴식을 하게 합니다.
이런 힘은 저를 아는 사람들의 도움입니다. 나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며 젊어서 챙겨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힘들 때를 생각하여 이런 행동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각 부분의 종사 단체입니다. 참으로 그들의 봉사적 실천을 보면 아끼지 않고 힘을 다하여 희생적 본사 활동은 하느님의 자비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선심성 봉사 보여 주기식 본사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시였듯이 알려저 이익을 보려하면 봉ㅅ아의 가치를 회손 시킵니다.
한 가정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은 무보수의 원칙입니다. 정직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본사 정신을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좋은일 하고도 빰을 맞는 다고 상처 받지 말고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필요해서 하는 일어여야 합니다. 혹시 통하는 사람끼리 서로 주고 받는 것이면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은 왕이 되시려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자서 다신 산으로 물러 가셨습니다. 이는 얼굴을 감추셨다는 것이며 결코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아니고 필요한 사람이게 필요가 되어주기 위함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하여입니다. 태양은 태양 자체를 위해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빛이기 위해서이며 태양에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오늘 사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듯이 저희를 위하여 살아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서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진리를 따라 사랑하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함승수 신부님
추수할 때가 지나 나뭇잎도 모두 떨어지고 찬바람마저 부는 가을의 끝자락, 아직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과실을 '씨과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배가 고파도 이 '씨과실'만은 먹지 않습니다. 먹지 않고 땅에 심어서 이듬해 봄 새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싹은 자라 언젠가 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는 많은 과실이 열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배고파서 굶어죽게 생겼는데, '씨과실'을 묵혀두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잘 것 없는 그 작은 씨과실이 큰 나무로 자라 많은 열매를 맺을 거라고, 그러면 지금 참는 배고픔은 그보다 훨씬 더 충만한 만족감으로 되돌아올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아이가 예수님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드립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적은 양이지만, 그 아이에게는 '전부'였을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먹고 사는 일 조차 막막한 '어린 아이'의 신분으로, 언제 다시 음식을 마련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막막한 처지에서, 자신이 가진 마지막 음식을 내어놓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제자들은 아직도 그분의 권능을 믿지 못해 세속적인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데, 그 아이는 예수님께서 풍성한 결실을 맺으시어 사람들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리라고 믿었기에, 자기가 가진 마지막 음식을 예수님께서 일으키실 놀라운 기적을 위한 '씨과실'로 내어놓은 것이지요.
사람들은 부유하고 힘있고 능력있어야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참된 나눔을 실천한 것은 가난하고 힘도 능력도 없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어른들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 자기 것을 나누는 건 고사하고 남이 주는 것을 받아 먹기에도 빠듯한 작은 존재가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것입니다. 가진 게 없어서 못나누는게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 안나누는 것입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못채우는게 아니라,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해서 안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다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어드릴테니 부족한 것은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됩니다. 믿고 내어놓으면 주님께서 차고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우리에겐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빵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는
봄날 오늘이다.
건강한
삶을 위한
사랑의
성사이다.
관계라는
빵을
먹고사는
우리들
삶이다.
관계의
배고픔을
나눔이라는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실행으로
옮기시는
분이시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삐걱거리면
사랑은 늘
목마르고
배 고프다.
성체성사는
건강한 관계의
초대이다.
생명의 빵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생명의 빵은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빵으로부터
참된 감사를
배운다.
빵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관계는
귀하고 소중하다.
하느님께서는
빵이 되심으로
당신 먼저
사랑의 빛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빵이
빛이 되는
신비이다.
하느님과
만남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이 되신
육화(肉化)는
빵의 여정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빵이 되어주는
관계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눔이
빠져버리면
죽어가는
관계가 된다.
나눔의 성사는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비추는
부활이다.
사랑과 용서의
빵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오늘을 제대로
만나고
보게하신다.
진짜 삶
진짜 오늘은
우리또한
빵이 되는
삶이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오늘을
모으니 생명의
빵이 된다.
스펜서 실버라는 연구원이 강력 접착제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접착제에서 보이는 끈적거림을 없애줄 획기적인 강력 접착제를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끈적거림을 없애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계속된 실패로 점점 의욕이 잃어가고 있을 때, 드디어 끈적거림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 역시 실패였음을 발견합니다. 끈적임은 없었지만, 접착력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의 옆에서 함께 했던 동료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꽂아둔 책갈피가 자꾸 떨어져 불편했는데, 이 접착제로 책갈피를 만들면 어떨까?”
이 접착제로 만든 책갈피가 무엇일까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포스트잇’입니다. 실패가 오히려 성공을 가져온 경우입니다. 만약 스펜서 실버가 끈적이지 않고 동시에 접착력도 강한 접착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포스트잇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가 오히려 사람들의 사랑을 끌어내는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실패가 아닌 성공을 목격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까요.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긴장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굳게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이들이 배불리 먹습니다.
이 기적에서 빵이 남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딱 필요한 만큼만 기적을 일으키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어른들도 이런 말 많이 하시지 않습니까?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라고 말이지요. 주님께서 음식 남는 것을 당연히 하라고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기적은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입니다. 그저 주님만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주님과 함께해야 가능합니다.
‘사랑을 얼마나 해 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 보았느냐?’(은유)
불행은 전염되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여파로 사회가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한 사람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따라서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 옆에서 기침해대면 긴장을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요. 혹시라도 전염될 가능성 때문입니다. 확진자의 동선에 있는 가게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역시 전염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전염되는 바이러스 균을 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의 불행도 전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행에 빠진 사람에 대해 안타까움은 가지고 있지만,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불행은 전염병이 아닙니다. 대화하거나 악수를 하고 또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옮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멀리하는 이유는 자신도 이 불행의 처지에 함께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행에 빠진 이들을 더 힘들게 하고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사실 아픔에 함께하면 힘들어하는 이에게 큰 위로가 되고, 보인 역시 성장하게 됩니다. 나약한 존재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함께함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스스로의 자존감이 성장합니다.
불행은 절대 전염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함께해서 불행을 줄이는 백신이 내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기적은 “될까요?”로부터 시작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두 팔 없이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이름은 ‘제시카 콕스’(Jessica Cox), 올해 나이 35세입니다. 그녀는 두 다리만으로 할 수 있는 가능한 것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팔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세수나 화장도 손수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두 발만으로 콘택트렌즈까지 착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자는 1분에 25단어 정도가 가능하며, 그 작은 핸드폰 자판으로도 문자 메시지를 큰 불편 없이 친구들과 주고받습니다. 14살에 태권도 공인 2단을 땄고 수영도 합니다. 바다에서 서핑도 하며 물론 운전도 합니다. 그녀는 장애인 면허가 아니라 일반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비행기 조종도 합니다. 그녀는 20대 중반에 이미 단독으로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조건 ‘한다’라고 말하곤 했죠!”
“무조건 한다.”라는 믿음은 사실 “할 수 있을까?”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다보니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두 발로 두 손이 하는 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두 손이 있는 사람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면을 무시하면 결국엔 자신의 믿음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기적을 일으키실 작정을 하시고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는 말도 안 된다고 혀를 찹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다르게 안드레아가 대답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 다 믿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둘의 자세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마치 마중물이 들어간 상태와 들어가지 않은 상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의문형으로 말합니다. 의문은 이미 가능성을 1%라도 전제하고 있으므로 나오는 말의 형태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봉사하라고 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요.”라고 잘라버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제가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기 싫다는 의미로 들리고 그래서 시켜도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을 시키면 무슨 일을 시켜도 잘합니다.
빵 다섯 개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5’는 다섯 개의 감각, 즉 ‘오감’(五感)을 나타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능력을 말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에서 숫자 ‘2’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사람을 바꾸기 위해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성자와 성령께서 힘을 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부정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의문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이미 믿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미시간 그랜드 래피드 근처에 1904년도에 개발한 석고 광산이 있었습니다. 1943년까지만 해도 수백만 달러가 나가는 광산이었으나 결국 쓸모가 없어져 폐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이 폐광의 지하터널 온도가 연중 균일하게 10도 시 정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칠면조, 계란, 감자 등을 저장하는 창고로 변형시켜 큰돈을 벌었습니다. 모든 기적은 “혹시?”라는 작은 1%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걸음이 없으면 두 걸음도 없습니다.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전에게 유튜브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저는 시간도 없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난 못해!”라고 말하지 않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만 했습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해버리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에 나를 가두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때문에 시간이 생겨서 유튜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에게 주님께서 양식을 주시는 재료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사제가 된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적어도 의문은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부정적 확정문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작은 의문이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뜻에 나의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통한 주님의 계획을 잘 모릅니다. 주님의 어떤 뜻이 들어온다면 부정적 정언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끊어버리지 말고 적어도 “될까요?”라는 의문으로라도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미국 정부는 경기부양책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업에 무상 원조와 저금리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합니다. 개인에게도 일정한 금액을 준다고 합니다.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어도 세금을 낸 사람에게는 준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은 직원을 해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개인은 소비활동을 해야 합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 정책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 단체와 중앙 정부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한다면 건너지 못할 강은 아닙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 남은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씨 과일은 땅에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나고 그렇게 나무는 숲이 되고, 숲에는 생명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무엇이 마지막 남은 과일일까요?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핀다는 희망입니다. 힘들과 어려운 상황 속으로 달려가는 의료진의 헌신입니다.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는 나눔입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일궈온 원동력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시련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석과불식을 보았습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인 논리로 접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먹게 하려면 특별한 경제부양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빵을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도 빵은 남았습니다. 재물을 마련해서 빵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표징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도록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자비와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큰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아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곳에 성당을 세우고, 철야기도를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유하려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과 치유’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위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희망과 빛이시오니 간절히 비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맞갖은 기도와 찬미의 제사로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 아드님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갈릴래아에서 해방의 축제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에 그분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나름의 신심과
돈푼깨나 있는 이들이
해방의 축제를 즐기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때에 그분께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가난한 무지렁이 이방인들이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척박한 땅으로 가셨다지
그때 그곳에
모두가 파스카를 즐기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있기에
아무도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께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분께서는 미어지는 마음으로 보셨다지
파스카 곧 해방의 축제가 올 때 마다
오히려 얽매인 신세를 한탄해야만 하는 사람들
내일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그저 오늘을 버텨내야만 하는 사람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할 겨를 없이
맨몸뚱이로 당신을 따라나선 사람들
그때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당신께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다지
많은 군중에 놀라
어떻게 흩을까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그분께서 말씀하셨다지
먹을 것도 거의 없는 자리
기쁨도 희망도 찾기 힘든 자리
찌든 삶의 흔적만 나눌 수 있는 자리
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가
그분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고픈 자리이기 때문이라지
그때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온 몸과 마음 정성껏 모아
감격에 겨워 감사를 드리셨다지
당신께서 그 자리에 있음에
그리하여 당신을 내어줄 수 있음에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음에
그 가운데 당신을 닮은 사람들이 있음에
당신과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있음에
그리하여 당신께서 하시려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그때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모두가 아낌없이 나누는
모두가 넉넉히 배부른
모두가 갈림 없이 하나인
모두가 감사에 넘치는
참 해방의 축제를 여셨다지
어느 해 파스카가 가까운 때에
흥분과 설렘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수많은 유다인들의 발길을 거슬러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조차 없던
수많은 작은이들과 함께 하시고자
그분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지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는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보면 군중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피해 산으로 물러 가셨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군중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시며 군중이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시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 않으시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는 가끔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데에 있어서 계산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누구를 위해서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거래를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그렇게 우리와 거래를 이루시는 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나누어주시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시고 마지막 목숨마저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정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임을 믿는다면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하느님 안에 가진 자요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 안에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 지상에서의 삶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이에게 천국의 행복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파스카와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기적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빵의 양을 증가시켜 그곳에 있던 군중을 먹이신 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이 세상에 양식으로 내어주실 희생 제사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파악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니 소량의 빵과 물고기로 군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와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문제는 이 현실적 데이터가 쉽사리 우리를 회의와 실망, 포기로 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나 데이터에는 숨은 희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빛을 잃고 지치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초라함과 우리의 한계와 해결해야 할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지레 주저앉습니다. 필립보처럼, 안드레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적은 양이지만 아버지 앞에 펼쳐놓을 양식이 있고, 또 그것을 내놓은 순박하고 용기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제자들과 군중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은 넘치고 또 넘칩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군중은 "원하는 대로"(요한 6,11) 양식을 받아서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 남았다고 하네요. 사실 사람은 본성상 잉여분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그렇지만, 부자들도 가진 것을 더 불리고 싶어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요한 6,15)
그런데 군중은 빵을 더 챙기지 않는 대신 빵을 많게 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소유하려 듭니다. 그분이 임금이 되시면 더 이상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나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사도 5,41)
불신과 회의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을 수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게 된 변화야말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유에 실망하던 그들이 스스로 보잘것없이 작은 자가 되어 모욕 당하기를 기뻐하는 이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파스카의 밤을 통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화답송)
주님 때문에 겪는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들이는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를 영광으로 여기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히기 위해" 세상에 자기를 내놓는 존재로 굳건히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빵의 기적에 참여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그 기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의 증인으로 우뚝 선 사도들처럼 우리도 변화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꼭 가야할 하늘살기 걱정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 먹고 입고 사랑 살기 좋다며 꼭 가야할 하늘살기 걱정 안합니다.
하늘살기 지옥살기 둘 다 세상사는 내 마음상태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늘살기 준비로는 십계명 지키며 살거나 아님 자동지옥살기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하느님자녀 되게 하는 게 생애전부의 목적이었습니다.
십계명이 딱딱해서 아버지와 대화하는 주님의기도로 완성해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기도로 사신 예수님처럼 우린 주님의기도로 살아야죠.
사도들은 날마다 어디서나 끊임없이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선포하셨죠.
부활하신 예수님의 하늘 영광에 동참하려는 사람은 인생길 만점입니다.
지식의 이해와 응용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요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머리에 쥐가 난다. 복음사가가 너무 영안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게하려는 의도말이다. 예수님의 제자 필립보는 많은 시간을 지낸 후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동료 사제와 길을 걸으며 요한 복음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의 신학교 시절 아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교수 신부님들의 수업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과 삶에 대입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쳤던 신부님이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귀가 부족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신학교 시절의 교수 신부님처럼 우리들의 그리스도론 수업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받아드릴만큼의 충분한 삶이 없다는 것이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삶을 지닐 때, 지식은 이해를 넘어 영안으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식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도 ‘오병이어의 기적’(요한6,1-15)은 오천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으로 멈춰 있었지만 부활 후 당신으로부터 말씀을 다시 듣고, 빵을 다시 뗄 때’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 보았다.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 갈 것이다. “나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당신의 말씀, 십자가의 체험이 없이는 우리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에게서 완결판은 나오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본질을 놓쳤다. 필립보는 이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만 영안은 갖지 못했다. ‘하느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간청하기도 하고, 예수님은 답하신다 ‘나를 본 것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 그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말씀을 충분히 소화하려면 필립보가 삶의 체험을 통한 영의 작용이 훨씬 더 요구된다. 머리에 쥐가 나는 것은 삶이 없이 머리만 굴리기 때문이 아닐까? 삶을 통해 부활의 은혜를 입도록 살아보자.
'골고루'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원하는대로 나누어 주셨다'(요한 6장 1~15)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차별없이 사랑을 주십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사랑을 주십니다
주린배를 채워줄때,
상대가 원하는만큼 주시고
버려지는 조각 하나 없이
모으시는 알뜰함도 지니셨죠
쓸데 쓰고 아낄데 아끼는
사람은 멋이 있습니다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지듯,
사람도 차별없이 대하고 골고루 나눠주고
골고루 보살피는게 예수님 닮은 사람입니다
'사랑도 편식보다 골고루'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회적으로 긴급재난기금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 먹고 살 것이 없어서 힘겨워하는 분들이 떠오릅니다. 그런가 하면, 무엇을 먹어도 어떤 것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헤매이는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요한 6,11)라고 나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14)라고 반응했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부활의 체험을 알려주시는 여러 가지 징표 중에 예수님 생전에 배불리 먹여 주셨던 기적 이야기를 회상하며 제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1) 배고프고 어려울 때, 그리고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허전한 삶의 순간에 그것도 돈 없이 값 없이 먹을 수 있고 허전하고 목마른 우리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체험은 우리 생애에 주 하느님을 되새기는 생생한 부활 체험이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생명의 빵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주님은 표징을 행하십니다. 보이는 표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은총과 생명을 전하십니다. 표징이 전해주는 사랑을 알아보려면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사랑의 은총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표징을 행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드러나는 표징만 바라보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이익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많게 하는 표징을 행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빵만 바라본 군중들은 빵으로 배를 채워 열광한 나머지 그분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표징을 읽어내지 못하고, 아이가 내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권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질책하거나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셨고, 제자들을 차근차근 가르쳐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품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무시는 주님은 그 사랑을 그대로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 -분별력의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동체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여 분별력의 덕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라 칭하기도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참 중요한 분별의 지혜입니다. 배움의 지식은 짧았어도 옛 어머니들의 분별의 지혜은 뛰어났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지만 두가지 사실은 지금도 생생히, 고맙게 기억하며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갈수록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제 어머니는 화를 내거나 매를 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겨울철 저는 연 만드는 것을 참 좋아해 겨울에 10회 정도는 연을 만들어 띄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몰래 마실 간 틈을 이용해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실 후 연만든 것을 알아 채신후, “너 또 연만들었구나!” 곱게 눈흘기길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기에 참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창 내적 갈등으로 장기간 결석했을 때도 “너 학교 안가니?” 한마디만 하실 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도 고맙게 기억합니다.
사막교부들은 물론 그 후예인 성베네딕도 역시 특히 강조한 것이 분별의 지혜였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의 고생이 많듯 장상이 분별력이 부족하면 공동체가 많은 혼란과 불편을 겪기 마련입니다.
-‘대 안토니오 압바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몸을 고행으로 혹사시킴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분별력이 부족하다. 하여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은 분별력이 뛰어납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자 겸손이고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랑과 겸손, 지혜도 함께 하기에 좋은 분별력을 지니게 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빠스의 자질로서 분별력의 덕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1500년전의 성 베네딕도는 이렇듯 지혜로웠고 뛰어난 분별력의 덕을 지닌 경이驚異로운 수도승이었습니다. 참으로 수도공동체는 물론이고 모든 공동체의 책임자가 지녀야할 필수적 덕목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다음 대목 역시 성인의 분별력의 지혜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성규 머리말 45-46)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존재가 군계일학(群鷄一鶴), 뛰어난 분별력의 덕을 지닌 이로 드러납니다. 그의 사도들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별력의 지혜가 최고의회의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주님께 맡기고, ‘건들이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이 분별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분별력의 대가(大家)임이 드러납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후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신후 군중들의 광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위태한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 군중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처신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표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분별력이 결핍된 무지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예수님은 집착없이 산으로 떠나,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난처, 정주처가 되시는 ‘하느님 안 제자리’에 머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마디처럼 공을 이루면 거기에 머물지 않고 초개(草芥)같이 내버려 두고 떠나는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와 처신이 참 아름답습니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란 시 첫 연이 생각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욕의 지혜입니다. 일체의 탐욕이나 야심이 없기에 이런 아름다운 떠남의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늘 하느님과 함께 했기에, 늘 하느님 안에 머물렀기에 이런 분별력의 지혜란 은총의 선물입니다. 때로 분별이 되지 않을 때는 잠시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제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중단됬던 미사가 두달만에 거행된 날로 많은 분들이 주님 성체를 모실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저 역시 어제 작심하고 많은 시간을 내어 참 많은 분들에게 수도원 하늘길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아름다운 배경의 예수님 부활상을 찍어 카톡으로 다음 축복의 기도와 사진을 전송하며 미친듯 사랑을 나누니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사랑하는 자매님도 익명의 성녀중 한분이지요. 수도원 예수님 위로와 치유,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가장 좋은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판단하셨겠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15)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배고픔에 허덕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을 먹는 사람들이 아주 행복해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빵이 남았습니다. 정말 가슴 뿌듯한 축제를 치른 것입니다.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립니다. 이렇게 배부르게 하시고 기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그 순간 광야에서 겪으셨던 악마의 유혹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하던, 발아래 보이는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겠다던 악마의 속삭임을 다시 들으셨을 것입니다(마태 4,1-12 참조).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산으로 홀로 기도하러 떠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무엇이 다른지요? 어떤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지요. 칭찬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홀로 한적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당신의 원위치를 다시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큰일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하더라도,기도하며 본래의 자리로 금방 돌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빵을 주시는 주님<요한 , 6/1-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빵을 얻으려면 땀을 흘리며 노동하지 않으면 생명에 필요한 빵을 얻을 수 없다. 주님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엄제하신 후 악마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할 때 “ 사람은 빠으로만 살지 않은다.” 하시며 자신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지만 오늘 보라떡 5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기적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과 빵을 주시는 기적으로 앞으로 이보다 더 큰 기적을 세상 끝날 까지 행하실 것을 미리보여 주시였습니다. 미사는 빵을 당신의 몸으로 변화 시켜 세상 끝날 까지 우리 안에 현존하시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는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과 따을 창조하신 주님은 자연 안에 먹을 것을 준비해주시며 생명을 유지하도록 배려 하셨습니다. 유대아 이들이 모세를 따라 광야의 생활을 할 때 만나와 메추리를 보내주시어 먹이신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요사이 넉넉한 먹을 것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일차사업인 농산물을 4차 산업까지 이끌어 다양한 먹을 것을 먹게 하심은 또한 하느님의 자비심이입니다.
요사이 세계 식량 부족을 예산 하여 많은 나라가 식량 사재기를 한다는 소문을 불안하게 하지만 성체를 나누어 모두가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사는 것처럼 나눔의 정신이 부족하여 일어난 부조리리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선거공양 비슷하게 각 가정에 100만 원식 도움을 주겠다고 하고 선거후 이든을 어디서 마련할 까? 하고 정부나 당정에서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은 군자금에서 9000억 사감하여 마련하고 전부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겠는 데 70%는 거저 주고 30%는 주었다가 기부금으로 다시 받아내는 방법을 간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거저 주지 말고 그에 상응한 이익을 산출하도록 끝 난 다음 주는 것이 나라 빚지지 않고
생상적 의미도 살리고 무노동 임금이 아니라 노동의 결과로 돈을 받는 것이 국가 발전과 공짜 정산을 개조하는 결과가 됩니다. 예를 들면 길거리를 청소하든지 자기 집이라도 깨끗하게 한다든지 쓰레기 분리수거 잘한다든지 산에 나무를 심는다든지 하여간 할 일을 찾아 일하고 주는 정신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환경운동, 이웃과 사랑운동, 장애자 돌보기, 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공으로 생긴 돈은 하술 하게 써버립니다. 또 식당하는 사람 식재료를 어디서 구입하는지 구입 하고 파는 사람 조금 싸게 팔고 사는 사람조금 많이 사면서 농산물 소비를 늘이면 농민도 살고 모두가 살게 됩니다.
저는 농산물 생산하면서 기업 형으로 일짜리 없는 사람 일짜리주고 소비자에게 조금 싼 값으로 주어 덕을 보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돈으로 마음대로 떡 사먹고 술사마시는 일이 없이 생산에 사용하도고 교육시키는 일도 중요 헙니다. 모든 사람에게 양어깨 중간에 온몸의 중심에 머리를 올려주신 것은 머리를 서서 일하면서 먹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받은 대로 내어주는 삶을 살면서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얻도록 기도합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이다. 군중들에게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두고 제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과 예수님의 방식이 다르다. 살아가면서 어떤 사실을 보고 해결하려고 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방식대로 하려고 한다.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 어치 음식을 사야한다고 말하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개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들의 배고픔에 더 집중하시고 하느님이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고 기적을 행하신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그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 일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의 필요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에 머물며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는 개암나무 퇴비를 주며 내려다 본 밭의 풍경이다. 이제 오미자 능굴에서 새잎이 돋아나서 초록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계속 제초 매트를 덮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 풍요롭게 될 수 있도록 그런 풍요로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려고 한다.
생명을 주는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십자가
스투디온의 성 테오도루스의 강론에서(Oratio in adorationem crucis: PG 99,691-694. 695. 698-699)
십자가의 선물은 얼마나 보배롭습니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것에는 에덴의 옛 나무처럼 선과 악이 혼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라보기에도 아름답고 맛보기에도 달콤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 주는 나무입니다. 어두움이 아닌 빛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에덴의 낙원으로 들어가게 하며 여러분을 거기서 내쫓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이 사륜 마차에 오르듯이 그 나무에 오르시어 괴수인 마귀를 쳐부수고 그 폭군의 노예 상태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신 나무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나무 위에서 마치 전투 중에 상처 입은 위대한 역전의 용사처럼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처를 입어 우리 죄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사악한 뱀으로 인해 상처난 우리 본성을 고쳐 주셨습니다.
태초에 우리는 나무로 인해 해를 입었지만 이제 와서는 나무를 통하여 생명을 찾아냈습니다. 옛날에는 나무로써 뱀이 우리를 속였지만,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무로써 그 반역자인 뱀을 내쫓았습니다. 일찍이 들어 보지도 못한 이 전환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죽음 대신에 생명을, 부패 대신에 불사 불멸을, 수치 대신에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꽃핀 그 최고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자랑스럽게 뽐내는 것을 어리석게 보이게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라난 온갖 은총의 선물은 죄와 악의 싹을 잘라 버렸습니다. 세상의 태초부터 있었던 옛 예언과 예표들은 이 나무가 지니게 될 효력을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배우고 싶어한다면 그것들을 고찰하십시오. 노아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배를 타고 자기 자녀들과 자녀의 아내들과 온갖 종류의 동물과 함께 하느님이 보내 주신 홍수의 파멸에서 구출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모세의 지팡이는 무슨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것도 십자가의 예표가 아닙니까? 그 지팡이는 물을 피로 변화시키고 마법사의 거짓 뱀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또 모세는 지팡이를 갖다 대자 그 힘으로 바다를 갈라 놓은 후 물결을 다시 제자리로 흘러가게 하여 원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십자가의 또 다른 예표입니다. 그것은 하루 만에 꽃이 피어나 누가 참된 사제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자기 아들 이사악을 결박하여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았을 때 십자가를 예시해 주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은 소멸되었고 아담은 살아났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십자가로써 모든 순교자들은 영광의 월계관을 받았으며 모든 성인들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옷 입었고 옛사람들을 벗어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양들이 한 양 떼가 되어 하늘 나라에로 인도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그렇게 살겠습니다.
최민석 신부님
해발 1,187m의 무등산은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한 산’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등산의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이곳 집에서 바라본 산의 능선은 마치 젊은 여성의 풍만한 가슴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의 산이든 시골의 산이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에는 정자가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산의 아름다움은 정자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에 정자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하다.
산이 어머니라면 정자는 언제나 어머니 품속에 안겨 쉬고 싶은 자식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마을로 돌아간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정자를 바라보다가 영, 힘들어지면 어머니의 산에 안긴다. 어머니 품에 안겼다가 떠나면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한다.
내 마음에는 그런 정자가 하나 있다. 힘들고 지쳐 혼자 쉬고 싶어도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속의 정자를 찾아간다. 하루 종일 말없이 정자에 앉아 있다. 정자도 똑같이 아무 말 안하고 기다려준다. 말없이 있는 게 싫지 않다. 정자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들이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지나가 버린다. 왜 사람들이 부끄러운 죄를 지어야 하는지. 어째서 어둡고 슬픈 날들을 아프게 보내야 하는지, 왜 새벽을 맞이하기 위하여 캄캄한 밤을 견뎌야 하는지 정자에 와서야 깨달음의 지혜가 열린다.
장 바니에가 쓴 <사랑의 선물, 예수>를 읽다가 예수님의 탄생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예수는 어머니 품에 안겨 그 젖가슴에서 쉬려고 어머니 몸을 떠났다.“는 이 한마디 문장이 스친다. 어머니 품 같은 정자에서 다시 되새기는 말이다. 그렇다. 어머니 품에 안기려고 어머니 몸에서 떨어져 나와 사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영어 속담에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든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다. 내 삶의 가장 큰 은혜는 지금 살아 숨 쉬는 축복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 멋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누리는 최상의 축복이다. 내가 이곳에 사는 것은 꿈도 못 꾸었던 기막힌 천혜의 삶이다.
주님이 지으신 세상,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낮잠 자는 고양이, 산에 걸린 구름, 멀리 지나가는 경운기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들어온다. 내 눈에 들어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산길을 다녀와 골짜기 물에 손을 담그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정자에 앉아 서산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해와 나 사이로 산이 차츰 들어오면서 해는 보이지 않고 대신 산이 보인다. 내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 무엇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계심을 알아차린다. 아, 그 언제쯤에나 당신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산마루 너머로 장엄하게 지는 붉은 해가 더욱 아름답다. 이쪽에서 보면 져서 내리지만 저쪽에서 보면 솟아오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해의 운명일진대, 새삼 무엇을 가리고 이제 와서 무엇을 감추고자 하겠는가. 세상에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할 상채가 없음이 삼가 고마울 따름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게 못난 구석이 있어서 주님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은총인가. 내게 병든 구석이 있어서 주님의 치유로 채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인가. 나에게 모자란 구석이 있어서 주님의 풍요로 채울 수 있으니 나의 못남과 질병과 모자람이 갈수록 커지고 더욱 커져서 마침내 내 몸이 주님의 사랑과 치유와 풍요로 가득 하기를 원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눈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내 눈길이 그 일과 상황을 관통하여 주님께 닿아야 하는 줄 압니다만, 그게 잘되지 않아서 괜히 초조하고 암울하고 그럴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는 대신 그 어지러움 속에서 엄연한 당신의 질서를 본다.
당신의 현존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느낌에서 오는 생명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하늘이 제 품으로 자나가는 구름을 지켜보듯이, 당신이 저를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심을 알게 하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사랑 말고는 아무 다른 할 일이 없고, 마땅히 없어야 한다. 달빛이 횃불로 환해지지 않고 별빛이 태풍으로 흔들리지 않듯이 사랑은 세상의 눈치를 보이 않는다. 사랑은 누구의 거절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래도 그러니까 무등사랑이다.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은 생명의
길을 걸어가며
모든 것을
생명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먹고 남긴
조각으로
잊고 살았던
주님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흩어짐과
모아들임 사이에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갈
힘을 다시 주는
생명의
성체성사입니다.
작은 조각이
있기에 큰 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각까지도
주님의
은총이고 주님의
사랑입니다.
살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할
사랑과 감사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방식은
이와같이
나누는 삶의
방식입니다.
나누는 삶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나누는 길만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차게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나눔과 감사로
오시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이제 막 더하기 빼기를 배우는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과가 열다섯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다섯 개를 먹었습니다. 이제 몇 개가 남았을까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다섯 개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열다섯 개 중에서 다섯 개를 먹었어. 그렇다면 먹지 않아서 남은 사과가 몇 개일까?”라고 다시 설명하면서 물었지요. 그래도 이 아이는 자신 있게 “다섯 개요!”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 아빠가 먹는 게 남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 대답도 틀린 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빠의 논리와 선생님의 논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수학적인 개념을 알려 주는 것이고, 아빠는 생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둘 중에서 어느 것만 맞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스포츠 경기를 좋아해서 보다보면, 종종 비디오 판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심판의 위치에 따라서 내린 판결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결을 위해 비디오를 되돌려서 정심인지, 오심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심판만을 평생 했다고 해서 단 한 번도 오심을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심판의 보는 위치에 따라서 오심도 분명히 나올 수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틀렸다고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잘못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하는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점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이 많은 군중을 보신 주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는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해서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지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라고 하지요. 2018년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7,580원이니까 8시간 노동으로 생각했을 때, 1데나리온은 6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나라 시새로 1,2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것도 얻어먹는 처지에 이렇게 큰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습니다. 주님의 관점으로는 가능한 일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도 많고 틀린 것도 많지만, 주님의 관점인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내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가능한 일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의 관점인 사랑밖에 없습니다.
지혜란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여행을 한 후, 스스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마르셀 프루스트).
지혜가 필요한 때.
코카콜라 사장이었던 브라이언 다이슨은 인생을 5개의 공을 가지고 노는 저글링에 비유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일, 가족, 건강, 친구, 정신의 공입니다. 이 5개의 공이 모두 똑같은 공은 아닙니다. 하나는 고무공이고 나머지는 유리공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일’만 고무공이고, 나머지는 유리공입니다. 그래서 일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 번 깨지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만큼 조심스럽고 세심한 지혜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사실 이러한 지혜가 부족한 우리입니다. 나머지 역시 고무공이라고 생각할까요?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만을 강조하고 다른 것들은 소홀히 여깁니다. 그래서 가족이 깨지고, 친구가 없고, 건강을 잃고, 정신이 망가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분별력分別力의 지혜, -모든 덕행의 어머니는 분별력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분별력에 지혜’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우스개 말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분별력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컫는 말입니다. 공동체 책임자의 우선적 자질도 분별력에 있습니다. 분별력의 지혜요 분별력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서 '제64장 아빠스를 세움에 대하여'에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게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바로 베네딕도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분별력(discretio)’은 과격하거나 지나치지 않음이요, 깊은 생각에서 나온 절도있는 태도입니다. 베네딕도는 분별력의 중용을 모든 덕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합니다.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공동체 책임자들은 디테일에 강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예수님의 분별력이 빛을 발합니다. 복음 후반부에서 빵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표징의 의미를 참으로 깨닫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그들의 오해는 그 표징을 지상정치와 관련지은 데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민족해방자로 오해하여 억지로 메시아 왕으로 삼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다.’
광야에서 예수님께 대한 세 번째 유혹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땅에 엎드려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바로 이와 흡사한 유혹을 단번에 정리하신 예수님의 분별력입니다.
위기를 직감한 예수님은 이들의 유혹에, 열광하는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분별력의 결단을 내려 즉시 산으로 물러나십니다. 홀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면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며 영육을 충전시켰음이 분명합니다. 생각나는 두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하여 때로 예수님처럼 외딴곳에 물러나 삶의 중심을 잡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함이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말라는 노자의 말씀도 같은 맥락의 분별력의 지혜를 말합니다. 정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떠날 때 잘 떠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자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 바리사이 역시 ‘분별력의 대가’임이 드러납니다. 사도들의 일로 혼란해지 최고의회 분위기를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단숨에 정리해 버입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로 건드리지 말고 때가 될 때까지 하느님께 맡기고 기다리며 ‘그냥 버려 두는 것’이 분별력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경솔히 서두르다가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사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 그것이 현실이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기는 것도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모든 덕행의 어머니가 분별력입니다. 정보와 지식이 홍수시대, 복잡하고 유혹이 많은 일상에서 진짜 본질적 단순소박한 삶을 살기위하여 비단 공동체의 책임자뿐 아니라 누구나 분별력의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선사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분별력있는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이런 사랑의 관상적 삶에서 샘솟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아멘.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6,1-15(부활 2 금)
오늘 <복음>은 이른바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상향곡선을 그려오던 예수님의 인기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차차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표징”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단순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참조)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의 ‘소용없음’마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한 아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을 떠나기에
저마다 먹을 것을 챙겼습니다.
오랜 걸음 뒤에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섣불리 먹을 것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여행이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내일도 모레도 먹을 것이 필요할 테니까요.
모처럼의 쉼이었지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졸이며 서로를 살펴야 했으니까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싸준 이것저것 손에 들고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콧노래 부르며 함께 걸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렸던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픈 다리도 쉴 겸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주섬주섬 도시락을 펼쳤습니다.
내일이나 모레는 없었습니다.
옆에 아저씨들과 함께 나눠먹고 배부르면 되니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랫동안 걸었더니
몸은 피곤하지만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나의 내일을 위해
다른 이들의 오늘에서 눈을 돌리는
수많은 어른들
다른 이들의 오늘을 위해
나의 내일을 기쁘게 포기하는
한 아이
우리는 누구인가요?
자신의 것을 감추며 마음 졸이는
수많은 어른들
자신의 것 모두 내놓고 마냥 즐거워하는
한 아이
우리는 누구인가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한 아이를 통해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한 아이가 되어주지 않겠니?”
억지는 사고의 원인 <요한 6, 1-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은 육의 나라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고, 영의 나라 왕으로 오셔서 하느님의 나라가 떠오르게 하십니다. 자유의 나라, 평화의 나라, 기쁨이 넘치는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 기적의 표징을 보고 “저분이 왕이다.” 하시고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도 “내 나라는 이 나라가 아니다.” 하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억지를 부리고,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기중심적 고집을 부리며 사람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기 눈높이로 억지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세상의 왕은 참 평화가 아닌 거짓 평화로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는 이에게 나누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리고 권리를 이용하여 자기 주머니만 챙기는 사람, 백성의 행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자기 생각만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왕, 영적 나라의 왕은 섬기고, 나누고, 친교와 합치의 정신으로, 서로 사랑의 정신으로 “너 없이는 나도 없다. 너를 살리고 나도 살아야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왕은 어떤 일에 특권이나 월권이나 갑질을 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천대하고, 그 사람들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살고, 나만 구중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왕을 찾고 되려는 사람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자연의 성장을 본받고, 남을 모함하고, 뒷말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올라서려고 하면 참 지도자란 이름만의 왕이 아닌 참 왕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제 영의 왕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힘을 자랑하지 않고, 가진 바를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있으면 나누어 주고자 하며, 손해 보고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외롭고 쓸쓸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든 이 안에 모든 이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도자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땅에 집중하지 않고 하늘에 집중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4/13
우리말에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가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급하다고 성급히 움직이지 말고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다 검토하고 점검한 후에 확실하게 되었을 때 움직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을 바라보시며 제자들이 어찌 나오는지 보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그러자 필립보가 어처구니없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손을 내어젖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그런데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마치 ‘여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오니,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듯합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들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남은 것만 모아도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풍요로운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불러일으켜주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들이 공짜로 배불리 먹었다는 이유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14절) 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몰려오는 이유가 기적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을 배불러 먹고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15절)을 알아차리시고 그들의 야욕을 피하십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어찌 다른지 식별해 봅시다. 사람들의 식별의 근거와 원의가 예수님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사도들의 활동을 관찰하면서 가말리엘의 말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도 기억합시다. 살면서 가끔 맞이하게 되는 풍요나 기회가 당장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음 마음으로 혹하는 악의 유혹인지 주님의 축복인지를 조금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식별하고 투신합시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요한 6,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이라는 식탁에서
매순간 사랑의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순간이
특별한 순간입니다.
재대로 먹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하느님 생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사람과 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친히
빵이 되시어
흩어진 우리를
한 데 모으십니다.
나누는 사람이
가장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꺼이 누군가의
빵이 되는 사람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할 사람은
언제나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이들입니다.
삶의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람을 살리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의 자리는
성체성사의
자리입니다.
우리를 살게하는
모든 것에서
감사를 나누는
따뜻한 부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식탁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주님께서 친히
오늘의 빵이 되십니다.
부활의 삶은
다시 살게하는
빵의 밥의
삶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인도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계셨을 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성녀께서 계신 인도 캘커타를 방문했습니다. 성녀께서 길가에 쓰러진 병자들을 정성껏 간호하며, 가난하고 실의에 빠져 살다가 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주는 모습을 직접 본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녀님, 백만 파운드를 준다고 해도 저는 못하겠어요.”
그러자 성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고, 성녀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을 벗어나는 삶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많은 군중이 따랐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기적에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자리가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환호하는 그 장면에 서 있는 제자들은 나름 어깨가 으쓱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많은 사람들로 인해 시끄럽고 복잡했지만 행복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소란스러움을 떠나 제자들만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기적과 같은 표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지요. 뒤이어 나오는 빵의 기적 역시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군중들이 빵의 기적을 보고는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는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이는 영광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심을 갖게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고 존경과 사랑 속에 살고만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끄럽고 복잡한 삶의 한 가운데에 있고 싶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자.”
이 조용한 곳은 세상의 관점을 따르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착한 아들을 원하면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아빠를 원하면 좋은 아들이 되어야겠지. 세상을 바꾸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자신을 바꾸는 거야.(A.G.로엠메르스)
망하면 됩니다.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가정방문을 했던 적이 떠올려집니다. 이 집안은 유난히 화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님과 자녀와의 관계가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인 형제님에게 물었지요.
“가족이 너무나 화목해 보여요. 형제님께서 정말로 잘 하시나봅니다. 그 비결이 뭐에요?”
그러자 형제님께서는 웃으면서 “신부님, 망하면 돼요.”라는 것입니다. 망하면 된다면 말에 의아해하고 있으니 형제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사업을 크게 확장을 하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단칸방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단칸방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족 간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자기 방을 가지고 있고 또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는데, 이때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단칸방에서의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잊고 살던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형제님의 말씀이 참으로 인상 깊었지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더 큰 선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참고로 하버드대학 캐서린 스노우 박사 팀 연구에 따르면 만 3세 어린이가 책 읽기를 통해 학습하는 언어는 140개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과 밥을 먹으며 대화할 때에는 1,000여 개의 단어를 배운다고 하네요.
자녀의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이 많으시죠?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요? 좋은 학원을 보내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더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 -분별分別의 지혜, 무욕無慾의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지혜는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부모를 위시하여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의 우선적 덕목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속된 말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이야기도 분별의 지혜를 지칭합니다. 인디언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 또한 분별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지식과 지혜는 함께 가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아도 어리석은 이들이 있고 지식이 부족해도 지혜로운 이들이 있습니다. 부단한 깨달음을 통해 통찰력을 지닐 때의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입니다. 어제 소개한 제 옆집 어렸을 때의 친구 부부 역시 탁월한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를 지닌 이들입니다. 잠시 친구 부부의 삶의 역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친구의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돌아갔을 때 제 친구는 저와 같은 16세의 중3 학생이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던 날 새벽에 제 집 대문을 두드리며 ‘우리 어머니 죽었다.’ 울부짓던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16세 나이의 친구에게는 5명의 어린 동생들이 올망졸망했습니다. 친구는 가정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곧장 상경하여 친척의 커텐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집안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재혼하여 새 어머니에 딸린 동생은 3명이 되었고, 무려 7명의 동생을 거느린 장남이 된 셈입니다. 친구는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에 사업가적 마인드와 입지전적 자수성가형 인물입니다. 수년동안 열심히 성실히 일하면서 친척 주인의 인정을 받았고 시골의 동생들도 서울로 끌어 올려 공부도 시키고 취업도 알선하며 모두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일하다가 만난 착실한 분과 가정을 이루었고 이어 평택에서, 수원에서 함께 평생 커텐가게를 하며 집안은 물론 가난한 처갓집 7남매도 힘껏 도우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친구부부입니다. 물론 감리교회에 다니면서 중요한 봉사의 직책도 우선적으로 충실히 수행했던 신앙인이기도 했습니다.
친구와의 이야기중 두가지 경우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나는 부인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부의금이 4천여만원이 들어왔다 합니다. 이 때 부인은 지체없이 부의금을 7명의 시동생들에게 공평히 분배하고 큰 아들인 남편과 자기는 하나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별의 지혜는 바로 무욕의 지혜와 직결됨을 봅니다.
친구는 자기도 전혀 생각지 못한 아내의 지혜로운 결단에 감탄했다 합니다. 동생들은 큰 형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걸이를 해주었고 큰 형수를 어머니처럼 한마음으로 따랐으니 큰형의 장남으로서 리더십은 저절로 형성되었고 지금도 8남매 형제자매들의 우애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에도 성공을 거두면서 집안을 일으킨 친구는 아내의 나이 60세가 되던해 단호히 사업을 정리했다 합니다. 45년동안 재단하는 일을 하다보니 아내의 손마디마다 관절에 이상이 생겨 이대로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즉시 사업을 접었고 그동안 못한 여행도 하였으며 수년뒤에는 이미 마련해 놨던 서산땅에 내려와 과수나무를 심고 조촐한 농사를 짓고 자리를 잡았다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결혼에도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결혼하지 않겠다는 외아들의 혼인담도 이야기해줬습니다. 중국의 청화대에서 유학시켜 공부시킨후 대기업에 근무하게 된 수재아들에 대한 일화입니다. 아들의 결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중 인근 교회의 목사님이 떠올랐고 즉시 찾아가 아들의 중매를 부탁하여 성사된 아들의 혼인이었고 아들 부부 역시 잘 산다는 일화였습니다.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로 가득했던 친구의 성공적 인생여정을 들으며 참으로 감동했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 역시 분별의 지혜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닌 큰 어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병이적의 기적을 베푸신 후 예수님의 처신입니다. 당신이 일으키신 표징을 오해한 사람들의 집요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단호히 떠나는 예수님의 다음 모습은 과연 분별의 지혜의 압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
‘공성이불거功成以不居’, 공을 이루었으면 거기 머물지 않고 떠난다는 노자 말씀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집착없이, 미련없이 훌훌히 떠나는 예수님의 뒷모습은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지요.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 하니 하늘 아버지와의 친교가 예수님께는 우선이었고, 이런 아버지와의 친교의 기도가 예수님께는 분별의 지혜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의 율법교사 가말리엘은 학식과 지혜를 겸비한 참 큰 어른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가 가말리엘의 깨달음의 지혜에 결정적 바탕이 되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분별의 지혜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가말리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5,38-39).
참으로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바둑에서 뾰족한 수가 없을 때, ‘손을 뺀다.’는 표현이 있듯이, 당장 판단이 서지 않을 때 하느님께 맡기고 건들이지 말고 기다리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지혜로운 처방일 수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참지 못해 건들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이것은 무관심의 방치가 아니라 깊은 신앙에 바탕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지혜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이 분별의 지혜, 삶의 지혜입니다. 모두 무욕의 지혜와 직결되는, 말씀공부와 기도에 항구할 때 하사되는 하느님의 선물인 지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당신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다음 시편이 지혜로운 삶, 행복한 삶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 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내어 놓을 빵과 물고기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 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18,15).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으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르침보다 기적에 더 마음이 끌렸다. 기적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신다. 산에 오르시는 것은 우리에게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가신 적이 많다.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하셨다. 하느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는 모든 장애물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지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고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고 말한다. 여기서 보리빵 다섯 개는 모세오경, 즉 율법 전체를 나타내고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쓴 신약성경을 나타낸다. 즉 사도들의 설교와 복음사가들의 선포가 그것이다. 그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음식이 되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고 하신다. 이때는 바로 파스카가 가까운 때임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자들에 이어 복음의 빵이 되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가 나누어진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 주시리라 기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라고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기도를 바쳐 백성을 먹였듯이 그분께서 광야에서 자신들을 먹여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모세의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나와 같은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고, 물 위를 걸을 예언자고(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 가셨다.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는 그래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이 분은 세상에 오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 예언자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른바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상향곡선을 그려오던 예수님의 인기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차차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만큼,오늘은 단지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과의 차이 한 가지만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표징”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단순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표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십니다.”(요한 6,11 참조). 곧 당신 자신의 신원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당신 자신이“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로 삼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시험하여 한 질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이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먹을 빵을 어디에서 구하고 있는가?
그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진 “어린 아이”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린 아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나중에, 십자가에서 무력해진 어린 아이가 전부를 내놓아 모두를 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필립보처럼, 예수님이 아닌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 해결책을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그분의 권능을 신뢰하지 않고 있는 불신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 곧 오천 명을 먹인 성체성사의 표징을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라고 말하는 안드레아와 같이,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을 소용없다고 여기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바로 그“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비록 보기에는 하찮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전부인 일곱 개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5천명을, 아니 전부를 먹여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가난하지만, 나누기에 충분한 것을 지닌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어주기만 하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있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길 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감동을 통한 인격변화의 유도
윤경재 요셉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6,5~14)
프랑스 사람들의 존경하는 인물들로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1위를 차지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1912-2007)라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신부님은 1912년 프랑스 리옹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19세에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항독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투사였으며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주거를 제공하는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쓴 ‘단순한 기쁨’이란 책에 나오는 그의 경험담입니다. 한 청년이 자살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와서는 가정 문제, 경제적 파탄, 사회적인 곤란함 등등 자신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지금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신부님은 그이 이야기를 찬찬히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심과 함께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군요. 일이 그 지경이 되었으면 누구라도 살 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도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러나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그러고 나서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께서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라고 대답하고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일과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신부님 곁에서 열심히 따라했습니다.
얼마 후에 청년은 피에르 신부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때 내게 돈을 주셨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하여 무언가 베풀어주셨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부님과 같이 일하고 섬기면서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사는 길이 행복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삶의 의미는 누군가에게 도움이나 사랑을 받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외딴 곳에 떨어져 허기를 참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는 단순히 동정심을 느끼는 수준이 아니라 ‘내장을 쥐어짜는 아픔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읊으신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큰 칼 옆에 차고 수루에 올라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애를 끊는 듯한 감정은 동정심과 공감, 책임감이 함께 올라와 어떻게 해서든지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의지가 곁들어진 감정입니다. 고난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벗어날 길을 열어주고자 자신의 전 존재를 사용하느냐 애쓸 때 솟아오르는 감정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뜻을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전달하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참된 인간성의 회복은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되 그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는 데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적극적인 안드레아가 나섰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어떤 아이가 자기가 지니고 있던 자진해서 빵과 물고기를 내놓았든가 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주목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장면에서 땅에다 글을 쓰시는 동작을 하신 것처럼, 시선을 당신께로 돌린 것입니다.
사람들을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고 앉게 한 다음 예수께서는 아이가 건넨 빵과 물고기를 들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과연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따져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그리고 그대로 따라 하면 예수님의 의도에 합당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옛 경전이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서 경전을 재해석하였습니다. 이런 경전해석 태도를 ‘호로즈(Horoz)’라고 불렀으며, 호로즈 해석방법으로 토라를 재해석하여 편집하고 책으로 낸 것을 ‘미쉬나’라고 합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의 호로즈 해석방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적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단순한 축자적 의미 분석에 머물면 안 됩니다. 도덕적 해석을 거쳐 영적 해석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는 초세기 교회에서 교부들이 가르치셨던 방법입니다.
현대인에게 빵과 물고기는 일자리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성취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청년실업과 일자리 부족입니다. 아무리 대학을 나왔어도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대접을 받고 일하기 어렵습니다. 기성세대들은 무조건 눈높이를 낮추라고 충고하는데 청년들이 겪는 첫 번째 문제가 무시당하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한 쪽에서는 구직난이, 한 쪽에서는 구인난이 겹치는 일자리 미스매치 현상이 벌어집니다.
4차 산업혁명이 거론되는 이즈음에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축소되고, 산업 흐름에 뒤쳐진 사람들은 점점 더 소외될 것입니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 인터넷, 나노 기술, 생명공학 등 기술의 발달은 조만간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을 요구할 것입니다.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 대두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정신을 재해석하여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미래 시대에 정밀하고 힘을 쓰는 일은 기계가 대신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보잘것없는 일에 종사하게 되거나, 인간 서로에게 서비스하는 직업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판매직이나, 간병인, 경비직, 수리업종 등 감정노동과 단순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게 한다면 사회는 새로운 계급사회로 돌입하고 말 것입니다. 소수의 지배층과 대다수의 피지배층이 갈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최소한의 동등한 인격성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우리는 제일 먼저 인간 존엄성에 대하여 숙고하여야 합니다. 또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성취감과 보람을 누구나 찾을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설사 기계장치와 로봇이 인간보다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우선시 되거나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존경받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남에게 폐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현재에 되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생명의 기적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본 많은 군중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6,1-2). 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와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6,5-6).
이에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6,7)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사랑의 마음 대신 현실적인 계산력을 발동시킵니다. 한편 안드레아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지만, 그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합니다(6,9).
두 제자 모두 눈앞의 현상의 매여,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과 생선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6,11), 친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먹던 보잘것없는 빵이, 많은 군중의 허기를 채워주는 생명의 양식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지닌 보잘것없는 보리빵과 물고기에 담긴 위대한 생명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기적적으로 빵의 양을 늘리신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니고 있던 것을 서로 나누는 ‘사랑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6,27)이신 예수께서는, 가난 가운데서도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연대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와 돈의 우상을 좇는 구조적 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차별과 불평등, 빈곤과 소외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의 증인인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모두를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비록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기꺼이 나누어야겠습니다.
자신의 세계와 욕심에 갇혀 세상 재물과 현상, 인간의 업적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의 불의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눈을 돌리고 발길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이익과 안위에 집착하는 폐쇄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하느님의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 가족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을 으뜸가는 사명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소유에 매이면 소유하려는 대상의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돈을 닮게 되고, 음식을 탐하면 육적인 본능과 감각만이 발달하게 되겠지요.
하느님의 사람들은 소유에서 해방되어 어떻게 사랑으로 함께 있을지를 늘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연대는 현세 물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다 하여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의 시간과 재능을 오직 ‘사랑 때문에’ ‘함께하기 위하여’ 다가가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세상적인 계산이나 잣대가 끼어들 틈이 없으며, 오직 사랑만이 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재현해야 할 생명의 기적이 아닐까요?
오천 명의 기적은 나눔에서 시작
고원일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복음은 너무도 유명한 복음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배고픔까지 걱정해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도 따뜻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보시고 제자에게 묻습니다. 이들에게 빵을 먹이려면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장정만 5천이 넘는 인원을 먹일 빵을 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는 깜짝 놀라 하는데, 또 다른 제자 한 명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가져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인원 속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없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서로 먹겠다고 덤비면 상처만 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빵과 물고기를 받고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감사의 기도를 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게 빵을 내려달라는 요구가 아닌, 지금 주신 빵에 대하여 감사하며 나누어먹겠다고 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힘은 이 감사기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요구를 먼저 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일을 들어주시면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다. 이 말은 안 들어주면 신앙생활 안 하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기적을 보면서 우리들의 기도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양의 음식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예수님의 기도는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낳게 하였으며, 우리들의 기도를 부끄럽게 합니다. 믿음에 대한 확신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주 의심을 하고 확신이 부족하기에 감사의 기도를 먼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의 기적은 많은 숫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양에 초점을 맞추면 중요한 사실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을 행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기도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요구하기보다는 지금을 감사하며 기도하여야 할 것이며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천 명이 먹고 남은 12광주리 입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으나 저는 오늘 우리들의 비뚤어진 양심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아이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또 빵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빵을 찾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빵은 나누지 않고 혼자 배불리 먹고 싶은 욕심 때문에 숨겨둔 빵일 수 있습니다. 품에 빵은 숨겨두고 광주리 속의 빵을 배불리 먹다 보니 자신이 숨긴 빵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살짝 내어놓아 모인 빵의 숫자가 12광주리로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여름 산간학교 때 점심식사를 집에서 개인적으로 준비해서 올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준비하지 않고 오는 학생들 때문에 따로 도시락을 예비용으로 준비를 해서 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도 늘 준비한 도시락은 모자라 하나로 둘씩 나누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해는 그런 준비 없이 그들이 준비한 도시락을 모두 한군데 모아놓고 뷔페 식으로 돌아가며 음식을 덜어 먹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준비하지 않은 친구들까지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되었고 음식도 충분하여 남았습니다.
자신의 것만을 지키다 보면 사람이 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 모두가 풍성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나만을 위해 숨긴 빵의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나누면 풍성해 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며 그런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먼저 내어 놓을 때 오천 명의 기적은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 놓을 때 준비하지 않은 친구를 돕는 것이며 자신도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나눌 때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기 보다는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감사의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항상 평화로울 수 없고 항상 기쁨만 가득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을 하느님께 감사는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합시다.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최원석
요번주는 저에게 아주 큰 사건이 하나있었습니다. 그것은 학교 졸업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특허 관련된 일을 하여서 50이 넘으면 다음에 무엇을 하지 하면서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래서 선택한것이 공부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학교를 가고 싶어도 나이가 있고 그리고 설상 간다하여도 7~8년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서울에 있는 학교는 고려대상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찾은 것이 대구의 명문학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찾았고 그리고 원서를 내고 학격할수 있었지요 ..학격과정도 그리 쉬운 과정이 아니었어요 기적적으로 합격할수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담당 교수가 원치 않는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기적적으로 합격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이는 많지 공부의 결과물은 못낼것이 뻔하지 그러니 받아는 놓고 이를 어쩌나 하면서 저를 보시는 교수님의 얼굴에서는 수심이 항상 가득하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지풀에 지가 꺽여서 나가게 하려고 여러번의 시도를 하시더라구요 이것도 당신이 원하는데로 않되니 이제는 여론전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무능하여서 학위를 줄수 없다는 것입니다..등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든 저를 버리실 생각을 많이 하셨던 분이 지도 교수님이엤어요 ..졸업이 쉽게 이루어질 것은 아니었어요 .. 이때 저는 이렇게 생각하였지요 사건이 일어날때마다 한발씩 저의 위치로 부터 물러섬을 배웠어요 ..사건이 일어났을때 그때의 감정에 분하여서 반응하였다면 아마도 빨리 가방싸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 위하여서 저는 찾은 곳이 성당입니다 ..그리고 또 찾은 것이 이 묵상글이지요 ..나의 중심을 주님에게로 항상 돌리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참고 기다리면서 꾸준히 공부하였더니 차츰 차츰 교수님의 마음이 돌같이 차가웠던 분이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저는 꾸준히 공부는 하였습니다..나의 감정에 나를 맞기기 보다는 주님에게 나를 맞기고 뚜벅 뚜벅 걸어 갔습니다..그래서 요번주에 교수님과 함께 작업을 하여서 논문을 작성할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지금은 그 논문이 해외 저널에 평가 받기 위하여서 번역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시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고 그분을 인간적인 왕으로 모시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본질은 하느님의 영광이었고 인간적인 영광을 찾은 것이 아니었기에 주님은 급히 산으로 올라가십니다..주님이 보여주신 삶을 보면 항상 비움의 삶이었습니다..나의 영광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그리고 그 비움안에 하느님이 임하시는 자리를 만드는 삶을 사신분이 주님이시지요 ..그래서 항상 산에 오르시에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그리고 그분이 바라시는데로 주님은 사신 것이었습니다..이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주님의 가신길은 액자속의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가야할 길이지요 ..비움..그리고 그 비움안에 주님이 임하심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지요..오늘도 주님이 바라시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합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좋은게 좋은 거야!” “잘 되면 좋지, 자꾸 뭘 따지려고 해?” 라는 말을 주고받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말씀을 가르치시고 배고파 하는 이들에게 빵의 기적을 베풀어 배불리 먹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라고 나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오늘 알렐루야의 응송,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라는 말씀이 풀이해주는 듯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스승인 유다인 바리사이 가말리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인간적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놀아 즐거운 것으로 그치지 말고, 주 하느님께서 펼쳐주시는 섭리와 안배를 깨닫고 의탁함으로써 평안하고, 주 성령께서 임하셔서 충만하게 되는 데 더욱 신앙의 관심과 행복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 하느님, 저희를 말씀으로 배불리시고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을 실제로 실현해 주셔서 구원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버릴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할
빵의 조각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모으고
나누는 가장 살아있는
빵의 삶이었습니다.
흩어진 것을
모으는 삶이 바로
구원의 삶입니다.
구원의 순간은
바로 지금
이순간입니다.
빵의 삶또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구원을 모르고
살아가는 제삶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숨결을 모으니
감사 또 감사뿐입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하느님밖에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남은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구원은 빵이 되는
빵의 삶입니다.
이 부활시기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묻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눔을 모으니
또다른 나눔이 되어
열두 광주리
가득차 오릅니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나누고 감사해야 할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요한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