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복판 가을 이정표
팔월 초순 수요일이다. 대서에 이어 찾아오는 절기 입추를 맞았다. 일 년 사계에서 세울 립(立) 자로 구성된 절기가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다. 두음법칙을 지켜 ‘입’으로 쓰고 읽지 북한식이면 ‘립추’다. 출입문을 이르는 들 입(入)이 아니고, 세울 립(立)이다. 그곳으로부터 그 계절에 든다는 의미가 아닌, 그 계절의 조짐을 보여주는 이정표를 세워두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입추 아침 날이 밝아와 자연학교 등굣길에 올랐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월영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팔룡동으로 나가 창원역 기점으로 삼은 1번 마을버스 첫차로 갈아탔다. 이른 시각 근교 회사나 일터로 나가는 이들과 함께 도계동 만남의 광장에서 용강고개를 넘었다. 용잠삼거리에서 탄 승객 가운데 한 노인은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음에도 자리가 없어 서서 가야 했다.
주남삼거리에서 들녘을 지나 대산 일반 산업단지에 이르자 승객이 줄고 가술에서 거의 내렸다. 나는 수산교 길목을 지난 일동마을에서 마지막 손님으로 내렸다. 거기서 아주머니급 할머니도 같이 내렸는데 그 아낙은 강변 초등학교 환경미화원으로 교정으로 들고, 나는 찻길 건너 들녘으로 향했다. 논이 나오기 이전 대형 비닐하우스에는 계절과 무관한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듯했다.
올여름에 강변으로 나선 아침 동선에서 가장 먼 곳까지 나온 날이었다. 그동안 이른 아침 길을 나서 주남지와 동판지 주변에서부터 들녘을 걸었던 날이 많았다. 때로는 진영읍으로 나가 남포나 우암리 들녘을 걸었다. 드물게 북부리에서 유청으로 내려가 주천강이나 죽동천을 거슬러 가술로 왔다. 수산교 근처 강마을에서 내려 걸었을 때는 의미 있는 채집 활동을 했던 날이 있었다.
비닐하우스 특용작물로 가꾼 토마토와 오이 농장을 지났다. 정품 포장에서 밀려난 하품을 몇 차례 수집했다.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매장과 계약 재배 농산물이어서 당도는 물론 외양도 반듯해야 해서 선별에서 제외된 하품이 생겼다. 농장주는 정품 포장만도 일손이 바쁜데 처진 하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비닐하우스 바깥 노상에 방치시켜 농해지면 두엄으로 처리하는 정도였다.
나는 장마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한 달 가까이 선별에서 제외된 토마토와 오이를 몇 차례 수집해 집에서도 잘 먹고 이웃과도 나누었다. 농장주는 쓸모없고 귀찮아 그냥 내버렸는데 수거해 활용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 사례로 약소하나마 제과점 간식거리를 보내기도 했다. 내게는 소중했던 토마토나 오이를 거두어간 비닐하우스 농장에는 새로운 작물이 싱그럽게 자랐다.
비닐하우스단지보다 벼들이 자라는 들녘이 넓었다. 벼를 거둔 뒷그루는 겨울에 비닐하우스 당근을 키울 테다. 장마철을 건너온 벼들은 무성해 이삭을 배는 즈음으로 잎줄기가 볼록해졌다. 한낮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 젊은 농부들이 농약을 뿌렸는데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드론을 띄워 눈길을 끌었다. 농협에서 농가로부터 제초제나 농약 살포를 신청받아 일꾼들이 파견 나온 듯했다.
가술에 닿아 봉사활동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도서관이 아닌 강둑을 걸어볼 셈으로 유등을 거쳐 진영으로 가는 3번 마을버스를 탔다. 우암리 들녘을 지난 유등에서 강둑으로 나갔다. 맞은편에는 낙동강 자전거길을 따라 안동댐을 거쳐 새재를 넘으려는 사내를 만났다. 그는 다대포를 출발해 화명에서 1박하고 어제는 삼랑진 철교를 건너 김해에서 2박 후 아침에 생림 마사에서 왔다.
유등에서 가동으로 가는 강둑은 느티나무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워 뙤약볕이라도 더운 줄 몰랐다. 예보는 한낮에 소나기가 온다 했는데 구름조차 엉기지 않은 날이었다. 초여름에 한 차례 풀을 잘랐던 강둑인데 다시 무성해졌다. 강둑 언저리는 나물로 삼아 먹는 돌동부가 넝쿨로 자라 몇 줌 따 봉지에 채워 술뫼로 향했다. 전원생활을 누리는 지인은 농막을 비워 한림정역으로 갔다. 2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