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을 것이라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나아간 곳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를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3,17-18.20.28-29
17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18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20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28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29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제2독서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2,18-19.22-24ㄱ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19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 사람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니 겸손하다 하더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식사를 초대받았는데 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며 겸손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낮추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교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해지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늙은 마귀가 자기 조카 젊은 마귀에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편지로 쓴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겸손과 교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곧 교만의 유혹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번 네 보고를 받고 제일 걱정되는 건, 환자가 처음 회심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결심들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듣자 하니 앞으로는 계속 선한 일만 하겠다는 약속도 펑펑 하지 않았더구나. 심지어 한 번 받은 은혜가 평생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매시간 닥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에 해당되는 은혜만 바란다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네 환자는 겸손해졌다.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험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어라.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원하는 많은 단계들로 나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써먹지는 마라. 혹시라도 환자의 유머감각과 균형감각이 깨어날 시에는, 너를 간단히 비웃고 잠자리에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고.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꼭꼭 박아주거라.
실제로도 인간의 재능은 저들의 생각만큼 가치 있는 게 못 되지만, 그것은 중요한 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이 방법을 통해 수천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겸손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스스로 못난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며, 명석한 남자가 스스로 멍청이라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단다.>
겸손은 낮은 위치에서 나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KBS에서 2000년 9월 5일에 방영된 ‘내 남편은 두 살 – 정신연령 2세 남편과 결혼하여 살게 된 김영숙 씨 사랑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김영숙 씨(42)는 30대 중반의 요셉이라는 남편과 함께 반지하 월세방에서 삽니다. 그런데 남편의 정신연령이 2세 수준이기에 텔레토비 인형을 좋아하고 밥을 제일 좋아합니다. 한 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씨는 몸은 성인이지만 말 그대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김영숙 씨는 공부 잘하는 오빠만 챙기는 집안 분위기에서 항상 소외되고 매 맞는 아이였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오셔서 아랫목을 차지해 윗목 추운 곳에서 쭈그리고 잠을 자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입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아이들은 괴롭힘 감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영숙 씨는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합니다. 아버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중풍이 왔습니다. 몸 한쪽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허락해 주어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녀님을 보고 얼굴이 이상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영숙 씨는 수녀원을 나와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소외되고 매 맞아 항상 얼굴에 상처가 있는 요셉에게 관심을 둡니다. 자기 처지와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때리는 원장 때문에 김영숙 씨는 그냥 요셉 씨를 데리고 나와버립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습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두 살 어른을 데리고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배고프다며 발작을 일으켰고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에 요셉은 사라졌습니다. 김영숙 씨는 사방팔방으로 요셉을 찾아다녔고 한 시설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되돌아 나오는데 요셉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매달립니다. 마음이 약해진 김영숙 씨는 요셉 씨를 데리고 다시 나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혼인신고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또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김영숙 씨는 굳건히 요셉 씨와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요셉 씨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고 이젠 장인어른을 업고 병원에 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김영숙 씨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잊게 되어 겸손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두 살 지능밖에 안 되는 사람과 혼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주위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합시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도 인간을 당신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생각을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담가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질 때,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https://youtu.be/aU4zkAea5bc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돈과 사치품, 외모, 권력 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이룬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또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하나같이 소소한 일상을 언급합니다.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산책, 음악감상, 맛있는 음식 먹기, 독서 등등…. 이때의 놀라운 점은 남과 전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행복할까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묻는 말이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대단한 곳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겸손함에서 행복 찾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셨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가장 겸손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따라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활에서 식사 예절은 상당 엄격했습니다. 잔치가 크면 클수록 예절은 더 엄격해져서 식탁에 앉는 순서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과시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되면 최대한 윗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통해 순간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물이 바다로 향하는 건 바다가 낭만적이거나 고향 같아서가 아니라 그저 낮아서다. 정을 느끼며 살고 싶다면 그대 바다처럼 낮아져라(이수동).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